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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저자
제임스 퍼거슨
평가
⭐⭐⭐⭐
완독일
08/24/2024
분류
  1. 비문학
Created by
  • Jun
나는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상태를 '현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현존함으로써 취약성도 함게 나누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현존은 사회적 의무를 떠받치는 기반으로 작동한다.

'노동자의 세기'가 종말했다면, 그 이유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 임금노동자가 사라진 탓이 아니라, 지구적 성장과정에서 더는 임금노동을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급망과 노동시장이 세계화되면서 노동 계급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재정 긴축 탓에 구조적인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의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의 전 분야를 대체하거나 대폭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왔던 전환 논리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는 분배할당 시스템의 국가 간 간극을 볼 때, 나는 노동과 시민권 이외의 어떠한 기반이 새로운 종류의 분배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제도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사회적, 정치적 역학관계가 재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누가 무엇을 갖는가? 왜?'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 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즉 우리 모두가 거대한 공동 자산의 상속자로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유산은 노동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피 흘리고, 창의력을 발휘해서 함께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가치의 원천은 사회 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과실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노동자가 아닌, 상속자이면서 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야 한다.

지분은 정당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 '권리'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소유권자가 지분을 가져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의무는 다른 공동 소유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땅한 몫을 받을 것이라는 강한 기대의 또 다른 측면이 된다. 이를 나는 '정당한 지분'이라고 부른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와 같은 법적인 시민권이 아니라 가뭄을 함께 겪고, 같은 땅에 땀을 쏟으면서 공유된 물리적 존재가 만들어낸 육체적인 유대라는 점이다. 이처럼 오래된 정치적 전통에서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물리적인 존재는 실제로 성원권과 통합된 단일체가 된다.

내가 '성원권'이라 부르는 원칙('우리 중 하나')은 시민권의 형태로 법적으로 명확하게 인정되고 있으며, 정치적 주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현존'의 원칙('여기, 우리와 함께')은 대체로 상식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여기'에 존재한다는 명백하고 자명한 조건이 얼마나 확실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는 아직 완전히 깨닫기 못하고 있다.

... 아프리카에서 택시로 이용하는 미니버스를 통해 현존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조적인 상황을 제시하고자 한다. ... 덥고 땀내 나고 불편하며,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사회성을 공유하는 현장이기도 하며, 최소한의 예의범절과 시민행동의 원칙을 모두가 존중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공유된 정체성에 기초한 성원권 공동체의 대척점인, 일종의 우연적 공존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성의 한 편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 단지 나와 같은 요구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의 공간을 포기해야 한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진정한 의무의 신호는 동정심보다는 짜증으로 나타난다. ... "어쩌면 이리도 짜증나게 줄 수 있을까? 근데 어쩌겠더, 내 동생인데."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무가 주는 느낌이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립되고 관조적인 칸트적 관점이 아니라 실제 사회적 맥락에서 할당 결정을 내린다. 나눔에 대한 생각은 활발한 사회관계 속에서 적극적인 주장과 요구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펼쳐진다. ... 사람으로 가득찬 미니버스 택시에서 타인에게 공간을 내주는 것처럼 우리는 단지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거니와 자비로운 관대함과 무관하게 행동한다. 우리는 진정한 의무에 따라 움직인다. 의무는 의무일 뿐이다.

... 시민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자발적으로 제기하는 서비스 요구는 내가 인접성이라고 부르는 이웃의 '압박'관계에서 발생하는 요구가 '확장'된 것이다. ... 사실 몫을 양보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비좁은 미니버스에서 당신이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민가정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 누가 무엇을 얻는가 하는 구체적인 질문은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일종의 공유된 공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구체화시키고 공간을 만들어가는 실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국가 또는 정치조직처럼 기존에 구성된 사회단체의 승인된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종종 비자발적인 유형의 집합체에 참여하는 참가자로서 이러한 실천에 관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는 추상적인 정치적 성원권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공동 사용과 공존의 실용적인 조정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해온 것이다.

... 우선 익숙한 축은 성원권으로 이루어진 축이다. '우리'라는 감각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성원권의 범위와 정치적 연대의 폭을 얿혀 축을 늘이는 것이다. 덜 익숙한 두 번째 축은 '여기' 그리고 '우리와 함께'라는 감각을 확장시켜 정치적으로 현존 주장을 강화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시민권의 기반이 되었던 성원권을 존재나 인접성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회적 의무는 실제로 제공된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일종의 수수료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당신이 나에게 y를 주었으니 나는 당신에게 x를 신세졌습니다'라는 계약이 아니다. 대신 '당신은 배가 고프고, 여기 함께 있으니 같이 식사하시지요!'라고 말하는 수렵채집인에 더 가깝다.

... 현존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현존의 특징 중 하나는 요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 현대 이민자들의 관점에서 사회적 서비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요구를 보면 명확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취약성과 고통마저도 함께 따라온다. 한마디로 모든 문제점까지 함께 공유한 상태로 비자발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 존재의 힘은 그에 수반되는 상호 간의 취약성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인근의 존재가 잠재적 위험요소로 보인다면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데리다는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기 때문에 해체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봤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와 반대다. '여기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중 하나'를 구축하는 복잡한 기호화와 정치적 과정을 똑같이 필요로 한다. 현존은 '근본'은 아니지만 사실 끊임없이 '파괴 가능'하며 재구축할 수 있는 관습이다. 따라서 '존재'(현존)라는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어 표면적으로 데리다와 의견의 불일치가 있어 보이더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 버틀러는 '불안정성'이나 '다른 사람과 대립하는 상황'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에 대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작업을 진행해왔다는 사실이다. 버틀러는 인류학적 관점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의무에 대한 모든 쟁점을 '우리의' 윤리적 의무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버렸다.

... 윤리적 의무는 내 견해에 따르면 취약성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내 삶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버틀러는) 우리의 삶이 의존하지 않는 '다른 곳'에 있는 타인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좀 더 도전적인 공유의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여기'에 있으며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다.

버틀러는 물리적 인접성이 갖는 힘을 그야말로 '정치적인' 맥락으로 제한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물리적으로 인접함으로써 자각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경로를 건너뛰고 있다. 클라이브 바넷이 최근 '집회, 시위, 저항의 행동 모형에 대한 낭만적 선호'라며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결과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러한 사회관계를 분석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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