근래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을 하나만 꼽자면, 저번 주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5일이나 되는 이번 연휴를 연휴답게 즐길 수 있었다. 어딜 다녀야 쉬는 날도 있는 법이니까. 출근 제안을 거절했다면 남의 떡만 쳐다보며 쓰디쓴 입맛만 다시는 5일이 되었을 것이다. 5일은 긴 시간이다. 누군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나는 이번 연휴에 꽤 많은 얘길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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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엔 옷장을 만났다. 지난 1년 동안은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쩍 볼 일이 많아졌다.
옷장 : 그래…출근하니까 어때?
나 : 그냥 그래. 1년 전에 퇴사할 때 세운 목표는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다시 출근하는 거니까. 아침마다 네 안을 뒤적일 때마다 포기 선언을 하는 기분이야.
옷장 : 나는 네가 양말을 신어서 좋은데….
나 : 나는 양말이 싫어.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일자리엔 '티어'가 있잖아. 경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한, 그냥 돈 하나만 보고 하겠다고 한 일인데도 양말을 엄청 잘 챙겨 신고 나가게 된단 말이지. 1년의 시간을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후진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동화 속 탕자들은 한바탕 방황하고 나면 대박을 내거나 쪽박을 차더라도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던데…
옷장 : 그건 동화니까. 현실은 동화보다 빡세서 현실이고. 오늘은 양말 안 신니?
나는 대충 갠 빨래를 던져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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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둘째 날엔 작업실을 정리하러 갔다. 나는 그동안은 월세 10만 원짜리 옥탑방을 빌려서 작업실로 쓰고 있었는데, 이제 회사에 출근하게 됐으니 쉴 때 미리 정리해둘 심산이었다. 사실 작업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민망하다. 작업이라고 하면 뭔가 창조적이고 멋진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실상 거기서 하는 일이라곤 디지털 눈알 붙이기에 가까운 아르바이트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뭐가 되었든 간에 이젠 정리할 것이니 큰 상관없다. 작업실-옥탑방에 가면 소파가 있다. 처음 입주하던 날 1층에 누가 버린 걸 주워다 놓은, 패밀리 사이즈의 파란색 소파였다.
나 : 널 주워 올 땐 뭐라도 돼서 나갈 줄 알았는데…
소파 : …(소파는 과묵한 편이었다.)
나 : 그래도 디지털 눈알 붙이기 하고 남는 시간에 뭘 많이 하긴 했어. 작년 연말엔 망한 계획 모아서 시상식도 열고, 올해 초엔 하고 싶은 일 받아서 여행 티켓 만들어서 보내고…남들이 보기엔 허튼짓거리로 보였겠지만…
소파 : …
나: 그렇게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하고 싶은 일 하는 게 꼭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 하고 싶은 일=행복이라고 진리처럼 확신을 갖고 말하는 사람들은 엄청 많잖아. 다들 그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별로 안 행복하던데.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남한테 권하겠어. 그래도 그땐 재밌었는데. '하고 싶은 일' 전도사 노릇. 언젠간 다시 해야지. 다시 확신이 생기면.
소파 : …
나 : 어쩌면 그게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 그런 건지도 몰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라고 말하는 거랑 그냥 입 닥치고 묵묵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니까. 해보기 전에 둘을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소파 : …
나 : 음…닥치고 지내는 건 꽤 좋은 것 같아. 몇 달 닥치고 지낸 덕분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할 배짱이 생겼거든. 맨날 기자나 에디터처럼 살짝 빗나간 목표를 세워두고 성에 안 찬다고 투덜대기만 했었는데. 돌아보니까 당연하다 싶더라고. 애초에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성에 안 찼던 거야.
소파 : …
나 : 비겁했던 거지. 근데…해보니까 내가 내 생각만큼 잘 하는 게 아니더라고. 글도 별로고 그림도 별로고. 후진 작가도 작간가? 아무한테도 못 보여줄 단편소설을 하나 썼고, 눈 딱 감고 공모전에 냈다가 광탈했지. 그리고 광탈한 날에…
소파 : …바퀴벌레가 나왔지.
나 : 내가 그날 이후로 작업실에 잘 안 오게 된 건 순전히 바퀴벌레 때문이라고. 그래도 난 성장했어. 작가가 되겠다고 말도 할 수 있고(여전히 목소리가 떨리긴 하지만) 내가 별로란 것도 알았어. 자기 객관화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아? 소크라테스 알아? 넌 모르겠지. 소파일 뿐이니까.
소파 : 근데 출근은 왜 한다고 했어? 그림도 배우러 다니고 글도 더 열심히 쓴다고 했잖아.
나 : …
소파 : 괜찮아. 원래 약간 비겁한 선택지가 더 고르기 쉬운 법이니까.
연습장, 이불, 수면바지, 슬리퍼 같은 것들은 70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처넣고 나니 이제 소파만 남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옥탑방까지 이걸 도대체 어떻게 들고 왔담. 그새 몸이 축난 건지 예전에 초인적인 힘을 냈던 건지. 도저히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아빠한테 손을 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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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3일째. 아빠는 트럭을 몰고 왔다. 옥탑방 아래 트럭이 세워져있는 걸 보니 꼭 학창 시절에 사고 쳐서 부모님을 불려오게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날엔 꼼짝도 안 하던 소파가 이날엔 번쩍번쩍 들렸다. 트럭 짐칸의 소파를 실어놓고 조수석에 탔다.
아빠 : 그러게 면허는 1종을 따라니까.
나 : 어차피 혼자는 못 옮기는데 뭐.
아빠 : 집에 들어와서 공무원 준비해라. 학원비는 내줄 테니까…
나 : 공부하면 다 붙나.
아빠는 트럭을 잘 몰았다. 차가 빼곡히 차 있는 산동네의 좁은 길을 난감해하는 기색도 없이 빠져나왔다. 심지어 차엔 후방카메라도 없는데. 나는 아빠가 운전하는 걸 옆에서 보며 절대 저렇게는 못할 거야, 나는 아빠처럼은 할 수 없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미안할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아빠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이 미안했다.
나 : 아빠…얘기 들었지…3개월 동안 잠깐 일하기로 한 거. 이거랑 여태 하던 다른 일이랑 합치면 그래도 남들만큼은 버는 셈이고…아니지, 옛날에 회사 다닐 때보다 더 잘 버는 거지. 잠깐 동안이긴 하지만…
아빠는 트럭 위에 올라가 소파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나 : 올해는 그냥 다니면서 한숨 돌리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할래요.
아빠 : 그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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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 연휴 넷째 날엔 친구를 만났다.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는 어느새 3년 차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친구는 얼마 전의 차를 샀다고 했다. 친구의 새 차 트렁크엔 근사한 캠핑의자가 있었고, 추석이라 연 가게도 별로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냥 강가에 가서 앉아있기로 했다.
친구 : 이제 거지야. 차 사느라 돈 다 썼어. 새로 시작하는 거지.
나 : 어…거지는 나야. 근데 연말까지 다시 회사 다니기로 했어. 좀 쉬게.
친구 : 그래. 너 뭐 많이 했잖아. 그…뭐지…'풀칠'도 매주 보내고.
나 : 너 '풀칠' 열어보긴 하니?
친구 : 아니. 난 글 안 읽어.
나 : …나는 언제쯤 차를 살 수 있을까.
친구 : 저거 아직 내 거 아니야. 반은 빚이거든. 그리고 너도 돈 벌잖아.
나 : 그래도. 내가 버는 돈은 월세 내고 관리비 내고 밥해 먹으면 끝인걸. 차는 꿈도 못 꾸지. 돈 좀 모이면 아이패드나 살까…
친구 : 너는 빚질 일은 없잖아. 당겨서 살 수 없는 걸 쫓으니까. 그것도 나름 잘 사는 거야.
나는 친구가 말한 내가 쫓는다는 것이 아이패드인지 아니면 어떤 야망 같은 것인지 헷갈렸다.
나 : 아이패드?
친구 : 아니, 뭐냐…'풀칠' 같은 거.
나 : 너 안 보잖아.
친구 : 그렇지. 이젠 볼게.
나는 이젠 보겠다는 친구의 말이 기뻤지만 내색하는 건 좀 후져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캠핑의자를 뒤로 젖혔다. 슬슬 놀이 지려는지 해를 등지고 바라본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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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5일이나 되는 긴 연휴도 끝이 나긴 하는구나. 내일은 다시 출근해야 하는구나. 아직 출근하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마음을 정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4일을 잘 쉬었으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약속도 할 일도 없어서 아마 누구도 만나지 않고 보내게 될 것 같다. 방에 누워서 연휴 동안 나눈 대화를 돌이켜봤다. 지난 대화를 돌이켜볼 때면 늘 그렇듯이 후회가 밀려온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받아쳐도 괜찮았을 텐데, 조금 더 쾌활하게 말할걸, 같이 웃을만한 다른 얘기를 좀 할 걸 등등.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옷장과 소파와 아빠와 친구를 모두 모아두고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면.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게을러서 끝을 못 본 계획들, 옥탑방, 아빠의 운전 실력, 매일 자전거 타고 오르내리는 갑천, 갑천에서 보는 하늘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했더라면.
아니면 추석답게 사근사근하게 인사를 전해볼걸. 옷장에는 새 양말을 넣어놓고, 소파한테는 그동안 덕 많이 봤다고 얘기하고, 아빠한테는 자신 있다고 허풍을 좀 치고, 친구한테는…음…무슨 얘길 한담…그래, 추석이니까 결혼 얘기를 하면 좋았겠다. 이렇게.
너 결혼할 거라고 했지. 빨리했으면 좋겠다. 너 결혼식 가게. 나는 작가가 돼서 네 결혼식에 갈 거야. 아마 무명이겠지만 무명작가도 어쨌든 작가는 작가니까. 지금보다 머리도 더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땀나면 안 되니까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 타고. 오토바이 사면 보험은 xx형한테 들고. yy이네 가게에서 정장도 한 벌 사 입고. 다른 애들이랑 돈 모아서 냉장고도 하나 사줄게. 냉장고는 zz이한테 하면 되겠네. 사진은 내 친구 사진관 하는 애 있거든? 걔한테 찍어달라고 하자. 결혼해라. 내가 네 몫까지 분리수거도 더 열심히 하고 고기도 더덜먹고 자동차는 원래 안타니까 더 안 타고…여하튼 내가 열심히 할 테니까 너는 애도 낳아라. 그럼 친구는 나의 개소리 공세에 깔깔댈 것이고 나도 같이 웃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휴에 친구랑 같이 강바람을 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허튼 생각을 많이 했더니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의 대화 상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냉장고랑 몇 마디를 주고받게 됐다.
나 : 뭐 먹을 것 좀 있니?
냉장고 : 어저께 집에서 가져온 반찬 많다.
그리고 락앤락에 담긴 반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반찬 : 한 번에 다 안 먹어도 괜찮다.
나는 밥을 차리면서 맞는 말이라고, 아무렴 한 번에 다 이뤄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옛사람들이 태초에 연휴를 발명해낸 건 혹시 '어차피 한 번에 다 이뤄낼 수는 없으니 쉬면서 해라'라는 금언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달력 : 그건 아닌 듯.
달력을 넘겨보니 다음 달에도 3일짜리 연휴가 있다. 그것도 2주 연속으로. 게다가 이틀만 더 가면 또 주말이다. 지금 실컷 먹고 자고 일어나면 내일 출근하는 기분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창밖을 보니 달이 참 밝다. 여기까지가 연휴 동안 나눈 얘기들이다. 완벽한 시기에 찾아온, 참으로 아름다운 연휴였다. 좀 짧은 게 흠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