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Sign In

SUNDAY

주일예배 녹취
All
주일설교
수요설교
큐티
2025 0202 나의 생애를 흐르는 구속사의 강 (에 4:14, 요 1:14)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나만을 위한 40년을 일했지만, 지난 2년간 아프리카에서 교직생활을 마치고 났더니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왕 의사가 될 바엔 최고의 의사가 되고자 서울대 의대를 목표했습니다. 그렇게 이루고나니 목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나면, 올인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악인과 의인에게도 공평히 햇빛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처럼 저도 공평한 기회에 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큰 어머니가 일본에서 시집을 오셨는데, 그분이 저희 집안에 복음을 전하게 되셨습니다. 큰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전라도에 오셔서 핍박을 받고 인고의 시간을 지나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셨습니다. 유일한 크리스찬이셨던 큰 어머니를 자주 찾아 뵈었는데, 남편과 자식이 죽은 고통의 시간동안 교회에 계시면서 기도하셨고, 그를 통해 온 집안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망한 인생 같지만 온 집안이 구원을 받는걸 보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찬양 드립니다. 저희 어머니는 고난 받는 대표적인 여인상입니다. 단양 출신의 인텔리셨는데, 반대로 사범대학에 입학이 좌절 되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시면서 남편의 폭력을 감당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다른 여자를 데려오시는 여성 편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일방적인 피해를 받는 여성이셨고, 5살때 트라우마는 피가 터진 엄마 머리채를 잡고 다니는 아버지의 기억입니다. 매일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를 말리는 저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처절한 인생을 사셨지만 강한 정신력과 통찰력으로 제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쓰셨고, 팔순을 앞둔 나이에 자서전을 내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완벽주의가 있으셨고, 저는 저를 어머니와 동일시 하기도 하며 암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힘든 사람들을 돕고, 의료선교를 하는 것들이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구원은 제 인생의 숙제였고, 아버지는 가해자라 불쌍하고 어머니는 피해자라 불쌍해서 두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고, 눈물이 별로 없는데, 어머니의 임종을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제가 국제 사랑의 봉사단과 사랑의 병원을 설립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을 섬기는 에너지가 생긴 것은 어머니와 나를 동일시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사용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고통을 주신 분이지만 그당시에는 악 감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가해자로 일관된 삶을 사셨고, 굉장히 많은 쓴 뿌리를 유발 시키셨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에게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소년의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적 아이로 부터 숨겨진 분노들이 터지는 내적 거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가 해석이 됩니다. 상처가 별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당시 해석이 되었다면 기도하며 갔을 텐데 크리스찬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몰랐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가서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준곤 목사님입니다. 이분을 대학 1학년 때 만나게 되었는데, 갈급했던 심령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모든 것이 해석되었습니다. 이분이 민족 복음화 운동을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 믿은지 한달 만에 캠퍼스복음화에 헌신 하면서 40여년을 달려온 것 같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만나면서 제 고통의 심연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이 부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의 고통의 상처가 너무 깊었는데, 그 깊이만큼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정도로 깊었냐면, 그때 은혜를 받고 얼마 안있어 13명을 곧이어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복음화에 그때부터 제 사명으로 받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이 복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선지자적 역사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전테스팅 - 언제 비전을 던져야하고, 리더쉽을 발휘해야하는지. 그리고 영적전쟁을 위해 언제 금식하며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과점을 하겠다고 하시다 망하시는 바람에 당시 2억의 빚이 있었는데, 빚쟁이들이 어음을 쓰라고 해서 쓰게 된일로 의사가 되기전에 법정에 불려 다녔습니다. 주님을 믿었지만 해석이 되기전에 이런 고통이 오니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수 있는가? 했는데, 하나님 비가온 다음 어느날 캠퍼스 근처에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것이 호수가 된 것을 보며 너는 고통의 웅덩이를 얘기하지만 그 웅덩이가 없으면 물이 고일 수 없지 않냐고 묻는 하나님의 계셨고, 고통의 웅덩이가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부어주실 수 있는게 되고, 사명이 생기니 이제는 제가 복음을 위해 전세계를 다니고 있는데, 그 에너지가 고통의 웅덩이에 엄청난 은혜를 쏟아 부으니 생기게 된 것이 인정 되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모든 것이 해석되고 아버지상이 회복되고 주님을 민족을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염 되었습니다. 그분의 연약하심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60년대 말에 민족 복음화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한국이 믿기만 하면 세계에 으뜸을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40년 동안 그 기도제목이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선포하고 달려가는 구조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에스더가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 해석이 끝난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해석이 끝나면 헌신할 수 있고, 목숨을 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들은 우연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짜증은 감사의 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짜증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감사를 잃어버렸기에 짜증을 허락하셨고, 그를 통해 감사 할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감사의 달인들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윌리엄 캐리, 코리텐 붐, 크리소스톰입니다. 모든 것은 인생과 역사가 해석 될 때, 절대 감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세미나를 할 때마다 당신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격이 어떠하든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인사는 제 것이 아니고 전경철 교수님이 하신 것을 채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스트레스 자체가 암을 유발 시키는 요인은 아니지만 진행시키는 요인입니다. 사람에게 기대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기대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깨어지며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것이고, 그때마다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고, 치료의 대상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전하지만 '배신을 당하면 이럴 수 있는가?' 하다, '아! 사람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구나,하며 사랑의 대상이지'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생은 기대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고난을 즐기며 가는 것인데, 이것은 엄청난 상급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할때도 둘이 한줄 알았는데, 네 사람이 한 것이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 뿐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상처받은 소녀와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분노가 없는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편하니까 아내에게 소리 지르는 저를 보며 아내 한사람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경험했습니다. 내면의 아이들이 부딪히면 부부싸움을 하게됩니다. 이런 관계속에서 깨달은 것은 제안의 상처받은 아이, 부끄러운 아이, 미움받는 아이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너무 잘하는 사람도 사적 영역에서는 내적아이가 저를 지배하는 걸 보면서 이를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기도하게 되었고, 제가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 했지만 연애나 아내를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한것은 영성이고, 그다음은 성품이고 3번째가 외모이다 라고 가르치는데, 결혼하고 보니 순서가 바뀐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영성과 비전의 문제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이것이 고난임을 이해하고 나서는 결혼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깨닫고 아내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40년을 살았기에 첫 아들을 결혼시킬 때, 하나님께서 40년을 돌아보면서 언약의 훈련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려면 수술대에 올려야 하는데, 결혼이라는 수술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수술을 끝까지 견디며 부부 한 사람을 돌파하면 전 세계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과 수술이 끝날 때 까지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은 절대 상대방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입니다. 내가 변하면 다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의 아이들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치유받으면 행복이 부산물로 옵니다. 내가 행복하면 전 세계가 행복합니다. 결혼을 통해 구속사적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내면의 아우성 치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는 절대적 사랑이 아닌 조건적 사랑으로 아이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조건적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에 다들 그렇게 아이를 키웁니다. 절대적 사랑을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가해자로 바뀌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파멸로 인도하는 막강한 내적 거인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우리가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상처가 쓴뿌리가 되어 내 인격의 하나로 정착되게 할 것인가 입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자기는 피해자라 생각하지만 자기도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잘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당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쓴 뿌리가 되면 회개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이 상처가, 한이 결국 쓴뿌리가 됩니다. 치유함에 있어서 중요한 전재 조건은 내가 환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자기가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치가 된다고 봅니다. 또 중요한 것이 드러남의 은혜입니다. 내안의 감정이 드러나게 하나님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 은혜 입니다. 제가 상처가 있다보니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양보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속에 쓴 뿌리가 생깁니다. 당시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바로바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한번 수술대에 저를 올리게 됩니다. 제 연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날 수록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러내면 약재료가 되고, 숨기면 쓴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경영이라는 차원에서 온 세계를 주도하시는 하나님께 집중을 해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구속사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은밀성과 역설로 표현 됩니다. 은밀성은 거룩과 겸손과 은닉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 것이 들어가지 않은 거룩함과 겸손하게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 역설에는 팔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핍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것이 축복이고, 애통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용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은 시대의 하수구 같은 곳인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축복이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판적 고난과 섭리적 고난이 있는데, 이는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는 변화를 위한 고난과 우리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감사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땅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것이 축복입니다. 지금 현재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폭발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기위해 지금 기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주님오실 날에 추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대학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했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살아 가고 있는데, 자녀들을 키울 때, 미래가 아닌 현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먼저 추구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 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를 건 비전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두고 달려가는 것이 비전입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오게 하신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생각합니다. 연약한 저를 통해서, 제 생애를 흐른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찬양하길 원합니다.
  1. 주일설교
황성주 박사 (이롬대표, 사랑의 공동체)
에스더 4:14, 요한복음 1:14
  • 안식
2025 0126 돌이켜 떠나라 (열하 17:9-18)
9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하나님 아버지, 돌이켜 떠나라고 하십니다. 계속 우리의 주제가가 ‘돌이키고 살지니라’ ‘돌이켜 떠나라.’ 그런데 돌이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요새 뉴스에서 그린란드 이야기가 자주 나오던데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에요. 면적의 80%가 빙하라고 하는데요. 그린란드가 아주 관심이 많아서 트럼프가 사려고 하고, 덴마크는 안 팔려고 합니다. 근데 이 빙하도 녹았다 얼었다 하는데요. 나사 과학자들 조사에 따르면 빙하는 수백 년간 조금씩 녹아서 약해지다가 결국 2~3년 만에 크게 붕괴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점진적으로 녹던 것이 갑자기 무너지는 그 순간을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순간도 바로 이런 티핑 포인트예요. 오늘 본문이 그걸 분명히 보여주는데요. 이제 200년 넘게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쌓이던 악이 결국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거예요. 하나님이 이걸 자세히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이렇게 되지 말라고요. 이 악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악에서 돌이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돌이켜 떠나기위해서는, 첫째, 점차로 행하는 불의를 알아야 합니다 (9-12) 9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지난 주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12지파 중 그 반역한 북이스라엘 10지파가 모조리 앗수르로 사로잡혀 갔어요. 하나님의 백성에겐 엄청난 사건이었죠. 숱한 전쟁을 겪었고, 많은 재앙을 당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도 땅도 다 사라졌어요.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절망의 사건입니다. 도대체 어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은 7절부터 41절까지 하나님이 그 이후를 자세히 설명해놓으십니다. 판결문 선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참았던 하나님이, 미안하시기도하고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돌아오라고 애정을 갖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길게 반복하시는 말씀에 우리도 길게 반복해서 들어야합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냥 지나갈 순 없습니다. 같은 말이어도 날마다 다르게 들립니다. 북이스라엘은 산당을 세우고, 앗세라상을 세우고, 중간엔 또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죄가 많아서 '또'가 반복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가 읽기 어렵지 않도록 한 단어로 맨 앞에 두십니다.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일인데요, 어떻게 행했다고합니까? "점차로"행했다합니다. 예전 개역개정에는 '가만히'로 해석되었었는데, 안들키면 계속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의로운 일은 드러나도 하기 힘들지만, 불의한 일은 드러나지 않으면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 본성과 딱 맞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저절로, 점차로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에 바늘만했던 죄가 점차로 젓가락, 그리고 방망이만큼, 그리고 아세라상이 됩니다. 아주 점차 온도가 올라가는 물에 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언젠가 익어 죽습니다. 망할 일이 반복되면 망하는 거예요. 흥할 일이 반복되면 흥하게 돼 있어요. 사소해도 점차로 행하는 대로 양쪽의 결론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의 바늘은 간 곳이 없고, 처음부터 기둥이었던 것처럼 이 기둥이 진실이 되는 거예요. 이 과거를 생 각을 하기 싫어해요. 생각 안 해요. 그래서 본문에 ‘세우고’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산당 세우고~ 목상 세우고~ 아세라상 세웁니다. 뭘 자꾸 세우려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행복을 세우고~ 이름을 세우고~ 업적을 세우고~ 인기를 세우고~ 권력을 세우려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바벨탑을 높이높이 쌓아서 이름을 내려는 우리의 기복적인 욕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 그런 바벨탑만 높이 쌓는 이방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11절 말씀처럼 하나님 백성이 ‘이방 사람 같이’ 행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이방 사람을 따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처럼 산당을 세우고, 목상을 세우고, 그렇게 온갖 우상들을 세우고 또 세웁니다. 우상의 종이 되어서 그 앞에서 분향하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걸 그냥 가만 놔두실 수 있겠습니까? 이방 사람이 우상을 섬기면요. 이방 사람은 물리치면 그만이죠.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이방 사람 같이’ 하니까 문제예요. 하나님이 격노하십니다. 내 새끼가 잘못하는 거는 봐줄 수가 없는거예요. 그래서 이미 수도 없이 하지 말라고 돌판에도 기록하시고, 선지자를 계속 보내셔서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이 내 새끼 이스라엘이 듣지를 않아요. 듣지를 않아요. 정말 어떻게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어요? 하나님의 내 새끼인데. 사랑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멸망의 사건이 온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건 우리가 이렇게 내가 몰래몰래 반복해서 저지르는 불의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돼요.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 있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 봐야 할 불의는요. 자꾸 몰래몰래 세우고, 또 세우는 불의에요. 안 걸리니까 반복해서 점차로 크게 저지르고 있는 각종 죄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에게 큰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야? 사람들 다 그러잖아? 저쪽은 더 해요~ 다 마찬가지라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이런 게 바로 이방 사람같이 산당에 분향하는 거예요. 요즘은 정말 남탓전쟁중입니다. 힘있는 기관들이 전부 같은 편이 되어 아주 대놓고 협박을 해대니 막을 수 없습니다. 고향사람이 한 편이되어 한 목소리를 내니, 다른 소리를 낼 수가 없겠더라구요. 예수님이 고향에서 다른 소리를 내니 대접을 못받고 도리어 낭떨어지에 밀어 죽이려했죠. 내 이해타산과 반하면 합세해서 한 사람 죽이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희는 이북출신으로서, 남한땅에 저는 고향이 없죠, 더 무시받는 38따라지 아니겠어요? 그런데 고향에 있는 분들이, 이 조그만 땅에서 왜 그럴까요. 이해가 안되다가 자꾸 그 편에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됐어요. 저는 친척들이 없으니 말하기 편하죠. 그런데 제 친척들이 4촌부터 8촌까지 거기에 있으니 내가 어떤 얘기를 했다가는 누구 하나의 마음에 걸리겠죠? 그러니 이 마음이 너무 심각해요. 만세전부터 대구 광주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성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본이 될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해요. 다들 걸려있기에 제가 누구 편을 들 수 없어요. 북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안 걸리니까, 점차 몰래몰래 짓던 죄가 커지니 이제 막을 수 업게 됐죠. 바늘이었을 땐 돌이키기 쉽지만 기둥크기가 되니 이제는 걸린 게 너무 많은거에요. 죽던지 불나방처럼 돌진하던지, 방법이 이것 밖에 없는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시면 인간론이 다 나와야있어요. 모든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방식 따르기를 너무 싫어하세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안 들어요. 주님이 바알숭배를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 성전에 기둥이 되시기 때문이에요. 내가 죽어지고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 기둥입니다. 회개하고 나를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잘 지켜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 기둥으로 사는 것, 이것이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옳고그름에서 빠져나오는 비결이에요! 적용질문 요즘 제일 부러운 이방 사람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바알 기둥을 세우고 싶습니까? 오늘 인정 하고 고백해야 할, 내가 점차로 행하고 있는 불의는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성전 기둥인 것을 믿습니까? [차에 대한 집착으로 차를 새로 바꿨다가, 사자마자 후회했다는 나눔] 둘째,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13-16)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20년을 보내고 보내도, 또 안들립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은 "돌이켜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는 불의에서 아는 수준에서만은 안되요. U턴해야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야합니다. 다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요? 돌이키는 건 어렵고, 떠나는건 더 어렵죠. 몸에 안좋은 간식끊기, 술 담배 끊기는 더 어려운데, 그것보다 짜릿한 악에서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떠나겠어요!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7:9-18
  • 안식
2025 0119 종이 되어(열하 17:1-8)
1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7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스마트폰 잃어버린 적 있으세요? 요즘은 전화 안에 모든 정보가 있어 한 번 잃어버리면 큰일입니다. 한 조사에서, 한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5시간 화면을 본다고 해요. 잠자고 일하는 시간 다음으로 많지 않나 싶은데요, 스마트폰의 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가 나옵니다.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호세아가 이름 값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오히려 세상 왕의 종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습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종이 되어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세상 왕이 두려워 조공을 드립니다. (1-3) 1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아하스 12년에 호세아가 9년간 다스렸는지, 연대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남유다에서 다시 북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주인공은 19번째 왕 호세아입니다. 이스라엘은 반역으로 왕이 되고 9번이나 반역이 일어났고, 이 호세아 왕조가 마지막이 됩니다. 참고 참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심판을 허락하십니다. 9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셨고 사건만 주시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도 주십니다. 엘리야, 엘리사, 계속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합니다. 제사장 호세아는 음녀와 결혼시켜, 로암미와 로르하마 같은 아이들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을 깨닫고 보여주게합니다. 2절에서, 그 전 왕들과는 다르다고합니다. 호세아 왕은 새 우상을 만들지는 않았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하는 걸 막지는 않았습니다. 또 반대로 예루살렘 내려가는 것도 막지는 않았습니다. 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그러나, 이 호세아는 악이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음식이 상하면 조금 상하던 많이 상하던 똑같듯이요. 나는 너의 심복입니다, 앗수르왕에게 했습니다. 이에 호세아가 다르게 행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앗수르가 무서워서 왕의 '종'이 됩니다. 예배 적용은 좀 바뀌었는데, 삶의 적용은 한결같아요. 악이 너무 평범해졌기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 안에서 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지듯,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주인을 달래려고 조공을 드립니다. 이젠 아람도 같은 편이 아닙니다. 앗수르가 정말 무서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공은 하나님의 소제를 가리킬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지난 주 앗수르 제단이 마음에 들어 하루종일 예배드린 아하스 왕이 기억나십니까? 비슷한 모습으로, 호세아 왕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무서워 지극정성 조공을 바칩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이아닌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섬기지는 않나요? 앗수르의 종이되는 건 수치스럽고 싫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는 꺾을 자가 없죠. 권력을 유지해야하니 어쩔 수 없이 조공을 바칩니다. 세상 왕의 조공이 되는 건 말 자체로 부끄럽지만, 힘 있을 때 충성하던 사람들도 권력이 없어지면 바로 다른 사람한테 줄섭니다. 힘 있을 때 받는 충성은 진짜가 아닙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 뭐라고 부르시는지 아세요? '종'이라 칭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종, 아브라함, 이삭, 모세 ... 또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하고 부르십니다.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합니다. 세상 왕의 종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종은 사명을 얻고 사명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왕의 종으로 살면 늘 조공을 바치며 두려워 떨어야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서워하는 세상 왕이 있습니다. 직장 상사, 자녀, 배우자, 학교에서는 선생/교수가 두렵습니다. 친구가 두려울 때도 있죠? 요즘 교회는 성도가, 목사가 두렵습니다. 돈,건강,성공을 잃을까 두려워요. 어떻게합니까? 조공을 드리죠. 내열정 시간 비용 등,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애씁니다. 결국 세상 왕이 두려워 매여있는 모습입니다. 섬기는 주체가 세상 왕입니다. 세상 권세를 섬기다보면 마음 속에 평강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극정성으로 가르치려해도 그 사람이 두려워서, 혹은 그 사람에게 떨어질 콩고물 때문이었다면 그건 조공바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람 살리는 섬김이 아닙니다. 진짜 섬김은 주께하듯 할 때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짝지어주신 배우자를 섬길 때, 사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교회도 살고 이웃도 살고, 나라까지 삽니다! 이제 새로운 목장이 시작됩니다. 사람만 보고 사람께 하듯하면 불편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만난 목장식구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면 은혜충만 성령충만이 될 것입니다. 늘 사람이 하는 일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보통 목장개편은 20년이 지나도 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교인들이 많이 오다보니 6개월, 1년에 한 번씩 목장개편이 있어요. 보통교회에선 하기 힘든 일이에요, 목장 바꿔주면 다 떠나니까요. 사람이 하는 일엔 사각지대가 있고 이해타산을 갖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또한 하나님께 맡기며 지금은 마음에 안들어도 내년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순종해보길 바랍니다. 그렇게 늙어가길 바랍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성숙해질거에요! 이상한 목장을 만나야 거룩해져요. 그것을 기다립시다. 좋은 사람 만나서 하나도 믿음의 진보가 없는 것보다, 이상한 사람만나서 불편하고 참고, 인내하고, 섬기고 성숙해지는 것. 어느 쪽이 나을까요? 1. 내가 두려워하는 세상 왕은 무엇입니까? 조공으로 드리는 것은 무엇이에요? 2. 가정에서, 목장에서, 주께하듯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간 돈 열정을 어떻게 쓰십니까? 3. 나의 악의 양은 많습니까, 적습니까? [교회 오고 내내 불평하다가, 딸이 배반하니 (하버드에 가서 대들고, 뺨을 때렸다가 경찰에 끌려감)정착하게 됐다는 집사님 나눔] 없는 살림에 진학개혁으로 하버드에 보내놨더니, 자녀들이 인권을 운운하며 아빠를 접근금지까지 신청. 2. 가짜 구원자 찾다가 사로잡혀 갑니다. (4-6) 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호세아가 앗수르 왕의 종이 되어, 억지로 조공을 바치다보니 해마다 너무 힘들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명색이 믿는 사람으로서 이 오랑캐에게 아무리 바쳐도 끝이 없다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 누가 날 구해줄까, 내가 어떻게 벗어날까 싶어 생각 난 사람이 애굽 왕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언제나 돌아가고싶은 곳입니다. 400년이나 노예로만 살았는데, 그 노예노릇에서도 건져주셨지만, 그 고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애굽 왕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애굽 왕이 실력도 없는데, 우리가 힘 없을 땐 서로 친구아니냐며 잘 대해줍니다.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앗수르에게 조공을 끊었습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7:1-8
  • 안식
2025 0112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 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과 같지 아니한 아하스 이야기가 지난 주에 이어서 16장 전체에 기록됩니다. 본받을 게 하나도 없는 아하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할애하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지 아니하고 영적 질서를 비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하고 빼앗깁니다. 해석이 아닌 해결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도 유다 왕들도 모두 가장 문제는 산당을 폐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산당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아하스의 이런 이야기를 역대하와 열왕기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5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보게 하라고, 악의 평범성, 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망할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18절에 앗수르 왕을 두려워한 아하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 제단을 들여옵니다. (10-13절)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국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에 도움을 청합니다. 현금까지 바치며 부탁하니 앗수르 왕이 아람 군을 멸망시켰고, 그 감사인사로 다메섹에 갔다가 앗수르 신에 대한 제단에 눈이 돕니다. 당시 디글랏 빌레셀이 머물렀던 진영 내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제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스가 입이 떡 벌어집니다. 자기가 봤던 산당의 제단과는 비교도 안되는 제단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크고 멋졌습니다. 그 제단이 탐났어요. 그래서 앗수르가 가는 곳마다 이기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드니, 열등감에 허덕이는 아하스는 최고만 보면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진짜같은 복사품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게 얼마나 급한지, 당장 만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야가 왕의 지시대로 모두 행하니, 아하스가 복귀에 맞춰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야는 여호와는 빛이시다 라는 뜻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제사장 직분이었음 - 왕의 지시를 직접 받는 것으로 보아 대제사장 같습니다. 이 사람이 지시를 받고, 그게 앗수르 신을 섬기는 걸 몰라서 했을까요? 이사야에는 믿을 수 있는 증인이라는 '우리야'는 지금 아하스 옆 우리야와 동명이인일까요? 아니요, 같은 사람 같습니다. 평안할 때는 우리야도 진실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을 겪고 힘든 고난을 겪게되니 사명을 잊고, 그저 자기 목숨 부지하는 게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환경 앞에 장사가 없는 거에요! 이것이 인간됨의 한계입니다. 디글랏 빌레셀과 아하스는 소위 서로 '진실'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겠죠? 그러나 하나님없이는 진실한 관계는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사람은 진실로 진실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가 자기를 위해서만 제단을 쌓는 사람이니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하는 아하스였으니,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왕이면 뭐하고, 대통령이면 특별할까요? 성경으로 우리는 인간론을 배웁니다. 아하스가 돌아와서 무슨 짓을 벌입니까?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돌아와, 보고, 나아가, 드리되, 불사르고, 붓고, 뿌리고⋯ 카이사르 왈, 왓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는데 아하스는, 왔노라 보았노라, 앗수르 신께 제사드렸노라! 입니다. 제단만 보면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할 수 있는 건 우상숭배 뿐이에요. 우리도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안보이죠? 그래서 우상 사랑이라고 하지않고, 우상 숭배라고 하죠. 여자를 얻기까지 못할 짓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아하스도 같은 마음으로, 앗수르 왕의 마음을 얻기위해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는 제사장이 대신 드려줘야하지만, 앗수르 우상에게는 자신이 직접합니다. 아마도 한때는 진실됐는데, 우리야도 이 제단을 짓고나서는 같은 배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평소에 우리 마음에 쌓던 것을 봅니다. 아하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만 가능해요. 사람은 정직하지 않아요. 아하스는 크고 높은 것들을 동경하고 사모했습니다. 한 나라 왕이 쫓는게 이 따위 수준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유다 왕이 선도를 해야하는데, 상아궁도 그렇고 마음을 빼았깁니다. 아무리 반역을 해도 상관없어요.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는 모든 것은 도구일 뿐입니다. 아하스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을 폐하지 못하였더라로 나오는 유다 왕들의 평가지만, 지금은 악의 평범기준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수 마음대로 믿는 거에요. 아무데서나 예배드리고, 이것만해도 괜찮지않아? 계속 이렇게 됩니다. 드디어 산당을 폐하지 못하는 것을 너머, 산당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기까지 합니다. 금송아지를 가져오고, 심지어는 앗수르 왕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더해서, 앗수르 신을 위한 제단도 따라 짓습니다. '나도 갖고싶다. 나도 저런 제사 드리고싶다. 나도 앗수르 왕처럼 되고싶다' 쌓아놨던 욕심이 폭발합니다.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는 것이죠. 하나님의 거룩한 토성에 가져옵니다. 우리도 평소에 우러러보고 질투나고 탐나던 제단들이 많죠? 말 잘 듣는 아내, 인기,명예, 수 많은 앗수르의 제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은 내 손에 없는 그 제단을 내 손으로 움켜쥐고 싶어서 그 바깥에 있던 제단을 우리 집으로 들여오고 싶어 안달이 나는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이 제단으로 치환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잘되는 이야기도 원리를 가져와야하는데, 행위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꽂혀서" 가져옵니다. 성경공부 역시 그 예가 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게 됩니다. 붙는다고만 하면 못할 게 없는 우리가 보아야할 진정한 제단은 -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불살라지신 제단입니다. 내 생각을 딱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것입니다. 너무 싫은 상사에게 무릎 꿇고, 이혼을 멈추는 길.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여전한 방식으로 날마다 드려야할 제단입니다. 내 가정에도 든든히 세워야 할 영원한 제단인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큰 일이 오기 전에 우리가 작아보이는 큐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큰 십자가 져야 할 일이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을 때, 말씀에 의해 세상 무서움, 두려움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말씀 묵상을 열심히 해오는 사람은 어떤일에도 띵크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앗수르 왕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내 삶에, 내 집에 들여오고 싶은 크고 화려한 ‘그 제단’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진실하게 “안돼” 해야 할 요청이나 부탁은 무엇입니까? 내 욕심을 꺾고 십자가를 길로 놓고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술문화에 대한 나눔하신 목자님] 술로 관계가 너무 쉽고, 술을 안 먹으니 - 입김이 점점 약해지고 친밀함이 없어지는 두려움. 이번 회식때 일찍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제 너무 재밌었다는 얘기에 꽂힌 이야기. 2. 여호와의 앞 자기 자리를 옮깁니다. (14-17)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제는 앗수르 제단의 복제품 새 제단이 생겼어요. "역시 앗수르제가 좋아!" 결국 여호와의 앞에 있던 놋제단이 새삼 찌질해보입니다. 만들어진지 230년이 더 지났으니까요. 크고 화려하고 세련된 앗수르식 새 제단과 비교가 됩니다. 아하스는 어떡했습니까? 성전이 서쪽, 제단이 동쪽인데, 놋제단을 북쪽에 있다가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버리기는 어려운 계륵같이 됩니다. 이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성물인데 말입니다. 십자가를 슬그머니 옆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왜 아람이 쳐들어왔는지를 띵크해야하는데, 어떡하면 이길까/회복될까/잘 살까만 고민하게되니 꼬입니다. 병원에도 환자들이 많이 서있는데, 이 사이에서도 낫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 로비에서도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먹어라 저것먹어라, 이게 좋다더라 ... 예전 놋제단을 완전히 치우지는 않고 옆자리로 둡니다.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6:10-20
  • 안식HAUS
2024 1229 보내어 치게 하셨더라 (열하 15:27-38)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드디어 202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1년 여러분을 찾아왔던 손님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사람 손님일수도 사건 손님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들교회는 거주할 처소를 세우리라는 표어대로 힘차게 달려 왔습니다. 올해 처음에 대구 채플을 시작으로 송구영신예배때는 광주 채플을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띵크 목회자 세미나, 띵크 트립을 하며 섬겼습니다. 곳곳에 도피성 교회, 안전하게 거주할 처소가 세워지길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이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 후원을 기쁘게 받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손님중에는 생각하면 반갑고 감사한 분도 있지만 불청객도 있습니다. 오늘은 2명의 왕이 나옵니다. 북이스라엘 베가와 남유다 요담 왕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보내어 치게 하시는 심판을 겪습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어 치시는 심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내 멋대로 살면 불청객처럼 심판이 옵니다. (27-29)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지난 주일 브가야를 반역하고 왕이된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20년을 다스렸다합니다. 연대를 따라 계산해보면 8년인데 왜 20년을 통치했다 할까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12년이 문제입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해봅시다. 바로 12년은 므나헴의 10년과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다스린 2년입니다. 그 전의 살룸은 개혁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개적으로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죠. 유효기간이 겨우 1달이었습니다. 약점을 보일 틈이 없이 죽었습니다. 화끈하게 굵고 짧게 타올랐던 왕이었습니다. 반면 므나헴은 자기 손으로 다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 앗수르에게 은 천 달란트를 바치며 대내적으로는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살룸은 이상주의자, 므나헴은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살룸은 이상을 제공했다면, 므나헴은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베가가 므나헴 밑에서 장관으로 녹을 먹고 살았지만, 이 베가는 특별히 옳고그름이 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무서운 므나헴 밑에서 잠잠하다, 약한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니 2년만에 즉시 반역하여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됩니다. 우리가 죽고 죽이고 하잖아요 성경의 시대에는 이것이 놀라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옳고 그름의 버튼을 누르면 이게 객관적으로 보이기 어렵습니다. 이혼을 막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봐야합니다. 모든 것은 일원론입니다. 베가가 왕이 되니 적폐청산을 했겠죠? 동시에 무엇을 주장했을까요? 므나헴 왕조는 가짜다, 살룸의 대역죄인, 반역의 주동자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로 므나헴 왕조를 역사에서 지우고 그 12년을 내 역사 통치에 편입하겠다!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함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추진한 정책은 대 앗수르 외교였습니다. 므나헴은 은을 주고(부자들 은을 강탈하여) 친 앗수르 정책을 폈죠? 베가는 그 정책을 당장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리고 손 잡은 곳은 철천지 원수 아람입니다. 공동의 적 앗수르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람과 동맹을 맺습니다. 보세요, 베가는 브가히야의 경호대장을 할만큼 신임을 얻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속으로는 엄청난 반역을 꾸미고 있었죠. 속으로는 자기가 반역하리라 하는 마음이 없었겠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가니까 반역합니다. 이렇게 모순적 삶을 살게 됩니다. 한마디로 베가는 제멋대로 산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장관은 못했겠죠. 드러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너무 믿음직한 사람이니 므나헴부터 브가히야까지 경호대장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속은 제멋대로의 인생이었습니다. 지금 이상한 역사의식, 이상한 명분으로 국내 질서 국내 정세 이런것 하나도 상관없이 밀어붙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됩니까? (29절)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이 사건으로 디글랏 빌레셀이 세운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공국이던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 맺어 반란을 일으키는데, 앗수르가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는 내용입니다. 베가 입장에서는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 옵니다. (이는 앗수르 왕입니다.) 조공 천 달란트를 바친 나라에 2차침공을 온 셈입니다. 5년 동안의 날나 예산을 받은 입장인데, 또 옵니다. 설마가 사람 잡습니다. 베가는 자기가 준비를 한다고, 온다해도 아람과 동맹했기에 막을 수 있으리라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너무 막강합니다. 항상 원칙대로가 아니라 내가 준비하면 안됩니다. 최북단 납달리 영토를 결국 빼앗깁니다.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 역사 중 첫 포로사건이 이렇게 발생합니다. 앗수르라는 불청객이 스스로 왔겠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때부터 읽어내려와서, 이게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 인생의 결론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식, 구속사가 없다면 우리 삶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계속 있지만.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이 없네요, 이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유다는 하나님이 보내셨다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엘리야, 엘리사를 보내어 또 부르고 불렀으나 듣지 않은 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한 왕만 남았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이 없으면 내가 구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내 멋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가 끝나며 마지막에 하는 것이 불신결혼, 이혼 하지 말라고 불신결혼, 이혼을 하는 것의 가장 큰 이유가 십일조를 안하기 때문에 신앙 고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이 얼마나 믿었던 부하들에게 죽습니까? 항상 원칙이 중요합니다. 사소한것 같아도 목장에서 나누면 나누면서 정리되는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능적으로 목장에서 반대할 거라 생각하면 안나눕니다. 욕심이 있어서 뒤에서 내 멋대로 하는 것입니다. 2024년 마지막 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하겠습니다. 한 해 얼마나 잘 묻고, 들었는지 생각해봅시다 1. 인정할 수 없는 윗질서가 있습니까? 내 멋대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대놓고 내 멋대로입니까? 뒤에서 내 멋대로 입니까? 내 삶의 불청객은 누구입니까? 3. 내 멋대로 한 일의 결론임이 인정 됩니까? 내 권세로 지우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돈에 대한 탐심 나눔들 - 동업, 불신교제, 돈 이야기] 2.좋은 조건이라도 여호와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30~34)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베가가 적패청산을 하며 추진한 반 앗수르 정책의 결론은 납달리 영토의 상실입니다. 잃어 버린 후에 아니면 말고 하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거기 살던 사람들이 다 잡혀 갑니다. 그러니 정권이 유지 될 수 없고,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또 반역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한결 같이 제 멋대로 행하는 북 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봐야 하는데, 개혁을 외치며 자기 멋대로 하니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완전한 멸망의 눈 앞에 서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사람을 쫓습니다. 인본주의이기에 신본주의를 알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안들립니다. 사울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그 한마디 말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구속사로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베가가 제 멋대로 행하며 심판을 향해 돌진 할때, 남유다 상황은 어땠을 까요?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열왕기하 15:27-38
  • 안식
2024 1222 평생 자기 손에 (열하 15:16-22)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3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우리는 돈이나, 힘이나, 인기를 가득 채우면 행복할 것 같아서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도 않고, 채운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자원의 저주). 우리 므나헴이 우리의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므나헴을 통해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생 자기 손에> 움켜쥐려는 삶은 1. 폭력이 삶을 지배합니다(16-18절)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오늘 주인공 므나헴은 한달 천하의 살룸을 죽이고 왕이됩니다. 므나헴도 살룸같은 장군출신입니다. 그 보다는 충신이었는지, 그는 살룸을 인정하지 못하여 반역자를 처단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왕이됩니다. 별 인생이 없네요? 자기의 의로 반역을 하긴 했는데, 왕이 되자마자 자기처럼 반역자가 생길까봐 즉시 요새마다 충성맹세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딥사는 아람의 다메섹보다도 더 북쪽 성읍입니다. 이윽고 나라가 남북이스라엘로 나뉘며 지배권을 잃었다가, 여로보암 2세때 다시 차지합니다. 그러니 딥사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충성심이 있겠어요? 상황이 바뀌면 바로 돌아설만한 곳입니다. 충성서약을 그렇게 딥사는 하지않았습니다 (성문을 열지 않아) 므나헴은 권력을 움켜지려는 큰 사람이었고, 변방에서 위협할 수도 있었지만 아예 치러갑니다. 한번 기회 줬으면 끝입니다. 폭력의 정도는 장난이 아닙니다. 성읍 지도자 몇명을 처단한 게 아니라 딥사 모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칩니다. 딥사 뿐만아니라 그 사방까지 칩니다. 아주 그 일대에 적용된 듯하고, 아이 밴 부녀까지 찢었다고 해요. 당시로서도 너무 끔찍한 행위에요. 딥사에 씨를 말립니다. 딥사의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치고 또 치는 폭력. 잔인한 폭력이 므나헴입니다. 그의 삶을 지배하려는 힘은 폭력입니다. 대체 왜 므나헴은 이토록 폭력을 쓸까요? 일벌백계로 반역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입니다. 므나헴 손에 안들어오면 이렇게 된다? 경고의 의미입니다. 므나헴의 왕권을 움켜지려는 그 손아귀힘이 이렇게 쎄네요 권력욕이 엄청 세고, 욕심이 죄를 낳듯 폭력을 낳았습니다. 이 폭력도 욕심도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므나헴 안에는 근본적 악이 자리합니다.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합니다. 스가랴는 6개월, 살룸은 1개월인데 므나헴은 10년입니다. 폭력에 의지한 통치가 성공해보입니다. 폭력이 참 무섭습니다. 매 한 번에 누구든 고분고분해집니다. 감히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그 예시입니다. 3대가 내려오도록 거역을 못합니다. 므나헴에 가공할 만한 악이 16절에 먼저 나오고 순서가 바뀌어 또 나옵니다. 6개월, 1개월 후에 10년의 근거가 이 무서운 폭력정치입니다. 그러나 10년 간 므나헴이 한 일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한 줄 뿐입니다. 칼을 휘두르며 폭정했기에 '왕권'은 지켰겠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냥 그건 악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런데 므나헴에게만 붙은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평생"이라는 게 하나 붙습니다. 그의 모든 나날에서 여로보암의 죄와 하나가 되어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악하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를 못 대는 죄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 죄에 푸욱 빠졌습니다. 지정의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교만이 꽉 찼답니다. 그러니 죄의식도 없겠죠. 자신을 평생 숭배하며 사니, 무엇을 움켜쥐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했겠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그랬더니 두려워 벌벌 떱니다. 자신이 육신의 노예고 교만의 노예가 됩니다. 폭력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도 폭력에 약합니다. 자식 아내 식구들에게도, 층간소음으로 괴로운 이웃관계도 그래요. 내가 시끄러울 때는 이웃이 없었으면 좋겠고 내가 조용할 땐, 이웃들도 조용했으면 좋겠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내 뜻대로 좀 목장 식구들도 내 손아귀안에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이 통제안되는 목장은 내가 함께 고통을 겪겠다는 순종입니다. 집단 상담이 얼마나 비싼 줄 알죠? 집단 상담을 우리는 무료로 받고, 결혼하고 회사를 가요. 얼마나 목장이 유익한 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목장에서 미리 배움은 금주고도 못삽니다. 나라는 또 어떱니까? 서로 남탓하며 옳고 그름 따지는 건 제일 쉬운 것입니다. 각자의 기준대로 결정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발작버튼 누른다는 표현을 쓰듯, 우리의 "계엄, 반역, 진영"등은 다 버튼입니다. 언론은 이런 버튼을 부추겨요, 전부 비즈니스라 그렇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죠? 그 둘을 보고 헷갈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발작버튼이 눌려 감정이 폭발한 후엔 솥뚜껑보고도 놀랍니다. 우리가 5천년 역사에도 지고도 못사는 국민성을 버리지를 못해요. 옳고그름의 화신인 한국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손에 들어와서도 안되는 것을 움켜쥐려는 므나헴의 죄를 기억하세요. 내 손 안에 들어와야한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여로보암의 악한 죄를 '평생'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우리 나라 - 10위권의 나라가 되다보니 마구 이 성격을 써댑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예시) 우리 모든 국민들이 망상환자같아요, 부정도 긍정도 하지 말아야 할 시대같습니다. 이런 때가 참으로 위기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망상환자의 때를 모두 보냅니다. 목장에서도 믿음이 천차만별이라, 이럴 때 직선적으로/옳고그름으로/아니고 기고 하면 안됩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아야하는 목장에서 해가면서 '그러게요', '알았어요' 해야합니다. 우리들교회에서 목장나눔하듯, 다윗도 살기위해 거짓말을 하듯 해야합니다. 블레셋도 다 속아넘어갑니다. 거짓말에만 초점을 맞추면 누가 옳고그르겠습니까? 적어도 다윗은 백성들을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나머지는 자기의 정권과 유익만을 위해 거짓말 합니다.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단정적으로 하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의 분량에 맞게 잘 분별해야합니다. 큐티는 이럴 때 일수록 구속사의 말씀으로 중심잡길 바랍니다. 뉴스에 휘둘려서 감정/시간/에너지 낭비 하지말자구요. 우리나라가 잘 사는 데 집중하지 말고 벌 받아야 하는 건 벌 받고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요즘 무슨 일로, 누구에게 분을 냅니까? 치고 또 치고, 찢고 또 찢으려는 폭력에 지배당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평생 떠나지 않고 있는 금송아지 숭배는 무엇입니까? 2. 돈만 의지합니다(19-22절)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아요. 구속사로, 나쁜 부모 좋은 부모가 없이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라고 했듯 구속사로 바라봐야합니다. 분해서 학교도 못가고 직장도 못가면 안됩니다. 므나헴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참다 참다 불을 보내십니다. Fire가 아니라 29절에 리그랏 빌렛 3세 - 앗수르 왕을 보냅니다. 앗수르의 영토를 두 배나 넓힌 왕입니다. 이 사람은 지중해로 진출 하는 항해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칩니다. 최대 강대국 앗수르가 쳐들어 옴은 므나헴에겐 최대 위기입니다. 앗수르에게 잠시 후 나라가 없어져요. 마지막 때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폭력으로 자기가 꽉 쥐고 있는 왕권을 잃도록 앗수르를 보내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콜링입니다. 그러므로 돌이켜야합니다. 그러나 므나헴이 초점맞춘 것은 머니머니해도 돈입니다. 큰 부자들에게서 강탈합니다. 은 50세겔은 최소한 2천만원은 넘는 1년 연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6만 명 정도에게 강제로 빼앗아 은 천 달란트 마련합니다. 5년 치 나라 수입을 한 번에 불에 조공 바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원어를 보면 평생 자기 '손'에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똑같은 선택이라도 이게 나를 위함인지 나라를 위함인지 하나님과 본인은 알아요. 불의 손이 자기 편을 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앗수르 왕의 손에 사로잡힌다 할지라도 '나라'만 자기 손에 쥘 수 있다면 자기가 종이 되어도 상관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돈 받고 앗수르 왕이 떠납니다. 평생 속국처럼 비위를 맞추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나헴이 자기 권세를 위한 작전은 성공한 것입니다. 온 백성이 므나헴 손에, 므나헴은 앗수르 손에 사로 잡힌 것입니다.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반역으로 왕권을 움켜쥔 므나헴은 자기도 반역당해야되잖아요? 그런데 천수를 누리고 가는 거에요. 그리고 아들 브가히야까지 왕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다 이루고 가네요. 공포정치를 통해 반역자도 막았구요, 앗수르 침공도 돈의 힘으로 극복했어요. 자기 손에 움켜 쥔 것 아무것도 뺏기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나 므나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한마디로 '악'을 행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을 떠나지 않았다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보신 인생이에요. 아무리 다 쥐어도 뭐해요? 그저 악행하고 자게 된 인생입니다. 앗수르를 보내심은 마지막 콜링입니다. 네 손에 움켜쥔 욕심 좀 버려봐!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므나헴은 자기 손에서 힘을 빼지 않고 더 세게 움켜쥐었어요. 왜냐하면 그 힘이 있으니까요. 힘이 없었다면 저절로 놓았겠지만, 그에게 힘이 있었습니다. 재력보다 무서운 게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므나헴은 부자들을 마구 강탈해낼 힘이 있었던 것 입니다. 영끌해서 모아 둘 돈도 있었습니다. 그가, 돈만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평생 떠나지 않는 그 여로보암의 죄를 떠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1. 주일설교
담임목사님
열왕기하 15:16-22
  • 안식HAUS
20241117 돌이키고 살지니라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요즘 선거는 전쟁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미국은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가 최악의 전투였습니다. 그 해 10월, 아브라함 링컨은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참한 전투 속에서도 농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주님은 우릴 향한 자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의 죄, 감사와 회개를 전쟁 중에 외쳤습니다. 감사와 회개는 하나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멀리서 응답이 왔습니다. 트럼프를 100% 인정하지 않아도 고레스 역할처럼 그의 공약은 아주 차별화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능도 있었는데, 합격도 좋지만 최고의 가치는 구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돌리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은 제 간증입니다. 오늘도 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죄에서 돌이킬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남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오늘도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은 죄에서 돌이키고 살 최고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시다고 합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왜 아들이 힘드냐는 뜻입니다. 힘든 사건이 찾아오면 우리의 반응은 ‘열심히 했는데, 내가 당할 일이 아니에요’ 라며 억울해 하는 것이고 남 탓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인해 조상에게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조상, 부모 탓 하면서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의절, 이혼, 버림 후에 더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계속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속담을 다시 쓰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범죄하면 죽는다고 하십니다. 사건에서 우리는 남 탓 하기 바쁘지만, 그 탓은 모두 착각입니다. 남 탓은 하나님 탓으로 이어집니다. 고난은 돌이키라고 주신 사건인데, 잘못이 없다고 남 탓만 하면 하나님을 들이박고 천국 문을 스스로 닫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해석해서 잘 풀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풀다가 지옥을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영혼입니다. 우리는 벗어나던지, 부족하던지 우리 힘으로는 과녘을 맞출 수가 없기에, 내 죄를 보라고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 탓만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에요. 무슨 일로 누구를 탓하고 있습니까? 끊으려 하는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은 제가 간증을 해보겠습니다. 장로님이 아들 전도를 안하셨어요.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라 음란보다 명예에 관심이 있던 것 같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겉으로는 땀을 흘리며 아이를 받는 의사였지만 제게 모든 것을 제한했었습니다. 혈압이 높았지만 음식물 조절부터 모든 것에 대해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만날 교회 오빠도 없었고, 먹고 살아야 하는 걱정으로 입시 끝난 날 과외부터 찾았어요. 그렇게 광야를 지나 시간을 천금같이 썼던 제가 결혼 후 부터 겪은 고난은 이렇게 힘든 광야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제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겉모습은 좋았지만 안으로 보면 율법적, 분노 조절 불가, 탓, 오해하고 수 없는 잔소리를 했습니다. 모든 일의 결국은 제 탓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억지로 내려놓는 자존심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 남편에게 밥만 축내는 인간이었지만, 병원 환자 간호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저의 자존심 내려놓는 것을 보고 저보고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문제가 생기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남편이 딱 멈추는 거에요. 그러나 그 와중에서 저도 탓하기 죄가 전염되어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속으로 남편 탓, 시댁 탓을 하며 이 결혼을 시킨 친정 부모를 탓까지하며, 그 결론으로 나는 힘이 없으니 이혼하자고 도달했습니다. 저도 부모가 되니, 부모탓을 들을 땐 참 듣기가 힘들더군요. 서로 탓함은 우리 인생의 돌이키고 살려면 탓을 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저는 땅 끝까지 내려갔습니다. 2. 공평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우리는 악인이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보다 우리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디로 돌이켜야 할까요? 27절까지 공의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인이어도 믿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말합니까?
  1. 주일설교
김양재 담임목사님
에스겔 18:1-4, 23-32
  • 안식
20241110 돌아온 언약궤 (삼상6:1-15)
주일예배 본문: 사무엘상 6:1-15 제목: 돌아온 언약궤 박재현 목사님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큐티할 때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 책과 함께 묵상하시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을 잘 자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서 잃어버린 언약궤 찾으시길 소망합니다. 1.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채워져야 합니다.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대표적인 민족이 블레셋입니다. 그들이 사는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공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보니까 전투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지역도 오늘날 가자지구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패배하고, 사기도 바닥을 쳐 전쟁을 지는 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단 전쟁터를 언약궤로 들고옵니다. 이 언약궤를 보고 군사들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큐티하고 기도했으니 하는 일이 잘 될거야 라고,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언약궤를 들고 나아갑니다. 언약궤가 성공을 위한 부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정체성과 같은 언약궤를 뺏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들고 있는 큐티책을 뺏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뺏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영광을 성공에 사용한 결과로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가 성공을 위한 예배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예배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소유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믿고 있던 다곤 신전 옆에 언약궤를 보관하기로 합니다. 이 신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물질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언약궤를 필요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악을 부르는 사건이 됐습니다. 멀쩡하던 신상이 넘어지고, 손과 발, 머리가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곤 신상의 심판의 바람이 백성들에게 갑니다. 오늘날로 치면 흑사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의 고통 소리가 하늘을 쳤다고 합니다. 1절에 질병이 7달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재앙,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블레셋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 완전한 항복을 하려고 합니다. 내 욕심과 야망도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야 내려놓게 됩니다. 그 시간이 왔다면 구원의 시간인줄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언약궤를 성공의 도구로, 블레셋처럼 야망과 욕심의 도구로 사용했던 마음이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지나친 영적 교만이 제게 있습니다. 목회자는 아껴야 하고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적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100원도 놓치지 않고 쓰고있습니다. 지나치게 거룩한 척을 합니다. 사역이 마치면 무조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안에 ‘나 정도면 좋은 목회자, 좋은 아빠, 남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으로 사니 아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내는 24살에 저와 결혼했습니다. 그 달콤한 시기에 거룩한 사모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고, 퀴즈를 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와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새 옷을 사서 자랑하듯이 물어보면 저는 그 옷이 얼마짜리냐고 물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 마음 속에 악한 종기가 자라는 것, 울부짖는 것을 보지 못했고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게 7달이 채워지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울면서 그만 살자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친 저의 의로움이 전염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교만했고 내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징계가 눈앞에 펼쳐지자 죄가 보였고, 하나님과 아내에게 두손 두발 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게 됐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여전히 가계부를 쓰지만, 땅의 언어로 바뀌게 됐습니다. 지난 주에는 울림카페에 갔는데, 성도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1. 내게 언약궤는 성공의 수단인가요? 구원의 통로인가요? 2.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주님께 돌이킨 적 있나요? 2.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 안식
20241103 여전한 산당제사(열하15:1-7)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 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그렇게도 징하게 여전히 산당 제사를 드린다고 해요. 주 님, 이게 다 우리의 문제인데 그 여전히 드리는 산당 제사를 좀 폐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27기도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수고해 주신 모든 성도 님들과 특히 청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박수로 또 붙회떨감 기도회를 수능 전에 한 번 더 해서 ‘이른비 기도회’로 또 어제 기도회를 했어요. ‘붙회떨감’은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감사인데 우리 는 여전히 세속적 감사를 너무 원하기 때문에 수능을 앞두고는 ‘떨어진다’의 ‘떨’자도 듣기가 싫은 우리입니다. 근데 오늘 아사랴는 거꾸로 해서 붙으면 감사한 것도 아니고, 붙으면 자랑하기 바쁜 거예요.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만 높였기 때문에 이 아사랴는 역대하에서는 웃시야로 불리는.. 역대하에서는 아사랴가 부국강병의 대명사예요. 근데 열왕기에서는 아무것 도 언급하지 않고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나병으로 치셨다’ 이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여전한 산당 제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어요. 산당을 제거하려면 첫째로 1. 겸손한 환경이 축복입니다 (공동 통치 24년) [1-3절] 52년 중에 공동통치하던 때 24년을 의미하는데요. 1절부터 3절입니다.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이렇게 북이스라엘, 남유다 왕들이 계속해서 번갈아 나오면 우리가 머리가 살짝 복 잡해집니다. 또 연대도 그냥 이렇게 27년... 골치가 딱 아픈데, 이게 공동 통치인지, 단독 통치인지... 너무 틀린 거 잡아내려고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충분히 틀림없이 담고 있어요. 1절에 ‘여로보암 제27년’은 주전 BC767년으로 아사랴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 해예요. 2절은 ‘그가 왕이 될 때에 16살’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24년 전인 BC793년을 의미 하는데요. 아버지 아마샤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52년 중에 공동 통치한 2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아버지 아마샤는 정직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에돔을 정벌하고 나니까 교만해져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네가 감히!!” 하면서 요아스에게 도전장을 던졌죠. 완전히 패배해서 예루살렘까지 점령되는 초유의 일을 겪었어요. 전쟁을 일으킨 책임 이 있었기 때문에 면목없는 죄인이 되어서 어린 아들과 공동 통치를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엔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반역을 일으켜 살해되었어요. 그 아들 아사랴는 이 모든 걸 다 보고 겪으며 성장했어요. 아버지가 제일 잘 나갈 때도 보았고, 최악의 패배를 당해 폐인처럼 숨만 붙어 있을 때도 다 보았어요. 그리 고 마지막에 같은 무리(유다의 반역자 무리)에게 살해되는 고통도 다 보았어요. 아 지 아마샤만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고..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북이스라엘도 밉고, 아버지를 압박하고 계속 잔소리해야 되는 유다 지도자들은 더 밉고,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은 철천지 원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특히 요아스 이후 유다 왕들이 이렇게 상처와 연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대제사장 고모부 밑에 평생 눌려 살다가 마지막에 심복의 반역으로 죽은 요아스. 그런 아버지 인생을 보면서 그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도 같은 길을 가다가 역시 반역으로 죽은 아마샤. 이제 그 상처와 연민이 아사랴에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다윗 왕가에 이런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누구도 몰랐을 거예요. 룻기부터 구속사적으로 아니 창세기부터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사랴는 참 겸손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믿고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어요. 그저 마음의 상처와 연민만 가득했고요. 왕권 또한 허울뿐이었어요. 그래도 요아스도, 아마샤도 ‘정직했다’고 그러잖아요. 아사랴도 그 성품으로 정직함을 물려받았어요. 게다가 아사랴 엄마가 예루살렘 사람 여골리야였어요. ‘여호와는 능하시다’는 뜻입니다. 믿음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이었죠. 그래서 아마샤아가 신결혼을 해서 아들을 그래도 믿음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양육은 고난 중에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역대야 26장에 이 웃시야(아사랴의 다른 이름)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같은 역사를 열왕기는 공동체 관점에서 기록했고, 역대기 는 구속사적인 개인적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요. 웃시야가 특히 그런데요. 거기에 아주 중요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역대하 26장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에 (웃시야가)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니까 웃시야가 무슨 일이든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여기의 스갸라는 우리가 ‘스가랴서’를 통해 아는 그 스가랴와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웃시야의 할아버지 요아스도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교훈을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웃시야도 스가랴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는 형통했다는거예요. 왜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어머니 여골리야를 통해 믿음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 고난 가운데 절망하거나, 다른 우상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을 거예요. 근데 그 하나님 찾았다고 하나님은 웃시야를 어마어마하게 형통하게 하셨어요. 패배 후 15년을 숨죽이며 지냈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하나님이 아니면 기댈 존재가 없는 거예요. 길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더니 그 패배가 변하여 형통이 됐습니다. 여러분 웃시야의 형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성공과 견줄만했어요. 역대하를 보면, 블레셋과 암몬을 굴복시켜 조공을 받 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중수하고, 농사도 크게 일으켰고요. 관개 수로를 다 만들고, 군대를 재건하고, 장수만도 2,600명이 넘고, 군대는 무려 30만 명이 넘었죠. 그러니 남쪽 시내 반도까지 세력을 회복해서 항구 도시 엘랏을 건축했다 그랬죠. (열왕기하 14장). 그래서 얼마나 그 형통이 컸는지 역대하 26장 15절에 보니까 웃시야의 이름이 그냥 널리 국외로 퍼졌다고 해요. 그것도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 해진 결과로 소문이 쫙 났다고 그래요. 형통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우리 인생의 상급이심을 보여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1. 여러분의 환경이 비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그래서 남을 탓하며 원망합니까? 지금 하나님의 양육을 잘 받고 있습니까? 2. 강성하니 산당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14년 부국강병) [4절] 이거는 이제 강성한 14년의 부국강병 시대를 의미하는데요.
  • 안식
20241020 여호와께서 보셨고 (열하14:23-29)
제목: 여호와께서 보셨고 본문: 열왕기하 14:23-29 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8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동네마다 무인편의점, 무인 점포가 많습니다. CCTV아무리 많이 설치해도, 훔쳐가겠다고 작정하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죠. 감시만으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감시만하면, 피할 방책을 꼭 찾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의 시선. 이 시선이 여러분은 부담스러우세요? 한 목장에서, 그럼요~ 이래야 재밌습니다. 나는 든든하기만해요! 하면 맛없습니다. 죄 많은 사람으로 재미나게 망가지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로보암 2세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을 보셨다고합니다. 무엇을 보시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 거기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할 지 생각해봅시다. 1. 나의 악한 형통을 보십니다. (23-25) 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요아스의 아들 여러보암의 4번째 왕입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큰 업적을 이어왔으니 요아스는 책임이 컸습니다. 굉장히 눌리겠죠.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합니다. 성경은 여러보암을 악의 대명사로 기록하는데도, 여러보암의 화려함때문에 엘리사를 찾다가도 자기 아이는 여로보암으로 짓네요. 41년이나 이어지네요. 북이스라엘 가운데 제일 오래동안 재위한 것 자체가 나라가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때, 영토도 경제도 인구도, 상아궁까지 가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영화를 누리는 왕입니다. 얼마나 번영했는지 아모스에 보면 양고기, 소고기를 침상에서 마음껏 먹고 악기를 만들어 파티를 열었습니다. 오일마사지를 받고, 아무 근심거리도 없었다고해요. 여호세벳의 환란에는 근심하지 않았다고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준으로도 너무 부러운데, 어떻게 그 당시 그런 영화를 누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최고 전성기입니다. 여러보암의 꿈, 조상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인생이에요. 그러니, 여러보암은 앉으나 서나 자랑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대단한 여러보암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판단을 의미합니다. 일생에서 그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악인의 형통을 주목하고 보고계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보시면, 가장 무서운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가장 안전한것입니다.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그런데, 문제는 이 악한 여러보암이 점점 잘되는 것이에요. 집도 부자고, 공부도 잘하는데 외모도 있고 결혼도 잘하는 그런 모습. 자식도 잘되고, 게다가 아이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면 너무 분이나고 박탈감이 느껴지죠. 재벌에, 학벌에, 미모에⋯ 그런 사람 있죠?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가 없으면 어떻게되느냐 이 얘기입니다. 짧은 인생이에요. 우리 중 한 사람이 젠더 이슈를 가진 한 사람이 나타나, 판사가 된다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게되는 지 모릅니다. 이제 판사 3명이 법을 통과시킵니다. 겉모양으로 예쁘고 공부잘하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21년 동안 이혼없이 청년부 내에서 결혼했을 때 잘 사는 모습은 메세지 그 자체에요. 여러보암이 점점 잘되는 것입니다. 영토가 회복하고 하맛부터 아라바바다까지 재패합니다. 하맛은 북이스라엘에 그렇게 복권하려고 해도 넓어지지 않았던 그 땅입니다. 앗수르를 아람이 밟아주기 시작해서, 아람을 진출하여 북쪽 영토를 되찾아옵니다. 남쪽으로도 에돔과의 전쟁을 이겨, 세력을 넓혀 세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할정도라고 합니다. 여로보암 대왕 맞네요! 잘 먹고 잘 살면서, 너무 악한데 날이갈수록 잘되는 표상. 우리는 이런 사람이 해석이 안되요. 이게 악한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해요. 하나님이 없는 형통은 악해요. 여러보암도 요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해요. 요나가 우리가 아는 요나 맞아요. 여러보암의 때에 요나가 활동합니다. 번영의 때에 영토를 가장 넓게 할 거라는 말씀을 요나가 - 하나님이 했다고해요. 요나가 이 악한 여로보암에게 너무 잘된다고 예언하는거에요. 얼마나 그 소식을 듣고 왕실이 좋아했겠어요? 왕실 전담 예언자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전한대로 가장 큰 번영이 여러보암의 손을 통해 일어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만 잘된다고 예언했는데, 이스라엘을 장차 무찌를 앗수르가 80년 후 망하게 만들기까지, 그 잔인한 앗수르도 못 알아보고 좋아만합니다. 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가서 전하라고 하는 명령을 그러니 요나가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러니 요나는 전지적 선지자가 아니라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를 더 쳐줍니다. 악을 행하건말건 여로보암 만세만 외치는 소리엔,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회개하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주목"합니다. 초원님이 드디어 돈을 버니까, 외도로 나가는거에요. 대단한 41년의 통치는 "악행"이었습니다.
  • 안식
20241013 패한 후 15년 (열하 14:12-22)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7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21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22 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 아버지 패한 후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할 지 오늘 말씀하여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997년 세계 최고의 체스 선수였던 카스 팔로프는 IBM 인공지능 딥 블루와의 체스 대결에서 패했지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6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당시의 패배를 인정하며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력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성장이고 성숙인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아마샤도 화를 자취하여 큰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패배 후 15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 15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어떻게 보내야만 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불쑥 찾아오는 이 패배와 그 이후 수치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패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입니다. (12-14)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북이스라엘을 치러나갑니다. 요아스 왕이 싸움을 거절했음에도 고집대로 일을 진행했다가 대패당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패했다고 하지않고, 이스라엘 앞에서 패했다고 합니다. 유다를 패하게 한 전제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거에요. 이스라엘은 그저 보고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적수동태 표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패배를 당했다는 뜻입니다. 징계입니다. 에돔의 우상을 섬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유다의 30만 군대가 스스로 무너지듯 패하여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승리를 거저 얻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 주범인 아마샤를 사로잡았습니다. 왜죠? 전쟁의 책임이 아마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굳이 아마샤가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로 소개합니다. 신복에게 살해당한 아하시야, 고조할아버지 아합 가문의 결론이죠. 아마샤가 언급되는 이유와 아하시야가 언급되는 이유가 같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오염시킨대한 죄의 징계를 언급하는것입니다. 에브라임이 여기서 또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장자처럼 취급받습니다. 유다의 중심지파였습니다. 가장 큰 문 이름도 에브라임 문입니다. 북이스라엘 군대가 에브라임 문을 허는 것은 확실한 메세지가 되겠죠. 우리가 요셉의 후손이야, 너희는 이렇게 요셉의 후손에 부셔지는거야 라는 메세지를 주는것이죠. 유다백성에게는 엄청난 수치였을 것입니다. 요즘의 기독교는 정말 큰 수치를 당하고있죠. "너희는 안돼, 개독교야!" 하듯.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모퉁이 400규빗을 헙니다. 또 금,은을 탈취하고 사람을 볼모로 잡고, 속국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아람왕에게 다 바치고 빈 곳간을 에돔을 정복하고 가져온 것들이 있어서 다시 채웠을텐데, 다시 이스라엘에게 모조리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요아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아마샤도 죽여버렸을텐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패배가 단순히 북이스라엘에게 당한 것만 생각한다면 원망과 증오만 남았겠죠. 그러나 이 패배는 하나님에 의한 사건이라고 신적수동태로 표현합니다! 사람에게 당한 일이 아닙니다. 100% 옳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합당한 징계랍니다.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우상숭배 기준으로보면 북이스라엘이 훨씬 심한 오염도였습니다. 제사도 자기 마음대로 다 바꾸고, 엘리야/엘리사 같은 사역자가 있어도 꿈쩍도 안했죠. 남유다는 산당은 내버려뒀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도 8명이나 있고,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유다를 훨씬 격하게 다루세요. 예수의 씨는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유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씨. 이것은 택자입니다. 구속사의 계보가 에브라임, 유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심이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유다에 있는거에요! 후손들의 죄를 더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모든 것을 싹 다 빼앗기는 징계로 회초리를 드십니다. 죄에서 돌이켜 살아나라고. 구원받으라고. 사람 막대기, 인간 채찍으로 징계하십니다. 자녀를 사랑하시는 진정한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는 생각도 하기 싫어요. 이기고 이기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있어요. 패배는 한 번만에도 질려요. 승리는 백번해도 즐거워요. 승리(복수)는 나의 힘! 그러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잎이 무성할 땐 밑동이 잘린 줄도 모르고 그대로 갑니다. 하지만 이런 징계를 통해, 내 한계를 알게 됩니다. 패배를 당할 때, 힘들고 슬프고 절망되지만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어제 큐티 예레미야 18장에서, 토기장이가 그릇이 진흙이 터지면 마음대로 만든다고 했죠? 아무리 다른 그릇으로 만든다할지라도, 버리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기에 패배의 사건으로 징계합니다. 사람의 결정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결정을 하게됩니다. 그러므로 무너져야합니다. 부서져야합니다. 육이 무너지는만큼 영이 세워집니다. 징계를 잘 받아들이고, 아버지께로 돌이켜야합니다. 만회하고도 남고도 남는 진정한 승리인줄 믿습니다. 1. 인정하기 힘든 패배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2. 패배하여 미운 사람은 누굽니까? 3.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징계하신 나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권고사직 당한 스타트업 회사를 원망했는데, 그 대표가 법적 조치를 받는 뉴스를 본 목자님과 초원님의 처방] 내 학벌로도 하찮아보이는 곳에서 쫓겨날 수 있는 일이 수치가 아니라 축복 중 축복입니다. 2. 15년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15-18)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7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15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안식
1
20241006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느냐 (열하 14:1-11)
제목: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느냐 본문: 열왕기하 14:1-11 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여러분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은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것이죠? 다들 당이 당긴다며 먹을 것도 없는데 계속 냉장고 문을 열거나, 음식 앱을 열거나, 아무 생각없이 먹어요. 이것을 정서적 폭식이라고 합니다. 2016년 발표된 생리학 논문에의하면, 정서적 폭식자들은 음식섭취 후 죄책감, 우울감 등 부정적으로 더 악화된다고 합니다. 폭식은 당연히 몸에 좋지 않을 줄 알지만 멈추지 못합니다. 정서적 폭식은 자기 파괴 일환입니다. 안좋은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에요. 술 바람 마약 등도 마찬가지죠. 무모한 도전, 같은 실수 반복, 자해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좋지만 결국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마샤왕도 멈춰야할 일을 멈추지못하고 화를 스스로 불러옵니다. 자취입니다. 스스로 번다구요.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느냐 라는 말을 직접듣고도 멈추지못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화를 자취하지않으려면 어떡해야할까요? 1. 회개가 없는 정직때문입니다. (1-4절) 1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아스 왕의 두 아들을 장가가게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기쁨이라는 아마샤의 어머니입니다. 예루살렘 사람이니 당연히 믿음있는 딸이었겠죠? 그렇게 아마샤는 믿음이 있게 자랄 수 있었어요.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부터 시드기야까지는 총 20명이었습니다. 그 중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했다는 평가는 8명 밖에 안되요. 아사부터 반도 안되는 사람이 정직하게 행했고, 나머지 전부 악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정직하다는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8명 뿐입니다. 최고의 환경을 갖춘 유다왕들이 이모양이면 백성들은 어떻겠어요? 북이스라엘은 기준자체가 여로보암입니다. 그가 따라갈 모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사람을 우상삼아요. 이들에게는 정직도 기대하지않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에서 떠나기만해도 칭찬해주려는데, 그렇게 한 왕이 한 명도 없어요. 최고의 개혁을 행했던 예후마저 여로보암의 길은 떠나지않아요. 이들 중 불세출의 모델은 여로보암입니다.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길처럼 정직했지만 다윗과 같지는 않았답니다. 남유다는 기준이 다윗이에요. 무엇이 기준입니까? 택자라는 뜻입니다. 직계 택자냐른 말 = 예수씨요. 모든 상황에 영육간 수준이 아주 높게 대하십니다. 이야기는 똑같은 잘못을 해도 왜 나만 달라? 조금만 실수해도, 조금만 악해도 그렇게 되는 것은 사람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라는 뜻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기대때문에, 인간 막대기와 채찍으로 사건으로, 계속 양육해가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왜 나한테만 이래! 라는 뜻의 소리는 하지마요. 수준높게 보셔서 감사하게 여기실 바랍니다. 정직히 행했지만 산당예배를 드렸다는 뜻은, 산에서 우상에게 복을 빌던 장소죠. 예루살렘이 생기기전에 산당에서 제사지내기도 했죠. 원래는 있어서는 안되는 우상숭배의 단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지어진 후 제거되어야 했었는데 남아있었고, 히스기야와 XXX만 제했기에 성군이라는 칭을 받죠. 산당은 영적으로는 비정상적 장소였지만, 너무 익숙해서 악인지도 모를 익숙했던 곳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사회전반적으로 익숙해져서 평범하게 저질러지는 악이었습니다. 아마샤 입장에서는 산당을 내버려둠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조상들 누구도 없애지 못했는데 자기가 어떻게 선택권이 있었다고 생각했겠어요? 내가 99가지를 해냈는데 한가지 못했다고 어떻겠나 하는 죄와의 타협이 화를 자취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성은 우리의 죄성이 표현됨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회에서 한 적용을 해봅시다. 악의 평범성 - 인구가 정상적으로 많다면 반려견을 키워도 괜찮겠지만, 점점 반려견이 자식의 자리를 차지해가고있죠. 하나님자리에 사람이, 사람자리에 반려견이있네요. 먹고살 길이 있는데 왜 결혼하고 자식을 낳겠냐고 합니다. 결혼도 하기 싫고, 해도 복종하기도 싫고, 그러므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에요. 아침에도 새벽에도 쪼르르 나와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나를 나와보지 않죠? 왜 쓸데없이 자식낳아 고생하나 싶은 생각이 산당입니다. 아무도 없애질 못해요. 남유다의 산당이 이해되죠? 평범한 악. 열왕기 저자는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다윗과 같지 않음으로 화를 자취한다고 하는데요 - 하나님 보시기에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같은 정직은 무슨 뜻일까요? 다윗이 정직했나요? 있는대로 죄 다 지었죠. 밧세바와 간음, 통일왕국되니 잘난척하며 인구조사했고 ⋯ 그럼에도 왜 여러보암의 길로 가지 않았나요? 바로 "회개"때문이에요. 여로보암이나 아마샤나 회개했다는 말이 아무데도 없어요. 남북이스라엘 가운데 왕이 회개했다는 말이 없네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직장, 좋은 스펙, 좋은 땅 물려주는 부모가 아니라 회개하는 모습 보여주는 상사/부모 지도자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10층에 사는 사람을 정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윗의 길은 지하1층부터 정직히 올라오는 사람입니다. 회개없이 산당예배를 드리면 -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이 화를 자취하는 길이라는 거에요. 회개가 안되니 자꾸 요아스처럼 인간적 노력하다가 3번만 치고 그치는 거에요. 우리도 반드시행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어쩔수없이 멈추는 일이 있어요. 하나님이 제거하라는 산당이라면 제거해야겠지만 신체조건,병,시스템,제도,나라,먹고살아야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가 외쳐지는 이유가 수만가지가 넘어요. 하지만 이런 타협을 계속한다면 화를 자취할 수 밖에없는거에요. 지금 당장 아무 일 없어보여도 결국 화로 이어집니다. 물론 이런 한계를 한번에 뛰어넘는 일은 없어요. 다 연약하니까요. 하지만 한번만이라도 시작해보고, 시도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타협하며 내버려둔 산당 하나 깨닫고 벽돌 하나라도 빼는 적용할 때, 우리도 구속사의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나는 정직합니까? 정직하다면 남을 힘들게 하는 정직입니까, 남을 살리는 정직입니까? 2. 복수심보다 말씀을 따라야합니다. (5-7절)
  • 안식
1
20240929 하나님의 사람 (열하 13:19-25)
제목: 하나님의 사람 본문: 열왕기하 13:19-25 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22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24 아람의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해야하는 지 알려주세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들껜 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으세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나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 이런 사람이 있으세요?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그런 사람이세요? 정치뉴스만 봐도 요즘은 내 사람이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믿는 도끼는 발등을 찍으라고 있는 것 같을 정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기억해야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신명기에 처음 표현된 사람으로 모세, 마지막은 디모데후서에 "예수믿는 사람"으로 쓰입니다. 대단한 모세부터 평범한 우리 모두까지 모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불린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에겐 7번, 엘리사에겐 29번. 거의 30번에 육박하는데, 과연 갑절의 영감 맞습니다! 1. 마지막까지 거룩한 분노로 양육합니다.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지난 주 엘리사가 14절에서, 죽을 병에 들어 찾아온 요아스 왕에게 처방했으나 끝까지 순종못하고 3번에 그치는 그를 보며 마지막까지 사명감당으로 분노하다 갈 수 있다는 걸 알게됩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한 요아스를 보며 애통하다못해 화까지 나는거에요! 왜 마음대로 3번에 그치냔 말입니다. 가족/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자기 생각으로 가득한 이 집안/나라/가문에 대한 강하고 질긴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거의 합격 이란건 없잖아요? 3번으로 참아야하는 게 됩니까? 끝까지 참아야지! 하는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예수 믿어야해. 진작 믿었으면 역사하셨을텐데! 이혼하면 안돼! 사표내면 안돼! 주식은 끊어! 화를 내고 소리를 치며, 믿으라고하며 마지막 사명까지 그럴 수도 있다는 모습입니다. 구원때문에 분노할 때,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이번에 하동균 집사님네에 방문했습니다. 하 집사님은 간암, 김 집사님은 췌장암입니다. 모든 식구를 모으고 임종예배를 드렸는데, 돌아가시기 몇일 전이죠. 영상으로 찍어뒀어요. 고통가운데서 그렇게 엄마 아빠가 싸우시다가도 임종예배로 정리됐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찍어뒀습니다. 마지막에 우린 이렇게 가야해요. 마지막에! 아멘. 저렇게 하고 돌아가십니다. 이렇게 가셔야하지 않을까요? 너무 중요한 영상이네요. 요아스는 하나님이 주셨다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이름이 너무 좋으니 남 북 왕의 이름이 이렇게 있죠. 이렇게 하나님이 다 주셔도, 마지막까지 양육을 받더라도 - 확신이 없어 3번만 치고 그칩니다. 배고파서 화가나고, 기대대로 안되서 화나고, 빼앗겨서 화가나고! 본질은 내 피해입니다. 내 피해와 손해가 생길 때, 본능적 감정의 반응이 분노입니다. 이런 인간적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아닙니다. 감정폭발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 대상은 죄여야합니다. 죄에 대한 분노는 바꿔말하면 구원에 대한 애통입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본능적분노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에서 남유다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해요. 본능적인 분노죠!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죄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십니다. 구원받아야 할 그 대상에 대한 애통함으로 주님께 이끌 때 거룩한 분노가 됩니다. 그게 양육입니다. 그렇다고 마구 분노하라는 게 아닙니다. 눈높이에 맞춰서 물어보고 대답해주고 하시길바랍니다. 양육은 받는 양육자가 아니라 시켜주는 사람이 양육을 받습니다. 말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처럼, 마지막까지 양육에 힘 씁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요아스가 다들 3번 친 것만해도 어딘데, 왜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시는지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죠? 쉬운 예를 들어보겠어요. 예전에 수요큐티모임을 시작하며 교회 시작한 때입니다. 제 책을 읽고 은혜받았다는 성도님이 1년의 기한 안에 아들이 예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본인은 아무것도 안 깨달아지는데 그 모임에서는 다들 잘 깨닫는 표정을 짓는다네요. 무언가 쓰는 사람들과 다르게 자기는 쓸 게 없다고하며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큐티는 얼마나하냐고 물어봤더니 딱 3번이랍니다. 요아스처럼 3번만 치고 그치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노해야할 때 저는 개척초기라 노하지 못했습니다. 권면을 했는데, 우리 아들이 교회 잘 나가고 있고 충분히 은혜받고 있다고 하기에 거기서 계속 은혜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저를 계속 아래로 놓고 얘기하시는데 어떤 얘기가 그 분께 필요했을까요? 믿고 얘기를 하면 날마다 이상한 얘기를 듣게되니 말조심하게됩니다. 성경을 내 이야기로 듣는 훈련이 안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곳에 가보니 은혜가 되었다하다길래 거기를 가라고 하니, 거기서 은혜는 받았지만 또 여기 큐티모임이 좋긴하더이다 합니다. 거기서도 노하질 못했습니다. 지금은 열매가 있고 교회가, 제 편이 있어서 예전보다는 많이 노합니다. 여러분은 죽을때까지 활을 땅에 치다가 가시길 바랍니다. 묵상을 계속하면 지혜롭게 사람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게 대여섯번 치는 일은, 물귀신처럼 큐티해야한다. 가정이 살아난다! 외치고 청하고 청하는 것 잘해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참 교양없죠. 추석때 몽골인들을 위한 수련회를 했습니다. 3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통역으로 했는데, 몽골인들이 모르는 한글 큐티인을 그렇게 사더라구요. 우리에게 오신 선교사분들이 계셨듯, 우리도 몽골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구절벽 한국에서 몽골같은 곳으로 이 촛불이 옮겨가진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심각하고 낮아진 우리의 예전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모습처럼 열심히 듣더라구요. 지난 주는 군 선교사 수련회에 갔습니다. 여기도 큐티인해야한다고 부르짖고 부르짖었습니다. 대회보다는 목장탐방에서 열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참 쉽게되지가 않습니다. 군선교사 수련회에 여자 강사가 처음아니겠어요? 우리 부목사님들이 체통을 좀 지키시라고 하더라구요. 어디가서 전할 시간이 없으니 시간달라고 계속 요청합니다. 마지막까지 활로 치다가 갑니다. 적용 1. 요즘 무슨 일로, 누구에 대해 화를 냅니까? 죄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까? 2. 내 손해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입니까? 3. 어떤 양육을 받고 있습니까? 그만두려 하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분노로 끝까지 마치겠습니까?
  • 안식
1
20240915 구원의 화살(열하 13:10-19)
구원의 화살 (열왕기하 13:10-19) 김양재 담임목사 10 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 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5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 16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17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18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우리나라가 양궁을 제일 잘하잖아요? 언제나 양궁 금메달을 꼭 땄는데요, 실전과 똑같이 환경을 만들어놓고 연습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제일 중요합니다. 큐티를 하고 적용을 해둬야 실제 사건이 왔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죽음을 앞둔 엘리사가 요아스에게 쏘아라 하는데요, 오늘 추석을 맞아 쏘아야하는 구원의 화살을 알아봅시다 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 쏘아야합니다. 10 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까지는 남쪽 요아스왕을 얘기했으나 오늘은 북쪽 요아스왕입니다. 남쪽 40년 동안 통치한 요아스와 겹쳐 3년을 남북으로 요아스가 통치하네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합니다. 왕들마다 따랐다하면 여로보암이고, 떠나지 않았다하면 금송아지네요. 줄창 하나님은 해대시는데, 반복하시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하신 게 무엇일 지 다시 생각해봐야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 이것이 영적인 것이고 사람 보기에 악한 것은 도덕입니다. 다시말해 끊임없는 옳고그름입니다. 어제 큐티 예레미야 6장을보면, 피난하라,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멸절한다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어제 설교하신 장로님은 어려서부터 3선 국회의원 장로님 가정에서 대대로 우월과 선민의식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저절로 목적지향적 삶과 가족우상이 있었겠죠. 여호와보시기에 악한 것이나, 아직도 그것이 피해야 될 죄로 생각이 안된다네요. 적용은 하셨는데, 모두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은 별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민의식이 너무 강해서 아직도 별인생이 없다가 아니라 있다고 생각드신대요. 부모님들도, 자기도 대학교수로서 훌륭하잖아요? 자녀들 얘기를 안하면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 자녀들이 속을 썩였지만 다른 데서는 얘기 안할 이야기입니다. 딸은 미국 유명 대학에서 대학교수고, 아들은 헌법재판소에 연구위원입니다. 다들 S대 법대죠. 구태여 그 속썩인 이야기를 안하면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일텐데, 그 속 썩인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서 도망가라는 게 인정이 안될법하죠? 제일 훌륭한 자녀는 셋째 딸입니다. 청년부에 앉아있습니다. 그렇게 이타적이랍니다. 그 딸이 왜 저렇게 남들을 위해 사는가 하는 생각이 도망가야할 예루살렘이랍니다. 여호와보시기에 악함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입니다. 청년부에서 믿음만 있으면 결혼하라그래서 믿음으로 잘 살면 좋겠는데 그렇게 삐그덕거립니다. 믿음보다는 예쁘고 돈 있는 케이스는 항상 싸웠다하면 위기입니다. 그때 부모들이 중심 잘 잡아야할텐데, 그때마다 부모들도 흔들립니다. 어떤 자매는 모든 목장에서 남편 얘기만 하는 게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다고 하네요. 목장에 자리를 지키는 게 힘들고, 생각만해도 구역질나고 실제로 구역질도 했답니다. 여자목장도 부부목장도 늘 쓴소리 듣는건 저뿐이고 남편한테 처방하는 사람은 없네요. 무슨 여자들 교화소도 아니고, 우리들교회 지긋지긋해요! 라고 나눕니다. 왜 이렇게 목장에서 그러냐면, 자고로 남자들은 잘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까 올려줘야하는거죠. 질서를 지키느라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나눔을 하니까 목자님이, 그래도 지난 주 말씀듣고 기운차리고 정신도 차렸죠? 물어보니까 전혀요! 가지도 않았어요! 했답니다. 그래도 집사님 믿음의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집사님도 믿음의 어머니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했더니, 제가 죽고싶다기보단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네요. 이런 얘기를 그래도 목장에서 하는 게 어디겠어요. 이런 얘기를 그래도 목장에서 할 수 있으니, 결혼을 지키는 비결이 됩니다. 또 다른 부부는, 둘 다 약도먹고 치료받고 신랑은 THINK양육도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싸우고 집도 나가고 하니까, 시아버지 목자님께 연락을 했더니 그들 인생이라고 자긴 모르겠다고 합니다. 자기도 케어받고 살아났으면 자기도 잘 돌봐야지요. 부부싸움이라는 건 결국 참지못함입니다. 여기 부부는 아내가 유리, 유리컵을 집어던집니다. 남자들은 짐승이되어 화가 올라오는 거죠. 되던졌다가 아내 머리를 맞고 피가 났습니다. 어떻게 폭력이 오고가면 다들 집에서 귀한 아들 딸이니까 못 참습니다. 충동적인 사태들을 들으면 정말 이혼하는 게 맞아보여요. 그렇게 말렸는데, 이혼서류를 내겠다 그러니까 모든 평초원들이 가서 기다렸습니다. 그날 접수를 고사하고 그 다음날 접수했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악해도,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택자라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죠? 그래서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선한거에요! 이 세상 제일 큰 죄는 내가 옳은 거에요. 구속사를 모르면 당신이 옳다가 안되기에, 지겹게 상대방의 악만 보는 거에요. 그러니 고난 가운데 부드러운 언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쉬운 게 안되면, 부글부글 끓어 나죽고 너죽자! 이혼하자! 됩니다. 구속사는 발상의 전환이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죄인인 인생의 만남은 해석이 안됩니다. 해석이 안되어 이혼하면 이혼 히스토리밖에 남는 게 없는거에요. 그러니 이혼은 무조건 막아야하고 안 막으면 교회가 여호와보기에 악한 교회가 됩니다! 결혼의 목적은 거룩에 두어야 행복이 옵니다. 욕한번 먹고 실직되고 집어던지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면서 목장이 무시되기 시작합니다. 목장이 무시되기시작하면 결혼생활이 어려워집니다. 목장에도 이상한 사람 너무 많죠. 목장이 무시되면 가정생활이 망합니다. 피로 값주고 산 형제자매인 우리가 목장으로 묶였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지켜야하니까 거룩이됩니다. 행복에 목적을 두니 이혼타령을 하게 되는거죠! 목사님은 어떻게 이혼에 대한 얘기만 21년동안 한 줄도 빠지지 않고 얘기할 수 있어요? 샘물같아요! - 샘물이에요. 천국갈때까지 가정얘기를 할 거에요. 남아공 대통령이고 노벨상 수상자였던 넬슨만델라는 약 30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도 이혼했습니다. 총 3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석방되고 나서 자기가 옥에 있을 때, 부인이 외도한번 했다고 27년간 옥바라지에도 이혼했답니다. 자기가 27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 외도가 그렇게 클까요? 80살에 셋째 결혼을 합니다. 옳고그름으로 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지켜도 가정은 못 지킵니다. 정치는 적어도 신념에 추앙하는 동지들이 있고, 그 안에서는 옳아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말도 안되는 것이 나를 괴롭히는거에요 (내가 큰일하는데!) 말도 안되는 배우자가 날 때리고, 외도하고, 잔소리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그 배우자가 나보다 옳다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니 감옥살이보다 더 힘든 것이 결혼살이이고, 그걸 지키는 게 더 힘든일입니다! 만델라도 이혼할 정도니 우리도 이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집니다. 애초부터 조강지처를 설득하며 기다렸어야죠. 정치를 하게끔 인도했다면 반드시 조강지처를 돌려줬겠지만, 때마다 부인을 갈아치웠습니다. 결혼은 아프리카 감옥보다도 어렵고, 재혼은 아프리카 선교보다 어려운 것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들교회가 이 아프리카선교, 감옥보다 더 어려운 결혼을 평범하게 잘 지켜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선교사가 되어 선교훈련도 안 받고 선교사가 됩니다. 언약의 최고봉은 결혼이에요. 이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하는데, 이 최고의 언약을 깨고 가서 어디서 복 받겠습니까? 수십년이 지나도 넬슨 만델라를 한국에 김양재목사가 이렇게 설교할 줄 알았겠습니까? 몇백년이 지나도 언약은 언약이고 아닌건 아닙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것은 "나를 닮아라"입니다. 내가 형편이 없어도 택자라면, 나를 닮아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해요.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지난 주 초원 나눔 : 나를 닮아라라고 퍼센티지로 앙케이트를 했더니 100%가 딱 두 분 전자동으로 옳고그름으로 생각하는 나눔입니다. 내가 형편이 없으니까요 라고 생각하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비교적 청년부 출신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결혼했으니 이혼하지 않는 겁니다. 이혼을 안하리라 믿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의 통로입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악이 없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처럼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죄악의 최악은 자기가 금송아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처럼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엉망이든 우아하든 별 인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금송아지쯤 하나씩 지고 삽니다. 절대로 엄마/아빠처럼 살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대로 살고 있는 자기모습을 발견하게됩니다. 금송아지 굴레를 사랑하면서요. 왕조가 뒤바뀌는 상황에서도 금송아지 죄에서 떠나지 못했어요. 이 죄악이 얼마나 깊은지, 그 북이스라엘에 처음 유입시킨 여로보암 왕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열왕기라고 했듯 - 그 가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매인 자들이 말갛게 쓸어버린다고 합니다. 여로보암 가문, 바사의 집, 예후의 집까지 전부 심판이 임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이 심판으로 진멸당합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엔 금송아지가 좋아보여도 무거운 짐일뿐입니다. 외모 스펙 이 모든 것들이 믿음이 없이는 무거운 짐이고 고달픈 수고입니다. 우리가 다 요아스입니다. 그래서 슬퍼요. 우리가 왕마다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 또 따랐다는 것은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애통함의 사인입니다. 여호와보시기에 악했구나 깨닫는것이죠.
  • 안식
2024 0908 간구하매 들으셨으니 (열하 13:1-9)
간구하매 들으셨으니 (열왕기하 13:1-9) 설교: 김양재 담임목사 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요즘 간절히 기도하는 게 뭐에요? 너무 간절하여 안 들어주시면 삐질 것 같은 기도제목이 있으세요? 기도를 들어주시면 좋겠지만 구하는대로 들어주시는 게 진짜 좋은 일일까요?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가 말하길,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지만 약속을 이뤄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근거한 우리 기도를 들어주세요. 우리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세요. 매일 기도가 홈페이지에 올라옵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성도분들이 계신데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간구를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북이스라엘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간구했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합니다. 우리도 간구하매 들으셨으니를 우리의 삶의 결론으로 깨달아지길 바랍니다. 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1-2) 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여호아하스 23년에 무슨일이 있었나요? 요아스가 성전수리를 시작합니다. 그때 예후가 죽습니다. 예후는 그 시대 개혁의 아이콘입니다. 45년 이어지는 오므리 왕조 - 아합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끊어내고 바알의 집을 멸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 엄청난 업적을 1년만에 행하고 온갖 개혁을 해냈으나 나머지 27년은 열심은 있었으나, 그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 생명이 아닌 사망으로 끝납니다. 요아스는 39년간 교훈 안에서 치하하다가 1년간 악을 행했는데, 이 1년과 27년을 비교해보세요. 자기 은인 아들을 1년 동안에 쳐죽인 것. 별 인생이 없네요. 1년이나 27년이나 마지막에 눈 감을 때 예수로 끝나야해요. 이것은 우리들교회에서 예수믿고 가는 분이 너무너무 많아요. 전부 구원때문에 안타까워해요. 우리들 교회를 그것 하나 때문에 지켜보호하심입니다. 그도 17년이나 왕 위에 있었던 예후 아들입니다. 예후가 하나님이 붙드셨다라는 뜻으로 지었던 것 같습니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름만 잘 지으면 뭐하겠어요? 여호아하스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한편, 사람보기엔 어땠겠어요? 위대하고 멋질 수도 있어요. 열왕기상을 계속 읽어내려보면서 여로보암의 죄를 계속 만납니다. 따라가고, 떠나지 않는 죄인 여로바암의 죄는 무엇일까요? 떠나지 못했다가 아니라 떠나지 '않았다' 입니다. 떠날 마음 조차 없었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 가장 많이 붙는 설명은 -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했다 입니다. 느밧이라는 아버지 이름을 계속 욕보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한 사람으로부터 끝나지 않네요. 온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범죄하게 합니다. 죄는 나 혼자만의 죄로 남지 않습니다. 전염됩니다. 그러므로 불신결혼하면 안되요. 불신자는 죄를 몰라요. 평생 살아도 죄가 뭔지를 몰라요. 금수저는 점점 더 몰라요. 김정은이가 죄를 알면 저러겠어요. 죄를 몰라요. 자기 한 사람때문에 온 백성들을 힘들게하고, 죄짓게 합니다. 누구도 떠나지 않는 이 죄가 금송아지 숭배입니다. 그러니 금송아지 죄를 다시 한번 봅시다. 열 지파가 따라 나갔습니다. 요셉의 후손인 여로보암이고 북이스라엘을 세웁니다. 나라가 분열됐다고 신앙까지 분열될 건 아니잖아요? 예배는 남유다에서 드려야할 텐데, 다 가고 정착할까봐 금송아지를 세워서 날마다 윤을 냅니다. 너무나 보암직한 - 그 압도되는 비쥬얼로 압도하는 동안, 제사장도 공모해서 아무나 세웁니다. 그리고 예배도 아무렇게나 합니다. 결국 정권욕때문에, 하게 된 이것을 백성이 모를까요? 알아요! 이 허름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다가 벧엘의 금송아지가 너무 번쩍 번쩍하잖아요. 머리로는 아는데, 떠나지를 못합니다. 거기서 예배드리면 병도 낫고 죄도 사해줄 것 같아요. 부모들이 거기 가서 섬기니, 속썩이고 말 잘 들어도 거기가 기준이 됩니다. 구속사니 세속사니는 자녀들은 눈으로 보고 따라합니다. 즉 북이스라엘 자녀들은 악을 아무도 떠나지 않고 선택합니다. 집안에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완전주의와 교만이 그대로 내려가서 자녀들이 이중인격자로 자랄수도 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는 완전 말 잘듣고,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도 번쩍거리는 금송아지를 누가 외면합니까! 사람이 죄인이라 따라갑니다. 이게 데카르트의 2원론입니다. 얼마나 그가 착한 소년이었는지 몰라요. 그는 좋은 아들로서 이원론의 창시자가 됩니다. 원색적인 부모의 가면을 보고 자라는게 좋을 수도 있죠. 인간은 불완전하니까요. 예수도 안 믿으면서 올바른척/훌륭한척/경건한척할 때 이중성이 나옵니다. 우리집은 왜이럴까? 부모가 왜이럴까? 이런 남편/아내일까? 이러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 인간에 대해 알 수 있게 풍토를 주셔서 감사하다 해야합니다. 나 죽고 집안망치고 나라망친 북이스라엘 가문이 되지 않도록이요. 그래도 우리는 너무 왕이 좋아요! 이 왕이랑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어! 가 우리의 주제가입니다. 결혼도 한 번 못해봤는데, 왕하고 하룻밤만 자면 너무 좋겠다 싶죠. 이게 뭘까요? 유명한 영화배우만 만나도 임팩트가 셉니다. 외모를 너무 봅니다. 금송아지가 너무 압도적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게 내 모습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감사해야하지만 결론은 예수믿지 않을 때 헛것이 됩니다. 육신은 죄의 집합소입니다. 모든 습관들이 죄입니다. 육신이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면 - 쌓여있는 그 모든 것들이 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치적은 언급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만 쓰입니다. 예수 믿기 전 성품들이 바뀌지 않으면, 예수 믿기 전의 모든 것을 놓지 못해요. 하나님 자리에 있는 한 창업주들이 그렇게 예수 믿기 힘든거에요. 부모가 잘 살면, 자녀가 그 만큼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까 교만하고 부모가 못 살아서 자녀가 잘 되면, 자수성가해서 교만하고 부모를 무시합니다. 내 육신의 습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튀어나옵니다. 조금씩 금송아지 쪽으로 하여튼 갑니다. 적용 1. 나는 여호와보시기 에 악합니까? 사람보기 악합니까? 2. 육신은 죄의 집합소라는 것이 얼마나 믿어지세요? 3. 악인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습관은 무엇이에요?
  • 안식
1
20240901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예레미야 1:1-10)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예레미야 1:1-10) 김완규 목사님 (세종 한빛교회)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목회를 할만 한 아무 것도 없는게 저입니다. 중학생 아들이 제게 ‘노력해도 안되는게 있을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마음이 공감이 되고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아들의 질문 속에서 저를 또 보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실까, 나 같은 사람도 쓰실까? 늘 그 고민 속에서 20-30대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하는 것도 없고 바보같고 몇 번을 떨어지며 들어간 작은 신학교, 성골도, 진골도, 목회자 자녀도 아니고 은사나 배경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할 때 주님이 제게 ‘너를 사랑한다’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왜 저를 사랑하시는지 질문을 했더니 ‘너는 내가 이만큼 일하면 사랑하는 줄 알지? 나는 네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아버지’ 라는 말이 처음 튀어나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준을 못 채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제 인생을 바꿔놓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적립해주시는 귀한 시간이 됐지만 이 사랑과 인도하심이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큐티를 몰랐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큐티는 내 죄와 허물을 가지치기 해가는 것인데, 말씀이 내 생각을 쳐내며 말씀의 가치관으로 서 있어야 하는데, 주야로 말씀 묵상하는 것이 형통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 안에, 이번 목세를 통해 형통은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것이라는 울림이 생기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말씀 묵상하는 삶으로 인도받을 수 있을까요? 1. 말씀 앞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아비야다 제사장의 후손이 모여 사는 베냐민 땅의 몰락한 제사장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몰락한 가문에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봤는데, 저희 외할머니께서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아들이셨더라구요. 그런데 유교 집안으로 시집가시면서 잊으셨다가 어머니 덕분에 전도받으셔서 영접하셨던 것이 기억나서 제가 예레미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잘 끌려가라는 내용이 예레미야의 주된 내용인데, 에스겔에서 그발 강가에 묶여 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잘 세워지라고 예언하는 예레미야, 다니엘도 70년만에 이것이 그쳐지리라는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 같아도 내 힘이 빠지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될 때… 예레미야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생각을 바꿔놓으십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몰락한 제사장 가문, 망해가는 나라의 소망없는 인생이 너의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우리집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인생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 외칠 사명이 있는 인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지었다, 알고 있다, 선별하고 구별하였다, 그게 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세상적 관점을 버릴 수 없었지만, 주님이 모태에서 저를 지었고 분별했고 그렇게 쓰겠다고 하시는 것을 인정하게끔 저를 바꿔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고 싶으신 그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김양재 목사님은 택자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시죠? 꼼짝 못 하는 곳에서 사명의 길 가라고 하시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믿습니다. 18년 전 저는 이곳에서 암 환자 장모님의 생각을 바꾸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처음 휘문에 올 때 셔츠를 네장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장로님은 기도해서 딸이 사모가 되었고 교회-집만 아시는 분이었기에 교회 일 열심히 하니 복 받았다는 말을 들으시다가 암에 걸리시더니 무슨 저주를 받아서 암 걸렸냐 하시며 휘문에 오셨습니다. 말씀을 들어가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됐고 기복신앙을 보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시게 하셨습니다.
  • 안식
2024 0825 큰 은총을 받은 사람아! (다니엘 10:9-14, 19-21)
큰 은총을 받은 사람아! (다니엘 10:9-14, 19-21) 김성우 목사 9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13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14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19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20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21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 청소년부 헌신예배입니다. 우리가 큐티를 다 하고 있는데, 드디어 70년이라는 시간이 다 차서, 포로가 귀환이 됐습니다. 저는 70년이 아니라 치리가 끝나고 감옥에서 귀환했습니다. 3주 전에 제주 VIPS를 다녀왔는데, 휘문의 한 친구가 저를 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 엄마한테 들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아시나보다 했는데, 입쌀놈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몇일 전에는 심방을 다녀왔는데, 저를 처음 본 여자 집사님이 권찰님에게 저분 누구세요? 라고 하시더니 "입살롬있잖아"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입이 싸서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쌌다면 부담스러워 하셨을텐데, 싼 맛에 저를 세우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좀 친숙하게 시작합니다. 9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다니엘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고등부 친구들은 너무 친숙합니다. 저는 종종 보는 광경이에요. 그런데 다니엘이 잠에 들었다고 합니다. 음성을 듣자마자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는데,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었더니 얼굴빛이 변하고 몸에 힘이 빠지고, 망한 모습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저 역시도 부모님이 심하게 싸우시면 문 밖의 소리를 외면하기 위해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잠든 채로 하나님이 두지 않으십니다.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은 1. 깨우시고 깨닫게 하시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10-11절) 10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손이 어루만지고 다니엘이 떱니다. 그리고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시는 것이죠. 원문에 보면 다니엘이 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다니엘을 어루만진 손을 어떤 학자는 가브리엘 천사다, 성육신하기 전 예수님이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영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깨우기 위해 이 사람을 보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떨었더니’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문을 보면 흔들어 깨웠다는 표현입니다. 어루만지니 일어나지 않아서 흔들어 깨웠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큰 은총 받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 옆에 나를 깨우는 사람, 사건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볼 것은, 다니엘이 스스로 눈을 번쩍 뜬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오자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깨워졌습니다. 오늘 아침에 스스로 잠에서 깨신 분이 있나요? 우리가 생각해보면 내가 눈을 떠야지 하는 순간은 이미 깬 상태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법칙, 신호에 의해 깨운 것입니다. 잠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옆에서 깨워줘야 합니다. 간혹 스스로 눈 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아내는 자다가 스스로 코 고는 소리에 깨서 저를 때립니다. 옆에서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깨우면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만나주시기 위해 찾아온 사건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어루만지다 라는 표현은 닿다, 이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다니엘을 ‘일어나!’ 하면서 나팔을 불고 깨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잠들게 한 사건 때문에 찾아오셔서 만져주십니다. 이 만지는 것이 내가 예수님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눈을 감는 사건이 나와 예수님이 이어지는, 나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의 고난이 나와 닿는, 십자가가 나와 닿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어떻게 깨워야 할까요? 찾아가야 합니다. 찾아가서 나도 그랬다, 한 사람의 고난 받는 환경 가운데에서 보내심 받은 그 사람처럼 우리의 아픔이 닿을 때 이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닿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깨어내야 합니다. 11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내가 네게 이르는 말. 나도 너와 같은 아픔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깨닫고 일어서게 됩니다. 청소년들을 일어서 라고 말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석되고 깨달으면 일어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해야 하고 닿아야 하고 일어서게 해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이 너무 힘들었던 시간입니다. 제대로 묵상한 적 없는 눈 감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아버지는 감옥에 다녀오셨고, 어머니는 사라지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을 버틸 수 있던 것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한 말이 어머니가 외도를 해서 쫓아냈다고 하셨습니다. 훗날 어머니께 들어보니 몇날 몇일을 맞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정말 죽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신학교에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이 내 고난과 닿아졌습니다. 누군가 나를 찾아오진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깨우시고 흔드시고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과 닿았다, 일어나라’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큐페 때 앞에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서 죄패와 고난, 눈을 감고 싶은 상황을 나누면 선생님들이 나도 그랬다, 너 안다, 우리 자녀도 안다 하면서 그 친구들을 껴안고 함께 울며 기도합니다. 옆 사람의 손을 붙잡고 울어줄 때 아이들이 깨어나서 깨닫고 일어서서 고백합니다. 이제 한 존재, 하나님 앞에 내게 주신 자유와 독립된 존재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청소년기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경계에 있는 아이들입니다.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로 두발 딛고 일어서야 하는, 자신의 세계를 깨트리고 눈을 떠야하는 시기입니다. 그 때에 우리들교회에서 아이들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 고난을 통해 예수님과 이어졌다는 것, 예수님께서 나를 일으키신다는 것, 찾아오신 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간증을 듣고 일어섭니다. 다니엘이 잠든 곳이 티그리스 강입니다. 이 강은 예전부터 영혼과 육의 경계를 이르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디사이더가 됐습니다. 적용 1. 나의 청소년기는 어떠했나요? 2. 누가 나를 깨우나요? 3. 나를 깨운 글귀나 사람이 있나요 4.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운 사건은 무엇인가요? 5. 사건이 깨달아져 일어섰나요? 사건 앞에 다시 넘어졌나요 2. 스스로 겸비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13-19절)
  • 안식
1
2024 0818 모든 성물을 보냈더니 (열하 12:17-21)
모든 성물을 보냈더니 (열왕기하 12:17-21) 설교: 김양재 목사 17 그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므로 18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19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21 그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더라 그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저도 여러분이 너무 보고싶었어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다들 큐티인에 관심이 많아지셨습니다. 아까 보신 것처럼 이미 쓰시게 된 곳, 9월부터 당장 써야겠다고 결단하신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열매들을 갖고 가니까 믿어주시더라구요. 이번 집회 때 감사함을 전합니다. 집회를 동안 많은 분들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나는 고멜이라는 편지, 허무한 개미는 제 남편얘기에요. 자기 간증, 자녀의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말씀이 들리는 은혜, 감사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네요. 처음 경험하는 부흥회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힘든 남편과 영적대화를 하게 됐다고도 편지를 주시더라구요. 바로 이 사명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있고 교회도 이 나라도 살게하시는 줄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 위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사명이 분명하면 위기에서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1938년, 밀어붙인 뮌헨 협정은 체코 땅을 되찾으면 침공 위기를 막아질 줄 알았는데, 그 명분으로 2차대전이 열립니다. 위기때문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더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봅시다. 1.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됩니다 (17-18절) 17 그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므로 1달 전, 1-16절까지의 상황, 기억나십니까? 그 때에 아람왕 하사엘이 쳐들어 옵니다. 요아스가 성전에서 보호하심을 받고 7살에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야다의 교훈 아래에서는 정직히 행했으나 산당을 제하지는 못했고, 그것의 면죄부로 성전보수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그 명분으로 여호야다를 교묘히 재끼는 계기가 되는 행간을 우리는 읽어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넘어서려는 그 마음을 수리해야한다고 했었습니다. "그 때"에 하사엘이 쳐들어옵니다. 문맥이 맞죠? 잘못하고 있으니까 하사엘이 징계로 옵니다. 문자적으로 그 때라는 것은, 성전 수리 공사가 끝난 직후부터 요아스가 죽기 직전까지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로, 듣기 좋은 말로 요아스를 유혹해댑니다. 역대하 24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깁니다. 아세라는 바알의 짝입니다. 바알의 잔당입니다. 이제는 무서운 얼굴이 아닌, 아첨꾼의 모습으로 요아스를 우상숭배 죄로 끌어들입니다. 이럴 땐 Think를 해봐야죠? 여호야다가 요아스 39년 쯤 죽은 것 같습니다. 혼자 통치한 1-2년 동안 갖은 죄를 범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39년이 있어도, 내 죄악대로 살기엔 1-2년만이면 충분합니다. 사실 요아스의 개혁은 여호야다의 교훈의 힘으로 진행됐지만, 그 1년만에 실체가 드러납니다. 근본적으로 요아스가 고난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아스가 지금 아무리 환경이 좋더라도, 예전 찐 고아라는 피해의식때문에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씨의 한 가운데에서 자기 인생이 해석이 안되니, 구속사가 안 깨달아졌고, 여호야다는 상사의 고나리였습니다. 자기 친척은 다 죽었죠? 여호야다 말도 안 들으면 안될 뿐이었습니다. 여호야다 죽고 딱 1-2년만에 방백들이 "왕이시여, 이제 재미 좀 봅시다" 하는 꾐에 넘어가보입니다. 골프도, 룸싸롱도 다니고 좀 그러세요하는 말에, 남의 말만 듣고 거절 잘 못했을테니 - 가볼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뿅 갑니다. 전혀 알지 못 했던 죄의 맛을 맛봅니다. 하나님은 요아스를 포기하지 않으세요. 그를 돌이키려 선지자 스가랴를 보냅니다. 오늘 날 자기를 있게해준 여호야다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그때 그냥 죽인 게 아니라, 성전 뜰안에서 돌로 쳐죽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순교자 스가랴인데, 그렇게 유약했던 요아스가 어찌 그렇게 악해질 수 있나요. 그렇게 자기를 죽음 가운데서 키워낸 여호야다와 그 아들. 불세출의 선지자 스가랴인데 돌로 쳐죽인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날마다 여호야다의 허락이 필요했을 것이고, 백성들도 여호야다를 봤을 것입니다. 아들은 더 훌륭해요. 그러니까, 내가 왕으로서 무슨 권세가 있겠냐 하는 마음으로 분해서 쳐죽인 듯 합니다. 요아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지는 않았을 거에요. 세속사 밖에 없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래도 네네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권세가 주어지니 잔인해집니다. 비교와 시기 질투가 얼마나 사람을 순식간에 바꾸는지 모릅니다. 스가랴 죽을 때 (역대하에서) 여호야다의 교훈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래도 그를 감찰하고 돌봐달라고 기도합니다. 1-16절까지의 결론으로 "그 때"가 나옵니다.
  • 안식
1
20240811 하나님의 꿈 (다니엘 4:1-18)
하나님의 꿈 본문: 다니엘 4:1-18 설교: 김영순 평원지기 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13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14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8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묵상의 꿈을 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꿈인 저희 공동체, 하나님 앞에 모였으니 각자에게 품은 꿈이 해석되게 해주시옵소서, 저희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늘 부들부들 떠는, 쓸데없이 심각한 제가 여기 서있어서 놀라셨죠? 사실 요즘 아침마다 놀라고 놀라다가 여기 이 자리에 섰습니다. 3주 동안 부목사님들 설교를 들으며 울고 웃고 하셨겠지만, 저는 뭘해도 떨어요. 저는 휘문 목양국 - 새가족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오늘은 목양국 헌신예배인데요.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모든 것을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양인 우리를 목양하시는 근원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힘든 환경과 상황을 허락하셔서 목양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어주며, 목양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택자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는 목양시스템이 참 잘 되어있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목자의 직분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양을 목양받고 목양하면서 영적 목자로 살아내는 것이 목양의 근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꿈이, 우리와 구원을 이뤄가는 구속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의 꿈나무입니다. 오늘 제목에 하나님의 꿈으로 지었더니, 어떤 분이 모두가 잠주무셔서 꿈꾸면 어떡하냐하시는데, 괜찮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꿈을 해석하지 못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1-7) 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어젯밤 혹시 어떤 꿈을 꾸셨나요? 저희 목장 어떤 여집사님은. 부목사님 심방을 4-5분이나 오셔서 식사를 부지런히 준비했대요. 한 남자 집사님이 로또를 사시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우리 모두 웃었습니다. 이런 꿈이 해석조차 하지 못해서 번민하게 되는지요. 나의 꿈이 양육받고, 취업하고, 질병에서 나음받는 것인지요? 아니면 그 꿈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번민하시는지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꿈이 해석받고 인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람으로 가던 야곱, 애굽으로 팔려가던 요셉이 그랬습니다. 꿈은 하나님의 계시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묵상했기에, 느부갓네살 왕을 양육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꿈이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꿈은 말씀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거룩한 신들이 있다고 하긴 했지만 하나님도 많은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도 말씀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이적을 베푸는 여러 신들 중 하나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의 꿈이 이뤄지는 게 하나님도 싫어하시는지 좋아하시는지 알려면 말씀 묵상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로 목양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끔 할 수 있게 말씀과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이뤄지기위해서 목장, 양육, 매일의 큐티로 날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양육도 놓치지 말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하시는 - 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서 양육을 받아야합니다. 우리는 40주동안의 양육동안에는 거룩하게 살지만, 또 연약하게 되는 저희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요 1:1 하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저 역시 말씀 양육 받으라고 권하지만, 학생때는 저는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신 줄도 몰랐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 동방박사가 갔구나 할 정도로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지식이 없고 자존감이 바닥이고,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청년 시절 자살시도까지 했습니다. 저는 성경지식으로 제가 가치있다고 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 말씀이 깨달아져서, 그리고 저같은 사람이 말씀이 깨달아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다가 구속사 말씀을 만나니 신분세탁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고 하니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구속사 어록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에 그 어록으로 - 사건들로 저의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저의 죄가 보이진 않았지만 말씀으로 매일 매일 제 죄를 만났습니다. 개인의 예배로서, 자기가 자기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하듯,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말씀 묵상해야합니다. 큐티의 장점은 오늘 못하면 내일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의 말씀을 보고 잊어도 저녁에 다시 봐도 됩니다. 뭔가 잘 깨닫고, 잘 알려고 하다가 시작도 못할 수도 있죠? 그러나 지금은 부목사님들의 새벽큐티와 10분큐티로도 말씀을 들으실 때 내 사건이 어느날 해석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해석이 많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이 해석이 안된다고 난리를 치는데, 해석이 뭘까요? 해석은 어떤 사건도 내가 주인공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내 이야기로 듣는 것입니다. 최고의 왕이 되고자 하는 느부갓네살도 나고, 신하를 불 가운데 집어넣는 느부갓네살도 나고, 해석안되서 방방 뛰는 느부갓네살도 나라고 하면, 내 상황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주 흥하던 때에 이 꿈을 꾸며, 찢기고 낮아지는 - 고난의 때를 주시며 느부갓네살이 구원받는 꿈을 하나님께서는 주십니다. 그 외에도 해석할 수 없음은 구체적으로 본문에 나옵니다. 그 당시 바벨론 왕은 세상 권력 물질의 천하 유아독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은 세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그 가치관으로는 절대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적과 놀라운 일을 찬양하는 느부갓네살은 오히려 가해자로 고난없이 이적만 보고 3절에 놀랍다, 능하다, 크다 찬양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보다 이적만 찬양한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해석도 안되고 사건이 해결된다면, 해결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곧 잊어버립니다. 4절에서 하나님 집에서 평강해야하는데, 내 집에서 평강했다고 하니, 내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라 바로 모래위의 집같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아예 갖추지 못한 사람은 잃을 게 없어서 두려움이 없어질텐데, 많이 가진 자는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존재가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들을 많이 말씀 드렸는데 나는 어디에 속했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 안식
1
2024 0804
이찬규 성공에 대한 뜻을 못 내려놓겠다. 해왔던 일 (아웃도어) 업종에 대한 열정. 주일성수가 문제가 되어 지금은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아웃도어 쪽에 대한 미련이 크다. 하나님 뜻이 분명 아니라곤 하지만, 순종이 잘 안된다. 이번 주에 "십일조"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 됐다. 십일조를 안하고 있는데, 신앙 고백으로서 거기서부터 순종이 잘 안되는 것 같다. 또 십일조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어서 고민됐는데 또 무너졌다. 오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을 정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적용을 해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드백 모든 선택에서 내 뜻을 분별해보라고 했는데,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받았다고 했듯. 찬규도 그 모습을 보면서 상처가 됐을텐데, 이 사건에서 다니엘처럼 "뜻을 정할 때" 하나님도 그 마음을 바꿔주실 수 있을 것 같다. 그 뜻을 어떻게 구할까에 대해서 묵상해보면 좋겠다. 안식 이력서 넣은 회사, 굉장히 유력하다고 생각햇던 회사 다 떨어졌다. 어떡하지라는생각이 든다. 결혼해야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늘 큐티, 말씀들어도 아웃리치 한 줄로 요약하면 준비하는 기간동안 예배,나눔만 했는데 이 두가지를 쓰셨다. 그 교회 예배가 회복이 되었다. 피드백 안치훈 안식왈- 뜻을 정하여 술을 끊으세요, 사람은 살면서 술담배 둘중 하나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번에 느낀건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술먹고 담배피면 맛탱이 가버린다. 담배는 이번에 무조건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웃리피 가서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영광왈 - 담배말고 술을 끊어라 술이 문제다. 일단 양교 이번에 받으면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양교 바든ㄴ걸로 박경찬 저도 양교 받기로 생각했습니다. 양교를 일단 하고 부서 섬기는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 안식
Made with Slash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