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page.31
노인은 바다를 늘 '라 마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스페인 말이었다. 물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바다를 나쁘게 말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조차 바다를 언제나 여자인 것처럼 불렀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불렀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다.
* 라 마르: 무생물에도 성의 구별을 두는 스페인어에서는 바다를 여성형으로 '라 마르(la mar)', 남성형으로 '엘 마르(el mar)'라고 부른다.
page.62
문득 앞쪽을 바라보니 물오리 떼가 바다 위 하늘에 새겨 놓은 듯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흩어지고 다시 나타나면서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누구도 바다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age.91
노인이 맨 처음 고기의 모습을 본 것은 고기가 세 번째로 선회할 때였다.
처음 ㅂ왔을 때는 마치 시커먼 그림자 같았는데, 배 밑을 통과하는 데 시간이 너무 한참 걸리는 바람에 그 길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냐, 녀석이 이렇게까지 클 리가 없어." 그가 말했다.
그러나 고기는 실제로 그렇게 컸다. 고기는 한 바퀴 다 돌고 난 뒤 배에서 2미터 반이 넘게 떨어진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노인은 물 위로 솟아올라 온 그놈의 꼬리를 보았다. 꼬리는 큼직한 낫보다도 훨씬 컸으며, 검푸른 물 위에서 엷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꼬리는 약간 뒤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는데, 고기가 수면 바로 밑을 헤엄쳐 갈 때 거대한 몸뚱이와 띠를 두른 것 같은 자줏빛 줄무니가 보였다.
page.107
"내가 그 녀석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어. 그리고 정당한 방식으로 죽였다고." 노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더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고기를 잡는 일은 나를 살려주지만, 동시에 나를 죽이기도 하지. 그 소년은 나를 살려 주고 있어,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나 자신을 너무 속여서는 안 되지.
page.118
"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조금 사고 싶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뭣으로 사지?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잃어버린 작살과 부러진 칼과 부상당한 이 손으로 그걸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넌 바다에서 보낸 여든 날하고도 나흘로 그것을 사려고 했어. 상대방도 네게 그걸 거의 팔아 줄 듯했잖아." 그가 말했다.
page.122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가로등 불빛에 고기의 커다란 꼬리가 조각배의 고물 뒤쪽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허옇게 드러난 등뼈의 선과 뾰족한 주둥이가 달린 시커먼 머리통, 그리고 그 사이가 모조리 앙상하게 텅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