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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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 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해 지우는 자신에게 겨우 '할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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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세상에 자비도 없고 희망도 없고 노래도 없던 때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그 밤을 덮고 자느라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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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기 시작할 무렵 비로소 깊이에 공포를 갖는다"는 말을 듣고 놀란 기억이 났다. 채운은 깊이나 높이에 대한 공포처럼 단순한 감각도 날 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인간은 앉는 법과 서는 법, 물 삼키는 법까지 일일이 배워야 하는 존재였다. 어느 건 배워도 안 지키고, 알고도 실천 못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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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당신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건 무엇입니까?
핵심 표현: feel uneasy 불안을 느끼다



채운은 화면 속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빈칸에 진짜 답을 적을까 가짜 답을 적을까 고민했다. 사실 지어내기로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성적, 진로, 교우관계 등 평범한 십대 청소년의 고민으로 보일 만한 거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바람돌이는 인간과 달리 채운의 비밀을 무게 재지도, 심판하지도 않을 터였다. 채운은 '기계인데 굳이 본심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주저하다 '기계니까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갈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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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페 회원들은 용식의 바로 그런 면을 좋아했다. 용을 닮았으나 용은 아닌 점을, 갑옷 같은 피부에 감춰진 나약함을, 모든 게 처음인 양 얼떨떨해하는 눈동자를. 그리고 그 작은 생명을 보살피며 곧잘 당황하고 기뻐하는 십대 양육자를 응원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만화 속에 은근히 비치는 지우네 생활이 윤택하지 않은 점도 회원들의 애정과 응원의 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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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난 반댄데.
- 뭐가?
-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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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나 본인은 그 교훈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티브이에 여행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 여행자가 러시아의 한 공예품점에 들어가 '마트료시카를 살 땐 맨 마지막 것까지 채색이 잘 되어있는지 꼭 확인하라'고 하자 아버지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 저거 봐라. 인간들은 틈만 나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등쳐먹으려 한다.
- .....
- 그러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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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지난번에 면회 갔을 때 언니가 그런 말을 하더라. 그땐 그냥 넘어갔는데 요즘 자꾸 그 얘기가 생각난다고. 어쩌면 누군가 그걸 원해서, 산산조각난 유릿조각 앞에서 자신이 통곡하는 모습을 그토록 생생히 그릴 정도로 바라서, 간절히 꿈꿔서, 자기가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이모가 호박잎을 다듬다가 멈추고 문득 거실 바닥을 응시했다.
-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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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찌른 사람은 난데 사람들이 나를 위로합니다.
나는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그들에게 절합니다.
이곳은 내가 벌받는 자리입니다.
위로가 벌이 됩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세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줄거리'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이런 일의 '주제'를 떠올려본 적이 없어서였다. 채운이 화면을 응시하다 다소 반항적인 투로 답했다.

나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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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축구 훈련중 채운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했다. 그러고 담당의로부터 더이상 운동선수로 살기 어려울 거란 진단을 받은 뒤 남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내가 그만둔 게 아니니까. 내가 의지가 약해서, 실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양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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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뿅뿅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 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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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달라고 외쳤대, 지연이가.
지우의 손등으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선호 또한 제 속의 무언가를 가까스로 누르며 지우에게 말했다.
- 네가 오해할까봐 그러는데, 엄마는 너를 위해 나쁜 선택을 한 게 아니야. 그건 정말 사고였고 지연이는 살려고 하다 실패한 거야.
- .....
- 그러니까 이제 집에 가자. 친구네서 용식이도 데려오고.

지우가 손등으로 쓱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아저씨는 용식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직 모르는구나' 생각했다. 선호가 지우에게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 상기시키며 다시 공을 던졌다.
- 이제 네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