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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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의 소리
「나는 겨냥을 하고 있었어」 하고 잭은 말하였다. 「어디를 찍을까 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멧돼진 찔러 죽여야 해」 랄프의 사나운 말투였다. 「멧돼지 찔러 죽이는 얘기를 하잖아」
「멧돼지는 목을 따서 피를 내는 거야」 하고 잭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기를 먹지 못하는 거야」
「그러면 아까는 왜......」
세 소년은 모두 잭이 어째서 죽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칼을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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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한 얼굴과 긴 머리카락
「너희들은 불을 꺼뜨렸어」
같은 소리를 두 번이나 듣고 잭은 불안해졌다. 그는 쌍둥이 형제를 보다가 다시 랠프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냥을 하는데 그들이 꼭 있어야 했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삥 둘러쌀 수가 없었어」

(중략)

그는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너도 그 피를 보았더라면 오죽 좋았을까!」
사냥 부대 소년들은 아주 조용히들 하고 있었으나 피 얘기가 나오자 다시 웅성거렸다. 랠프는 그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한 팔로는 아무것도 없는 수평선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크고 사나워서 모두들 잠잠해지고 말았다.
「저기 배가 보였었어」
이 말 속에 너무나 많은 무서운 뜻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잭은 뒷걸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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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어른들은 사리에 밝아」 돼지의 말이었다. 「어른들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아. 모여서 차를 마시고 토론을 하지. 그러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돼ㅡ」
「어른들 같으면 섬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지. 혹은.......」
「어른들 같으면 배를 만들 거야ㅡ」
세 소년은 캄캄한 속에 서서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당당한가 하는 것을 알리려고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른들 같으면 싸움을 않을 거야ㅡ」
「내 안경을 깨뜨리지도 않을 테고」
「짐승 얘기 같은 것도 않을 테고ㅡ」
「어른들이 우리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게만 되면」 하고 랠프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어른들일 것 같으면 이렇게 하겠다는 걸 무언가 알려주기만 한다면...... 무슨 신호라도 보내준다면 오죽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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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높다란 나무
「에워싸!」
둘러선 몰이꾼들이 원을 좁혔다. 로버트는 공포에 질린 시늉을 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나중엔 정말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야, 이제 그만해! 아이구 아파!」
그가 에싼 소년들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나무창의 손잡이 끝이 그의 등에 와 닿았다.
「이놈을 잡아!」
모두들 그의 팔과 다리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열띤 흥분에 사로잡힌 랠프는 에릭의 창을 잡고 그것으로 로버트를 찔렀다.
「그저 놀이였어」 랠프는 불안한 어조였다. 「나도 그 전에 럭비경기로 몹시 다쳤던 일이 있어」
「북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고 모리스가 말했다. 「그러면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건데」
랠프는 모리스를 쳐다보았다.
「제대로라니, 어떻게?」
「잘은 모르지만 그러나 불이 핊요하고 또 북이 필요한 것 같아. 그러면 북소리에 맞추어서 장단을 맞출 수가 있어」
「멧돼지가 필요해」 로저의 말이었다. 「진짜 사냥 때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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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의 선물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 할 일이 생기니 모두 열을 내어 일하였다. 적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돼지는 기쁨과 넘치는 해방감으로 가득 찼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기여했다는 자랑스러움으로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 때문에 그는 땔감을 나르는 데 조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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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의 선물
창자더미 위에는 파리가 새까맣게 모여들어서 톱질을 하는 소리같이 윙윙거렸다. 얼마 후에 파리떼는 사이먼이 흘리는 땀을 찾아와 마셨다. 파리떼는 사이먼의 콧구멍 아래를 간질이고 넓적다리 위에서 등넘기 장난을 하였다. 파리떼는 새까마니 다채로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사이먼의 전면에는 <파리대왕(大王)>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끗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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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시체가 모래에서 얼마쯤 붕 떠올랐다. 입에서 퍽 소리를 내며 기포(氣泡)가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시체는 밀물 속에서 돌아누웠다.
이 세계의 어두워진 곡선부의 어디에선가 해와 달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지구 표면의 물의 층이 그 때문에 팽팽해지고 그 중심부가 회전함에 따라 한쪽으로 부풀어올랐다. 밀물의 큰 물결은 섬을 따라서 점점 크게 밀어닥치고 물 높이도 점점 높아갔다. 꼬치꼬치 파고드는 발광생물에 둘러싸인 채 꼼짝 않는 성좌의 별빛을 받고 은빛으로 빛나는 사이먼의 시체가 서서히 난바다로 밀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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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바위
「창을 들고 가야 해」 샘이 말하였다. 「돼지도 창을 들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ㅡ」
「너희들은 소라를 들고 있지 않아!」
돼지가 소라를 쳐들었다.
「너희들은 창을 가지고 가려면 가지고 가. 난 안 들고 가겠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러나저러나 아무것도 안 보이니 난 개처럼 끌려가야 할 거야. 좋아. 웃으려면 웃어! 마음껏 웃어! 그렇잖아도 이 섬에는 아무거나 보고 웃어대는 그 패들이 있어. 결국 무슨 일이 생겼지?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린 사이먼은 살해되었어. 그리고 얼굴에 점이 있었던 꼬마가 있었댔어. 우리가 처음 이곳에 온 뒤로 그를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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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바위
랠프는 커다란 바위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그것을 본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발바닥에 전해 오는 진동소리를 그는 감촉했다. 벼랑 꼭대기에서 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엄청난 붉은 바위가 길목을 질러서 튀었다. 그는 납작 엎드렸ㄷ가. 오랑캐패는 날카롭게 함성을 질렀다.
바위는 턱에서 무릎으로 스치면서 돼지를 쳤다. 소라는 산산조각 박살이 나서 이제 없어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신음소리를 낼 틈도 없이 돼지는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채 공중으로 치솟았다. 떨어지면서 재주를 넘었다. 바위는 두 번 튀어오르더니 숲속으로 처박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돼지는 40피트 아래로 내려가 바다 위로 삐져나온 네모진 붉은 바위에 등을 부딪히고 떨어졌다. 머리가 터져서 골통이 삐져나와 빨갛게 됐다. 돼지의 팔다리가 도축된 직후의 돼지처럼 경련했ㅎ다. 그러자 다시 바다는 길고 느린 한숨을 쉬고, 물결은 희고 붉은 거품을 일으키며 바위 위에서 끓어올랐다. 물결이 내려앉았을 때 돼지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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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꾼의 함성
「너희들의 연기를 보고 왔단다. 그런데 너희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네, 모릅니다」
자기가 목격했던 추적의 광경을 눈앞에 생생히 떠올리면서 장교는 말하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 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
「처음엔 그랬어요」 하고 랠프가 말하였다. 「잘 돌아가다가......」 그는 얘기를 멈췄다. 「처음엔 합심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받침해 주었다.
「알겠다. 처음엔 <산호섬>에서처럼 잘 지냈단 말이지?」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