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이 단순히 욕망을 드러내거나 (또는 감추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또한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이고, 또한, 역사가 우리에게 쉼 없이 가르쳐 주고 있듯이, 담론이 단순히 지배의 체계 또는 투쟁을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을 위해, 그것에 의해, 투쟁하는 것이자, 우리가 탈취하고자 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어긋남의 작용은) 매번 절대적으로 새롭고 순수한 지점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담론, 각각의 사물, 감정, 생각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나는 담론이라는 서정적 꿈이다.
주석의 기능은 사용되는 기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오직 그곳(1차 텍스트)에 말없이 분절되어 있었던 것을 마침내 말하는 것이다. ... 열린 복수성, 불확실성은, 주석의 원칙에 따라, 감히 말해질 수도 있었던 것으로부터 되풀이의 상황, 위장, 형식, 개수로 옮겨진다. 새로운 것은 말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의 되돌아옴이라는 사건 안에 존재한다.
... 관건은 말하는 주체의 희소화이다. 특정한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또는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한 경우, 아무도 담론의 질서에 들어갈 수 없다. 보다 정확히는, 어떤 담론 영역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거나 진입 가능하지 않다.
교의는 개인들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구분 지어 주는 특정 유형의 언표 작용에 봉사한다. 교의는 말하는 주체를 담론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담론을 말하는 개인의 집합에 예속시키는 이중적 예속화 작용을 수행한다.
담론에 대한 외관상의 존중과 로고스의 사랑 아래에는 일종의 두려움이 숨어 있다. 모든 것은 마치 금지, 장벽, 문턱 그리고 제한이 설령 부분적일지라도 담론의 거대한 증식 작용을 지배할 수 있다는 듯이, 그러한 풍부함이 가장 위험한 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는 듯이, 통제 불가능한 것을 피하게 해 주는 형상들에 따라 무질서가 조직될 수 있다는 듯이 이루어진다.
사물은 물체적 분산 작용 안에서, 또한 그 효과로서, 생성되는 어떤 것이다. 사건의 철학은 어떤 비물체적인 것의 유물론이라는 일견 역설적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해 두자.
계보학적 측면이란, 통제를 부여하는 한계의 내부와 외부 또는 대부분의 경계획정의 다양한 측면을 망라하면서, 담론의 실제적 형성 작용에 관련되는 작업이다. 비판이 희소화 과정뿐 아니라 담론의 실제적 형성 작용에 관련되는 작업이다. 비판이 희소화 과정뿐 아니라 담론의 재통합 및 통일화 과정을 분석한다면, 계보학은 이러한 여러 과정의 분산적인 동시에 불연속적, 규칙적인 형성 작용을 연구한다.
만약 비판적 스타일이 근면한 경쾌함의 그것이라면, 계보학적 기질은 행복한 실증주의의 그것이 될 것이다.
철학은 이제 추상화의 구조물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늘 물러난 채로 존재하면서 획득된 일반성과 단절하고 비철학과의 접촉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철학은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앞서는 것, 자신의 불안에 의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철학은 이러한 것들을, 환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유하기 위해서, 역사의 일회성, 과학의 지역적 합리성들, 의식에 있어서의 기억의 깊이를 다시 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