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링 마,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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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도마뱀 뇌는 실로 강력했다.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수명이 다한 컴퓨터의 마우스를 움직이고, 망가진 세단의 스틱을 조종해 운전하고, 텅 빈 식기세척기를 가동하고, 죽어 버린 화초에 물을 주기도 했다. 그들의 집을 습격하는 밤이면 우리는 실내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가족 사진첩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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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녁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고개를 들어 곳곳의 창문을 쳐다보며 그 안에서 살고 있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그들의 탁상 조명, 잔가지로 세공한 바구니에 담긴 공중 스파이더 펀, 인테리어용 베개에서 빈둥거리는 삼색 고양이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거리를 배회하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고,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상상은 나로서는 무한정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엿보기를 즐기는 께름칙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그렇게 엿보는 것 자체가 내 삶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계속 걷는 것, 하릴없이 계속 걷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세 시간이나 네 시간 혹은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 정도가 흐르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통째로 뒤섞였다. 도로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와 괜찮은 거냐고,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저한테 뭐가 필요해 보이는데요? 내가 그렇게 되물었더니 남자는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눈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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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저희는 먼 길을 왔습니다, 밥이 계속 말했다. 더 멀리 갈수록 저희 앞에는 더 불안하고 더 불확실한 길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저희 중 일부는 신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저희가 한 번의 습격으로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금 당장은, 오늘은, 저희가 곧 개시할 습격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갓 기원한 선의와 행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밀봉하는 의미로 원 모양을 그리며 빙빙 돌았고, 각자의 출생신고서에 기록된 정식 이름을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서는 밥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갔다.
로버트 에릭 리머.
저넬 사샤 스미스.
애덤 패트릭 로빈슨.
레이철 세라 애버딘.
제너비브 엘리세 굿윈.
에번 드루 마처.
애술리 마틴 피커.
토드 헨리 게인스.
캔디스 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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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살아 있는 습격에서는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마지막에 전부 죽여, 토드가 설명했다.
아니, 우리는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니야. 해방시켜 주는 거지. 밥이 토드의 말을 정정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지?
그게 인도적인 일이니까, 제너비브가 대답했다. 똑같은 루틴만 내내 반복하다가 퇴화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그런 비참한 고통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게 구해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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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앞으로 향후 몇 년 동안은 이 생산직들이 또 다른 곳으로, 아이팟과 해피밀과 스케이트보드와 미국 국기와 스니커즈와 에어컨을 중국보다도 더 저렴한 인건비로 생산해 낼 의향이 있는 몇몇 국가나 인도로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인 사업가들은 그 국가들을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고, 제조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들을 겨냥해 세워진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현지 음식을 시식하게 될 테고.
이 일련의 과정에 나도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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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밥이 설교를 이어 갔다.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우리의 두 눈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근시가 돼 버렸어. 온라인에 있다는 건 곧 과거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니까. 그리고 인터넷이 쓸모가 많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할 수는 있겠지만, 인터넷의 중요한 부작용 중 하나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과거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는 데 있어. 단! 밥은 여기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둘러보았다. 밝은 면도 있어. 인터넷이 사라진 지금이 우리에게는 기회가 되니까. 우리는 더 자유롭게 현재를 살고 더 자유롭게 미래를 그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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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나는 위아래가 거꾸로 된 애슐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애슐리는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나를 인식하지도 못했다. 동공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눈빛은 뭐랄까, 누군가가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거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을 때의 눈빛과 가장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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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과 똑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아야 했다. 내가 가진 이 다름을 알고,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도 깊고 깊은 내 바닥을 이해해야 했다. 물론 나라는 사람이 가진 모든 튻겅을 고려하면 모순적인 일이었지만, 나는 예술 부서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예술 소녀가 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나는 성경 부서에서 영원히 일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랫다가는 미쳐 버리고 말 테니까. 얇은 성경 종이가 윤전기에서 찢겨져 나가는 악몽을 계속해서 꿀 수도, 나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의뢰인에게 계속해서 설명할 수도, 수영을 하다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몹시 불규칙하고도 요동치는 환율에 따라 위안화를 달러로 바꾸는 짓을 지속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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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기억은 기억을 낳는다. 기억의 병인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각자가 지닌 기억에 무한히 갇히고 만다. 그런데 열병에 걸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에게도 기억이, 완벽한 기억이 있는데. 내 기억은 자발적으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게다가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도 무한한 루프 속에서 흘러간다. 우리는 운전을 하고, 잠을 자고, 조금 더 운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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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그런데 종교와 관련해 루이팡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기도였다. 처음에는 다른 신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했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지하 아파트에서 홀로 기도를 올렸다. 가발을 만들다가 눈이 침침해지고 손가락은 뻣뻣해지고 피로가 몰려오는 오후 시간이 되면 루이팡은 부엌 식탁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기도 시간은 곧 중요한 의식이자 루이팡에게 통제감을 안겨 주는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루이팡은 사실상 기도를 통해 미국에서 자기만의 삶을 일구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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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아빠는 평생 회사에서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잔반을 먹는 삶을 살았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으나 그건 주말도 없이 매일 출근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많은 이민자처럼 근면함을 중시했고 자신을 받아들여 준 나라에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인생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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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밥에게 이 시설은 단순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설은 그의 허울뿐인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장소다. 밥은 자기 자신만 온전히 알고 이해하는 규칙을 세우고 강요한다. 밥의 입장에서 우리는 포상 또는 처벌을 내릴 대상일 따름이다. 그는 나를 통제하고 싶을 때 칭찬을 한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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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다른 독자들은 내가 재난 포르노를 게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내가 뉴욕을 떠나지 않은 이유, 블로그 활동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이유도 문제 삼았다. 한 의심 많은 독자는 이런 댓글을 남겼다. 당신이 열병에 걸린 게 아니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믿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