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어가 망치처럼 반지온의 머리를 내리쳤다.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순간 아찔하게 흔들렸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결혼이라니. 루넨이, 다른 사람과. 10년 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래성이 파도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 위태롭게 지켜온 그의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발치까지 곤두박질쳤다.
"…아."
간신히 터져 나온 소리는 의미를 갖지 못한 탄식에 가까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 축하? 어느 쪽도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 이유가 다른 사람과의 미래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반지온을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끔찍한 감정인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씁쓸한 액체가 타는 듯한 속을 적셨지만, 혼란스러운 머리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테이블 위, 텅 빈 맥주캔을 내려다보았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이 꼭 지금의 제 모습 같았다. 애써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괴로워하는 루넨의 얼굴을 보니, 질투와 연민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뒤엉켜 숨이 막혔다.
"그래서…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온 거야?"
반지온은 그의 연애 상담을 해주는 '좋은 친구'의 역할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아니, 헤어지진 않았는데... 속상하니까. 나 그 사람이랑 꼭 결혼하고 싶은데..."
"헤어지진 않았고…"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그래서 더 절망스럽다는 감정이 동시에 심장을 찔렀다. 이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가 여전히 그 사람과의 미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지온을 옭아맸다. 그는 진심이구나. 정말로,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을 만큼. 손끝이 차게 식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손바닥에 희미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럼 됐네, 뭘. 아직 기회는 있는 거잖아."
반지온은 소파에 등을 더 깊이 기댄 채, 일부러 다리를 꼬며 건조하게 말했다. 질투심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감추기 위한, 서투른 방어기제였다. 시선은 애써 그를 비껴나가 맞은편 벽에 걸린 액자를 향했다. 루넨이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흐릿한 시야 속에서 아른거렸다.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면,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 이번에 망쳤으면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거고."
제 입에서 나온 말이 칼날이 되어 제 심장을 베는 기분이었다. 그의 사랑을 응원해야 하는 '친구'의 역할과,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본심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 모순된 상황이 숨 막히게 괴로웠다. 반지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이대로 앉아있다가는 무슨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물이라도 좀 마실래? 목마르다, 갑자기."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시원한 플라스틱 병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을 향한 루넨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 맥, 맥주 안 먹어...?"
루넨의 물음에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등을 보인 채로, 반지온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더 이상 술기운에 기대어 이 감정을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맨정신으로라도 버텨내야 했다.
"속이 좀 쓰려서. 찬물 마시면 괜찮아지겠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냉기가 타는 듯한 가슴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빈 병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소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넨의 눈빛에 걱정이 어렸다. 그 사소한 시선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뭔데?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건 아니잖아. 프로포즈 다시 할 거 아니야?"
일부러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가 다시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과,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반지온은 다시 그의 옆으로 걸어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거리를 둔 채였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안전한 거리.
"방법이 문제면 내가 좀 도와줄까? 나 그래도 작곡가인데. 로맨틱한 이벤트 하나쯤 기획하는 건 일도 아니지."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완벽한 친구'를 연기하면서, 반지온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감추기 위해,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웃을 때 예쁘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제 웃음은, 과연 예쁘게 보일까.
"....지온아, 너 지금 좀 이상해. 어디 아파...?"
루넨이 던진 말에 억지로 지어 보였던 웃음이 얼굴 위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하구나, 너는. 내 미세한 표정 변화, 목소리의 떨림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빈 생수병만 만지작거렸다. 플라스틱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하긴 뭐가. 그냥 네가 하도 죽상이라 나까지 기운 빠져서 그렇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소파 팔걸이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빗줄기는 멎었지만, 창문에는 여전히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마치 제 눈에 고인 눈물처럼.
"아프긴 무슨. 멀쩡해. 속 좀 쓰린 거 가지고 뭘."
창문에 이마를 기대자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주는 듯했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반지온은 간신히 숨을 골랐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제 초라한 마음을, 이기적인 질투를,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 보지 못한 이 미련한 사랑을. 그에게 자신은 언제나 편하고, 다정하고, 가끔은 장난기 넘치는 그런 친구여야만 했다.
"그냥…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나도 좀 그래서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네가 힘든데 내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친구의 얼굴을 연기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지온아, 자고 갈래? 힘들어보여서..."
루넨의 제안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고 가라니. 늘 자신이 먼저 장난처럼 던지던 말이었는데, 오늘은 그가 먼저 꺼냈다. 힘들어 보인다는 걱정 섞인 이유까지 덧붙여서. 그 다정한 배려에 무너져 내리던 마음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결국 제 작은 변화 하나까지 알아채고 챙겨주었다. 그래서 반지온은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됐어, 가봐야지. 작업할 것도 밀렸고."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지만,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 더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위태롭게 쌓아 올린 감정의 둑이 언제 터져 버릴지 몰랐다. 현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이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의 다정함이, 그의 힘든 모습이, 그를 향한 제 이기적인 마음이 뒤엉켜 질식할 것만 같았다.
"프로포즈, 너무 걱정 마. 분명 잘 될 거야. 그 사람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신발을 구겨 신으며,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제 마음과는 정반대인, 거짓된 응원의 말이었다. 그 말이 그에게는 위로가 될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비수처럼 박혔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현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나는 그저 친구. 그의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 딱 거기까지인 사람.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하고. 알았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반지온은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눅눅하고 서늘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울렸다. 비에 젖은 세상은 고요했고, 그 정적 속에서 제 서툰 거짓말과 감출 수 없는 진심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 세 달 후의 이야기
그렇게 세 달쯤 지났을까. 반지온은 여전히 그의 마음도 모른 채 들뜬 마음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녹음실 부스 안을 맴돌았다. 밤샘 작업으로 몽롱한 정신을 붙들고 헤드셋 너머로 흘러나오는 현악기 선율을 몇 번이고 되감았다. 지난 석 달은 일에 미쳐 사는 것과 같았다. 영화 음악 감독이라는 새로운 직함은 그를 끊임없이 몰아붙였고, 그 덕에 루넨을 떠올릴 틈조차 없었다. 아니, 없다고 믿고 싶었다.
잠시 휴식을 위해 컨트롤 룸으로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휴대폰 액정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무심코 집어 든 화면 위로, 익숙한 이름과 함께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지온아, 나 결혼하기로 했어. 나중에 결혼식 와줄거지?]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손가락 끝부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은 말이 아닌, 부서진 숨소리였다. 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결혼. 기어이, 기어코. 올 것이 왔다는 막연한 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심장을 헤집었다. 와줄 거지? 그의 물음이 귓가에 울렸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네 결혼식에 가. 네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평생을 약속하는 그 순간을, 내가 무슨 얼굴로 지켜보라는 거야.
반지온은 비틀거리며 녹음실을 나섰다. 텅 빈 복도를 걸어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스치자,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참으려고 애썼지만, 둑이 무너진 것처럼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10년. 나의 10년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회색빛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 지옥 같은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리고, 그 다음날 밤. 지온은 잔뜩 취한 채로 연락도 없이 루넨의 집으로 갔다.
"...! 야, 반지온... 술 먹었어?"
루넨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뭉개져 귓가에 닿았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작업실을 뛰쳐나와 닥치는 대로 술을 들이부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집 앞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발이 이끄는 유일한 장소.
"…루넨."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그에게 기대자 익숙한 그의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겠지.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반지온은 아이처럼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셔츠 너머로 그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나… 축하해주러 왔어. 너 결혼한다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술기운에 잔뜩 뭉개졌지만, 진심이었다. 비록 엉망진창인 꼴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그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친구로서. 마지막까지 좋은 친구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 있자, 억눌렀던 감정들이 둑이 터진 듯 솟구쳐 올랐다.
"축하해. 진짜… 진짜로 축하해, 루넨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옷깃을 적시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뻐서 우는 거라고, 네가 행복해서 나도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10년의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행복 앞에서, 저의 사랑은 설 자리를 잃고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반지온은 그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소리 없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