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분명하게 하나의 자각이 생겼다. 어둠의 세계를 향하여 팔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면 된다는 것. 머지않아 5월의 꽃들도, 제복을 입은 자들도, 짖궂은 급우들도, 내가 벌리고 있는 팔 안에 들어오리라는 것. 내가 이 세상을 바닥으로부터 뒤어짜서 움켜쥐고 있다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자각은 소년의 긍지가 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다.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갔다. 마치 돼지처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 타인이 모두 멸망해야 한다. 내가 정말로 태양을 향해 얼굴을 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멸망해야 한다.
이미 나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에서 금각의 환영을 좇지 않게 되었다. 금각은 점차 깊숙이, 견고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 섬세한 세부와 복잡한 전모는 서로 어루러져, 음악의 한 소절을 떠올리면 그 전체가 흘러나오듯이 어느 한 부분을 집어내도 금각의 전모가 울러 펴졌다.
나는 남에게 의문이 일게 만드는 것을 어째서 좋아하는지 반성했다. 스스로에게 그것은 의문도 아무것도 아니다. 자명한 사실이다. 감정에도 말더듬이 중세가 있었던 것이다. 내 감정은 언제나 시기를 놓쳐버린다. ... 미미한 시간의 엇갈림, 미미한 지체가 언제나 내 감정과 사건을 전혀 다른, 마치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관한 듯한 상태로 바꿔버린다.
하나의 솔직한 감정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정당화하는 동안은 좋으나, 때로는 두뇌에서 만들어낸 무수한 이유들이 자신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을 스스로 강요하게 만든다. 그 감정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건 우리들이건 어느 쪽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하니까 몽상을 아주 싫어하게 됐지.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 거야.
그때 나에게는 진지하지 못한 기쁨이 생겨나서, 욕망에 의해 그 욕망을 수행함으로써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걸 실증하려고 했던 것인데, 육체가 이것을 배반하고는 내가 정신으로 행하려 했던 일을 육체가 해버렸기 때문이지. 나는 모순에 봉착했어. 굳이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확신을 이용해서 사랑을 꿈꾸고 있었던 게 되지만, 최후의 단계에서는 욕망을 사랑의 대리로 두고 안심했던 거야. 그런데도 욕망 그 자체가 존재 조건의 망각을 요구하고 내 사랑의 유일한 관문인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 나는 욕망이란 아주 명석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내 자신을 꿈구기를 필요로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나는 처음으로 친화의 감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믿었지. 그리고 문제는 나와 대상 사이에 있는 거리를 어떻게 좁힐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답게끔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걸히를 유지할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우리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건, 가령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오후에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스미듯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산다는 것과 파멸하는 것이 똑같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인생이었다. 그것은 전진하고 획득하고 변모하며 상실할 수가 있었다.
만약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모든 삶의 무목적이라는 전제가 부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욱더 다른 일반적인 삶과 등가의 삶인 것이다.
정신이 이처럼 소박한 실재감을 지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육체로부터 배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선은 무상을 체로 만든다고 하며, 자신의 마음에 형도 상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하지만, 무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견성의 능력은 아마도 또한 형태의 매력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그가 나와 같은 독자성 혹은 독자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을 추호도 갖지 않은 채 삶을 마쳤다는 점이다. 그 독자성이야말로 삶의 상징성을, 즉 그의 인생이 다른 무엇인가의 비유일지도 모른다는 상징성을 박탈하고, 나아가 삶의 확대성과 연대감을 박탈하여 항상 붙어 다니는 고독을 낳게 하는 본원인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허무와도 연대감을 지니지 못했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했다. ...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어떠한 것이든 종ㅁ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을 부여하는 결단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자유의 근거였다.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상상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내 원천적인 기억이라고 바꿔 말해야 옳으리라. 인생에서 언젠가는 내가 맛보게 될 모든 경험은 훨씬 눈부신 형태로, 이미 체험했다는 느낌을 나는 지워버릴 수가 없다. ... 그것은 모든 쾌감의 원천이 되어, 현실의 쾌감은 그곳에서 한 모금의 물을 얻어 마시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미는 그 모두이리라. 세부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며 금각이기도 하고 금각을 에워싼 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