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떠나기 앞서 명확한 의미를 갖춰놓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여지까지 내게 여행이란 곧 마침표였다. 수능 후, 전역 후, 이별 후, 졸업 후, 퇴사 후. 굵직한 인생의 한 시기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행을 갔다. 그러나 이번 휴가는 다르다. 그냥 어쩌다 보니 짬이 났고, 마침 비행기 표 값도 싸길래 떠나는 휴가였다. 그러나 이건 이유를 표면적으로 둘러대는 너스레는 될 수 있어도 진짜 동기는 아니다. 짬이 난다고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제주도에 가야 한다는 법도 없거니와, 비행기표야 찾아보면 언제나 싼 날이 있기 마련이니까. 별 이유도 없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공항에 있다는 사실이 마냥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보안검색대에 배낭을 통과시키듯 내 머리통을 통과시켜 이 여행이 단순한 충동소비인지, 아니면 이전의 여행들처럼 마침표인지,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끝나기라도 한 것인지 속 시원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게이트 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다들 어떤 확실한 의미를 갖고 이 평일 저녁에 비행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게이트 안쪽의 카페에서 파는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를 사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