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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상반기 일대일 양육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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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간증 - 나의 출애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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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간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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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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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관리 -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주제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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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약하여서(삼하3:21-39)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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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사랑하고 (엡 5:21-33)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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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 날마다 촉촉히 적셔주는 이슬비
주제큐티
3
  • 안식
기도 - 기복을 넘어 팔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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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수 10: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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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 100% 옳으신 하나님
주제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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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영혼 구원을 위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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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 갈등충만은 성령충만
주제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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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약하여서(삼하3: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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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20] 김양재 목사 - 내가 오늘 약하여서(삼하3:21-39)
21 아브넬이 다윗에게 고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가니라
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 요압과 그 함께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24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 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
30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왕이 상여를 따라 가서
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바가 아닌줄을 아니라
38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
요즘 시국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본문이라고 생각해서 이걸 다시 한번 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직 믿음만을 지키려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의 대선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백인 우월주의를 부르짖는 트럼프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트럼프 반대 데모가 한창인 지금, 우리나라도 촛불 집회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이 사무엘하 3장 1절에 보면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고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점점 강하게 되어 갔는데도 그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쫓아다닐 때는 그의 음란이 활동을 못했는데, 사울이 죽고 결정적인 적이 없어지니 그렇게 전쟁을 하면서도 여자를 계속 취한 본문이 바로 이 본문 직전에 나옵니다. 다윗의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여전한 약점으로 공개되더니 오늘은 약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뭐든지 훌륭하고 신앙에 좋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약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다윗이 "내가 오늘 약하여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를 오늘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로 내가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니 원수가 스스로 분열해서 나라를 가져왔어요. 할 말이 없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다윗이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무엇이나 어디서나 힘든 것입니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전쟁이에요. 기본 전투에서 다윗 쪽이 승리를 했음에도 끈질기게 다윗 왕가를 괴롭혔어요. 정말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이제 승리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악한 이웃, 불우한 이웃을 선으로 이기려면 인내가 요구됩니다.
언약 신앙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큰 인내가 요구됩니다. 성도들에게는 사단의 끈질긴 공격이 쉬지 않고 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 더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야고보서 1장 4절에 말씀하고 있어요. 온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고자, 이 사울 쪽의 군대 장관 아브넬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기호합하여 다 동의를 구했습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보면 아브넬이 얼마나 기회주의자인지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다윗을 대적해 왔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윗을 높이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하나님이 다윗의 사자인 것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사울도 알고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죽은 것은 결국 자기 삶의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사울은 인본주의의 심벌로서 죽기까지 도움이 안 되는 기회주의 간신 아브넬을 끼고 돌았습니다. 분별이 안 되니 신접한 여인도 찾아가고, 선지자 사무엘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아첨만 하는 아브넬을 평생 끼고 돌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2년 전에 이런 설교를 했는지, 저도 굉장히 신접하지 않습니까? 이 시국에 이걸 한번 해야 되겠다, 제가 생각을 했어요.
사울은 정말 사람 분별이 안 돼서 죽을 때까지 아브넬을 믿고 죽었어요. 그러나 사울이 죽은 후에 아브넬은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사울 쪽에서 보면 가장 큰 배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는 전쟁을 했지만, 믿으면 안 될 사람을 이렇게 죽을 때까지 믿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에게 충성을 다한 것 같지만, 사랑 없이 충성했을 때 나도 남도 죽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충신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충신이었다면 어떻게 사울의 첩을 범하겠습니까? 무능하고 힘이 없다고 어떻게 그의 아들을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식을 행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사울과 아브넬은 왕과 신하로서의 서로를 배려하는 지식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있는데 돌이키는 행함이 없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 최태민은 2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면서 박 대통령은 크게 되실 뿐이라고 날마다 왕과 신하로서의 서로를 배려하는 지식은 있었지만,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돌이키는 행함은 없었기에 지도자로서의 지혜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가득해도 자기 죄를 못 보는 진짜 무식한 인생이 무엇인지 사울과 아브넬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유익과 자리를 위해서 뜻을 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아브넬의 뜻을 받아들인 것은 다윗의 약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기회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반대편 장수인 아브넬의 뜻을 받으려면 사울의 딸인 자기 부인 미가를 몰래 데려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 사울의 아들이니 그 이스보셋에게 의논하고 설득해서 공개적으로 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른 편을 안 드셨겠습니까? 안 드셨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미 무서운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그 다음서부터 치명적인 약점인 여자를 계속 얻어들이다 보니 당연히 약함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엇을 할 때 뜻을 정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정말 이게 거짓인가, 진실인가, 상대방에게 유익인가, 또 이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인가, 상처를 주는 일은 아닌가, 이런 걸 끊임없이 생각해서 뜻을 정해야 하는데, 계속 그걸 think 한다고 하잖아요, 그죠? 여기서 아브넬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잘 믿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는 아브넬의 이 기회주의를 다윗도 결국 기회주의가 되어서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대방으로 인해서 할 수 없어서 그랬다고 넘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다윗에게는 이 일이 자신이 할 일을 아브넬이 완벽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나라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보면서 아브넬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적용으로 나가야 되잖아요, 그렇죠? 정말 아브넬은 나쁜 놈이구나, 여기저기 붙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제가 그때도 그렇지만 얼마나 이 본문을 그때 설교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내가 얼마나 아브넬인가, 나에게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실한 것처럼 4대째 무태신앙이니까 항상 진실해야 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처럼 하면서 얼마나 나의 유익을 구한 일이 많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아브넬은 이 세상으로 말하면 성공이 목적인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또 굉장한 성공한 강요예요. 거기에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잘 참는 편이라서. 화내는 사람보다 저의 유익을 구하기가 참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잘 참으니까, 내가 인내하고 뜻을 잘 정한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말씀을 볼수록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환경에서 내가 살아야 하니까 참을 수밖에 없으니까 참았다는 것이에요. 지금 보면 "너는 왜 못 참니?" 그렇게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내가 참았으니까 남들 보고, 또 식구들 보고 "너는 왜 못 참니?"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니까 제 옆에 사람들이 저를 너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귀해주의자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아브넬처럼 귀해주의자가 되어서 가난한데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얼마나 처신을 잘했으면 선생님들이 그렇게 잘 봐주어서 피아노도 돈도 없이 하고 예고 강사도 돈도 없이 되었겠는가.
요즘에 정유라를 보면 하나님 백이 최고 아니겠어요? 엄마 백이 몇 년도 못 가서 삼천포로 이렇게 빠져요. 근데 그게 하나님 백이라기보다 내가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고 정말 처신을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처신을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때 믿음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도덕과 윤리는 남이 보는 데서는 무조건 너무나 훌륭하고, 또 안 보면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까 저는, 그게 너무나 저의 절박한 문제니까, 심지어는 컨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실기 시험 때 모두 앞에서 "나는 피아노 연습을 하나도 안 했다"고 하고, 시험 볼 때도 "공부 하나도 안 했다"고 하면서 거짓말인지도 모르는 거짓말을 그렇게 일삼았다는 생각이 들고, 공부를 잘하려면 얼마나 이기적이어야 했는지를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부유한 우리 아들은 공부를 안 했으면 안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하고도 안 했다고 하는 이런 차이가 굉장한 차이가 둘 가운데 있더라고요. 아브넬 같은 면이 저에게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큐티를 하면서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닫고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벌고 생활비까지 대야 하니까 인생이 항상 절박했어요. 그래서 아플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었다는 말을 계속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도 큰 수술을 하고 지금 이제 3주 됐는데, 정말 3주 동안 제가 아플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들 때문에 평생 그 생각을 이렇게 하는 게 습관이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픈데도 계속 영상 기도 제목을 보내고, 음성으로 그 믿음이 없어도 아마 그게 이제 습관적으로 저한테, 내 옆에는 부자도 너무 부자인 친구들이 항상 있었어요.
지나고 나서 보면 그 부자 친구들을 보면서 제 속에서 어찌 비굴함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니 살아남아서 "내가 그렇게 못될 것이 어디 있는가?" 하며 나의 쌓아놓은 간판으로 부자인 신랑에게 선뜻 시집을 갔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 왕보다는 다윗 왕을 택해야 되겠다는 뜻을 정한 것처럼, 제가 이 두 왕 중에 학교에 남는 것보다 다윗처럼 믿음이 있는 장로님 댁, 그것도 부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나에게 훨씬 유익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으로 인도 안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물론 저도 결혼을 해서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팅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믿음이 좋아서 행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에요.
다윗처럼 너무 약해서 한 결정들인데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성공지향적으로 나갔던 아브넬은 죽이셨는데 저는 죽이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구나 생각하니 정말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설 수가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적용
1. 여러분의 기회주의는 어디까지입니까?
2. 여러분의 욕심이 기회주의에 넘어가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2. 다윗이 약하여서 신복의 배반을 처리하지 못 했습니다.

22절, 3절에는 요압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와서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고 평안히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평안히 가니라, 평안히 갔고, 평안히 갔나이다 하면서 지금 죽으러 가는 아브넬을 평안히 갈 수 없는 아브넬이 평안히 갔다고 자꾸 강조를 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암시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 편에서 보면 평안히 갔지만, 그리고 다윗과의 회담은 성사되었지만, 다윗이 평안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넬의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입니다.
다윗이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브넬의 평안을 보장하고 하나님의 가치관이 그 속에 들어갔을 때 평안한 것이지, 다윗이 평안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히 갔지만 아브넬은 죽게 됩니다. 누군가 나의 앞날을 보장해 줄 것 같지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나님이 보장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요압의 신복이 "아브넬이 왔는데요, 평안히 갔어요." 이러면서 요압과 다윗을 이간질 시키는 발언을 합니다. 자기의 원수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 평안히 갔다고 하는 것은 요압에게는 가장 뒤집어질 말인 거예요.
이제 통일 한국이 눈앞에 왔는데, 그러니까 부하는 상대방에게 하나도 욕하는 것 같지 않게 하지만, 아브넬이 평안히 갔어요 하면서 들으면 뒤집어질 것을 알고 말하는 여러분들의 속셈이 또 얼마나 많겠어요. 하나도 욕하는 것 같지 않게 "평안히 갔어요." 근데 그건 상대방에게 너무 뒤집어질 말이에요. 근데 보니까 또 제가 얼마나 나도 이랬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항상 교양 있게 이야기하면서 제가 뒤집어지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 전공입니다. 저만 보면 짜증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나는 뭐든지 잘 참으니까요. 그래서 다 이것을 보니까, 이것도 또 제 이야기에 갔습니다. 24절 5절에 보니까,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하심이니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하시려니와 내래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에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입니다." 하고 요압은 아브넬이 화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왕을 속이러 왔다고 따집니다. 그런데 이럴 때 다윗은 자기 신복 요압의 말을 들어야 되겠습니까? 원수인 아브넬의 말을 들어야 되겠습니까? 리더를 하라면 뭔가 결정을 해야 하니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어제까지 아브넬이 원수였지만 지금은 아브넬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윗은 아브넬이 또 배반할 것을 알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나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아브넬이 약속을 지켜서 자기 부인 비가를 데려왔고 20명을 데려왔기에 이때는 아브넬을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요압이 이런 거 이해하지 못합니다.
항상 요압은 아브넬은 나쁜 놈인 거예요. 그냥 다윗같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도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니까 날마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이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인 거예요. 같이 이렇게 혈전을 거치면서 구속사를 지나왔어도.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장관이니까 나쁜 놈인 거예요. 나쁜 사람도 오늘 달라질 수 있어요. 아브넬과 다윗은 원수였지만 이때는 사실 영적 교류가 이루어질 때였어요.
그런데 다윗은 요압이 따질 때 왜 그러냐고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요압이 너무 무서운 사람인 거예요. 왜?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들을 태세도 안 되었고, 15년 동안 너무 자기를 위해 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한마디도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26절, 7절에 이에 요압이 다이덱에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랑 오물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잘 순 알지 못하였더라. 이에 요압이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며,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을 믿어라. 다윗과 친척인 요압은요, 원한이 많고 작은 일에 집착을 하는 사람이어서 왕에게 가서 따지고, 아브넬을 자기 동생을 죽인 그대로 배를 찔러서 죽였어요.
이거는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 동생 아사엘 때문에 죽였다는 거예요. 이렇게 원한이 가득 찬 사람이 몇십 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딱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압의 식구들 형제들이 한결같이 열심당원으로 다윗도 한국의 열다섯 광야로 올 때 너무나 도움을 주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지금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면서 인간론에 대해서 이렇게 배워야 합니다. 장립공신이라고 해서 언제든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장립공신 요압이 다윗의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한이 가득 찬 사람이 너무나도 신복으로 일을 잘하는 거예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악역을 믿음 때문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서도 오직 야망을 위해서 직분 때문에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정치도 딱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요압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에요.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이 한 사람, 원한을 잘못 샀다가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브넬이 이 한 사람 때문에 너무나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일이 안 되려면 그렇게 안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때 아브넬이 좀 빨리 갔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다윗은 미리 보냈는데 1분 사이에 일이 일어났어요. 뭐든지 세월호도 그때 배를 틀지만 않았다면, 탈출하라고 명령만 했어도, 그 1분에 뭐든지 결정되는 것 같은 이런 일들이 우연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부르고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제가 상풍 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오전 집회를 갔다가 점심을 먹고 운전을 하고 오는데, 제가 상풍 백화점에 뭔가 바꿀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기가 어려우니까 "오늘 오다가 바꿔야지." 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쪽으로 길을 접어들어서 갔는데, 무의식적으로 평소에 안 다니는 길이니까 그냥 그 길을 지나쳤어요.
직진을 해야 되는데 우회전으로 우리 집으로 그냥 이렇게 오는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올 시간이 언제 또 있을까, 이 한낮인데 유턴해서 돌아가야 되겠다." 했는데, 하나도 바쁜 일이 없는데 그냥 왔어요, 집으로. 생각은 "유턴해서 가야 되겠다." 가까워요, 우리 집.
그 반복해서, 상풍 백화점이 굉장히 가깝잖아요. "아무 일도 없는데 가야 되겠다, 가야 되겠다." 그랬는데, 와봤더니 우리 집이에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상풍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딱 들리는 거예요.
그날 일이 너무 생생합니다. "사명이 아직 남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제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는 마지막에 하나님을 부르고 갔을 것이니까, 저는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고 기도하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안 죽어서 간증이 아니에요.
그런 일도 또 저한테는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믿으면. 만사형통이니, 이 병도 안 걸리면 좋겠지만 열심히 목회를 했는데 또 암이 딱 걸렸어요.
하나님은 저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 있다고 수요일에 제가 다 이 죄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에 한 명이 암이라는데, 암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늘 암 환자로서 제가 기도하잖아요, 제가 암을 모르니까 한번 체험해 보라고 암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암이 권세로 쓰여서 정말 제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홈피에 보니까 세계적인 암 박사 김의신 박사가 말하기를,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의 암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대요. 31년 동안 숱하게 암 환자를 대하면서도 미국인 환자나 가족이 우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한국인 환자나 가족은 대화를 나누다가 울음이 복받쳐서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래요.
그래서 미국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하나님이 결정한다고 믿는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도 국가가 기독교니까 그런가 봐요. 그리고 병원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기고 제일 안 듣는 사람들이 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이래요. 그리고 막 데이터를 가져와서 맨날 따진대요.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집중만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한답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회사에 출근을 한대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기 전날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그럼 암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인 암환자들은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구역질하는 경우가 드물대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렇게 구역질을 한대요. 이게 믿음의 문제일까요? 체력의 문제일까요? 그분들은 지방이 많아가지고 구역질 안 하는 거 아닐까요? 나도 이제 하게 될까 봐 미리 연막전을 이렇게 딱 펴놓고, 그런데 한국인은요, 암에 걸리면 일단 직장부터 그만둔다는 거예요.
그러고 다 산으로 들러 이제 하루 종일 암과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한대요. 그런데 그건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그래서 진짜 그래서인지 그렇게 걱정을 해서인지 이렇게 구역질을 다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저도 분명히 한국인이니까 구역질을 할 거예요. 너무 믿음 없다고 그러지 마세요. 근데 이제 보니까 일을 하라고 하니까, 아, 일을 하라고 하니까 저도 다음 주에 컨디션이 허락되면 우리들 교회가 이 주관하는 아프리카 선교사 수련회에 갔다 와서 항암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들 교회 전체가 서포트를 하고 선교사 400분이 넘게 오시고, 또 주일학교 아이들도 청소년, 유년 주일학교까지 우리들 교회가 모두 주관을 하는데 정말 제가 기가 막힌 거예요. 1년을 훨씬 넘게 준비를 해왔는데, 그래서 그냥 오직 목회자 세미나하고 아프리카 선교사 수련회 때문에 그냥 항암 선거를 받는, 아니 암 선거를 받는 때부터 이거 갈 수 있어요? 갈 수 있어요.
근데 제가 지난주까지 이제 가지 못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김우신 박사가 일을 하려 하잖아요, 일을. 근데 이거 노동이 아니고 기쁨으로 하면 또 안식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합니다. 컨디션이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아서 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관지 수술을 2박 3일 하고도 바로 끝나고 도저히 못할 것 같은 목회자 세미나를 해서 암 수술할 때 하나님이 많이 도우셨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목회자 세미나 할 때 제가 진짜 신들린 듯이 하루에 9시간씩 20강의를 소화하고 그 다음날 수술했거든요. 여기 뭐 성령이 수술해 주시는 게 있죠? 그래서 정말 이것이 노동이 아니고, 이거 누가 돈 주고 하라고 하겠습니까? 사명이니까 하는 거죠. 모두가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뻐서 면역이 막 올라가면 황암도 잘 받지 않을까요? 할렐루야! 아브넬이 죽은 것도 결국 하나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사건과 시간을 지켜 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편 구원을 위해 내 생명을 내놓았는데 우리 남편을 구원시켜 주시고 나를 이 땅에 남겨 주셨으니 내가 날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고 나가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 지금부터 모든 식구들을 주님께 인도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의 시간을 알고 기도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셔야 됩니다. 주님께 인도하셔야 합니다. 가장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죽게 인도하고자 오늘도 안식으로 나왔습니다. 노동으로 나온 게 아니라 안식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전도주일에 추수감사주일에 정말 한 사람이라도 구원시키고자 나왔습니다. 정말 오늘 다 구원 받으셔야 돼요. 할렐루야.
28절, 9절에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딱 듣고 다윗이 "나는 아브넬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다." 그리고 29절에서 "그것은 요압의 죄라고 하면서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벽군자나 나병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다윗은 즉시 이 문제에서 요압을 저주했어요. 이건 아주 공평한 결정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로 있었던 요압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브넬도 하나님이 처리해 주실 것을 믿어야 되는데 그것을 못 믿고 자기가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그 저주가 자녀에게 간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으면 우리 자녀에게 그대로 내려갑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원수 갚으면 나의 모든 사연, 바람 피우는 집에서 바람으로, 술 먹는 집에서 술로 내려가는 것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 저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맞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사연과 저주가 다 끊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넬은 워낙 무식한 사람이고 자기 죄를 못 보기 때문에 원한을 많이 산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요압에게 원한을 사서 갑자기 죽은 것이니까, 이거 다 아브넬 삶의 결론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부활에 있었던 요압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원수를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요압을 이렇게 저주했는데, 미리 요압이 물어보았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아브넬을 죽인 다음에 이렇게 저주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약함이라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요압이 무서워요.
요압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어요. 요압이 무섭고 이제는 아브넬도 죽은 마당에 요압까지 없으면 통일왕국이 되질 않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맨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나라가 분별이 안 됩니다.
교회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인간 나라와 똑같습니다. 다윗도 통일 한국을 세울 때에 아브넬의 힘을 의지하고 요압의 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요압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요. 요압이 야망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식구들을 못 보고 내 동생을 누가 죽였냐고 사사로운 논화를 갚은 것이고, 또 아브넬을 보니까 자기 동생 아사해를 죽인 솜씨가 아주 날렵한 거예요.
그리고 다윗가에 화해를 청했던 그 노련함을 보았을 때 통일왕국의 군사령관은 아브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의 권력욕 때문에, 사사로운 원한과 권력욕 때문에 아브넬을 죽인 거예요. 나라와 다윗을 생각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최순실 씨와 정윤회 씨는 박 대통령을 놓고 보좌하는 방법이 다르고, 또 남편 정윤회 씨가 신임을 받으니까 최순실 씨가 질투를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딸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이 권력을 이용해서 딸을 끼고 돌다가 대한민국을 정계, 재계, 학계, 문학계, 스포츠계를 초토화시키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커졌어요. 이 세상에 힘든 것이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는 거예요. 이 세계적으로 우승거리가 된 이 큰 사건이 이 사소하게 보이는 잔여 우상에서부터 터진 것을 여러분들 아십니까? 거기서부터 이 사건이 다 불거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힘들 때 어려서부터 알던 최 씨를 물리칠 수 없지요. 박 대통령도 20대 때 정말 이 모든 것을 엄마 아버지를 잃고, 또 청와대에서 쫓겨날 때 그때부터 알던 최 씨를 물리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질투를 하니까 최 씨의 이혼으로 결론을 낸 것 같습니다.
이혼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막아야 하는데, 저는 가정을 깬 것도 보좌를 받는 지도자로서는 생각해 봐야 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무서운 요압은 오랜 시간 다윗에게 한마디도 대들지 않으려고 다윗을 절대 추종하다가 자기 자리가 걸리니까 이렇게 무섭게 달라집니다. 여러분들 권세가 있고 자리가 있을 때 이렇게 달라집니다. 몇십 년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리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이 있을 때는 무조건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결정적으로 다윗의 부하로서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는 거예요. 다윗의 원수인 사울과 아브넬이 죽었다고 요압이 어떻게 슬퍼하겠습니까? 이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또 그러니까 이런 요압이 다윗의 신복이니 얼마나 다윗이 힘들었겠습니까?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은 다윗의 결정적인 원수를 요압이라는 제갈공명이 다 무찔러 주었어요. 아브넬이 그렇고, 우리아가 그렇고,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일에 항상 요압이 자기의 야망으로 원수를 다 처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요압에게 약점을 점점 더 잡히니까 점점 더 무서워서 함부로 다룰 수도 없어서 배신을 막지도 못하고 배신 후에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거한 저주를 했어요. "네 집에서 백탁병자, 나병환자가 나올 거다." 이러면서 30절에도 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요압뿐만이 아니라, 아비세도 관련이 되어서 요압의 형제들이 전부 다 같이 공모를 해서 같이 죽인 거예요.
여러분, 다윗과 같이 그다지도 고난을 같이 겪었는데 인간의 이해는 어디까지 해야 됩니까? 요압은요, 다윗이 이해가 안 돼요. 신복인데도 이해가 안 돼요. 왜 다윗이 자기에게 경배하고 원수 사울의 왕관을 가져온 아말렉 소년을 죽이는가, 이게 또 이해가 안 돼.
원수 아브넬을 죽인 부하 요압을 지금 왜 저주하는지 이해가 안 돼. 기름 부은 자 사울을 슬퍼하면서 아브넬을 위해 애가까지 짓는 것이 구속사인데, 이 모든 것이 아브넬은, 아니 요압은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 똑똑한 사람은 제 설교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구속사를 모르면서도. 그런데 무서운 것은 다윗의 의심을 꿰뚫어보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 옆에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끝까지 같이 갈 수밖에 없어요. 내가 할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 다윗의 지경이 넓어지듯이, 인간관계가 힘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은 요압이고 바로 아브넬이구나 라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시험이 어렵기 때문에 7년 6개월을 기다리게 하시고, 사울과 아브넬과 아말렉의 시험을 치르게 하십니다.
부부간의 부모자식간의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는 사람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돈 있고 먹을 것 있고 잘해주니까 하나가 된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짜 바람피고 돈 없고 명예 떨어지고 그때 진짜가 하나가 되는지, 그때 시험해 봐야 합니다. 바람 핀다고 죽네 사네 이러는데 뭐가 하나가 되겠습니까? 바람 피면 피는 거지, 이해가 안 되죠? 지금 바람 피서 예수 믿은 집이 한두 집이에요. 바람 피우는 거 다 해봐야 돼요. 이런 모든 거 해봐서 진짠가 가짠가를 가려봐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바람도 안 피우고 돈도 잘 벌고 하나가 되는데, 그건 구속사가 깨달아져서 하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신복으로 몇십 년을 있었어도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나를 반대하는 자 중에 나를 돕는 자가 있고, 나를 돕는 자 중에 해를 끼치는 자가 있습니다.
적용해 보세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뒤통수를 치는 배신을 겪어본 일이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같이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사람이 내 옆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오늘 내가 약하여서 너무 어렵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화해를 청하러 간 아브넬을 죽였으니까, 다윗을 보고 믿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넬처럼 죽일 거야. 여러분, 지금 사울은 이스라엘이고 다윗은 유다입니다. 잘 들으세요. 다윗 최고의 위기가 왔어요. 그러나 다윗은 위기 때 강해요.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여전한 방식으로 애가를 부르고 슬퍼하면서 사흘 왕가의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불렀어요. 다윗에게 위기가 왔지만 상여를 따라가고, 수치의 불명예 장사를 해주고, 요압을 말로 저주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소리 높여 울고, 옷을 찢으라고 하며, 금식하고, "내가 음식을 먹으면 벌 위에 벌을 내리지어다." 하면서 본을 보였습니다. 자기의 왕권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요압과 아비새를 아브넬이 와서 견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객관적인 상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지 않고, "하나님, 오늘 내가 너무 약하여서 이 일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이 다윗의 강함이라고 봅니다. 요압 같은 인본주의 세력이 다윗을 끝까지 방해를 합니다. 약점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배반을 막지도 못하고, 처리하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나는 상관이 없다, 내가 그를 죽였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다 자기의 자리 때문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눈앞에 왔는데 멀리 간 것 같아서 자기를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울고 기도하게 해 준 사울이 감사하고, 아브넬이 자기 나라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니까, 이것이 다 너무나 감사해서 구속사를 이루게 해 준 그 사람들이 감사해서 옵니다. 사울을 위해서 울고, 아브넬을 위해서 울고, 이것이 되면 하나님 만난 사람입니다.
끝까지 기름 부은 사울, 안가를 위하여. 계속되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다윗을 봅니다. 내 속에 기름 부은 자를 위해 끝까지 대접하라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내 관계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울을 기뻐하고 용서하는 것이 기름 부은 자를 내 손으로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복이를 그르쳤어요.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지 세상 나라가 아닌데, 목장도 세상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고요.
구원 때문에 내가 일을 해가는데 어떤 사람이 세상 방법으로 그걸 그르치면 우리가 얼마나 애통한지 몰라요. 내 뜻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애가를 같이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이런 노래를 불러야 된다고, 바로 이것이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슬픈 기도 제목 가지고 많이 오셨을 텐데, 여러분들이 힘들 때 이렇게 교회 와서 찬양하고 말씀 보고 기도를 해야 된다고 제가 가르쳐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진심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하가 잘못했어도 책임은 전적으로 다윗이 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날마다 교회를 위해서 눌린다고 했어요. 모든 것의 책임은 저에게 돌아오니까, 내가 어떤 것도 모른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 눌린다고 한 말이 정말 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굶고 배고프고 줄이고 매 맞는 것과는 비교도 안 돼요. 제가 교회를 향해서 눌린다고, 제가 이렇게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들 기도 제목 때문에 얼마나 눌리는 것이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들의 아픈 기도 제목 때문에 제가 성경 말씀 보면서 얼마나 회개하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늘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영혼을 보내주셨으니까, 제가 책임자이지 않습니까? 교만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걸 못 합니다. 즉시 꿇어 엎드려 복종하고 금식하고 옷을 찢고, 요압을 저주하고 야단칠 사람 야단치고, 내가 할 것을 행하는 것이 안 되고 뭘 해야 될지 모릅니다. 나는 모른다, 나는 책임 없다, 이런 얘기밖에 못 합니다. 계속 사흘같이 아브넬처럼 높은 자리에만 있다 보니까 그런 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제 다윗의 진심을 알고 백성들이 와서, 그래도 다윗 보고 밥은 먹어야 되지 않냐 하니, 내가 밥을 먹으면 내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맞다고 하니, 드디어 온 백성이 기뻐하면서 왕이 무슨 일을 해도 기뻐하게 되었다고, 드디어 백성들을 설득해낸 것입니다. 항상 목장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도 설득해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39절에 이제 백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39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내가 기름 부음 받은 왕이 되어서, 수류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영원한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1절에는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갔다고 했는데 마지막 절은 다윗은 오늘 내가 약하여서, 내가 너무 어렵다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같이 갈 수도 제거할 수도 없는 이런 문제가 다윗에게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수루야의 아들과 친했던 이유는 수루야는 훗날 자신의 아버지인 이세의 아내가 된 나스의 딸로 이복 누이고 그녀의 아들들은 다윗의 조카가 되는데 워낙 다윗을 형들이 무시하다 보니까 이 계모의 아들들과 나이가 비슷하니까 그때 서른받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어 친해졌는데 이 수료의 아들들은 또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 이제 서로 하나가 딱 됐지만 자기를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힘든 처지끼리 모여서 어려서부터 서로 도왔는데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보다 더 오래 살면서 다윗을 괴롭혔어요. 다윗보다 요압이 더 오래 살았어요.
다윗은 사울도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길 바랬지만 요압도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처럼 오늘 내가 약합니다. 다윗이 오늘 내가 너무 약하였어, 오늘 내가 너무 약하여서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오늘 내가 너무 약하여서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믿는 사람은 오늘이 항상 어렵습니다.
오늘 그렇게 항상 약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니, 거룩하게 살려니 오늘이 항상 어렵습니다. 기도 제목만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기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아비세를 통제하지 못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아주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고 이제 어렵다고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공정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요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십시오. 이 사람이 구속사가 안 들리니까, 요압은 다윗이 자신의 집에 백탁병자, 나병 환자가 끊이지 않을 거라면서 자기에게 저주를 했는데, 요압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도 안 보이니까, 이 땅의 것밖에 안 보이니까 자기 자리가 보장된다면 말로 하는 저주는 저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여기 수없이 예배를 와도 이 성경으로 하는 저주가 나에게 하나도 저주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믿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이거 진짜 무서운 저주인데, 성경으로 하는 저주처럼 무서운 저주가 없는데, 요압은 인간적으로 다윗도 정치를 해야 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다윗을 쥐고 있습니다. 다윗은 끝까지 옆에 평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 요압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아의 약점서부터 다, 그러니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도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은데, 얼마나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데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 내가 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있기 때문에 다윗의 지경이 넓어져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합니다.
이 교회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저 목사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런데 다윗의 계속되는 진실한 적용 때문에 백성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할 일 없는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한 번 발걸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발걸음인데, 우리 교회가 날마다 세 가족이 오니까, 한 주일만 되어도 한 가족이 되어 금세 헌 가족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일관성 있게 기름 부은 자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던져서 아브넬을 애도했습니다. 구원 때문에 사랑하고, 구원 때문에 가야 하고, 구원 때문에 우리는 결혼도 해야 되고, 구원 때문에 진로도 결정해야 되고, 구원 때문에 뭐든지 끝까지 기름 부은 자라는 거, 아까 말했듯이 질세의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는 부부가 최고입니다.
부부가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가서 내가 엄마 때문에 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엄마가 나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라는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시고, 아빠 때문에 내가 이 결혼을 했다고 하면, 맞다고 다 내 탓이라고, 내가 너무. 약하다고 이야기하셔야지, 부모가 돼가지고 다 나는 책임이 없다고,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알아서 하겠지만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원수를 사랑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살 수 없는 부부 생활을 산다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부모, 또 부부, 이 자식 간에 내가 오늘 가족이니까 살아야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집이 많아, 그러나 사셔야 됩니다. 부부가 끝까지 살 수 있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물어보십니다.
사울 왕가의 실력자인 아브넬은 사라지고, 요압이라는 실력자가 다윗의 방해 요인으로 떡하니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과 여전한 약점과 약함의 가운데서도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은혜로밖에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15 광야를 지나고 예수만 믿으면 뭐든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오늘 약하여서 어렵다고 고백을 해야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내가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배반을 막지도 못하고,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다시 15 광야를 지난 후에 하는 이 고백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국도 그렇고, 이렇게 말씀대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나라를 위해서도, 저는 어떻게 몇 년 전에 이런 설교를 했는지, 여러분 제가 약간 신접해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말씀이 있다면, 내가 원칙을 지키고 가면, 근데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내가 약하오니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어렵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고백하겠습니다. 나의 영혼, 나의 영혼 연약하여 지치고 근심 속에 내 마음 울릴 때, 주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길 잠잠하게 나 기다립니다. 다시 한번 나의 영혼, 나의 영혼 연약하여 지치고 근심 속에 내 마음 물릴 때, 주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길 잠잠하게 나 기다립니다.
주님의 손 날 일으켜 주시고 풍랑 위를 나 걷게 하시네, 주 어깨에 기대어 있으리, 이전보다 더 강하게 되니, 더 간절히 나의 영혼, 나의 영혼 연약하여 지치고 근심 속에 내 마음 눌릴 때, 주 오셔서 나와 함께 가시기 찬양하게 나 기다립니다. 주님 우리를 일으켜 주소서. 주님 손 날 일으켜 주시고 이 풍랑을 통과하게 하소서. 나 걷게 하시네, 주 어깨에 기대어 있으니 이전보다 더 강하게 되니, 주님의 손 날 일으켜 주시니 성당을 통과해 소량으로 걸어가게 하십니다. 주 어깨에 나 걷게 하시네, 주 어깨에 쉬게 하십니다. 주 어깨에 기대어 있으니 이전보다 더 강하게 돼, 주 어깨에 쉬게 하십니다.
주옥에 기대어 있으니 이전보다 더 강하게 되니, 여러분들 오늘 내가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이렇게 배반을 막지도 처리하지도 못하는 내가 무서워서 버릴 수도 같이 갈 수도 없는 요압 같은 사람이 있는데, 이걸 하나님이 다 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더 오래 산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의 그 어려운 전쟁을 하나님이 오늘 아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고백을 하시고 기도하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 기도와 그 사랑의 금식으로 제 치료 방법이 항암으로 정해졌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는 치료 방법이 정해졌으니까 금식을 끝내시고 여러분들의 모든 기도 제목을 놓고 하나님, 내가 오늘 약하였어, 이 전쟁이 너무 어려우니까 나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제 저의 항암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우리 오늘 다 하나님, 내가 어렵습니다, 내가 어렵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4대째 못해 신앙인 저는 교회에서 살면서 참으로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아브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면서 아브넬은 나쁜 사람이라고 구속사적인 가치관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정말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넬보다 뭐가 돼야 내가 더 나은 사람인가, 당연히 아브넬처럼 세상 성공을 향해서 가니 내 옆에 무서운 이 요압에게 비굴하게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이런 모든 것들이 제 속의 야망 때문인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항상 하나님은 저에게 아플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이런 걸 습관적으로 살아오게 하셔서, 주님, 참으로 이제 오늘 내가 약하오니, 이 사람들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그 고백이 이렇게 늘 쏟아져 나왔던 인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지경을 넓혀주는 것이고, 점점 강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주님, 같이 갈 수도 안 갈 수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을 평생 도운 이 요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오늘 내가 약하고, 내가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약하오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약하오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부를, 나의 대상으로 내가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용접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목적이 아버지 구원이 되며, 구원 때문에 살고, 구원 때문에 간 우리 인생이 되기 위하여서, 이 나라 정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아버지 하나님, 그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알고, 천하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약할 때 강한 대신은 주님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약할 때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예수,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 그 자리에 일어나 주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오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참으로 내가 진정이지 약하다고 주님께 고백하겠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셨소서, 그럴 분들이 그 자리에 일어나 주십시오. 참으로 제가, 참으로 교회에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도 날마다 이혼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일어날 일 없는, 그 전혀 없는 그 한 사람이 오늘 자리에 왔다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합니다. 그 자리에 일어나셔서 우리 주님을 같이 부르고 가는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가 약하오니 이 환경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이 사람을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저를 따라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오늘 너무 약합니다.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환경도 사람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천국 갈 때까지 주님을 부르는 저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무 연약한 인생입니다.
오늘 이렇게 부르짖으니 평생 이렇게 부르고 가는 저희들 될 수 있도록 은혜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천국 가는 날까지 주님 지켜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려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 하나님께서 이제 생명체계에 울리신 줄을 믿습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손바닥 위에,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신 줄을 믿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이 음성을 듣고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해 주시옵나이다. 아멘.
내가 너무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쳐내야 할 신복을 그대로 두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돈 문제, 가족 문제, 관계문제를 겪습니다. 분별하여 그때그때 선택해도 결국 나도 속고 남도 속는 내 안의 욕심은 연약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가족들을 통해 질서를 부정하고, 천국에 혼자 가고싶었던 죄패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 소개해줄 수 없겠냐, 돈 있냐며 전화오는 형과 결혼자금도 없으면서 결혼해놓고 돈 언제 갚을거냐며 재촉하는 누나의 전화가 너무 불편합니다. 그런 형과 누나를 불쌍히 여겨주라며, 믿음 있는 자가 먼저 미안하다 사과해야한다며 강조하는 엄마에게는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아버지를 보면 그 동안 번 돈 하나도 남지 않아 불쌍하다가도, 왜 지금도 가만히 있을까하며 분이 올라옵니다.
결국 저는 제 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엔 가족을 의지하면서도 의지가 안되는 가족들이 여전히 불만족스럽습니다. 이 가족구성에 대한 열등감과 죄가 너무나 깊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금 느낍니다. 언제쯤 이 불만이 그치고 100% 인정할 수 있을까요.
적용
1.
엄마와 아빠의 거처를 놓고 기도하기
2.
그 동안 의지해왔던 IT 벤쳐기업, 부자 이사장님 등의 사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새롭게 허락해주실 자리를 놓고 준비하며 기도하기
기도
하나님 오늘 내가 약하여서, 여전한 방식으로 가족들을 죽이는 생각으로 나도 속고 남도 속이며 착한 얼굴하고 살아왔습니다. 제어가 안되는 환경은 사실은 하나님이 세팅해주신 것임을 깨닫고, 더 이상 엄한 데 힘빼지 않게 해주시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 환경에 굴종해왔던 저는 드디어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수고해준 덕분에 제가 구속사를 받아들이고 제 구속사를 이어갈 수 있었음을 100% 인정할 수 있게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