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휴머니스트
page.28
훈이네 대표 손정애
많이 놀라셨겠어요.
두 환자가 누워 있으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요양원을 알아보니 한 달에 800만 원이 들더라고요. 그런 돈이 어딨어요. 집에서 간호했죠.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내 인생은 없다, 나는 돈 버는 기계다 생각하며 살아보자 했죠. 그때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나도 애들도 그때 일을 정확히 기억 못해요. 연도나 날짜 이런 것들.... 이상해서 의사한테 가서 물어봤는데 그러더라고요. 의사도 싫은 기억은 지운다고요.

장사에 병간호, 살림까지 다 하신 거네요.
뭘 먼저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옷가게 일은 제대로 못했어요. 그러다 신용 불량자가 됐죠. 3년 7개월 만인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옷가게 정리하고, 칼국수 골목에 온 거예요.
page.43
훈이네 대표 손정애
또 다른 '정애 씨'들의 삶
1950년대에는 영숙이라 불리는 딸들이 가장 많았다. 정애, 순자, 영희도 숱했다. 꽃부리 영(榮), 맑을 정(晶), 순할 순(順), 사랑 애(愛) 자 같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상이 곧 이름이 됐다. 어떤 딸들은 이름부터 차별받았다. 말순, 종숙, 후남, 끝순 등은 모두 '다음에는 아들을 낳자'는 바람이 반영된 이름이었다. 1950년대 합계 출산율은 6.3명. 한 집에 자녀 수가 5~6명은 됐는데 딸들은 아들 없는 집에서는 눈칫밥을, 아들 있는 집에서는 식은밥을 먹으며 자랐다.
'민증'없는 노동자들
54년생 10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 전략은 가발, 합판, 섬유, 신발, 전기제품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열악한 작업장의 10대 여성 노동자들은 베니어합판*으로 대충 나뉜 기숙사에서 출퇴근 구분 없이 일하거나, 타이밍(잠 깨우는 각성제)을 먹어가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산업을 떠받쳤다.

대접은 달랐다. 여성 노동을 보는 시선부터 차별적이었다. 1971년 1월 13일 인력개발연구소가 작성한 '한국 여성인력의 현황보고'를 보면 그 시절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남성 경영자의 70%는 '남성의 능력이 여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답했다. 여성 경영쟈의 40.5%는 '여자와 남자가 같다'고 했고, 36.5%는 '여성이 열등하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직장 여성의 특성을 조사한 결과 가사에 소홀하고 사치하는 편"이라는 표현도 실렸다.
page.75
자원활동가 장희자
내 이름도 잘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들 모임 가면 20년 가까이 만나도 본명을 모를 때가 많아요. 누구 엄마라고만 부르니까.
명함을 만든다면요? 글쎄... 맏딸, 맏며느리, 총무, 요양보호사, 한식조리사, 베스트 드라이버? (웃음) 그냥 자원활동가요. 봉사는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거든요.
page.82
소통 전문가 인화정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민태원의 '청춘예찬' 한 구절을 붓글씨로 써서 교실에 딱 붙여놓은 거예요.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이것은 청춘이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걸 보니까 너무너무 좋았어요. 이거다 싶었어요. 이걸 내가 해야 되겠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내 몸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가 자기 몸에 들어왔다고 얘기하는 걸 본 적 있는데, 맞아 나도 그랬지... 어린 나이에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어요.
page.92
소통 전문가 인화정
우리 딸 사는 거 보면 참 좋아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당당하게 일하면서 잘 사는 것 같아요. 아들에게도 결혼하라는 말은 안 해요. 나는 시대를 탓하고 싶진 않아요. '집사람'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누구 엄마, 누구 아내보다는 나를 찾고 싶었던 게 강했던 것 같아요.
60대, 나는 지금이 좋아요.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꿈틀거리는 마음이 좋아요. 글씨도 어떻게 써야 한다고 생각 안 해요. 쓰고 싶은 대로 그날의 마음을 담아서 써요. 요즘 내 마음을 글로 써놨어요. 동년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글이기도 해요.
"말도 안 되게 설렘과 벅참이 찾아올 거예요. 당신에게."
page.98
소통 전문가 인화정
필수노동은 6070 여성들이 떠받치고 있다
필수노동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등장한 개념이다. 재난속에서 사회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일하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접촉이 불가피하고 그만큼 감염병 위험이 높은 업무를 뜻한다.

(중략)

분석 결과 필수노동자의 67.4%는 여성, 32.6%는 남성이었다. 배달원과 자동차 운전원을 제외한 모든 직업에서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여성 비중이 가장 높은 직업은 가사 및 육아 도우미(98.2%)였고, 간호사(94.7%), 돌봄 및 보건 서비스 종사자(93.8%), 보건의료 관련 종사자(91.4%) 순이었다. 고령층 여성의 비중은 특히 두드러졌다. 전체 필수노동자를 연령대별로 줄 세웠을 때 50대 여성(16.2%), 60대 여성(15.7%), 40대 여성(11.2%), 70대 이상 여성(10.2%) 순으로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필수노동은 여성들이, 고령층 여성들이 떠받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page.98
소통 전문가 인화정
그들의 노동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마주할 혼란은 어떤 것일까. 인간다운 삶, 기초적 생활, 위생적 환경, 노동할 수 있는 자유, 몸과 마음의 건강이 근간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사, 육아의 공백은 많은 부모의 경제활동을 중단시키며, 돌봄 노동의 공백은 간병이 필요한 환자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생존의 위기로 내몰기 때문이다. 청소의 공백으로 일상 공간이 방치되고 위생 문제가 누적되면서 방역과 보건에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지하철 손잡이를 닦던 이들, 화장실 세면대 물기를 훔치는 이들, 쓰레기통을 비우던 이들, 사무실 창문을 열고 계단을 쓸던 이들이 사라지고 나타날 일들이다.

그 공백은 사회를 멈춰 세우고도 남을 만큼 크지만, 그만큼 중요한 그 노동은 너무도 값싼 비용으로 유지돼왔다. 모두가 꺼리는 적은 임금, 열악한 근무환경, 불안정한 일자리, 감염 위험, 직업을 낮잡아 보는 인식을 고령층 여성들이 감수해온 덕에 이 사회가 유지됐다.
page.120
화곡식당 사장 윤순자
먼저 대학에 간 두 언니처럼 육아교육을 전공해 지매들끼리 유치원을 하라던 아빠는 막내딸이 '남자들의 직업'을 가진 것을 뿌듯해했다. '일하는 여자'가 된 혜원 씨의 하루하루는 생각과는 달랐다. 남성 위주 조직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회사에서 혜원 씨는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남자 신입을 원했다"는 선배들에게 "이 회사에 들어오려고 재수까지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맥주병을 숟가락으로 따며 '소맥'을 말았다. 성희롱으로 신고할 법한 상사의 농담도 '쿨하게' 넘겼다. 혜원 씨는 "남자들만의 문화를 불편하지 않게 넘기는 여자 직원이 되는 것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었다.
page.127
화곡식당 사장 윤순자
순자 씨가 공부로 우울의 시간을 통과한 것처럼 혜원 씨도 글을 쓰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갔다. 서울에 새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한 혜원 씨는 여성 심리와 우울증을 다루는 독서 모임에 가입해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썼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글감으로 떠올랐다. '엄마를 쓰는' 마음은 처음엔 원망이었다가 미안함으로 뒤엉켰다. 직장 상사의 성희롱 발언에 괴로워하던 자신의 모습에서 성희롱과 폭언을 일삼는 손님을 상대하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엄마는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저는 제가 엄마보다 인내심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애초에 엄마처럼 사는 일이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page.132
화곡식당 사장 윤순자
엄마와의 인터뷰가 저에게 엄마를 조금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딸과 엄마의 관계는 종결이 없는 것 같아요. 항상 해피 엔딩일 수는 없고 말이지요. 분명 둘 중 하나는 더 사랑하고 그만큼 더 참아주고 있을 테니까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은 뒤늦게 깨닫게 되고 항상 더 많이 슬플 테니까요.

저는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더 늦지 않게 알게 되어 얼마나 배가 부른지 몰라요.
page.144
화곡식당 사장 윤순자
1983년생 딸 4명 중 1명은 경력 단절
딸과 아들의 노동은 30대를 기점으로 급격히 달라진다. 2018년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20대 후반 여성들은 같은 남성들 월평균 임금의 91.7%를 받는다. 하지만 30대 초반이 되면 남성들이 천 원을 벌 때 여성들은 837원을 벌고 30대 포반엔 723원까지 떨어진다. 비정규직 여성 비율도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급증한다. 30대 푸반에서는 여성의 30.8%가 비정규직이다. 이는 40대 푸반 37.1%, 50대 후반 50.8%로 가파르게 오른다. 남성 비정규직 비율이 30대 후반 14.6%, 40대 후반 20.0%, 50대 후반 22.6%로 완만하게 증가한 것과 대비된다.
page.162
과수원 대표 이광일
운전하니까 어떠세요.
좋지. 얼마나 편하다고. 왜 내가 신랑한테 맨날 구걸했을까 싶어요. 운전은 필수야. 마을에 운전하는 여자가 별로 없어요. 예전 부녀회장이 운전했었고 또 내가 하고요. 내가 움직이고 내 몸 편하자면 운전은 필수야. 남이 하는 걸 다 배워놔야 해요. 그래야 급할 적에 사용할 수 있거든.
page.210
베테랑 광부 문계화
여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도시 여성이고 농촌을 이야기할 때 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남성 농민이다. 농촌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농가 인구의 51%(2019년 기준)가 여성이다. 왜 농촌 여성들의 이야기는 없을까.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농촌을 꼭 찾아야만 했던 이유다.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가를 받기 시작한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광월 씨가 쉰이 다 되었을 때, 시아버지의 경제권이 남편에게로 넘어왔다. 시부모에게 돈을 '타서' 썼던 광월 씨는 처음으로 자신 명의의 통장을 만들었다. 임금을 받으려면 본인 명의 통장이 있어야 하는 도시와는 달리 농촌에는 통장조차 없는 여성이 많았다.
page.253
교육 전문가 이선옥
시아버지가 반대는 안 하셨나요.
학원 일을 하다가도 부르면 자습 시켜놓고 집안일 하러 가고 그랬어요. 제가 하는 일을 직업으로 보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남편을 내조하거나,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정도로 생각하셨죠.

학원 운영도 실제로는 선옥 씨가 다 하셨나요.
네. 강사들 수업 연결해주는 것도 했고 제가 직접 수업을 하기도 했고요. 신랑은 애들 픽업해서 학원 앞에 내려주는 것. 딱 그것만 했던 것 같아요.

남편분은 그냥 명함만 필요하셨던 건가요.
명함으로 얘기하면 저희는 딱 갈리는 거죠. 저는 명함만 없이 일은 많이 했고. 그 사람은 정말 명함이 많았어요. 많이 찍고 다녔어요. 무슨 무슨 산악회, 연합회 회장 등.... 저희 애들이 잘 커줬는데 둘째(아들) 같은 경우엔 특목고를 갔거든요. 근데 특목고 간 게 또 신랑의 명함이 되더라고요.
page.264
교육 전문가 이선옥
이유가 있으세요.
음... 저는 명함이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걸 온전히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명함을 찍게 된다면 최고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라는 제목으로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딸이 저에게 '엄마 인생 시즌2'라고 하는데요. 저는 '시즌2'라기보다는 이제야 제 인생이 온전해진 것 같아요.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누구를 기쁘게 하려거나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나이에 갇히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 오십대 중반이 넘어가는데 갑자기 육십이 됐다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할까.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