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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저자
헤르만 헤세
평가
⭐⭐⭐
완독일
09/08/2024
분류
  1. 독일문학
Created by
  • Jun
과학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오래된 포도주를 언제나 새로운 술 포대에 담는다. 새로운 술 포대에 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가들은 얼핏 보기에 그릇된 주장들을 태연스럽게 고집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조, 학문과 예술 사이의 불평등한 오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과학은 별다른 도움 없이 언제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왓다. 언제나처럼 예술은 믿음과 사랑, 위로와 아름다움, 그리고 영원에 대한 예감의 씨앗을 뿌려 왔다. 또한 풍요로운 토양을 새로이 발견하여 온 것이다. 그것은 삶이 죽음보다 강하고, 믿음이 의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나 임무에 충실한 관료라 할지라도 학교에서의 이런 교육이 없었다면, 마구 날뛰는 난폭한 개혁가나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힌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 누구라도 먼 여행길을 떠나기 전에 기꺼이 그러하듯이, 이 마지막 날들의 아름다운 햇빛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껏 맛보려고 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오나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주위 환경에 여전히 머물면서 자신의 위험천만한 결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남다른 쓰라린 쾌감을 주었다.
... 운명의 여신은 한스로 하여금 자신의 암울한 구상을 마음껏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한스가 날마다 죽음의 잔을 들이키며 몇 방울의 환희와 생의 의욕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처 입은 불구의 젋은 영혼 하나쯤이야 그다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그 영혼은 자신의 원을 끝까지 그려야만 하는 것이다.

... 그녀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면, 아직 맛보지 못한 쾌감과 꺼림칙한 양심의 가책이 뒤섞인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해안을 따라 자신을 유혹하는 새롭고 낯선 땅이 그의 영혼 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 그의 쾌락은 참신한 사랑의 힘, 그리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그의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어지고, 자신의 영혼이 두 번 다시 찾지 못할 어린 시절의 세계를 이미 떠나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스는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비밀을 너무나도 빨리 알고 말았다. 그것은 달콤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쓰디쓴 맛이었다. 부질없는 탄식과 그리운 추억, 그리고 암울한 사색으로 물근 나날들, 숨가쁜 심장의 고동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무서운 꿈결로 빠져드는 밤의 연속. 꿈속에서는 피가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끓어올라 끔찍스러운 거대한 괴물이 되기도 하고, 목을 휘감아 죽음을 부르는 팔이 되기도 하고, 불타는 눈빛을 지닌 환상의 짐승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심연이 되기도 하고,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이 되기도 했다.

...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깊은 생각에 잠겨 ... 한 해뿐 아니라, 전 생애의 그리운 추억들이 맑고 푸른 가을의 하늘 너머로 흘러가는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흐뭇한 기분으로 아름다운 날을 찬미한다. ... 어디를 가더라도 한 해의 아름다운 마지막 날들을 노래하며 축하하고, 춤과 노래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은 변함 없이 고운 이마와 창백하고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여느 사람들과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천부적인 권리라도 되는 듯이. ... 이 소년은 한창 피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꺾여 즐거운 인생의 행로에서 억지로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 우리는 수레바퀴 아래 깔린 당팽이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운명을 짊어진 수레바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고향의 짙은 흙 내음을 맡으며, 다른 바퀴와 함께 어우려져, 달그락거리는 가락에 맞춰, 공동의 이상향을 향하여, 흥겹게 돌아가는 수레바퀴 말이다. 그 수레 위에 꿈과 사랑과 역사를 싣고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어린 소년 한스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재조명하는 잣대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보다 성숙한 삶의 자세를 촉구하는 자극제임에 틀림없다'라고.

- 김이섭, 작품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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