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Sign In
Subscribe

SUNDAY

주일예배 녹취
All
주일설교
수요설교
큐티
2025-04-20 주일예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셨고, 하나님의 대단한 경륜은 감추어져있습니다. 또다른 창조주 예수님은 여자의 자궁 속 점으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경륜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효과적인 도우시는 성령님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영생의 길로 갈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영접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심을 알아야 부활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1.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노고는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노고하면 듣기도 힘듭니다. 성경에서는 전도서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를 악물고 버텨야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에서, 가정에서, 언제나 어렵고 버티기 힘든 고된 일들이 거듭 옵니다. 그것을 이겨내줄 돈과 힘과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또 노고가 되고 맙니다. 이러나 저러나 참 수고스러운 삶입니다. 이 노고는 모든 심판의 결론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죄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날 뿐입니다. 제 남편은 방탕하게 살기는커녕 주일에도 아이를 받아줬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도 아이를 받으니 자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도 했습니다. 눈코뜰새없이 밤낮으로 환자를 봅니다. 저는 집에서 갇혀 큐티를 했습니다. 결국 안식일을 열어놓고 애를 받았던 남편은 안식일에 천국에 갔습니다. 여기서 끝이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 솔로몬은 인생의 노고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바로 하나님이 그 노고를 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11절입니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노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하나님의 작품이니까 망친 것은 없어요. 모든 게 아름다워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해요. 아름다운 때에 아름답게 하셨다고 하지 않으세요. ‘어떤 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에요. ‘아름답다’는 말은 ‘딱 들어맞는다’라는 건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나답다’는 게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예술 작품은 어디에 두어도 빛이 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예술품이 되기까지 작가는 정성껏 깎고, 또 깎습니다. 그래야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작품이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래요. 우리 인생의 작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깎고 또 깎으십니다. 삐져나온 부분을 뽑아내고, 깨뜨리고, 가지치고, 다듬고, 닦으셔서 아름답게 빛이 나는 걸작품으로 만들어내십니다. 그래서 어디에 두어도 딱 들어맞는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는 거예요. 1절이에요.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난번 개역한글 성경에는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그러니까 ‘때를 안다’는 것은 이렇게 모든 것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목적을 아는 것이 때를 아는 거예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에요. 그래서 그 거룩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게 사명이에요, 2절부터 8절입니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그래서 이 모든 때를 지금 아름답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의지를 뛰어넘는 때' 라는 거예요. 이 저자 솔로몬은 반대되는 우리 인생 속에 긍정, 부정의 14쌍의 스물여덟 사례를 대조하여 제시하는 거예요. 여러분 울고 있어요? 울 때가 되어서 우는 거예요. 웃을 때가 되어서 웃는 것이고, 고난 받을 때가 되어서 받는 것이에요. 거기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목적을 아는 것이 오늘 현재의 순간을 아는 것이고, 내 때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사람은 오늘 내 삶이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현재 일들을 인정하기 위한 연습임을 아는 것이 목적을 이룰 때예요. 공부 잘하고 성공하는 때가 목적을 이룰 때가 아니고요. 오늘 현재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 목적을 이룰 때라는 거예요. ‘천하 범사’라고 하셨으니 어떤 상황도 목적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 때’나 ‘사랑할 때’만 좋은 때라고 하지 않으세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모든 때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죽을 때도 인정하고 날 때도 인정하면, 사실 낙태도 안 되고 안락사도 안 되는 거죠. 낳든 죽든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목적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적과 사명을 모르니까 이 때를 거부합니다. 고난의 때를 멀리해달라고, 물러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근데 오늘 이 28가지의 이런 모든 그 때를 보니까, 중요한 주제가 죽음이에요. 즉,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시작과 끝을 지금 언급합니다. 식물을 심을 때 뽑을 때, 사람의 생명을 보존할 때와 취할 때, 건물을 세울 때와 헐 때 모두 출생과 죽음의 개념을 나타낸 거예요. 울 때 슬퍼할 때와 대조되는 웃을 때와 춤출 때도 죽음과 파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의미해요. 또 마지막으로 사람의 두 가지 기본적인 감정인 사랑과 미움을 그 궁극적 결과인 평화와 전쟁과 대조시켜 언급하는 것은 이 세상은 결론으로 ‘때’ 중에 죽음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러므로 제일 추한 모습이 죽을 때 모습이에요.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죽음의 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저자인 솔로몬이 ‘지혜자나 우매자나 똑같이 죽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어요. 여러분은 죽을 때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제가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죽음을 겪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이 똥내 나는 몸빼바지 입고 갑자기 교회 앞에서 교통사고로 가셔도, 또 남편이 암으로 하루 만에 가도 다 이렇게 잘 믿고 갔죠. 믿는 사람들은 정말 참 아름답고 평화스럽게 가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하실 때가 있는데, 오늘 그 모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죽는 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세속적으로 보고 ‘죽기 싫다’고 추해지는 거죠. 어느 할머니가 그냥 너무너무 정말 많이 아파서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 그러더니 이제 그 욕창이 생기셔서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데, 진통제 먹는 만큼 회복이 안 좋다고 하니까 세상에 나중에 보니까 그 많은 진통제를 하나도 안 먹고 이불 밑에 다 숨겨 두었다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때이고, 행복한 때예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화가 없는 이유는 과거의 모든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을 알게 해주는 연습임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알아서 내가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도록 때마다 허물을 벗도록 모든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새가 태어나서 작은 병(甁)에 넣어서 아무리 살피고 보살펴도 자라면 밖으로 내보내야 되잖아요. 새는 자라고 있는데, 끼고 키우겠다고 내보내지도 않고 병(甁)도 안 깨어진다면 어떻게 거기서 살겠습니까? 깨야 날라갈 수 있습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전도서 3:1-11
  • 안식
2025-04-13 주일예배 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구원을 위한 고난 본문: 누가복음 22:63-71 설교: 김현중 목사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저는 올해 예배행정, 휘문 평원지기를 섬기고 있는 김현중 목사입니다. 구원을 위한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요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 비슷한 그림들이 보이시죠? 시간이 지날수록 AI가 삶에 깊숙히 들어오는게 느껴지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리서치에 따르면 AI가 내 삶에 해가 될 것이라는 답이 많았습니다. AI에 의해 정보가 왜곡되고 사건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뉴스에 의해 속을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남 일일때는 무관심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거짓소문 만큼 힘든 것이 없는데요, 가짜뉴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빠르게 완전히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가짜뉴스에 의해 공회 앞에 서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죄인들에게 끌려가시고 폭행과 조롱을 당하시고 누명을 쓰십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을 참으셨을까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고난의 사건이 찾아옵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나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나를 위해 주신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을 어떻게 하면 잘 당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1. 희롱하고 때리는 내 죄를 봐야 합니다.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감람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 무리에 잡히셨습니다.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셔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예수님을 감시하던 병사들이 희롱하고 폭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가만히 맞으시기만 하십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셨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병사들은 밤새 예수님을 가지고 놀며 매질했는데, 누가 쳤는지 맞춰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에서 죽는게 목적이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은 나를 때리고 희롱하는 사건에서 십자가 적요을 합니다. 구원을 위해 있어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하니 상대가 변하지 않더라도 개혁되는 것을 기뻐하고 인내를 열매로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삶에서 수치와 조롱을 잘 당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고 구원의 열매만 맺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옳고 그름에 갇혀 유익을 위해 남을 희롱합니다. 구원을 위해 허락하신 배우자에게 판단과 조롱의 말을 던지고 자녀에게 혈기와 정죄의 말로 때립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내가 맞은 것만 보지말고 어떻게 때린 자인지 보아야 합니다. [목사님 간증] 예수님께서는 병사같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제가 그런 죄인입니다. 처음에는 죄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장로 권사로 섬기고 계시는 부모님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바빠도 신호를 어기지 않고 어기는 사람을 정죄하며, 길거리에 떨어진 돈은 줍지 않았습니다. 신앙에서도 바른 삶을 추구했습니다. 주일성수, 헌금, 전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준 기념선물에 우상을 줬다고 호되게 혼내기도 했습니다. 수련회를 다녀온 친구에게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격려사를 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자로 자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도 다른 사람의 죄를 들여다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여러 기준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저는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여러 실패를 겪게 해주셔서 아주 조금 낮춰주셨고, 29살에 선교의 비전을 가진 누나와 결혼하게 해주셨습니다. 금방 선교지로 나갈 것 같았지만 부부싸움을 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제 뜻대로 정해진 선교지에서 혼자 만족했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내와 대화가 단절되었습니다. 또 다른 단기선교를 가기 위해 아내에게 선물했던 반지를 팔거나 아내를 무시했습니다. 여러 말로 아내를 조롱했고 눈빛으로 때렸습니다. 아내가 자주 했던 말은 ‘선교 가려고 결혼했지?’ 였으니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는지 아실 것 같습니다. 나의 반을 버리지 않은 채 상대방에게 버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땅히 줘야 할 사랑을 주지 않고 복종만 기대했고, 사역을 핑계로 집을 비우고 인정중독에 살았습니다. 제 삶의 결론으로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결혼 3년차에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구속사의 말씀이 없던 저는 이혼을 밀어붙히는 아내를 보며 자기연민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울 속에 살 소망이 끊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내가 마음을 돌려 가정은 지켰지만 앙금이 남아있었고, 조용히 아내를 미워했습니다. 내 죄를 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니 이외에 많은 말로 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병사들이 욕했다고 하는데, 신성모독을 했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욕되게 했으니 합당한 표현입니다. 저는 그렇게 피해의식과 비교, 열등감에 빠져 아내를 욕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사역으로 바쁘게 지냈고 하나님은 아내의 육의 성전을 치시는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케냐 선교 후 아내의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가본 결과, 암이 대장을 뚫고 나왔다고, 많이 진행됐으니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여러 위기를 지나며 제가 아내의 몸을 해친 발암물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 교회에 와서 구속사의 말씀으로 양육 받으며 아내가 가해자가 아니고 제가 가해자라는 것이 인정되었고, 남은 삶동안 할말 없는 죄인임이 깨달아졌습니다. 이혼위기와 암 사건은 부부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아내에게 했던 것이 신성모독을 한 것과 다른게 없다는 것을 깨달아져서 회개가 됩니다. 지금은 반대로 아내에게 욕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장에서 저를 고발하는 아내를 보며 15년째 같은 소리를 하게 해서 미안했습니다. 어떤 때를 보내고 계십니까? 때리고 계십니까, 잘 맞고 계십니까? 현재의 고난이 구원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사건이라고 믿어지십니까? 그 속에서 희롱하고 때리는 내 죄를 보고 있습니까? 나의 인내 점수는 몇 점입니까? 2. 분별이 필요합니다.
  1. 주일설교
김현중 목사
누가복음 22:63-71
  • 안식
2025-04-06 주일예배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
2025-04-06 주일예배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21:29-38 김현우 목사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누가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왕국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국적이나 신분의 문제가 아닌, 영벌과 영생이 갈리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원하지 않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주십니다. 또 아무리 가까이 와도 우리가 알지 못하니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해달별이 떨어지는 고난의 그날을 허락하셔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땅에서 무너지고 망하는 사건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 영원한 최고의 상급인 줄 믿습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려면, 우연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무화과 나무는 흔히 볼 수 있던 나무였습니다. 이 말씀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우연 없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나뭇가지에서 싹이 나는 것 자체에서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고, 우연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보고 알라고 하십니다. 여름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싹처럼 우리 인생의 사건도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게하는 사건입니다. 우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 나라에 닥친 고난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아는 것은 알아도 이미 가까운 하나님의 나라를 모릅니다. 그렇게 전혀 상관 없이 살다가 멸망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건을 허락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반드시 이뤄진다고 하십니다.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진실로’ 라는 말은 ‘아멘’입니다. 택하신 자들에게는 절대 이 세대, 인생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밑동 잘린 인생인 우리에게 손을 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줄 믿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천지가 없어져도 남아있는 소망을 발견합니다.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모든 나무라고 하시다가 이제는 천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없어진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것도, 가난한 것도 지나갑니다. 웃을 일도, 눈물만 나올 일도 지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이에 우정도, 사랑도 지나갑니다. 해달별이 떨어지는 사건은 우리에게 지나간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유익이 됩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은 말씀 뿐이라고 하십니다. 말씀만 묵상하고 말씀만이 소망인줄 아는 것이 축복인줄 믿습니다. 삶의 고난과 환경이 달라도 말씀을 읽어갈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말씀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간증]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일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박수무당의 외손녀로 태어나 할머니의 차별을 받는 딸로 자라셨고, 신실한 불교 집안에 시집을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낳고 남편이 자살하여서 과부가 되셨습니다. 그 사건으로 어머니가 최초로 예수님을 믿고 시댁 식구를 전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딸이 익사하시는 사건을 허락하셨고, 서울에 올라오셔서 식당일을 하시다가 혼외자인 저를 낳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제게 신세 한탄을 하시며 누나가 죽었던 일을 말씀하셨고, 저는 제 존재가 부정되는 자아상으로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여러 방면으로 해달별이 떨어지는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차별이 몸에 밴 분이라 저를 많이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 오셔도 제게 용돈은 주지 않으시고, 제가 교회에서 받아온 간식을 사촌형에게 주시며 차별하셔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준비물이 너무 많았는데, 사달라고 말씀드리기가 너무 죄송해서 한 학기 내내 준비물 없이 등교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고집이 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건이 와도 저는 어머니께 준비물을 사달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나 혼자 커서 왕이 됐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당시에 잠깐 다닌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너무 믿어지니 저를 차별하시던 외할머니도 참을 수 있었고, 임종을 혼자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고2때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제게 다른 것은 주지 않으셔도 천국에 대한 확신을 최고의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적용하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믿어지십니까? 나에게 닥쳐온 해달별이 떨어지는 고난이 우연이 없는 하나님의 세팅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고집스러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2.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주님은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도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이 방탕함 때문이라고 하시는데, 구원과 전혀 상관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온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덫과 같이 임한다고 하십니다. 별 인생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심판은 세상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건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길만이 영원을 주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결론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밤새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두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면 장차 올 일을 모두 피하고 인자 앞에 선다고 하십니다. 피한다는 것은 고난을 만나더라도 사건에 파묻히지 않고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이 깨어 기도하며 주님 앞에 누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본성을 따르면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활의 염려만 남습니다. 사건만 바라보니 쉽게 이혼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겸손한 환경만 있기에 기도하며 깨어 있는 환경이 최고인줄 믿습니다. 사건과 기도해주는 공동체가 깨어있게 해주는 최고의 세팅인 줄 믿습니다. [목사님 간증] 고등학생 때 우리들교회의 큐티를 배웠습니다. 저도 큐티하며 한번도 정리하지 못한 사건을 그 때 이후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생을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피해의식에 묻혀 있던 제가 살아나니 전도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고등부가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자가 끝나고 한시간씩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학기가 끝날 때 쯤,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저녁 집회가 끝나면 주차장에 나가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구원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수련회 마지막에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회에서 저는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큐티 모임이 3-40명이 모이게 됐고 고등부가 성장을 했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서울로 통학을 하니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생활에 대한 염려가 가득해졌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입대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생활의 염려에서 해방이 되니 너무 좋았습니다. 전역 후 하사가 되었고 월급이 늘고 개인 생활이 늘어나니 방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간에 아버지와 연락이 단절되는 것, 여러 사건을 엮으며 인생을 한탄하며 술로 보냈습니다. 마음이 둔해지니 군대에서 말뚝을 박아야겠다며 주임원사의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덫처럼 장차 올 그 날이 왔습니다. 같이 군종병으로 섬기던 그 친구가 하루는 차 키를 갖고 차를 끌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멀쩡하게 서있는 장교분들 차를 들이 받았던 사건입니다. 그 친구가 이혼 가정의 힘든 아이인 것을 인간적인 측은지심에 자진하여 뒤집어 썼습니다. 그랬다가 보험조사관이 와서 취조를 마구 해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 중년남성을 너무 무서워했는데, 그때 그 분이 불러준대로 적기 시작했고 - 내용이 보험사기꾼이라고 반성문을 썼습니다. 물론 나중에 모든 오해가 다 풀렸지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지 못하니 덫처럼 사건이 찾아왔고, 비로소 큐티를 다시 잡게 되었고 삶의 목적을 새롭게 했습니다. 하사의 꿈을 접고 신학교에 돌아와 첫 채플예배때 예배가 어땠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돌탕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구원을 위해 깨어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사건과 사고가 몰려올 때 파묻히지 않고 주님, 공동체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적용하기 나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방탕함입니까, 술 취함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까? 별 인생이 없고, 구원을 위해 나아가는 인생이 최고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장차 올 환난을 피하고, 주님 앞에 서도록 깨어 있게 하는 겸손한 환경은 무엇입니까? 3. 야망은 사망이고, 사명은 생명임을 알아야합니다.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1. 주일설교
김현우 목사님
누가복음 21:29-38
  • 안식
2025-03-30 주일예배 기도하는 성전
누가복음19:45-20:8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김성철 장로입니다. 이 자리에 선 저를 보고 여러분들이 놀라시는 것보다 저는 더 놀라고 놀라다가 정신 차려보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제가 어떤 설명이 필요 없이 제가 이 자리에 왜 서 있는지 오늘 큐티 본문 누가복음 20장 2절을 통해 먼저 텔링하고 가겠습니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정말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한 말을 장로가 된 제가 묵상하고 이 자리에서 나누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의 권위로 저뿐 아니라 이곳에 한 분 한 분이 앉아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말씀 45절에 나오는 이미 성전에서 내쫓기는 것이 마땅한 자, 46절에 나오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2007년 10월 14일 반드시 이혼하리라 굳세게 마음먹은 채로 당시 5살이던 아들과 아내와 함께 저 오른쪽 뒤편에 앉아 있었고, 저희 가족 주변으로는 그 전날 목장에서 처음 만났던 목장 식구들이 혹시라도 제가 중간에 나가버릴까 걱정하며 에워싸고 포진해서 앉아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직 이혼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 한 번만 주일예배에 가준다는 약속을 하며 아내와 장모님에게 쓴 이혼서약서에 도장을 받고 왔던 그날 이후에도 끊임없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제가 2025년 주일예배의 자리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서 있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위이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자격 없는 제가 감히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저를 어떻게 가르치시며,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때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 기도하는 성전이 되어야 하는 저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음에 회개가 되었고 지금도 온전히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쫓아내야 하는 강도가 제 안에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각자의 사연과 역할로 혼자 앉아 계시거나, 가족이 같이 앉아 있어도 다른 마음으로 위태롭게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도 예수님의 권위가 없이 내 힘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은 단 한 분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이 시간이 되어 가정과 목장과 일터, 내가 속한 그곳에서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받고 그곳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로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의 저처럼 이 시간에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죽이려고 꾀하는 마음으로 앉아서 저를 노려보고 계시거나, 아예 오늘 담임 목사님도 안 계시니 자체 방학을 하신 분이 반드시 있을 텐데, 바로 그분들이 저처럼 이 자리에서 간증을 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받게 되실 그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금 이 말에 절대 ‘아멘’을 하지 않고 ‘절대로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권위가 임할 수 없다’며 믿지 않기로 작정한 그분 자신이 꼭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로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전이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 기도하는 집이 될 가정과 목장, 교회와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성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와 내가 있는 곳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1. 내 속의 강도를 내쫓아야 합니다. (45-46절)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이 예수님의 내 집,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당시 성전 제사 제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부패로 인해 오염이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이 나오는 병행 구절 마태복음 2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 성전에 돈 바꾸는 사람들, 비둘기 파는 사람들처럼 나의 유익을 구하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오는 백성들에게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성전세로 내는 것이 우상 숭배이니 로마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 내야 한다며 투명하게 계산하지 않고 부당한 이득을 취해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성전에 올 때 멀리서부터 재물을 가져와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편함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성전 앞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던 제물이었던 비둘기를 몇십 배로 팔면서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을 통칭해 예배하는 백성이 아니라 ‘장사하는 자들’이라고 내쫓으십니다. 이렇게 교회에 각자의 유익을 감춘 채 기도하는 집, 주님의 집에 나의 유익, 나의 복을 구하며 기복으로 오는 발걸음이 강도의 발걸음이며, 하나님의 자녀보다 세상의 자녀로 키우며 주의 일꾼이 아닌 돈과 성공의 일꾼으로 가족들을 부추기는 것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장사하는 네가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문자적으로 이곳에서 병원 홍보를 한 것도 아니고, 물건을 판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승승장구의 정점에서 거식증에 알코올 중독의 아내를 만나 외도까지 정점을 찍어준 가해자 때문에 피해자로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절대 장사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혼당하지 않으려고 당시 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같다고 아내에게 말했던 것처럼 끈질기게 제게 붙어서 이혼하지 않으려는 아내가 본문에 장사하는 자들처럼 저를 사기 위해 공동체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의 시험도 전국 1등이었고, 개업도 하자마자 폭발적으로 환자가 오며 실패를 몰랐던 제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결혼 직후부터 끊임없이 깨닫게 해준 아내가 거식증이라는 것을 신혼 초에 알게 되고 정신병원에 입원도 시키고, 유명한 정신과 선후배의 인맥을 동원해 치료를 했는데 기적처럼 아들을 낳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집의 모양을 갖출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 나서 술에 취한 채로 병원 일, 집안일을 하며 술을 감추기 시작하는 아내로 인해 형사처럼 술을 찾아내 아내 머리에 붓고, 집 안에 술병을 던지며 온 집안에는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술을 덜 마시고, 표정이 밝아진 아내를 보며 다시 소망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남자들을 만나며 세상의 기쁨에 취한 것이었음을 아내의 핸드폰 문자를 통해 발견한 순간, 이제야 내쫓을 구실이 생겼다는 후련함에 오히려 ‘이제 나만의 집을 새롭게 만들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원했던 집은 어떤 집이었을까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은 벌어올 테니 아들 공부는 알아서 아내가 확실히 지켜서 내가 못다 이룬 꿈과 복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능력이 탁월해도 담당 교수에게 논문을 빼앗길 뻔하는 억울한 사건을 겪으며 이런 곳이라면 남지 않겠다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지만 못다 이룬 대학 교수로서의 업적을 아들이 대신 이어가도록 밀어주며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개업의로서의 삶을 끝내는 것이 소원이 되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며 살 수 있도록 재테크를 공부하며 돈을 불리고, 자녀를 성공시키는 정보력으로 세상에 발 빠른 아내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집이 어떤 집일까요? 바로 오늘 말씀의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러니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기 위해 아픈 아내를 주셨는데, 아내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하는데도 제가 교회에 오지 않으니 외도의 정점까지 찍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아내를 내쫓을 기회로만 여기며 오히려 이혼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왔으니 그 또한 제 속의 강도였습니다 첫 예배에서 ‘어떤 중독자라 해도 친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는 없다’는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어린 아들을 위해 이혼은 안 되겠구나’ 생각했고, ‘아프다 하여 버린다면 개돼지와 다를 게 무엇이냐’는 말씀이 저의 심장에 박혀 이혼을 접었지만, 그다음은 아내의 병 낫는 것이 목적이 되어 교회를 이용하는 두 번째 강도로 이어졌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제게 내가 쉬어야 할 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목장과 예배, 게다가 양육까지 받아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은 그저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 외도까지 하며 귀신 들린 것 같은 아내 안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딱 그때까지만 참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악물고 견디는 시간이었습니다. 양육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야기하고, 예배 때마다 삶의 목적을 이야기하셔도, ‘그래서 저 혈루증 안에 혈루는 언제 마르고! 저 속에 귀신은 언제 나와서 병이 낫는 거냐?!’ 이를 갈며 ‘어쩌다 너를 만나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억울함으로 울었습니다. 어떤 간증에도 은혜를 받기보다 ‘내가 왜 편히 쉬고 누려야 할 이 시간에 여기서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저런 죄 안 짓고 열심히 살아온 내가 저렇게 아픈 아내를 만나 여기에 앉아 있으니 상 중에 최고상을 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 외쳤습니다. 그 모든 주장은 결국 강도의 소굴을 만들지 못해 억울했던 장사하는 자의 논리와 주장이었으니 내쫓으셔야 마땅한 것은 바로 제 속의 강도들이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내 속의 강도는 무엇입니까? 나와 내가 있는 곳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1. 주일설교
김성철 장로
누가복음 19:45-20:8
  • 안식
2025-03-23 주일예배 낙심하지 않는 기도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2번 타자입니다. 2번타자는 득점이 날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하는 것이 역할인데, 병살만 당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돌아다녔더니, 전도사님께서 ‘약한소리 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실 그분이 누구실지, 그 역할을 준비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큐티엠 단행본 편집부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결혼합시다’를 준비하면서 여러 경쟁할 만한 책을 찾아봤습니다. 그 중에 한책에서 메모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메모에는 ‘헌신이 너무 힘들다, 단어 자체가 답답하다’ 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저도 헌신은 너무 어렵습니다. 요즘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 말이 저는 너무 부정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의 영적 헌신은 영적 세신이라는 말을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하는 헌신이라는 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을 친밀, 열정, 헌신이라는 삼각관계로 설명하는 예일대 교수님이 있습니다. 헌신은 단순히 헌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결정을 포함하고 있고 감정을 넘어 관계를 유지하려는 선택과 책임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결혼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출산, 양육까지도 헌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대를 생각해 보면 결혼, 양육, 출산이 너무 두렵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기성세대가 헌신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하시는 말씀 뒤에 나오는 억울한 과부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영혼구원을 위해 목숨 내놓고 울부짖는 기도를 통해 헌신을 보이고 배우는 저희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 내놓는 헌신의 기도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치지 않고 헌신하는 기도를 낙심하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낙심이라고 하는 단어의 원문은 악함으로부터 사로잡혀 피곤해지고 연약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악에 사로잡히니 소망이 없어지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낙심은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아 마음이 상한 상태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낙심하실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항상’의 의미가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 제목이 선하게 이뤄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항상 기도하라는 말은 끈질기게 기도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저와 여러분이 제자들이 낙심하실 것을 예수님이 아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당장 내 눈 앞의 현실에 낙심될 때가 많습니다. 건강의 문제, 결혼의 문제, 진로와 직장, 내 앞의 문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불의한 재판장에 비유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재판장에게 끝까지 간구해서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핵심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본문의 재판장은 유대인 지도자나 랍비가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재판장이 사람을 무시한다고 하는데, 이것만 봐도 로마 행정 재판관일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사람을 무시했기 때문에 로마에 기생하며 소송에서 돈을 받고 재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 앞에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대중들은 이미 눈치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비유를 알기 위해서는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과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말씀을 이해하기 쉽다고 합니다. 해석자에 따라 어제 본문부터 오늘 본문까지를 한 덩어리로 생각합니다. 어제 2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라는 말은 우리 안에, 가운데, 무리 앞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를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대적자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당한 것보다 더 큰 복수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할아버지는 친일을 하신 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초기에 반민족 행위자를 어떻게 기준을 나눴냐면, 군수 급 이상, 소위 이상을 반민족 행위자로 나눴습니다. 만주에서 높은 관직에 계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나라를 등지시고 배반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희 외가는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게 어릴 때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선교생활을 하던 선교사님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시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 인이 되셨습니다. 외증조부께서는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고충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이 제 뿌리라고 생각하기에 예수 믿게 해주시고 목사 만들어 주신 조상들이 저를 위해 수고해 주신 최고의 부모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구속사를 깨닫기 전에 가장 큰 슬픔은 신실한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아버지였습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만주에서 태어나셨지만 떠돌이처럼 내려와서 고아처럼 살아오신 아버지는 피해의식이 있으셨고, 그 피해의식이 스스로를 불의한 재판장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고3 때, 이렇게 가족을 힘들게 한다면 원수를 스스로 갚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한 번은 현관 앞에서 격렬한 소리를 듣고 공구함에서 망치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아랫집에서 올라오신 이웃께서 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시며 눈물로 호소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기도할 수 없는 저를 위해 찾아오셔서 말려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원한을 스스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싸움이 끝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의한 재판장처럼 오해한 나날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들교회에서 양육받으며 자라온 저와 비슷한 환경의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해석받았기에 저와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청년을 보며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기도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제 집에서 작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아들과 말에 꼬리를 모는 싸움을 보며 왜 저들이 내게 설교거리를 주려고 싸우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지켜봤습니다. 예전같았으면 설교 준비를 해야 된다는 생각과 행동을 했을텐데 이제는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싶던 아버지였겠지만 닮아있고, 아버지와 다르고 싶었지만 닮은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 모르고 갈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청소년들이 부모에 대한 원망을 쏟지만, 그 후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1. 주일설교
송민창 목사님
누가복음 18:1-8
  • 안식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눅 15:25-32)
2025-03-16 주일예배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번 타자입니다. 1번 타자의 덕목이 빠른 발인데, 그러면 체중이 적게 나가야하잖아요? 제가 일주일 사이에 5kg가 빠졌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양육 시기가 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양육을 준비하실텐데요, 제가 얼마나 집탕이며 돌탕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보게 될 말씀은 집에 있는 탕자 부분에 속합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맏아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 생각, 상대방의 생각이 다르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마음을 묵상해보겠습니다. 1. 거부해도 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맞아들이 성실하게 일하고 집에 들어가고 있는데, 풍악소리, 춤 추는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의아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있지만 좋은 소리 한 번 해주는 분이 아닌데 잔치 소리가 들려 의아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을 불러 물었더니 동생이 돌아왔고 잔치를 개설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허랑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둘째가 무엇이 기쁘냐 하며 분노합니다. 살찐 송아지까지 잡고 대대적 잔치를 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못마땅해 하며 생색과 피해의식으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 마음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나만 옳다는 생각이 강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거절하기 일수입니다. 맏아들은 이 상황, 아버지의 상과 징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만 옳고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가 맞다고 나아간 것이고 아들 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마음을 모르니 직접 알아보고 물으면 될 일을 종에게 묻습니다. 그런 맏아들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목사님 가족 나눔 저희 아버지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서 먹는 것에서는 염려가 많으십니다. 제가 배가 불러도 과자를 권하십니다. 이러니 불편합니다. 아들을 향한 배려와 관심은 알지만 불편합니다. 이것밖에 해주지 못하니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아버지도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희 부자는 귀엽기라도 합니다. 맏아들은 꼬일대로 꼬여 잔치를 거부하고 집 밖에서 서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말씀, 공동체에 대하여 거부합니다. 내 생각이 강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강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를 거부합니다. 자녀가 속을 썩이면 내 탓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난 삶을 리셋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자가 힘들어 이혼으로 거부하고 지치고 힘들어 쉬고싶다는 자녀를 학원, 과외를 보내며 거부합니다.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분노로 거부합니다. 저도 상한 갈대가 되어서 억울한 일 앞에 강하게 거부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열심히 사역을 했었고 주변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결혼 후에도 그 삶을 유지했습니다. 인정받아야 하는 교회 일과 명예가 우선이었습니다. 결혼을 했음에도 가정보다 밖에서의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썼습니다. 교회와 학교가 먼저였고, 상대방에게 아무 관심 없는 것처럼 했으면서 한 편으로는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체휼해주지 못했습니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힘들어할 때 큐티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업으로 힘들어하시는 장인어른과 유방암으로 고생하시는 장모님을 무시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기 위해 이런 것은 사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열심히 나아갈수록 상대방은 지치고 메말라가고 있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 아내의 휴대폰의 메세지를 보고 외도하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분노와 절망, 배신감으로 아내를 이전보다 더 달달 볶으며 코너로 몰았고 목을 죄었습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충성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렸는데, 염소 새끼는 커녕 외도라니요.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사역했던 교회, 학교 동기들도 옳고 그름의 세속 가치관으로 판단하여 상대방이 나쁜 사람, 제가 피해자라며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은 말이 많아집니다. 나만 피해자이고 억울하다며 이유를 댑니다. 여기저기 말해서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알리고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노상에서 순대를 파는 아줌마, 택시 기사님에게도 알렸습니다. 엘리트는 오픈이 어렵다고 하셨던 말씀처럼 정작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지만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연애 4년, 결혼 4년 총 8년의 시간을 보낸 여자는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권했지만 이혼으로 그것을 끊었습니다. 인생 가운데 8년의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분하기만 한 시간을 보내며 내게 닥친 사건을 해석하려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거부했습니다. 저처럼 분노하고 있던 맏아들이 문 밖에서 씩씩댈 때 아버지가 다가옵니다.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분노하여 집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 맏아들에게 간 아버지가 기뻐하자고, 허물을 용서하고 잔치에 참여하여 가족 관계를 회복하자고 권유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나의 기쁨에 함께하자고 권하십니다. 내게 임한 사건이 해석되지 않아 하나님을 피하고 숨으려 하지만 말씀으로, 사건으로 찾아오셔서 집에 들어가 즐기자고 권하십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을 위한 잔치일까요? 형에게 민망하니 들어오라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생각에 갇혀 지옥에 사는 맏아들을 위해 권하시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한 일이 발생할 때 회피하고 스스로 지옥을 사는 아들에게 함께 들어가자고 아버지는 권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집, 예배의 자리에 들어가자고 권합니다. 이 사건이 해석되지 않아 날마다 분노하며 원망만 늘어놓았고 꿈 속에서까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당시 학생이었지만 제대로 다닐 수 없어 막학기를 휴학했습니다. 다시 복학한 자리에서 권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담임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수련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께서 고난을 나누시며 고난 중에서 말씀 묵상을 놓지 않고 말씀으로 삶을 해석하자고 권하셨습니다. 구속사는 몰랐지만 저 분은 진짜다라는 생각을 했고, 큐티인을 묵상하고 사역하는 곳마다 큐티인을 권했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아 제대로 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날 목사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권함이었습니다. 고난이 축복인지, 상처가 별이 되는지, 그는 나보다 옳은지 잘 알지 못했지만 큐티인으로 묵상하고 사역하는 교회에서 나눴습니다. 분노하여 억지로 학교만 겨우 다니며 하나님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제게 담임목사님을 보내셔서 권하시고 책을 읽게 하셨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고 인정할 수 없는 일에 분노에 차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굴로 회피하고 이혼과 자살로 분노를 표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배, 목장, 큐티를 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망의 사건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참 기쁨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제가 말씀을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권하시는 사건입니다. 적용하기 이해되지 않고 분하고 억울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목장에서 잘 나누고 있습니까? 배와 목장과 큐티를 통해 하나님께서 권유하고 계심이 느껴지십니까? 2. 구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마음이 상해 빈정대며 하는 말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니 아버지의 ‘이 아들’ 이러면서 돌아온 것으로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친구들과 함께 즐길 염소 하나 얻지 못했는데,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한 맏아들에게 적절한 보상,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에게는 벌이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맏아들에게는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에게는 가정 경제를 책임진 공로, 가정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 공로,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기며 종처럼 일하며 참았던 공로가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종으로 섬기면 자기가 한 일이 공로가 됩니다. 그러니 둘째를 위해 개설한 잔치는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아버지는 비효율적인 일에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지만 아버지는 낭비합니다. 왜 이런 낭비를 할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쓸데 없는 일을 하는 이유는 구원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기고 유산을 달라 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했고, 이것은 동네 사람들이 둘째를 혼내고 죽은 사람처럼 취급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돈을 나가서 탕진했습니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마구 돈을 썼습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습니다. 곁에 두고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같이 있으면 또 피해를 입힐 사람, 죄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죄인이 돌아옴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혀도 멀쩡히 돌아온 것이면 족하다고 합니다. 집에 빚이 쌓이고 채무 딱지가 붙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돌아온 것이면 족하다며 송아지를 잡습니다. 엄청난 피해, 손해를 겪고도 중요한 가치는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싫고 무시해서 떠났고 경제적 피해를 끼쳤어도 아들이 돌아옴으로 인해 살찐 송아지를 잡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와 예배의 자리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아들이든 돌아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리시며 찾아와 권하시며 시간의 손해를 보십니다. 우리가 거절하면 당했다는 모멸감이 있지만 그것 또한 감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큰 돈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수하신 피해의 절정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손해입니다. 사망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은혜 받고 말씀이 들려도 돌아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구원 때문에 하나님은 낭비를 하십니다. 목숨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돌아온 우리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목사님 전처 외도 사건 전처의 외도를 알았을 때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하여 울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고 배신감에 아팠습니다. 오직 피해받은 것에만 보상받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선택한 것이 이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며 이루신 가정을 저는 제 자존심 때문에, 상처 때문에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목숨까지 내어주셨지만 저는 그 은혜를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손해보심처럼 교회와 목사님도 저 때문에 손해를 보셨습니다. 저는 이력서나 사역자 면접을 볼 때, 이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속이고 들어왔으니 얼마나 당황하셨겠고 목사님이 고민하셨을까 생각이 됩니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이력서를 내고 들어왔지만 분위기를 보니 이게 아니라 마음에 부담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고싶었습니다. 이렇게 말씀 묵상하는 공동체에 붙어있지 않으면 도저히 자유함을 얻을 수 없어서 그냥 붙어있었습니다. 그래도 누가되고 싶지 않아 만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늘 눌려 있었고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엘리사가 게하시 때문에 애통해하며 이타적인 기도를 했고 그로 인해 게하시가 눈이 열려 불말, 불병거를 본 설교를 통해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교회에 피해만 입히는 사람인데 목사님께서 나를 위해 통회하시고 이타적인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구원 때문에 이런 손해를 감수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아졌고, 구속사가 조금씩 이해되었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죄인인 저 때문에 목사님, 선배 사역자들, 여러분 공동체가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마을에 가셨을 때 거부함을 당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불을 내려 멸할지 물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고 함께 다른 마을로 돌아가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만 판단하고 해석을 못 하고 있는 저를 꾸짖으시고 저를 데리고 함께 다른 마을로 굳이 돌아가시면서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목사님과 공동체의 은혜로 제가 오늘도 숨을 쉽니다. 저도 영혼 구원 위해 살찐 송아지 잡는 사역자가 되겠습니다. 적용하기
  1. 주일설교
이상진 목사님
누가복음 15:25-32
  • 안식
상한 갈대 (열하 18:20-27)
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21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하건대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27 랍사게가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아버지, 상한 갈대를 꺾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님, 누가 상한 갈대인지, 또 이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 인생이 꼭 상한 갈대입니다. 어차피 죽을 거 그냥 꺾어버리면 그만인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건강하게 잘 사는 것보다 구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을 경외하고, 의뢰하여 만사형통을 경험한 히스기야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 어마어마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우뚝 솟은 나무 같은 인생이 되고 싶지만, 현실은 상한 갈대이기에 칭찬보다는 조롱을 받습니다. 랍사게의 일장 연설을 통해서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인생은, 1. 의심에 빠질 때, 나아가 예배해야 됩니다. (20-22절) 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21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지난 주에 네가 의뢰하는 의뢰가 무엇이냐 (19절)라고 했고, 27절까지에 의뢰가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의지'해요.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원수인 안 믿는 대적 - 랍사게가 외쳐주고 있어요. 아버지 아하스로 깨어있게 하시더니, 개혁을 해도 앗수르가 쳐들어옵니다. 결국 의지할 것이 하나님 밖에 없는 것으로 하나님'만' 의지 하는 환경으로 이끄십니다. 당연히 조롱이 시작되어야죠? 지난 주 19절에 산헤립의 질문을 랍사게가 대신 전했죠. 그리고 이어집니다. 네가 싸울만한 전략도 짰나본데, 그건 '입만 산' 행동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번에는 누굴 믿고 덤비냐 묻습니다. 그러더니 히스기야 대신 답까지 해주는데, 애굽의 힘을 기대했냐고 물어봅니다. 당시 유다의 뒷배였습니다. 작은 나라들을 앞세워서 앗수르가 애굽까지 공격해 오는 것을 막으려 그렇게 외교를 해뒀습니다. 작은 나라들 뒤에서 조종하여 앗수르를 반대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앗수르가 침략해오자 입을 싹 씻고, 애굽에 쳐박혀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 산헤립을 애굽을 놓고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합니다. 지팡이 중에서도 상한 갈대로 지어졌다고합니다.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인것도 기막힌데, 그 갈대가 상했대요.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뒤에서 배경이 되어줄 것 같았던 애굽이 딱 상한 갈대 지팡이입니다. 그래요, 젤렌스키 트럼프 사이 협상이 광물개발과 안보를 놓고 서로 교환하려 했지만, 안보의 보증을 끝까지 트럼프는 보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때요? 전쟁 끝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불공정계약입니다. 가장 잘 사는 나라가 가장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줬습니다. 얻어낸 것은, 5천년 역사 중 어마어마한 일 같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어디든 집적거린다는 말이 있듯, 주인없이 고아같이 두어진 나라였습니다. 우리 역사 중에 전쟁이 얼마나 많았어요? 안팎에서 전쟁이 끊임 없었는데, 미국이 방위조약을 해주니 70년간 전쟁이 없었죠?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전세계 우방국가들 전부에 주둔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그때도 미국이 절대 안해주려고 했었는데 - 미국이 우리를 뭐 때문에 사랑해줬겠어요? 이승만은 계속 휴전하자고하고 거듭 협상을 원하니 제거하려고 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못사니까 원조와, 한미상호방위조약 두 개만 제발 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재벌이 뒷배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우크라이나는 그래서 해주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여서, 그래도 70년간 약속을 지켜줘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말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라, 그 전까지는 중국에 반복적으로 조공을 바쳤었죠. 그러니 여기서 앗수르냐, 애굽이냐, 강대국이냐하겠지만, 그들입장에서 우리는 조공 나오는 나라일 뿐입니다. 유다는 애굽을 향해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죠. 몸에 벤 애굽의 습성을 없애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이 있어요. 400년이나 노예생활했음에도, 계속 그리워해요. 유다가 이럴 때 애굽에 다시 달라붙을 때, 정말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애굽은 연애고수처럼 밀당을 기가막히게 합니다. 잡힐 듯 기대하게 하지만, 절대 잡히지 않고 도와줄 듯 하지만 절대 안 도와줍니다. 누가 애굽을 상한 갈대로 만듭니까? 바로 유다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다의 믿음이 상한 갈대처럼 꺾이고 부서져내리니까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뢰한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라니! 속았어!가 아닙니다. 진실은, 내가 상한 갈대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밑동 잘린 나무가 ,상한 갈대를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보면 표가 안나요. 도리어 하늘하늘하니 멀리서보면 멋지게 보이기도 합니다. 여자들이 멍하니 4차원 표정을 하고있으면 도리어 남자들이 호기심을 갖죠? 막상 가까이가서 같이 살아보면, 다 상한 갈대입니다. 정치천재, 심리천재 앗수르 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합니다(22절) 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얼마나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의지했는지 알아요. 대단한 종교개혁 했음도 알아요. 유다 전국에서 산당과 제단을 제거함을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다신론자인 그는 히스기야의 신앙을 보고, 하나님도 히스기야를 돕지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상황이 어렵지 않다면 이런 말 타격 안 받겠죠, 그러나 히스기야는 불리한 상황으로 급변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잖아 봐!" 라는 말 들으면 얼마나 의심됩니까? 눈에 보이는 애굽도 나를 안 돕는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의심하지 않겠어요? 이때 어떡할까요? 놀랍게도 앗수르 왕이 힌트를 줍니다. 22절에,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라고 했잖아요?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하라 했으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병주고 약줍니다. 히스기야를 의심에 빠뜨립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이런 의심이 생기죠. 내가 주일에 공부하고 교회 안갔으면... 내가 목장안가고 2잡을 뛰었으면... 계속 가정하게됩니다. 게다가 수 많은 산당을 제거했는데, 거기서 기생하며 예배드리던 기득권자들이 히스기야의 불만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랍사게의 말이 그들 사이 이간질이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단의 꾀입니다. 이것이 고난 앞에서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에 빠뜨리게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염려하겠어요? 자기가 하나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염려를 하는 거죠. 이 의심의 치료제는 믿음밖에 없어요. 근데 혼자서 지킬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불러서 함께 묶어주신 교회로 나아가는 거예요. 지체들과 함께 모여서 뭉쳐서 예배하는 거예요. 날마다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 영적으로 맨날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수십 년 하는데 수십 년이 지나도 용서를 안 하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영적이어서 예배만 드립니다. 새벽 기도만 하고, 금식만 하고, 적용은 아무것도 없는 삶. 이게 산당예배입니다. 1. 자꾸 의지하고 싶은 나의 애굽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2. 의지하는 지팡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3. 주일, 수요, 목장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갑니까? [이단 교리를 신봉하며 판단력을 상실한 보호자들에게 고지의 의무를 위반한 채 수술하며 수혈한 일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는 의사 선생님의 칼럼] 2. 절망에 빠질 때,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23-25절)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랍사게는 산헤립 왕의 말로, 의심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고 뒤이어 조롱을 이어갑니다. 네게 말 2천마리는 조건부입니다. 내기하자는 것입니다. 네게 말 탈 사람 있으면 말을 2천마리나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급장교 한 사람도 너희는 못 물리칠걸? 하면서 조롱합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8:20-27
  • 안식
네 의뢰가 무엇이냐? (열하 18:9-19)
9 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 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13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15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6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17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그들이 올라가서 윗못 수도 곁 곧 세탁자의 밭에 있는 큰 길에 이르러 서니라 18 그들이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로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가니 19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네가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아버지 하나님, 오늘, 네 의뢰가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히스기야에게 네 의뢰는 무엇인지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919년 3월 1일에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그 무서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킨 지 106주년을 맞습니다. 이건 5천 년 역사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인데요. 그 당시 국민 중에 크리스천이 불과 1.6%에 지나지 않는 이런 소수였음에도 그 민족대표 33명 중에 크리스천이 16명이나 된 거예요. 그리고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역의 분포도를 보면 75%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실이에요. 그리고 광복은 그 후에 26년 뒤인 1945년에 이루어지니까 사람들은 그 해의 3.1 만세 운동이 실패한 운동이었다고들 말하죠. 그러니까 이 눈앞에 바라보는 거 가지고 성공, 실패 이러시면 안 돼요. 그것은 성공한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의미를 성경적 관점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주신 그 고난도, 축복도 해석할 수가 없어요. 조선왕조에서 그 절대 전제주의 이런, 그것도 500년. 그전에 고려부터 그런 나라에서 갑자기 자유민주주의를 감당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요. 하나님은 붕당 정치 계급의 타파를 위해서 일제의 압제를 일정 기간 허락하셔야만 했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류의 역사가 영적 전쟁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영적 전쟁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어요.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던 히스기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에게 닥친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의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Think를 해보겠습니다. 1. 내게 유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9-13) 9 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 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침략을 받은 사건이 다시한번 기록되는데, 그 기준 시점이 호세아 7년이아니라, 히스기야 4년입니다. 이번에는 히스기야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뜻이겠죠. 사마리아 함락 사건을 히스기야 상황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믿음'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 이것이 구속사입니다. 아하스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아빠 아하스는 너무 악합니다. 앗수르 왕에게는 제가 대왕님 종이고 아들입니다 라고 굽신거리나, 자신들(히스기야)의 형제들을 불에 바치기까지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델인 북이스라엘은 어떻게 됐나요? 정성껏 조공을 바치다가 잔인한 최후를 맞았죠. 성이 함락되고 사람들은 다 사로잡혀 저 먼 땅에 끌려감을 다시 반복합니다. 세상에 정성껏 종노릇(사장, 상사)하면서도 부하/아들은 죽이는 우리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 덕에 믿음으로 자란 히스기야는 생각했겠죠.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답이 12절입니다.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이사야 선지자가 알려줬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이유는 하나님 명령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았다면, 답대로 해야겠죠? 히스기야는 기다리다가 아버지 아하스가 죽자마자 강력한 종교개혁을 합니다. 그에겐 플랜B가 없어요. 그의 계획에 모든 미래가 달려있었고, 반대세력이 강력했겠지만 하나님만 오로지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형통하게 되었어요. 나라 안팎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봉사 잘하고, 큐티 잘하고, 예수 잘 믿었더니 모든 게 형통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어떡하게 되나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간통죄를 지은 때가 언제였나요? 어디로가던지 승리하던 때였습니다. 어디로 가던지 승리하기에, 쓸데없이 싸우러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낀 때였습니다. 내가 직접 나가지 않아도 할 때 - 영적으로 정점에 있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 때가, 가장 수치이자 가장 못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악한 왕 아하스가 아니고, 바알 숭배자 아합이 아니라, 바로 다윗입니다. 사람은 환경만 주어지면 누구든지 무너집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구속사는 거꾸로 생각해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교만한 존재니까요! 맹자는 이 교만한 인간을 두고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맹자는 사람이 착하니 덕과 인으로 다스려야하고, 순자는 사람이 악하니 교화를 위해 법치주의로 다스려야한다고 합니다. 기독교 내 죄인의 의미가 아니고 철저히 인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행위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이 세상 모든 철학가들은 얘기하죠. 문제의 탓을 항상 '환경'에서 찾습니다. 사회가, 인간이, 법이 틀렸다고 매번 고치기 바쁩니다. 날마다 누군가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지 않죠? 자기가 답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사상에 끌려요! 뭔가 깨어있어보이고, 개념있어보이고, 근사해보이는 것 - 우리가 쫓는 본성에 따라 정하게 됩니다. 그 상황 자체를 그런식으로 의뢰하고 믿습니다. 히스기야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던지 형통한데, 어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13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여기 제 14년은 히스기야 단독통치 기간입니다. 어디로 가던지 형통하던 축복이 최고조인 때에, 앗수르가 쳐들어오네요.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죽고, 잠시 약화되었을 때에 히스기야는 두로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죠. 요즘 젤렌스키가 곤경에 처하니 유럽들이 한 마음이 되어 젤렌스키 편을 들죠. 정상회담에서 아주 트럼프에게 야단을 맞았죠? 그러나 트럼프도 강하죠. 이 새 왕인 산헤립이 '이것들이?'하며 내부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남하합니다. 당시 앗수르 기록을 보면, 이 때 점령한 유다 성읍이 46채나 된다고합니다. 이미 히스기야가 블레셋을 점령했던 성읍도 다 빼앗았을 것입니다. 14년간 산당도 폐하고, 우상도 다 찍어버리고, 말씀대로 적용도 잘 했는데, 앗수르가 감히 네가 나를 배반해?하며 쳐들어옵니다. 다들 예수님을 믿게되면 나름 집안에서 종교개혁을 해대죠. 믿지않는 친지들이 다들 잘했다고 칭찬하나요? 이 몹쓸 놈!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죠. 형통의 때가 이렇게 끝납니다. 너무 억울해요! 내가 오직 하나님께만 연합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길래, 어찌 이런일이! 하면서 주제가를 부르게 됩니다. 제가 그랬죠, 교회반주 10년하고, 소녀가장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였습니다. 그러나 이건 내 상황이 내 노력,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유리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고 얘기하며, 하나님이 갑자기 그걸 다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게 유리한 상황 자체를 더욱 더 의뢰하는 태도 - 바로 이것이 기복/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의 끝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세요. 그러니 하나님은 택자를, 이 교만을, 낭떨어지 바로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세웁니다. 무엇으로요? "갑작스러운 상황"이요. 갑자기 어려운 상황, 고난을 통해서 이 반역의 틀에서 멈춰세우십니다. 우리가 의뢰해야 할 것은 내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고 주님이 외쳐주십니다. 네가 네 재산을 의뢰하냐? 네 좋은 남편을 의뢰하냐? 네 재산, 네 유리한 상황이 내게 의뢰할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해주십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낙심하면 안되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살피심, 보호하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타락할 것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이 더욱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세우심을 알아야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의뢰할 대상을 '잘'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1.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내게 유리합니까, 불리합니까? 2. 그래서 너무 우쭐합니까, 너무 낙심합니까? 3. 하나님이 나를 교만의 낭떠러지 앞에서 멈춰 세우신 사건은 무엇입니까? 2. 내 힘도 아닙니다. (14-17) 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8:9-19
  • 안식
2025 0223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열왕기하 18:1-8)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주님, 어떻게 살았든지 어디로 가든 형통하였더라라는 삶으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오늘 어떻게하면 형통할 수 있는지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개혁과 형통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혁에는 보통 많은 반대와 저항이 따라오기에 개혁자들은 고난을 통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도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나서 여러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이 승리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도 유다 역사상 가장 과감한 종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오랜 관습과 전통을 타파하는 일이라 반발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다’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개혁을 하면서도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음의 어머니가 중요합니다. (1-3절)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북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3년이면, 망하기 6년 전입니다. 당시 호세아에 대한 앗수르의 괴롭힘이 극에 달했던 때입니다. 이미 앗수르에 멸망당했고, 가는 곳 마다 앗세라의 제단이 설치되었고, 유다 아하스왕은 그 제단을 가져왔었죠. 히스기야는 이런 상황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11살에 공동 통치자로 즉위하여 이제 통치 수업을 받습니다. 히스기야의 어머니 이름은 아비인데요. 아비야를 줄인 이름 ‘여호와는 내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아버지 ‘스가리야’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는 뜻의 제사장이고, 믿는 집안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히스기야 아버지가 누구죠? 남북 이스라엘을 통틀어서 정말 가장 악을 행한 아하스잖아요. 그런데 이 아하스가 그래도 신 결혼을 했던 모양이에요. 자기 선택이 아니죠.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의 선택이었습니다. 요담이 상처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을 신결혼시켰습니다. 어떻게 가장 악한 왕 밑에서 가장 성군이 나올 수 있죠?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아버지가 악하니까" 훈련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아하스가 얼마나 악한지 다시 상기시켜드립니다. 자기 열심이 많은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자기 성취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녀쯤은 또 낳아도 되기 때문에, 이 사람은 기복을 위한 것은 못할 것이 없어요. 그 자녀가 우상이니까 자녀를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면 자기의 권자가, 가문이, 집안이 지켜질 것이라는 이 미신 같은 여호와도 믿고, 자녀'는' 죽인 거예요. 이것이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자식을 위한 우상으로 다른 자식을 죽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인격체로 알지 않고 또 낳으면 되는 하나의 One of Them으로 인식합니다. 유물론으로 알기에 이렇게 자식을 죽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을 우상으로 놓는 사람들은 다른 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한국의 엄마들은 들키지만 않으면 자식이 서울대 간다면 살인이라도 할 엄마들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 없으면 그 말이 진짜 맞아요. 지금 시대에 적용을 해보면은요. 그러니까 이런 게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적용을 해야 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내가 바쁘니까 앞으로 나올 우리 집안의 행복을 위해, 이 자녀를 위해서 내가 지금 공부를 해둬야 되니까, 지금은 마음대로 자녀를 낙태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죠? 앞으로 낳을 자녀를 위해서 지금 있는 자녀는 죽여도 되는 거라. 이렇게 항상 성경은 그 시절만 읽는 게 아니에요. 이런 아버지는 약한 아들은 가차 없이 버리고 차별하고, 센 놈만 살아남으라고 온몸으로 세상 가치관을 보이는 거예요. 정말 약한 수정란은 버리고 강해 보이는 배아만 착상시키는 것도 좀 이제 마찬가지 아닐까요? 몰렉 우상을 섬기며 자녀를 위한다고 자녀를 죽이는 게 그게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그런데 이 사람이 최고권자 왕이니까 말릴 자가 없는 거예요. 이 아하스는요. 그 위에 요담밑에서 눈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을 거예요. 근데 히스기야는 이런 무섭고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자랄 수도 있었는데요. 이 아버지를 분별하고 눈물 흘려 기도한 어머니 덕분에 고난의 인생에서 눈물 흘려 같이 기도했기 때문에 아버지에대한 이 상처와 원망과 슬픔 속에 빠져 있지 않고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가 말아먹은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아들로 준비된 겁니다. 저는 이런 아들이 남한 뿐만아니라 북한에서도 한 명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3대가 되도록 한 명이 안나왔습니다. 저 또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30대에 갑자기 과부가 된 것은 불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환경에 매몰되지않고 남편이 간 그날부터 지금까지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과부가 된 제 나이에도 아직도 결혼 안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전 벌써 과부가 되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복음을 마음대로 전할 수가 있는 것자체로도 너무 기뻐서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주를 위해 살겠다고 그때 '확실히' 기도했기 때문에 고난이 축복이라 다시한 번 얘기합니다. 인생이 굉장히 짧기 때문입니다. 밑동 짤린 나무같은 인생입니다. 벌써 35-6년이 지났네요. 살아온 인생보다도 더 지나버렸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너무 기가막힌 인생을 살면, 이런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남 보기엔 대단해보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엔 목적이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아하스 그 남편 앞에서는 입도 못 벌리던 어머니 아비는 자기 남편 아하스는 변화시키지 못했을지라도 그 눈물로 부끄러운 구원은 얻었기에 그 아하스가 아달랴도 못 올라가는 마태복음에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그 아픔의 눈물을 보며 아들은 성군으로 키워졌지만, 그 손자 므낫세는 전대미문의 악한 길로 갔으나 나중에 회개하여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렇게, 그래도 남편, 아들, 손자까지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봅니다. 한 사람 어머니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 해석과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열왕기 기자가, 남북 왕들을 공평히 설명하고 있지만, 북에는 9개의 쿠테타가 일어나서 북에 언급됩니다. 아하스가 그렇게 잔인하고 형편없어도 예수씨는 맞다고, 남유다로부터 오는 것을 확실히 얘기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모계만 확실하면 믿음의 가정으로 친다고하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해야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는 뜻이고, 에스겔과 참 비슷하네요. 히스기야는 개혁을 할 수 있는 아들로 준비가 되어졌어요. 가장 큰 비결이 아버지의 악함이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악한 부친 밑에서 성군이 나오고, 성군 히스기야 밑에서 가장 또 악한 왕 므낫세가 나오는 이 구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여전한 믿음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군 밑에 성군, 악한 왕 밑에 악한 왕도 나오는 네 가지 모델이 골고루 존재하긴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믿음에 있어서 고정관념을 버려야 돼요. 오직 믿음만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여튼 엄마 한 사람이 중심 잡고 해석해 주고가니까, 이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가장 불세출의 지도자가 나왔습니다. 1. 여러분의 모델은 이 네 가지 중에서 무엇입니까? 성군 X 폭군 2. 악한 부모 밑에서 가장 선한 자녀가 나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3. 신결혼은 필수라는데 얼마나 동의합니까? 나는 어떤 엄마입니까? 어떤 아내입니까? [독일 31살 아이엄마가 7살 딸 납치를 한 범인을 살해한 이야기] 2. 뿌리 깊은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4절)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그가'는 강조어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히스기야고,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 주목해서 보셨답니다. 드디어! 그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솔로몬 이후 250년 이후에 드디어 산당을 제거하는 왕이 나왔습니다. 징그럽도록 붙어있던 문구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여'를 떼는 왕이 나옵니다. 예수도 믿고,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던 악의 평범성에서 드디어 "아니야!"라고 하는 왕이 나왔습니다. 바알, 아세라 목상까지 다 찢었지만 산당도 찍고, 주목할만한 것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십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8:1-8
  • 안식
2025 0216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열하 17:29-41)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34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35 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36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37 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며 38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39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40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41 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 아버지, 여호와만을 경외하기를 원하지만 참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도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에 ‘이중사고(double think)’라는 개념이 나오는데요. 완전히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믿는 거를 말하는데요. 예를 들면은,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속박이다’, ‘무지는 힘이다.’ 소설 속에서 이중사고는 전체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수단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도록 쇄뇌 시켜서 통치하기 쉬운 분열된 정신 상태를 만들어내는 거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에도 이런 이중사고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가치도 신봉하고, 사망을 따르면서도 야망을 쫓고...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는 않으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랬어요. 앗수르 각지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사람들인데요. 그들은 자기의 신을 섬기면서 여호와도 ̇ 경외했어요. 요새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고, 아주 포용적인 것처럼 보이죠. 아주 깨어 있는 시민의 태도처럼 보여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뒤죽박죽 신앙에 대해서 단호하게 “NO!”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이중사고, 이중신앙은 통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1. 자기숭배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29-33절)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금송아지 제사드리다가 얼떨결에 여호와를 가르치게 된 제사장 기억하시죠?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는 앗수르 사람들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척을 했겠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는 짝퉁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가 아니라 '그러나'의 29절로 시작합니다. 각기 신상을 만들었고, 신상이름도 제각각입니다. ‘숙곳브놋’은 암탉이라는 뜻이고, ‘네르갈’은 수탉, ‘아시마’는 털이 벗겨진 수탉, ‘닙하스’는 개,‘다르닥’은 당나귀,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은 ‘몰렉 우상’ 듣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잖아요. 암닭, 수탉, 당나귀 ...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동물을 우상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복우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신주단지 모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 신들을 모셔와서 마음껏 만들어 섬길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 사마리아 땅에 갖춰져 있었던 거예요. 무엇이죠? ‘여러 산당들’이에요. 어떤 산당입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은 여러 산당입니다. 그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포로로 잡혀가고 이방인들이 차지합니다. 그 곳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사마리아'로 기억되고 맙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남긴 최고의 유물이 뭐겠어요? 산당이에요. 이 산당은 어디서부터냐면 솔로몬때에서부터예요. 그러니 북이스라엘도 솔로몬에게 배웠습니다. 기복적인 우상 숭배의 센터인 산당이, 그들이 남긴 문화유적이 됩니다. 여로보암의 길에서 돌이키지않은 기막힌 결론입니다. 하나의 악은, 또다른 악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이 가장 무섭다고 했는데, 결국 사자의 습격을 당했죠. 북이스라엘이 17:6 한절로 망해버렸죠? 왜 망했는지를 41절까지 계속 설명하는데, 한 마디로 "여호와를 경외하지않았다" 입니다. 하나님은 식상한 내용같아도 계속 반복해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식상해도 본문이 그렇게 말하니 지겨워도 듣길바랍니다. 32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들이 "또" 경외했대요. 각기 자기 우상 섬길 건 그대로 섬기면서도, 또 더해서 여호와를 섬깁니다. 하나님을 그 땅 신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말하면 어릴 때부터 복음을 들어뒀는데, 복음 하나 추가한 셈입니다. 자기 신도 섬기고 이 땅의 신도 섬기니 든든하고 행복했던 모양입니다. '구'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신'사마리아인들이 자기중에서 사람을 택해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자기'중에서 택하여 제사장 삼았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자기를 위하여 - 자기 모두로부터 제사장 삼았다고합니다.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이 아니라,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면 다 데려다가 제사장 세웁니다. 이것은 여러보암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제사장이 없으니 아무나 세워뒀어요. 그 사람들이 세상적이니까 금송아지 섬겼었죠. 다 악한것도 보고 배우는 법입니다. 제사장 만든 게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원래부터 각기 자기 신을 섬겼다가, 자기 행복이 깨어지는 사건이 왔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신 - 그 땅신을 섬깁니다. 누구든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하는 것입니다. 처음도/중간도/마지막까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가 무슨 우상을 만들든, 결국 우리가 섬기는 것은 - 자기 숭배입니다. 우상숭배의 끝은 그 목적이 자기입니다. 자녀가 공부 잘하면, 좋은 대학가면, 성공했으면 좋겠죠? 게다가 예수까지 잘 믿으면 좋겠죠? 그런데, 이게 누구를 위함입니까? "자기"입니다. 우리는 이타적일 수가 없는 존재예요. 인간은 사랑을 할 수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자기애(自己愛)는 우리의 기본값입니다.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절망하며 우울한 사람은 자기애가 없을까요? 아니에요! 자기애가 과할수록 우울과 좌절에 빠지기가 쉬운 거예요. 우리 존재의 최종 목적이 자기 자신인 것이 바로 아담에게 물려받은 원죄인 거예요. 이것이 자기숭배예요. 드러난 자기숭배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자기숭배도 많습니다. 교양 있고, 착한 사람은 굉장히 이타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래서 착한 게 악한 거예요. 드러나질 않으니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의 중심에도 ‘나’라는 우상이 있어요. 그러니까 더 무서워요. 그 속으로는 결국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착하기 때문이에요. 드러나지 않으니까 모를 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숭배하고 있다는 걸 몰라요. 몰라서 더 문제예요. 착한 게 제일 예수 믿기 어렵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함정이에요. 빠지는 줄도 모른 채 빠져 있기 때문이에요. 돈이 많고, 착하고 이러면은 함정에 빠져 있다는 걸 몰라요. 이렇게 우리 모두는 자기숭배 함정에 빠져 있어요. 심지어 사역에 헌신을 해도 자기숭배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훌륭한 사역자들이 넘어지는 일을 많이 봅니다. 별 인생이 없습니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약하고/악한 존재인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만'을 경외해야합니다. 아무리 내가 나를 숭배해도 우리 안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높이고 숭배하고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숭배의 함정에서 평생 고생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풍속’으로 번역된 [미슈파트]는 26절과 37절에서 각각 여호와의 ‘법’과 ‘법도’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자기들의 민족적 관습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도 섬김으로써 오히려 그 경외함이 우상숭배의 또 다른 형태가 되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내 고향' 신을 섬기는데 여호와도 섬기니까 그게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감정, 진영논리가 어려운 거예요. 1. 나는 어떤 신상을 만들고 있습니까? 2. 내가 인생에서 보험처럼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내 자기숭배 점수는 몇 점입니까? 105세의 김형석 교수님께서, 엊그제 강의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본인은 실제적으로 25년 일제치하에서 식민 시대를 겪었지만 해방 후 80년을 살았어도 지금처럼 힘든 때가 없었다고 얘길하십니다. 아주 동의가 됩니다. 식민지 때에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해방만 된다면...,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믿었어요.) 러시아,중국,북한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가 진보/보수가 함께가는 데, 우리나라는 그게 안된다고 합니다. 자원이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이 나라 밖에서 가져와야하는데,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잘 안됩니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은 대화를 안합니다. 정의는 인간답게 사는 길이고 자유는 양심의 자유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역사에 남겨준 교훈은 결국, 정치/경제는 '인간답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진보와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일 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잘하는 진보와 보수, 그것에 대해 반하게 된다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진영논리를 극복하고자 광주와 대구에 이렇게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가 들어가자마자 아니 어저께 광주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네요! 역사적인 ‘뭔가 반대 의견도 이렇게 표시할 수 있는 그런 집회가 열렸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 함정에 빠진 줄 모르게 다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자기숭배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제 자기 고향신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건강한 진보와 보수가 가야 되면 무슨 얘기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2. 그 함정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34-39절)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7:29-41
  • 안식
2025 0209 하나님 앞에서 (열하 17:19-28)
19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21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코로나 시대의 상징이었던 재택근무가 서서히 사라지는 분위기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계가 드러났죠? 우리 중 대부분은 나를 감시 · 감독하는 상사 앞에서라야 성실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죠? 지난 10년간, 휘문은 사무실이 없어서 다들 재택근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가 좋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우리 삶도 그래요.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주님이 늘 동행하시기에 사실 ‘재택 신앙’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이라고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게되죠?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고 숨으려 할 때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게 망하는 길인데 말이죠.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자기 죄를 보는 사람입니다. (19-22절) 19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지지난주, 오직 유다만 남았다고 했죠. 기억납니까? 그 앞에서 쫓아내셨답니다. 사실 인과응보가 좋은 시스템같죠? 인과응보만 잘 진행되어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을텐데요. 그런데 그것도 완전하지 않아요. 유다가 남았지만 그들이 잘한 게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알려줍니다. 유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했다고, 갑자기 밑줄 긋고 강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죄악으로 어떤 결과를 맞게됩니까? 괴롭게하시고, 노략꾼의 손에 넘겨지고, 쫓아내어졌다고합니다 (20절)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반면교사 삼지않고 회개하지않으니 망했다고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망하는 게 - 북이스라엘이 망함이 누구탓입니까? 그게 유다탓이라고합니다. (21-22) 주님은 사랑하는 내 새끼들이 왜 망했는지 설명하셔야만하는거에요. 21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다윗의 집에서 찢어나누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는데, 솔로몬 때의 여로보암에게 주셨던 말씀을 상기합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신하였죠. 그 중 12조각 중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며, 열상 11장 31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북이스라엘을 시작하게 한 사람이 바로 솔로몬왕이라합니다. 그의 타락때문에 나라가 둘로 찢어졌다고합니다. 그것이 여로보암 금송아지 숭배로 이어졌고, 그게 온 나라 죄로 이어졌고 마침내 쫓겨 떠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오직 유다가 남았다고 자랑할 게 없는 것입니다. 멸망을 가져온 북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탓해서도 안되는거에요. 근본적인 문제가 유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집이 이 모든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을 받았을 때, 그때 범죄한 그 원죄가 솔로몬에게 - 다윗의 집에 있고, 유다지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로보암 집에 "물어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떠났던 죄악을 -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숭배했던 그것을 회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던 불신자던, 무조건 신자가 잘못이고, 신자 중에는 믿음이 더 있는 사람이 무조건 더 잘못이라고 하는것입니다. 불신교제를 해도 데려온 사람이 무조건 잘못이랍니다. 그러니 데려와 양육받게 해야해요. 오늘 세례간증에서 목사님 딸이라도 삼위일체도 몰랐다고하죠? 기초양육, 세례, 일대일양육 전부 받아야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게 하기위해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면 항상 자기죄를 봐야합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모든 문제는 '내가 회개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아야합닌다. 다윗의 나라를 찢고 빼앗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한 회개할 것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20절, 23절에 "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쫓아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유다 땅에서 이주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는것보다 더 슬픈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제함을 받고 내쫓임받는 것이라는거에요. 하나님 심판을 당한 2명의 왕 - 사울과 솔로몬입니다. 시작은 너무 좋았는데 끝에 망했어요.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닌데 의지할 대상이 필요해서 믿다가 망했어요. 기대할 때는 잘 쓰다가, 기대할 필요가 없어지면 딱 버립니다. 오징어게임의 예시가 그래요. 16억 사람들이 보는 이유가 공감이 되니까 보겠죠. 455명을 모두 죽이고 남은 1명이 되어 456억을 받는 것. 돈 앞에서 아무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기둥처럼 끼고도는 것이, 그게 끝까지 가면 좋겠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 앗세라 우상을 끼고 도니까 처음엔 좋았지만,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가던지, 죽던지 - 두 개 밖에 없는 게 공산주의입니다. 이렇게 평등을 문자적으로 가져온 공산주의 역시 사도행전 2장에서 가져왔어요. 사람은 기대할 대상이 아닌데 기대했다가 내 기대같지않으면 죽여요. 왜죠?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에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은 장로교 목사의 딸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강신이었어요. 베드로에게 준 반석을 따 강반석으로 개명했어요. 그러다가 애들 다 맡겨놓고 재혼을 했어요. 그러다가 죽었어요. 이런 이야기 전부 빼놓고 갑자기 강반석이 항일투쟁자로 날조가 반복되었어요. 기독교핍박이 가장 심한 국가 1위 북한에서, 456번 그 한 사람의 권세를 위해 모두를 총살하죠. 오징어게임과 다를 게 없는 북한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이런 작품이 죄인끼리 우리는 너무 공감되는 것이에요. 인간은 역시나 100% 악하고 음란합니다. 그러므로 믿었다고 똑같은 신도가 아닙니다. 믿는 중에 이런 악이 있어요. 김일성 3대가 이어져도, 엄마가 선교사였어도 죄를 못봐요. 날조를 통해 항일투쟁자로 모시고 비나이다 하고 있어요. 내 죄를 인정하면 패배로 생각해요. 그러나 끝까지 듣지 않았아요.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똑같은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곧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이 됩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남과 같기 때문입니다. 역설 속에 담긴 진리입니다. 내가 아픈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픈 사람이고, 내가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지는 것이 믿음이에요. 북한 전체가 못 먹고 굶주리는데, 그 한 사람만 잘 먹고 쉬죠. 그 한 사람이 죄를 못보니까 북한 온 주민이 도탄에 빠져있어요. 그러므로, 한 사람의 위정자가 죄를 보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인간적으로 내 약함을 인정하면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겠는가. 전적 부패, 무지, 망하는 나를 살리실 분은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어제 큐티 본문에서, 주가 누가 더 사랑한다고 하세요? 죄를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를 더 사랑한다고 하시죠.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거울이에요. 우리가 거울 앞에 설 때 우리 실체가 다 드러나죠. 그런데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거기서 떠나면 여전히 더러운 채 살아야해요. 그러니 거울을 아침, 저녁으로 닦아야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죄를 보고 회개하는 사람, 돌이켜 살아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게 마음대로 안되는 거에요. 내 노력으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1. 당신 때문에 내게도 피해가 생기게 되었다”며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2. 사건이 올 때 부부, 자녀, 회사, 목장에서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까? 3. 말씀으로 내 죄가 드러날 때 더 자세히 내 죄를 보려고 합니까? 회피합니까? 목자는 그래도 목원보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잘못한 사람이어야해요! 유다의 잘못으로 다 망했다고. 믿음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죄보는 것입니다. 매번 옳고그름으로 대하지 말길 바래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어요. [청년부 목자 나눔 - 의롭게 사시는 아빠는 교회를 안나오고 사고뭉치 엄마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심. 이번에 30년간 모은 노후자금과 5억을 대출받아 코인에 탕진했다는 나눔, 회개안하는 아빠와 혼자 불편한 몸으로 엄마가 차를 끌고 목장에 가다 사고가 나심. 그 사건으로 혈기를 부렸던 청년]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23-26절) 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는데, 고향에서 쫓겨날 때 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역사를 줄줄이 읽어왔지만 역사상 종교개혁을 단행한 적이 없어요. 죄가운데 갈 때, 그 결과는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큐티를 통해 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가는 것이 얼마나 약속의 자녀가 됨인지 몰라요. 레위기 26:27 너희가 이 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7:19-28
  • 안식
2025 0202 나의 생애를 흐르는 구속사의 강 (에 4:14, 요 1:14)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나만을 위한 40년을 일했지만, 지난 2년간 아프리카에서 교직생활을 마치고 났더니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왕 의사가 될 바엔 최고의 의사가 되고자 서울대 의대를 목표했습니다. 그렇게 이루고나니 목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나면, 올인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악인과 의인에게도 공평히 햇빛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처럼 저도 공평한 기회에 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큰 어머니가 일본에서 시집을 오셨는데, 그분이 저희 집안에 복음을 전하게 되셨습니다. 큰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전라도에 오셔서 핍박을 받고 인고의 시간을 지나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셨습니다. 유일한 크리스찬이셨던 큰 어머니를 자주 찾아 뵈었는데, 남편과 자식이 죽은 고통의 시간동안 교회에 계시면서 기도하셨고, 그를 통해 온 집안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망한 인생 같지만 온 집안이 구원을 받는걸 보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찬양 드립니다. 저희 어머니는 고난 받는 대표적인 여인상입니다. 단양 출신의 인텔리셨는데, 반대로 사범대학에 입학이 좌절 되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시면서 남편의 폭력을 감당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다른 여자를 데려오시는 여성 편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일방적인 피해를 받는 여성이셨고, 5살때 트라우마는 피가 터진 엄마 머리채를 잡고 다니는 아버지의 기억입니다. 매일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를 말리는 저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처절한 인생을 사셨지만 강한 정신력과 통찰력으로 제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쓰셨고, 팔순을 앞둔 나이에 자서전을 내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완벽주의가 있으셨고, 저는 저를 어머니와 동일시 하기도 하며 암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힘든 사람들을 돕고, 의료선교를 하는 것들이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구원은 제 인생의 숙제였고, 아버지는 가해자라 불쌍하고 어머니는 피해자라 불쌍해서 두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고, 눈물이 별로 없는데, 어머니의 임종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제가 국제 사랑의 봉사단과 사랑의 병원을 설립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을 섬기는 에너지가 생긴 것은 어머니와 나를 동일시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사용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고통을 주신 분이지만 그당시에는 악 감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가해자로 일관된 삶을 사셨고, 굉장히 많은 쓴 뿌리를 유발 시키셨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에게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소년의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적 아이로 부터 숨겨진 분노들이 터지는 내적 거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가 해석이 됩니다. 상처가 별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당시 해석이 되었다면 기도하며 갔을 텐데 크리스찬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몰랐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가서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준곤 목사님입니다. 이분을 대학 1학년 때 만나게 되었는데, 갈급했던 심령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모든 것이 해석되었습니다. 이분이 민족 복음화 운동을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 믿은지 한달 만에 캠퍼스복음화에 헌신 하면서 40여년을 달려온 것 같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만나면서 제 고통의 심연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이 부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의 고통의 상처가 너무 깊었는데, 그 깊이만큼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정도로 깊었냐면, 그때 은혜를 받고 얼마 안있어 13명을 곧이어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복음화에 그때부터 제 사명으로 받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이 복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선지자적 역사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전테스팅 - 언제 비전을 던져야하고, 리더쉽을 발휘해야하는지. 그리고 영적전쟁을 위해 언제 금식하며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과점을 하겠다고 하시다 망하시는 바람에 당시 2억의 빚이 있었는데, 빚쟁이들이 어음을 쓰라고 해서 쓰게 된일로 의사가 되기전에 법정에 불려 다녔습니다. 주님을 믿었지만 해석이 되기전에 이런 고통이 오니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수 있는가? 했는데, 하나님 비가온 다음 어느날 캠퍼스 근처에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것이 호수가 된 것을 보며 너는 고통의 웅덩이를 얘기하지만 그 웅덩이가 없으면 물이 고일 수 없지 않냐고 묻는 하나님의 계셨고, 고통의 웅덩이가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부어주실 수 있는게 되고, 사명이 생기니 이제는 제가 복음을 위해 전세계를 다니고 있는데, 그 에너지가 고통의 웅덩이에 엄청난 은혜를 쏟아 부으니 생기게 된 것이 인정 되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모든 것이 해석되고 아버지상이 회복되고 주님을 민족을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염 되었습니다. 그분의 연약하심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60년대 말에 민족 복음화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한국이 믿기만 하면 세계에 으뜸을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40년 동안 그 기도제목이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선포하고 달려가는 구조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에스더가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 해석이 끝난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해석이 끝나면 헌신할 수 있고, 목숨을 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들은 우연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짜증은 감사의 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짜증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감사를 잃어버렸기에 짜증을 허락하셨고, 그를 통해 감사 할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감사의 달인들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윌리엄 캐리, 코리텐 붐, 크리소스톰입니다. 모든 것은 인생과 역사가 해석 될 때, 절대 감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세미나를 할 때마다 당신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격이 어떠하든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인사는 제 것이 아니고 전경철 교수님이 하신 것을 채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스트레스 자체가 암을 유발 시키는 요인은 아니지만 진행시키는 요인입니다. 사람에게 기대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기대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깨어지며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것이고, 그때마다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고, 치료의 대상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전하지만 '배신을 당하면 이럴 수 있는가?' 하다, '아! 사람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구나,하며 사랑의 대상이지'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생은 기대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고난을 즐기며 가는 것인데, 이것은 엄청난 상급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할때도 둘이 한줄 알았는데, 네 사람이 한 것이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 뿐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상처받은 소녀와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분노가 없는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편하니까 아내에게 소리 지르는 저를 보며 아내 한사람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경험했습니다. 내면의 아이들이 부딪히면 부부싸움을 하게됩니다. 이런 관계속에서 깨달은 것은 제안의 상처받은 아이, 부끄러운 아이, 미움받는 아이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너무 잘하는 사람도 사적 영역에서는 내적아이가 저를 지배하는 걸 보면서 이를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기도하게 되었고, 제가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 했지만 연애나 아내를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한것은 영성이고, 그다음은 성품이고 3번째가 외모이다 라고 가르치는데, 결혼하고 보니 순서가 바뀐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영성과 비전의 문제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이것이 고난임을 이해하고 나서는 결혼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깨닫고 아내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40년을 살았기에 첫 아들을 결혼시킬 때, 하나님께서 40년을 돌아보면서 언약의 훈련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려면 수술대에 올려야 하는데, 결혼이라는 수술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수술을 끝까지 견디며 부부 한 사람을 돌파하면 전 세계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과 수술이 끝날 때 까지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은 절대 상대방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입니다. 내가 변하면 다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의 아이들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치유받으면 행복이 부산물로 옵니다. 내가 행복하면 전 세계가 행복합니다. 결혼을 통해 구속사적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내면의 아우성 치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는 절대적 사랑이 아닌 조건적 사랑으로 아이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조건적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에 다들 그렇게 아이를 키웁니다. 절대적 사랑을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가해자로 바뀌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파멸로 인도하는 막강한 내적 거인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우리가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상처가 쓴뿌리가 되어 내 인격의 하나로 정착되게 할 것인가 입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자기는 피해자라 생각하지만 자기도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잘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당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쓴 뿌리가 되면 회개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이 상처가, 한이 결국 쓴뿌리가 됩니다. 치유함에 있어서 중요한 전재 조건은 내가 환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자기가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치가 된다고 봅니다. 또 중요한 것이 드러남의 은혜입니다. 내안의 감정이 드러나게 하나님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 은혜 입니다. 제가 상처가 있다보니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양보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속에 쓴 뿌리가 생깁니다. 당시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바로바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한번 수술대에 저를 올리게 됩니다. 제 연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날 수록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러내면 약재료가 되고, 숨기면 쓴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경영이라는 차원에서 온 세계를 주도하시는 하나님께 집중을 해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구속사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은밀성과 역설로 표현 됩니다. 은밀성은 거룩과 겸손과 은닉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 것이 들어가지 않은 거룩함과 겸손하게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 역설에는 팔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핍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것이 축복이고, 애통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용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은 시대의 하수구 같은 곳인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축복이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판적 고난과 섭리적 고난이 있는데, 이는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는 변화를 위한 고난과 우리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감사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땅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것이 축복입니다. 지금 현재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폭발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기위해 지금 기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주님오실 날에 추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대학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했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살아 가고 있는데, 자녀들을 키울 때, 미래가 아닌 현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먼저 추구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 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를 건 비전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두고 달려가는 것이 비전입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오게 하신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생각합니다. 연약한 저를 통해서, 제 생애를 흐른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찬양하길 원합니다.
  1. 주일설교
황성주 박사 (이롬대표, 사랑의 공동체)
에스더 4:14, 요한복음 1:14
  • 안식
2025 0126 돌이켜 떠나라 (열하 17:9-18)
9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하나님 아버지, 돌이켜 떠나라고 하십니다. 계속 우리의 주제가가 ‘돌이키고 살지니라’ ‘돌이켜 떠나라.’ 그런데 돌이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요새 뉴스에서 그린란드 이야기가 자주 나오던데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에요. 면적의 80%가 빙하라고 하는데요. 그린란드가 아주 관심이 많아서 트럼프가 사려고 하고, 덴마크는 안 팔려고 합니다. 근데 이 빙하도 녹았다 얼었다 하는데요. 나사 과학자들 조사에 따르면 빙하는 수백 년간 조금씩 녹아서 약해지다가 결국 2~3년 만에 크게 붕괴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점진적으로 녹던 것이 갑자기 무너지는 그 순간을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순간도 바로 이런 티핑 포인트예요. 오늘 본문이 그걸 분명히 보여주는데요. 이제 200년 넘게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쌓이던 악이 결국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거예요. 하나님이 이걸 자세히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이렇게 되지 말라고요. 이 악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악에서 돌이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돌이켜 떠나기위해서는, 첫째, 점차로 행하는 불의를 알아야 합니다 (9-12) 9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지난 주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12지파 중 그 반역한 북이스라엘 10지파가 모조리 앗수르로 사로잡혀 갔어요. 하나님의 백성에겐 엄청난 사건이었죠. 숱한 전쟁을 겪었고, 많은 재앙을 당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도 땅도 다 사라졌어요.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절망의 사건입니다. 도대체 어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은 7절부터 41절까지 하나님이 그 이후를 자세히 설명해놓으십니다. 판결문 선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참았던 하나님이, 미안하시기도하고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돌아오라고 애정을 갖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길게 반복하시는 말씀에 우리도 길게 반복해서 들어야합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냥 지나갈 순 없습니다. 같은 말이어도 날마다 다르게 들립니다. 북이스라엘은 산당을 세우고, 앗세라상을 세우고, 중간엔 또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죄가 많아서 '또'가 반복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가 읽기 어렵지 않도록 한 단어로 맨 앞에 두십니다.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일인데요, 어떻게 행했다고합니까? "점차로"행했다합니다. 예전 개역개정에는 '가만히'로 해석되었었는데, 안들키면 계속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의로운 일은 드러나도 하기 힘들지만, 불의한 일은 드러나지 않으면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 본성과 딱 맞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저절로, 점차로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에 바늘만했던 죄가 점차로 젓가락, 그리고 방망이만큼, 그리고 아세라상이 됩니다. 아주 점차 온도가 올라가는 물에 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언젠가 익어 죽습니다. 망할 일이 반복되면 망하는 거예요. 흥할 일이 반복되면 흥하게 돼 있어요. 사소해도 점차로 행하는 대로 양쪽의 결론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의 바늘은 간 곳이 없고, 처음부터 기둥이었던 것처럼 이 기둥이 진실이 되는 거예요. 이 과거를 생 각을 하기 싫어해요. 생각 안 해요. 그래서 본문에 ‘세우고’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산당 세우고~ 목상 세우고~ 아세라상 세웁니다. 뭘 자꾸 세우려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행복을 세우고~ 이름을 세우고~ 업적을 세우고~ 인기를 세우고~ 권력을 세우려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바벨탑을 높이높이 쌓아서 이름을 내려는 우리의 기복적인 욕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 그런 바벨탑만 높이 쌓는 이방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11절 말씀처럼 하나님 백성이 ‘이방 사람 같이’ 행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이방 사람을 따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처럼 산당을 세우고, 목상을 세우고, 그렇게 온갖 우상들을 세우고 또 세웁니다. 우상의 종이 되어서 그 앞에서 분향하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걸 그냥 가만 놔두실 수 있겠습니까? 이방 사람이 우상을 섬기면요. 이방 사람은 물리치면 그만이죠.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이방 사람 같이’ 하니까 문제예요. 하나님이 격노하십니다. 내 새끼가 잘못하는 거는 봐줄 수가 없는거예요. 그래서 이미 수도 없이 하지 말라고 돌판에도 기록하시고, 선지자를 계속 보내셔서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이 내 새끼 이스라엘이 듣지를 않아요. 듣지를 않아요. 정말 어떻게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어요? 하나님의 내 새끼인데. 사랑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멸망의 사건이 온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건 우리가 이렇게 내가 몰래몰래 반복해서 저지르는 불의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돼요.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 있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 봐야 할 불의는요. 자꾸 몰래몰래 세우고, 또 세우는 불의에요. 안 걸리니까 반복해서 점차로 크게 저지르고 있는 각종 죄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에게 큰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야? 사람들 다 그러잖아? 저쪽은 더 해요~ 다 마찬가지라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이런 게 바로 이방 사람같이 산당에 분향하는 거예요. 요즘은 정말 남탓전쟁중입니다. 힘있는 기관들이 전부 같은 편이 되어 아주 대놓고 협박을 해대니 막을 수 없습니다. 고향사람이 한 편이되어 한 목소리를 내니, 다른 소리를 낼 수가 없겠더라구요. 예수님이 고향에서 다른 소리를 내니 대접을 못받고 도리어 낭떨어지에 밀어 죽이려했죠. 내 이해타산과 반하면 합세해서 한 사람 죽이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희는 이북출신으로서, 남한땅에 저는 고향이 없죠, 더 무시받는 38따라지 아니겠어요? 그런데 고향에 있는 분들이, 이 조그만 땅에서 왜 그럴까요. 이해가 안되다가 자꾸 그 편에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됐어요. 저는 친척들이 없으니 말하기 편하죠. 그런데 제 친척들이 4촌부터 8촌까지 거기에 있으니 내가 어떤 얘기를 했다가는 누구 하나의 마음에 걸리겠죠? 그러니 이 마음이 너무 심각해요. 만세전부터 대구 광주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성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본이 될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해요. 다들 걸려있기에 제가 누구 편을 들 수 없어요. 북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안 걸리니까, 점차 몰래몰래 짓던 죄가 커지니 이제 막을 수 업게 됐죠. 바늘이었을 땐 돌이키기 쉽지만 기둥크기가 되니 이제는 걸린 게 너무 많은거에요. 죽던지 불나방처럼 돌진하던지, 방법이 이것 밖에 없는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시면 인간론이 다 나와야있어요. 모든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방식 따르기를 너무 싫어하세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안 들어요. 주님이 바알숭배를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 성전에 기둥이 되시기 때문이에요. 내가 죽어지고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 기둥입니다. 회개하고 나를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잘 지켜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 기둥으로 사는 것, 이것이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옳고그름에서 빠져나오는 비결이에요! 적용질문 요즘 제일 부러운 이방 사람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바알 기둥을 세우고 싶습니까? 오늘 인정 하고 고백해야 할, 내가 점차로 행하고 있는 불의는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성전 기둥인 것을 믿습니까? [차에 대한 집착으로 차를 새로 바꿨다가, 사자마자 후회했다는 나눔] 둘째,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13-16)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20년을 보내고 보내도, 또 안들립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은 "돌이켜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는 불의에서 아는 수준에서만은 안되요. U턴해야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야합니다. 다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요? 돌이키는 건 어렵고, 떠나는건 더 어렵죠. 몸에 안좋은 간식끊기, 술 담배 끊기는 더 어려운데, 그것보다 짜릿한 악에서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떠나겠어요!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7:9-18
  • 안식
2025 0119 종이 되어(열하 17:1-8)
1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7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스마트폰 잃어버린 적 있으세요? 요즘은 전화 안에 모든 정보가 있어 한 번 잃어버리면 큰일입니다. 한 조사에서, 한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5시간 화면을 본다고 해요. 잠자고 일하는 시간 다음으로 많지 않나 싶은데요, 스마트폰의 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가 나옵니다.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호세아가 이름 값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오히려 세상 왕의 종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습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종이 되어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세상 왕이 두려워 조공을 드립니다. (1-3) 1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아하스 12년에 호세아가 9년간 다스렸는지, 연대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남유다에서 다시 북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주인공은 19번째 왕 호세아입니다. 이스라엘은 반역으로 왕이 되고 9번이나 반역이 일어났고, 이 호세아 왕조가 마지막이 됩니다. 참고 참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심판을 허락하십니다. 9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셨고 사건만 주시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도 주십니다. 엘리야, 엘리사, 계속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합니다. 제사장 호세아는 음녀와 결혼시켜, 로암미와 로르하마 같은 아이들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을 깨닫고 보여주게합니다. 2절에서, 그 전 왕들과는 다르다고합니다. 호세아 왕은 새 우상을 만들지는 않았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하는 걸 막지는 않았습니다. 또 반대로 예루살렘 내려가는 것도 막지는 않았습니다. 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그러나, 이 호세아는 악이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음식이 상하면 조금 상하던 많이 상하던 똑같듯이요. 나는 너의 심복입니다, 앗수르왕에게 했습니다. 이에 호세아가 다르게 행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앗수르가 무서워서 왕의 '종'이 됩니다. 예배 적용은 좀 바뀌었는데, 삶의 적용은 한결같아요. 악이 너무 평범해졌기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 안에서 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지듯,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주인을 달래려고 조공을 드립니다. 이젠 아람도 같은 편이 아닙니다. 앗수르가 정말 무서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공은 하나님의 소제를 가리킬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지난 주 앗수르 제단이 마음에 들어 하루종일 예배드린 아하스 왕이 기억나십니까? 비슷한 모습으로, 호세아 왕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무서워 지극정성 조공을 바칩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이아닌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섬기지는 않나요? 앗수르의 종이되는 건 수치스럽고 싫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는 꺾을 자가 없죠. 권력을 유지해야하니 어쩔 수 없이 조공을 바칩니다. 세상 왕의 조공이 되는 건 말 자체로 부끄럽지만, 힘 있을 때 충성하던 사람들도 권력이 없어지면 바로 다른 사람한테 줄섭니다. 힘 있을 때 받는 충성은 진짜가 아닙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 뭐라고 부르시는지 아세요? '종'이라 칭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종, 아브라함, 이삭, 모세 ... 또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하고 부르십니다.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합니다. 세상 왕의 종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종은 사명을 얻고 사명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왕의 종으로 살면 늘 조공을 바치며 두려워 떨어야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서워하는 세상 왕이 있습니다. 직장 상사, 자녀, 배우자, 학교에서는 선생/교수가 두렵습니다. 친구가 두려울 때도 있죠? 요즘 교회는 성도가, 목사가 두렵습니다. 돈,건강,성공을 잃을까 두려워요. 어떻게합니까? 조공을 드리죠. 내열정 시간 비용 등,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애씁니다. 결국 세상 왕이 두려워 매여있는 모습입니다. 섬기는 주체가 세상 왕입니다. 세상 권세를 섬기다보면 마음 속에 평강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극정성으로 가르치려해도 그 사람이 두려워서, 혹은 그 사람에게 떨어질 콩고물 때문이었다면 그건 조공바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람 살리는 섬김이 아닙니다. 진짜 섬김은 주께하듯 할 때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짝지어주신 배우자를 섬길 때, 사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교회도 살고 이웃도 살고, 나라까지 삽니다! 이제 새로운 목장이 시작됩니다. 사람만 보고 사람께 하듯하면 불편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만난 목장식구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면 은혜충만 성령충만이 될 것입니다. 늘 사람이 하는 일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보통 목장개편은 20년이 지나도 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교인들이 많이 오다보니 6개월, 1년에 한 번씩 목장개편이 있어요. 보통교회에선 하기 힘든 일이에요, 목장 바꿔주면 다 떠나니까요. 사람이 하는 일엔 사각지대가 있고 이해타산을 갖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또한 하나님께 맡기며 지금은 마음에 안들어도 내년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순종해보길 바랍니다. 그렇게 늙어가길 바랍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성숙해질거에요! 이상한 목장을 만나야 거룩해져요. 그것을 기다립시다. 좋은 사람 만나서 하나도 믿음의 진보가 없는 것보다, 이상한 사람만나서 불편하고 참고, 인내하고, 섬기고 성숙해지는 것. 어느 쪽이 나을까요? 1. 내가 두려워하는 세상 왕은 무엇입니까? 조공으로 드리는 것은 무엇이에요? 2. 가정에서, 목장에서, 주께하듯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간 돈 열정을 어떻게 쓰십니까? 3. 나의 악의 양은 많습니까, 적습니까? [교회 오고 내내 불평하다가, 딸이 배반하니 (하버드에 가서 대들고, 뺨을 때렸다가 경찰에 끌려감)정착하게 됐다는 집사님 나눔] 없는 살림에 진학개혁으로 하버드에 보내놨더니, 자녀들이 인권을 운운하며 아빠를 접근금지까지 신청. 2. 가짜 구원자 찾다가 사로잡혀 갑니다. (4-6) 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호세아가 앗수르 왕의 종이 되어, 억지로 조공을 바치다보니 해마다 너무 힘들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명색이 믿는 사람으로서 이 오랑캐에게 아무리 바쳐도 끝이 없다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 누가 날 구해줄까, 내가 어떻게 벗어날까 싶어 생각 난 사람이 애굽 왕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언제나 돌아가고싶은 곳입니다. 400년이나 노예로만 살았는데, 그 노예노릇에서도 건져주셨지만, 그 고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애굽 왕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애굽 왕이 실력도 없는데, 우리가 힘 없을 땐 서로 친구아니냐며 잘 대해줍니다.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앗수르에게 조공을 끊었습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7:1-8
  • 안식
2025 0112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 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과 같지 아니한 아하스 이야기가 지난 주에 이어서 16장 전체에 기록됩니다. 본받을 게 하나도 없는 아하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할애하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지 아니하고 영적 질서를 비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하고 빼앗깁니다. 해석이 아닌 해결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도 유다 왕들도 모두 가장 문제는 산당을 폐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산당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아하스의 이런 이야기를 역대하와 열왕기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5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보게 하라고, 악의 평범성, 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망할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18절에 앗수르 왕을 두려워한 아하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 제단을 들여옵니다. (10-13절)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국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에 도움을 청합니다. 현금까지 바치며 부탁하니 앗수르 왕이 아람 군을 멸망시켰고, 그 감사인사로 다메섹에 갔다가 앗수르 신에 대한 제단에 눈이 돕니다. 당시 디글랏 빌레셀이 머물렀던 진영 내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제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스가 입이 떡 벌어집니다. 자기가 봤던 산당의 제단과는 비교도 안되는 제단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크고 멋졌습니다. 그 제단이 탐났어요. 그래서 앗수르가 가는 곳마다 이기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드니, 열등감에 허덕이는 아하스는 최고만 보면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진짜같은 복사품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게 얼마나 급한지, 당장 만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야가 왕의 지시대로 모두 행하니, 아하스가 복귀에 맞춰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야는 여호와는 빛이시다 라는 뜻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제사장 직분이었음 - 왕의 지시를 직접 받는 것으로 보아 대제사장 같습니다. 이 사람이 지시를 받고, 그게 앗수르 신을 섬기는 걸 몰라서 했을까요? 이사야에는 믿을 수 있는 증인이라는 '우리야'는 지금 아하스 옆 우리야와 동명이인일까요? 아니요, 같은 사람 같습니다. 평안할 때는 우리야도 진실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을 겪고 힘든 고난을 겪게되니 사명을 잊고, 그저 자기 목숨 부지하는 게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환경 앞에 장사가 없는 거에요! 이것이 인간됨의 한계입니다. 디글랏 빌레셀과 아하스는 소위 서로 '진실'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겠죠? 그러나 하나님없이는 진실한 관계는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사람은 진실로 진실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가 자기를 위해서만 제단을 쌓는 사람이니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하는 아하스였으니,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왕이면 뭐하고, 대통령이면 특별할까요? 성경으로 우리는 인간론을 배웁니다. 아하스가 돌아와서 무슨 짓을 벌입니까?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돌아와, 보고, 나아가, 드리되, 불사르고, 붓고, 뿌리고⋯ 카이사르 왈, 왓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는데 아하스는, 왔노라 보았노라, 앗수르 신께 제사드렸노라! 입니다. 제단만 보면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할 수 있는 건 우상숭배 뿐이에요. 우리도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안보이죠? 그래서 우상 사랑이라고 하지않고, 우상 숭배라고 하죠. 여자를 얻기까지 못할 짓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아하스도 같은 마음으로, 앗수르 왕의 마음을 얻기위해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는 제사장이 대신 드려줘야하지만, 앗수르 우상에게는 자신이 직접합니다. 아마도 한때는 진실됐는데, 우리야도 이 제단을 짓고나서는 같은 배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평소에 우리 마음에 쌓던 것을 봅니다. 아하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만 가능해요. 사람은 정직하지 않아요. 아하스는 크고 높은 것들을 동경하고 사모했습니다. 한 나라 왕이 쫓는게 이 따위 수준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유다 왕이 선도를 해야하는데, 상아궁도 그렇고 마음을 빼았깁니다. 아무리 반역을 해도 상관없어요.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는 모든 것은 도구일 뿐입니다. 아하스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을 폐하지 못하였더라로 나오는 유다 왕들의 평가지만, 지금은 악의 평범기준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수 마음대로 믿는 거에요. 아무데서나 예배드리고, 이것만해도 괜찮지않아? 계속 이렇게 됩니다. 드디어 산당을 폐하지 못하는 것을 너머, 산당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기까지 합니다. 금송아지를 가져오고, 심지어는 앗수르 왕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더해서, 앗수르 신을 위한 제단도 따라 짓습니다. '나도 갖고싶다. 나도 저런 제사 드리고싶다. 나도 앗수르 왕처럼 되고싶다' 쌓아놨던 욕심이 폭발합니다.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는 것이죠. 하나님의 거룩한 토성에 가져옵니다. 우리도 평소에 우러러보고 질투나고 탐나던 제단들이 많죠? 말 잘 듣는 아내, 인기,명예, 수 많은 앗수르의 제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은 내 손에 없는 그 제단을 내 손으로 움켜쥐고 싶어서 그 바깥에 있던 제단을 우리 집으로 들여오고 싶어 안달이 나는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이 제단으로 치환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잘되는 이야기도 원리를 가져와야하는데, 행위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꽂혀서" 가져옵니다. 성경공부 역시 그 예가 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게 됩니다. 붙는다고만 하면 못할 게 없는 우리가 보아야할 진정한 제단은 -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불살라지신 제단입니다. 내 생각을 딱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것입니다. 너무 싫은 상사에게 무릎 꿇고, 이혼을 멈추는 길.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여전한 방식으로 날마다 드려야할 제단입니다. 내 가정에도 든든히 세워야 할 영원한 제단인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큰 일이 오기 전에 우리가 작아보이는 큐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큰 십자가 져야 할 일이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말씀에 의해 세상 무서움, 두려움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말씀 묵상을 열심히 해오는 사람은 어떤일에도 띵크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앗수르 왕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내 삶에, 내 집에 들여오고 싶은 크고 화려한 ‘그 제단’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진실하게 “안돼” 해야 할 요청이나 부탁은 무엇입니까? 내 욕심을 꺾고 십자가를 길로 놓고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술문화에 대한 나눔하신 목자님] 술로 관계가 너무 쉽고, 술을 안 먹으니 - 입김이 점점 약해지고 친밀함이 없어지는 두려움. 이번 회식때 일찍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제 너무 재밌었다는 얘기에 꽂힌 이야기. 2. 여호와의 앞 자기 자리를 옮깁니다. (14-17)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제는 앗수르 제단의 복제품 새 제단이 생겼어요. "역시 앗수르제가 좋아!" 결국 여호와의 앞에 있던 놋제단이 새삼 찌질해보입니다. 만들어진지 230년이 더 지났으니까요. 크고 화려하고 세련된 앗수르식 새 제단과 비교가 됩니다. 아하스는 어떡했습니까? 성전이 서쪽, 제단이 동쪽인데, 놋제단을 북쪽에 있다가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버리기는 어려운 계륵같이 됩니다. 이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성물인데 말입니다. 십자가를 슬그머니 옆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왜 아람이 쳐들어왔는지를 띵크해야하는데, 어떡하면 이길까/회복될까/잘 살까만 고민하게되니 꼬입니다. 병원에도 환자들이 많이 서있는데, 이 사이에서도 낫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 로비에서도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먹어라 저것먹어라, 이게 좋다더라 ... 예전 놋제단을 완전히 치우지는 않고 옆자리로 둡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6:10-20
  • 안식HAUS
2024 1229 보내어 치게 하셨더라 (열하 15:27-38)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드디어 202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1년 여러분을 찾아왔던 손님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사람 손님일수도 사건 손님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들교회는 거주할 처소를 세우리라는 표어대로 힘차게 달려 왔습니다. 올해 처음에 대구 채플을 시작으로 송구영신예배때는 광주 채플을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띵크 목회자 세미나, 띵크 트립을 하며 섬겼습니다. 곳곳에 도피성 교회, 안전하게 거주할 처소가 세워지길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이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 후원을 기쁘게 받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손님중에는 생각하면 반갑고 감사한 분도 있지만 불청객도 있습니다. 오늘은 2명의 왕이 나옵니다. 북이스라엘 베가와 남유다 요담 왕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보내어 치게 하시는 심판을 겪습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어 치시는 심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내 멋대로 살면 불청객처럼 심판이 옵니다. (27-29)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지난 주일 브가야를 반역하고 왕이된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20년을 다스렸다합니다. 연대를 따라 계산해보면 8년인데 왜 20년을 통치했다 할까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12년이 문제입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해봅시다. 바로 12년은 므나헴의 10년과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다스린 2년입니다. 그 전의 살룸은 개혁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개적으로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죠. 유효기간이 겨우 1달이었습니다. 약점을 보일 틈이 없이 죽었습니다. 화끈하게 굵고 짧게 타올랐던 왕이었습니다. 반면 므나헴은 자기 손으로 다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 앗수르에게 은 천 달란트를 바치며 대내적으로는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살룸은 이상주의자, 므나헴은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살룸은 이상을 제공했다면, 므나헴은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베가가 므나헴 밑에서 장관으로 녹을 먹고 살았지만, 이 베가는 특별히 옳고그름이 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무서운 므나헴 밑에서 잠잠하다, 약한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니 2년만에 즉시 반역하여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됩니다. 우리가 죽고 죽이고 하잖아요 성경의 시대에는 이것이 놀라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옳고 그름의 버튼을 누르면 이게 객관적으로 보이기 어렵습니다. 이혼을 막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봐야합니다. 모든 것은 일원론입니다. 베가가 왕이 되니 적폐청산을 했겠죠? 동시에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므나헴 왕조는 가짜다, 살룸의 대역죄인, 반역의 주동자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로 므나헴 왕조를 역사에서 지우고 그 12년을 내 역사 통치에 편입하겠다!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함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추진한 정책은 대 앗수르 외교였습니다. 므나헴은 은을 주고(부자들 은을 강탈하여) 친 앗수르 정책을 폈죠? 베가는 그 정책을 당장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리고 손 잡은 곳은 철천지 원수 아람입니다. 공동의 적 앗수르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람과 동맹을 맺습니다. 보세요, 베가는 브가히야의 경호대장을 할만큼 신임을 얻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속으로는 엄청난 반역을 꾸미고 있었죠. 속으로는 자기가 반역하리라 하는 마음이 없었겠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가니까 반역합니다. 이렇게 모순적 삶을 살게 됩니다. 한마디로 베가는 제멋대로 산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장관은 못했겠죠. 드러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너무 믿음직한 사람이니 므나헴부터 브가히야까지 경호대장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속은 제멋대로의 인생이었습니다. 지금 이상한 역사의식, 이상한 명분으로 국내 질서 국내 정세 이런것 하나도 상관없이 밀어붙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됩니까? (29절)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이 사건으로 디글랏 빌레셀이 세운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공국이던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 맺어 반란을 일으키는데, 앗수르가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는 내용입니다. 베가 입장에서는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 옵니다. (이는 앗수르 왕입니다.) 조공 천 달란트를 바친 나라에 2차침공을 온 셈입니다. 5년 동안의 날나 예산을 받은 입장인데, 또 옵니다. 설마가 사람 잡습니다. 베가는 자기가 준비를 한다고, 온다해도 아람과 동맹했기에 막을 수 있으리라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너무 막강합니다. 항상 원칙대로가 아니라 내가 준비하면 안됩니다. 최북단 납달리 영토를 결국 빼앗깁니다.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 역사 중 첫 포로사건이 이렇게 발생합니다. 앗수르라는 불청객이 스스로 왔겠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때부터 읽어내려와서, 이게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 인생의 결론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식, 구속사가 없다면 우리 삶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계속 있지만.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이 없네요, 이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유다는 하나님이 보내셨다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엘리야, 엘리사를 보내어 또 부르고 불렀으나 듣지 않은 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한 왕만 남았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이 없으면 내가 구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내 멋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가 끝나며 마지막에 하는 것이 불신결혼, 이혼 하지 말라고 불신결혼, 이혼을 하는 것의 가장 큰 이유가 십일조를 안하기 때문에 신앙 고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이 얼마나 믿었던 부하들에게 죽습니까? 항상 원칙이 중요합니다. 사소한것 같아도 목장에서 나누면 나누면서 정리되는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능적으로 목장에서 반대할 거라 생각하면 안나눕니다. 욕심이 있어서 뒤에서 내 멋대로 하는 것입니다. 2024년 마지막 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하겠습니다. 한 해 얼마나 잘 묻고, 들었는지 생각해봅시다 1. 인정할 수 없는 윗질서가 있습니까? 내 멋대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대놓고 내 멋대로입니까? 뒤에서 내 멋대로 입니까? 내 삶의 불청객은 누구입니까? 3. 내 멋대로 한 일의 결론임이 인정 됩니까? 내 권세로 지우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돈에 대한 탐심 나눔들 - 동업, 불신교제, 돈 이야기] 2.좋은 조건이라도 여호와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30~34)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베가가 적패청산을 하며 추진한 반 앗수르 정책의 결론은 납달리 영토의 상실입니다. 잃어 버린 후에 아니면 말고 하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거기 살던 사람들이 다 잡혀 갑니다. 그러니 정권이 유지 될 수 없고,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또 반역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한결 같이 제 멋대로 행하는 북 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봐야 하는데, 개혁을 외치며 자기 멋대로 하니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완전한 멸망의 눈 앞에 서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사람을 쫓습니다. 인본주의이기에 신본주의를 알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안들립니다. 사울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그 한마디 말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구속사로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베가가 제 멋대로 행하며 심판을 향해 돌진 할때, 남유다 상황은 어땠을 까요?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5:27-38
  • 안식
2024 1222 평생 자기 손에 (열하 15:16-22)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3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우리는 돈이나, 힘이나, 인기를 가득 채우면 행복할 것 같아서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도 않고, 채운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자원의 저주). 우리 므나헴이 우리의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므나헴을 통해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는 삶은 1. 폭력이 삶을 지배합니다(16-18절)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오늘 주인공 므나헴은 한달 천하의 살룸을 죽이고 왕이됩니다. 므나헴도 살룸같은 장군출신입니다. 그 보다는 충신이었는지, 그는 살룸을 인정하지 못하여 반역자를 처단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왕이됩니다. 별 인생이 없네요? 자기의 의로 반역을 하긴 했는데, 왕이 되자마자 자기처럼 반역자가 생길까봐 즉시 요새마다 충성맹세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딥사는 아람의 다메섹보다도 더 북쪽 성읍입니다. 이윽고 나라가 남북이스라엘로 나뉘며 지배권을 잃었다가, 여로보암 2세때 다시 차지합니다. 그러니 딥사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충성심이 있겠어요? 상황이 바뀌면 바로 돌아설만한 곳입니다. 충성서약을 그렇게 딥사는 하지않았습니다 (성문을 열지 않아) 므나헴은 권력을 움켜지려는 큰 사람이었고, 변방에서 위협할 수도 있었지만 아예 치러갑니다. 한번 기회 줬으면 끝입니다. 폭력의 정도는 장난이 아닙니다. 성읍 지도자 몇명을 처단한 게 아니라 딥사 모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칩니다. 딥사 뿐만아니라 그 사방까지 칩니다. 아주 그 일대에 적용된 듯하고, 아이 밴 부녀까지 찢었다고 해요. 당시로서도 너무 끔찍한 행위에요. 딥사에 씨를 말립니다. 딥사의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치고 또 치는 폭력. 잔인한 폭력이 므나헴입니다. 그의 삶을 지배하려는 힘은 폭력입니다. 대체 왜 므나헴은 이토록 폭력을 쓸까요? 일벌백계로 반역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입니다. 므나헴 손에 안들어오면 이렇게 된다? 경고의 의미입니다. 므나헴의 왕권을 움켜지려는 그 손아귀힘이 이렇게 쎄네요 권력욕이 엄청 세고, 욕심이 죄를 낳듯 폭력을 낳았습니다. 이 폭력도 욕심도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므나헴 안에는 근본적 악이 자리합니다.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합니다. 스가랴는 6개월, 살룸은 1개월인데 므나헴은 10년입니다. 폭력에 의지한 통치가 성공해보입니다. 폭력이 참 무섭습니다. 매 한 번에 누구든 고분고분해집니다. 감히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그 예시입니다. 3대가 내려오도록 거역을 못합니다. 므나헴에 가공할 만한 악이 16절에 먼저 나오고 순서가 바뀌어 또 나옵니다. 6개월, 1개월 후에 10년의 근거가 이 무서운 폭력정치입니다. 그러나 10년 간 므나헴이 한 일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한 줄 뿐입니다. 칼을 휘두르며 폭정했기에 '왕권'은 지켰겠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냥 그건 악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런데 므나헴에게만 붙은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평생"이라는 게 하나 붙습니다. 그의 모든 나날에서 여로보암의 죄와 하나가 되어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악하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를 못 대는 죄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 죄에 푸욱 빠졌습니다. 지정의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교만이 꽉 찼답니다. 그러니 죄의식도 없겠죠. 자신을 평생 숭배하며 사니, 무엇을 움켜쥐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했겠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그랬더니 두려워 벌벌 떱니다. 자신이 육신의 노예고 교만의 노예가 됩니다. 폭력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도 폭력에 약합니다. 자식 아내 식구들에게도, 층간소음으로 괴로운 이웃관계도 그래요. 내가 시끄러울 때는 이웃이 없었으면 좋겠고 내가 조용할 땐, 이웃들도 조용했으면 좋겠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내 뜻대로 좀 목장 식구들도 내 손아귀안에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이 통제안되는 목장은 내가 함께 고통을 겪겠다는 순종입니다. 집단 상담이 얼마나 비싼 줄 알죠? 집단 상담을 우리는 무료로 받고, 결혼하고 회사를 가요. 얼마나 목장이 유익한 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목장에서 미리 배움은 금주고도 못삽니다. 나라는 또 어떱니까? 서로 남탓하며 옳고 그름 따지는 건 제일 쉬운 것입니다. 각자의 기준대로 결정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발작버튼 누른다는 표현을 쓰듯, 우리의 "계엄, 반역, 진영"등은 다 버튼입니다. 언론은 이런 버튼을 부추겨요, 전부 비즈니스라 그렇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죠? 그 둘을 보고 헷갈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발작버튼이 눌려 감정이 폭발한 후엔 솥뚜껑보고도 놀랍니다. 우리가 5천년 역사에도 지고도 못사는 국민성을 버리지를 못해요. 옳고그름의 화신인 한국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손에 들어와서도 안되는 것을 움켜쥐려는 므나헴의 죄를 기억하세요. 내 손 안에 들어와야한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여로보암의 악한 죄를 '평생'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우리 나라 - 10위권의 나라가 되다보니 마구 이 성격을 써댑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예시) 우리 모든 국민들이 망상환자같아요, 부정도 긍정도 하지 말아야 할 시대같습니다. 이런 때가 참으로 위기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망상환자의 때를 모두 보냅니다. 목장에서도 믿음이 천차만별이라, 이럴 때 직선적으로/옳고그름으로/아니고 기고 하면 안됩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아야하는 목장에서 해가면서 '그러게요', '알았어요' 해야합니다. 우리들교회에서 목장나눔하듯, 다윗도 살기위해 거짓말을 하듯 해야합니다. 블레셋도 다 속아넘어갑니다. 거짓말에만 초점을 맞추면 누가 옳고그르겠습니까? 적어도 다윗은 백성들을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나머지는 자기의 정권과 유익만을 위해 거짓말 합니다.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단정적으로 하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의 분량에 맞게 잘 분별해야합니다. 큐티는 이럴 때 일수록 구속사의 말씀으로 중심잡길 바랍니다. 뉴스에 휘둘려서 감정/시간/에너지 낭비 하지말자구요. 우리나라가 잘 사는 데 집중하지 말고 벌 받아야 하는 건 벌 받고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요즘 무슨 일로, 누구에게 분을 냅니까? 치고 또 치고, 찢고 또 찢으려는 폭력에 지배당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평생 떠나지 않고 있는 금송아지 숭배는 무엇입니까? 2. 돈만 의지합니다(19-22절)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아요. 구속사로, 나쁜 부모 좋은 부모가 없이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라고 했듯 구속사로 바라봐야합니다. 분해서 학교도 못가고 직장도 못가면 안됩니다. 므나헴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참다 참다 불을 보내십니다. Fire가 아니라 29절에 리그랏 빌렛 3세 - 앗수르 왕을 보냅니다. 앗수르의 영토를 두 배나 넓힌 왕입니다. 이 사람은 지중해로 진출 하는 항해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칩니다. 최대 강대국 앗수르가 쳐들어 옴은 므나헴에겐 최대 위기입니다. 앗수르에게 잠시 후 나라가 없어져요. 마지막 때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폭력으로 자기가 꽉 쥐고 있는 왕권을 잃도록 앗수르를 보내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콜링입니다. 그러므로 돌이켜야합니다. 그러나 므나헴이 초점맞춘 것은 머니머니해도 돈입니다. 큰 부자들에게서 강탈합니다. 은 50세겔은 최소한 2천만원은 넘는 1년 연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6만 명 정도에게 강제로 빼앗아 은 천 달란트 마련합니다. 5년 치 나라 수입을 한 번에 불에 조공 바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원어를 보면 평생 자기 '손'에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똑같은 선택이라도 이게 나를 위함인지 나라를 위함인지 하나님과 본인은 알아요. 불의 손이 자기 편을 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앗수르 왕의 손에 사로잡힌다 할지라도 '나라'만 자기 손에 쥘 수 있다면 자기가 종이 되어도 상관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돈 받고 앗수르 왕이 떠납니다. 평생 속국처럼 비위를 맞추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나헴이 자기 권세를 위한 작전은 성공한 것입니다. 온 백성이 므나헴 손에, 므나헴은 앗수르 손에 사로 잡힌 것입니다.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반역으로 왕권을 움켜쥔 므나헴은 자기도 반역당해야되잖아요? 그런데 천수를 누리고 가는 거에요. 그리고 아들 브가히야까지 왕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다 이루고 가네요. 공포정치를 통해 반역자도 막았구요, 앗수르 침공도 돈의 힘으로 극복했어요. 자기 손에 움켜 쥔 것 아무것도 뺏기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나 므나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한마디로 '악'을 행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을 떠나지 않았다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보신 인생이에요. 아무리 다 쥐어도 뭐해요? 그저 악행하고 자게 된 인생입니다. 앗수르를 보내심은 마지막 콜링입니다. 네 손에 움켜쥔 욕심 좀 버려봐!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므나헴은 자기 손에서 힘을 빼지 않고 더 세게 움켜쥐었어요. 왜냐하면 그 힘이 있으니까요. 힘이 없었다면 저절로 놓았겠지만, 그에게 힘이 있었습니다. 재력보다 무서운 게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므나헴은 부자들을 마구 강탈해낼 힘이 있었던 것 입니다. 영끌해서 모아 둘 돈도 있었습니다. 그가, 돈만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평생 떠나지 않는 그 여로보암의 죄를 떠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1. 주일설교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5:16-22
  • 안식HAUS
20241117 돌이키고 살지니라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요즘 선거는 전쟁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미국은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가 최악의 전투였습니다. 그 해 10월, 아브라함 링컨은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참한 전투 속에서도 농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주님은 우릴 향한 자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의 죄, 감사와 회개를 전쟁 중에 외쳤습니다. 감사와 회개는 하나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멀리서 응답이 왔습니다. 트럼프를 100% 인정하지 않아도 고레스 역할처럼 그의 공약은 아주 차별화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능도 있었는데, 합격도 좋지만 최고의 가치는 구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돌리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은 제 간증입니다. 오늘도 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죄에서 돌이킬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남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오늘도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은 죄에서 돌이키고 살 최고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시다고 합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왜 아들이 힘드냐는 뜻입니다. 힘든 사건이 찾아오면 우리의 반응은 ‘열심히 했는데, 내가 당할 일이 아니에요’ 라며 억울해 하는 것이고 남 탓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인해 조상에게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조상, 부모 탓 하면서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의절, 이혼, 버림 후에 더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계속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속담을 다시 쓰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범죄하면 죽는다고 하십니다. 사건에서 우리는 남 탓 하기 바쁘지만, 그 탓은 모두 착각입니다. 남 탓은 하나님 탓으로 이어집니다. 고난은 돌이키라고 주신 사건인데, 잘못이 없다고 남 탓만 하면 하나님을 들이박고 천국 문을 스스로 닫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해석해서 잘 풀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풀다가 지옥을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영혼입니다. 우리는 벗어나던지, 부족하던지 우리 힘으로는 과녘을 맞출 수가 없기에, 내 죄를 보라고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 탓만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에요. 무슨 일로 누구를 탓하고 있습니까? 끊으려 하는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은 제가 간증을 해보겠습니다. 장로님이 아들 전도를 안하셨어요.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라 음란보다 명예에 관심이 있던 것 같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겉으로는 땀을 흘리며 아이를 받는 의사였지만 제게 모든 것을 제한했었습니다. 혈압이 높았지만 음식물 조절부터 모든 것에 대해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만날 교회 오빠도 없었고, 먹고 살아야 하는 걱정으로 입시 끝난 날 과외부터 찾았어요. 그렇게 광야를 지나 시간을 천금같이 썼던 제가 결혼 후 부터 겪은 고난은 이렇게 힘든 광야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제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겉모습은 좋았지만 안으로 보면 율법적, 분노 조절 불가, 탓, 오해하고 수 없는 잔소리를 했습니다. 모든 일의 결국은 제 탓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억지로 내려놓는 자존심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 남편에게 밥만 축내는 인간이었지만, 병원 환자 간호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저의 자존심 내려놓는 것을 보고 저보고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문제가 생기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남편이 딱 멈추는 거에요. 그러나 그 와중에서 저도 탓하기 죄가 전염되어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속으로 남편 탓, 시댁 탓을 하며 이 결혼을 시킨 친정 부모를 탓까지하며, 그 결론으로 나는 힘이 없으니 이혼하자고 도달했습니다. 저도 부모가 되니, 부모탓을 들을 땐 참 듣기가 힘들더군요. 서로 탓함은 우리 인생의 돌이키고 살려면 탓을 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저는 땅 끝까지 내려갔습니다. 2. 공평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우리는 악인이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보다 우리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디로 돌이켜야 할까요? 27절까지 공의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인이어도 믿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말합니까?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에스겔 18:1-4, 23-32
  • 안식
20241110 돌아온 언약궤 (삼상6:1-15)
주일예배 본문: 사무엘상 6:1-15 제목: 돌아온 언약궤 박재현 목사님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큐티할 때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 책과 함께 묵상하시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을 잘 자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서 잃어버린 언약궤 찾으시길 소망합니다. 1.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채워져야 합니다.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대표적인 민족이 블레셋입니다. 그들이 사는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공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보니까 전투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지역도 오늘날 가자지구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패배하고, 사기도 바닥을 쳐 전쟁을 지는 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단 전쟁터를 언약궤로 들고옵니다. 이 언약궤를 보고 군사들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큐티하고 기도했으니 하는 일이 잘 될거야 라고,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언약궤를 들고 나아갑니다. 언약궤가 성공을 위한 부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정체성과 같은 언약궤를 뺏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들고 있는 큐티책을 뺏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뺏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영광을 성공에 사용한 결과로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가 성공을 위한 예배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예배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소유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믿고 있던 다곤 신전 옆에 언약궤를 보관하기로 합니다. 이 신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물질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언약궤를 필요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악을 부르는 사건이 됐습니다. 멀쩡하던 신상이 넘어지고, 손과 발, 머리가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곤 신상의 심판의 바람이 백성들에게 갑니다. 오늘날로 치면 흑사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의 고통 소리가 하늘을 쳤다고 합니다. 1절에 질병이 7달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재앙,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블레셋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 완전한 항복을 하려고 합니다. 내 욕심과 야망도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야 내려놓게 됩니다. 그 시간이 왔다면 구원의 시간인줄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언약궤를 성공의 도구로, 블레셋처럼 야망과 욕심의 도구로 사용했던 마음이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지나친 영적 교만이 제게 있습니다. 목회자는 아껴야 하고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적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100원도 놓치지 않고 쓰고있습니다. 지나치게 거룩한 척을 합니다. 사역이 마치면 무조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안에 ‘나 정도면 좋은 목회자, 좋은 아빠, 남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으로 사니 아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내는 24살에 저와 결혼했습니다. 그 달콤한 시기에 거룩한 사모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고, 퀴즈를 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와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새 옷을 사서 자랑하듯이 물어보면 저는 그 옷이 얼마짜리냐고 물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 마음 속에 악한 종기가 자라는 것, 울부짖는 것을 보지 못했고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게 7달이 채워지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울면서 그만 살자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친 저의 의로움이 전염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교만했고 내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징계가 눈앞에 펼쳐지자 죄가 보였고, 하나님과 아내에게 두손 두발 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게 됐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여전히 가계부를 쓰지만, 땅의 언어로 바뀌게 됐습니다. 지난 주에는 울림카페에 갔는데, 성도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1. 내게 언약궤는 성공의 수단인가요? 구원의 통로인가요? 2.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주님께 돌이킨 적 있나요? 2.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 안식
20241103 여전한 산당제사(열하15:1-7)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 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그렇게도 징하게 여전히 산당 제사를 드린다고 해요. 주 님, 이게 다 우리의 문제인데 그 여전히 드리는 산당 제사를 좀 폐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27기도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수고해 주신 모든 성도 님들과 특히 청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박수로 또 붙회떨감 기도회를 수능 전에 한 번 더 해서 ‘이른비 기도회’로 또 어제 기도회를 했어요. ‘붙회떨감’은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감사인데 우리 는 여전히 세속적 감사를 너무 원하기 때문에 수능을 앞두고는 ‘떨어진다’의 ‘떨’자도 듣기가 싫은 우리입니다. 근데 오늘 아사랴는 거꾸로 해서 붙으면 감사한 것도 아니고, 붙으면 자랑하기 바쁜 거예요.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만 높였기 때문에 이 아사랴는 역대하에서는 웃시야로 불리는.. 역대하에서는 아사랴가 부국강병의 대명사예요. 근데 열왕기에서는 아무것 도 언급하지 않고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나병으로 치셨다’ 이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여전한 산당 제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어요. 산당을 제거하려면 첫째로 1. 겸손한 환경이 축복입니다 (공동 통치 24년) [1-3절] 52년 중에 공동통치하던 때 24년을 의미하는데요. 1절부터 3절입니다.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이렇게 북이스라엘, 남유다 왕들이 계속해서 번갈아 나오면 우리가 머리가 살짝 복 잡해집니다. 또 연대도 그냥 이렇게 27년... 골치가 딱 아픈데, 이게 공동 통치인지, 단독 통치인지... 너무 틀린 거 잡아내려고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충분히 틀림없이 담고 있어요. 1절에 ‘여로보암 제27년’은 주전 BC767년으로 아사랴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 해예요. 2절은 ‘그가 왕이 될 때에 16살’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24년 전인 BC793년을 의미 하는데요. 아버지 아마샤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52년 중에 공동 통치한 2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아버지 아마샤는 정직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에돔을 정벌하고 나니까 교만해져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네가 감히!!” 하면서 요아스에게 도전장을 던졌죠. 완전히 패배해서 예루살렘까지 점령되는 초유의 일을 겪었어요. 전쟁을 일으킨 책임 이 있었기 때문에 면목없는 죄인이 되어서 어린 아들과 공동 통치를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엔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반역을 일으켜 살해되었어요. 그 아들 아사랴는 이 모든 걸 다 보고 겪으며 성장했어요. 아버지가 제일 잘 나갈 때도 보았고, 최악의 패배를 당해 폐인처럼 숨만 붙어 있을 때도 다 보았어요. 그리 고 마지막에 같은 무리(유다의 반역자 무리)에게 살해되는 고통도 다 보았어요. 아 지 아마샤만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고..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북이스라엘도 밉고, 아버지를 압박하고 계속 잔소리해야 되는 유다 지도자들은 더 밉고,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은 철천지 원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특히 요아스 이후 유다 왕들이 이렇게 상처와 연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대제사장 고모부 밑에 평생 눌려 살다가 마지막에 심복의 반역으로 죽은 요아스. 그런 아버지 인생을 보면서 그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도 같은 길을 가다가 역시 반역으로 죽은 아마샤. 이제 그 상처와 연민이 아사랴에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다윗 왕가에 이런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누구도 몰랐을 거예요. 룻기부터 구속사적으로 아니 창세기부터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사랴는 참 겸손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믿고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어요. 그저 마음의 상처와 연민만 가득했고요. 왕권 또한 허울뿐이었어요. 그래도 요아스도, 아마샤도 ‘정직했다’고 그러잖아요. 아사랴도 그 성품으로 정직함을 물려받았어요. 게다가 아사랴 엄마가 예루살렘 사람 여골리야였어요. ‘여호와는 능하시다’는 뜻입니다. 믿음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이었죠. 그래서 아마샤아가 신결혼을 해서 아들을 그래도 믿음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양육은 고난 중에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역대야 26장에 이 웃시야(아사랴의 다른 이름)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같은 역사를 열왕기는 공동체 관점에서 기록했고, 역대기 는 구속사적인 개인적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요. 웃시야가 특히 그런데요. 거기에 아주 중요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역대하 26장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에 (웃시야가)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니까 웃시야가 무슨 일이든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여기의 스갸라는 우리가 ‘스가랴서’를 통해 아는 그 스가랴와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웃시야의 할아버지 요아스도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교훈을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웃시야도 스가랴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는 형통했다는거예요. 왜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어머니 여골리야를 통해 믿음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 고난 가운데 절망하거나, 다른 우상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을 거예요. 근데 그 하나님 찾았다고 하나님은 웃시야를 어마어마하게 형통하게 하셨어요. 패배 후 15년을 숨죽이며 지냈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하나님이 아니면 기댈 존재가 없는 거예요. 길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더니 그 패배가 변하여 형통이 됐습니다. 여러분 웃시야의 형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성공과 견줄만했어요. 역대하를 보면, 블레셋과 암몬을 굴복시켜 조공을 받 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중수하고, 농사도 크게 일으켰고요. 관개 수로를 다 만들고, 군대를 재건하고, 장수만도 2,600명이 넘고, 군대는 무려 30만 명이 넘었죠. 그러니 남쪽 시내 반도까지 세력을 회복해서 항구 도시 엘랏을 건축했다 그랬죠. (열왕기하 14장). 그래서 얼마나 그 형통이 컸는지 역대하 26장 15절에 보니까 웃시야의 이름이 그냥 널리 국외로 퍼졌다고 해요. 그것도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 해진 결과로 소문이 쫙 났다고 그래요. 형통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우리 인생의 상급이심을 보여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1. 여러분의 환경이 비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그래서 남을 탓하며 원망합니까? 지금 하나님의 양육을 잘 받고 있습니까? 2. 강성하니 산당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14년 부국강병) [4절] 이거는 이제 강성한 14년의 부국강병 시대를 의미하는데요.
  • 안식
Made with Slash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