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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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철학책이야. 정치권력에 관한 것이지.”
”뭐라고 말하는데?”
”정직한 사람은 정치권에 몸담을 수 없대. 책임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정치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그래, 그 말이 맞아.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도둑놈들이야.”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책임에 대해 왜곡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책임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굶주려 죽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야. 그래서 내가 투쟁하는 거야.”
”빌어먹을 놈. 무력투쟁의 희생자, 그게 바로 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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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그녀의 얼굴과 청년의 이지러진 얼굴이 희미한 안개와 흰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단지 그들의 눈빛만이 반짝일 뿐이다. 점차로 안개가 걷힌다. 그러자 착하게 생긴 어느 여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바로 하녀의 얼굴이다. 하지만 몰라보게 아름다워져 있다. 볼품없던 눈썹은 연필로 그린 것처럼 예뻤고,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녀의 속눈썹은 활처럼 길고 멋지게 휘어졌고 피부는 비단결 같다. 미소를 짓는 입가에는 고른 치열이 시선을 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그럼, 옥양목으로 만든 소박한 옷은? 레이스가 달린 우아한 이브닝드레스로 바뀌어져 있다. 그럼, 청년은? 거의 흉터를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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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네게 말한 그 여자는 나와 함께 혁명운동에 가담했었어. 하지만 거기서 빠져나왔지. 그리고 나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어.”
”왜 그랬는데?”
”그녀는 삶에 너무 집착했어. 나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했고, 그저 우리의 관계에만 만족했어. 거기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어. 내가 며칠만 없어도 고통받았고, 내가 돌아올 때마다 울었어.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게 걸려온 동지들의 전화를 숨기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편지까지도 몰래 가로챘지. 그래서 끝이 난 거야.”
”그녀를 만난 지 오래되었어?”
”거의 2년이 되었어. 하지만 난 항상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어. 그녀가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도…… 거세하는 어머니처럼…… 잘 모르겠어. 아마 운명적으로 우리는 헤어지게 되어 있었나 봐.”
”왜 서로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이 질문도 볼레로같이 들리는군, 몰리나.”
”그런데…… 이 바보야, 볼레로는 수많은 진실을 말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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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소장 : 그런데 아레기는 어떤가? 우리가 그를 녹초로 만드는 데 성공했나? 자네 의견은 어떤가?
피고 : 그렇습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장 : 좋아. 난 잘 모르겠네. 몰리나, 그건 우리 판단에 맡기게. 여긴 그 방면에 유능한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피고 : 하지만 더 심해지면 감방 안에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의무실에 가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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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페니켈은 어쨌거나 서양 문명은 여자아이나 남자아이에게 각각 그들이 성적으로 모방하면서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델을 강요하고 있다고 밝힌다. 또한 페니켈은, 동성애 성향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어린아이가 반대 성(性)의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할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어머니의 행동 모델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아이나 아버지의 행동 모델에 만족하지 못하는 남자아이는 동성애의 가능성이 매우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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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발렌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뭔데? 말해봐. 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 어떤 느낌…….”
”…….”
”나는 없고……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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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다는 의미니까. 비록 그와의 관계는 끝났을지언정…….”
”행복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맞아. 하지만 조금 더 오래가는 것은 있어.”
”우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나한테 키스하는 것, 아주 싫어?”
”음……. 네가 처음에 말해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네가 표범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그래.”
”난 표범여인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넌 표범여인이 아니야.”
”표범여인이 된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야. 아무도 그녀에게 키스를 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도.”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
”발렌틴, 너와 우리 엄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야.”
”…….”
”내 생각 많이 할 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