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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이토록 사소한 것들
Grit Han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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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 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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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ㅡ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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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기술학교에서 나와 여름에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출근 첫날,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버섯을 땄음에도 손이 더뎌 다른 사람들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침내 라인 끝에 다다랐을 때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서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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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경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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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왜 석탄 광에 들어갔는지 말해주겠니?" 수녀원장이 말했다. "그냥 말하면 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아이는 의자에서 얼어붙었다.
"누가 널 가뒀지?"
아이의 겁에 질린 시선이 사방으로 달아가다가 잠시 펄롱과 마주친 다음 식탁과 접시 위 빵 부스러기로 떨어졌다.
"걔들이 절 숨겻어요, 원장님."
"어떻게?"
"그냥 놀고 있었어요."
"놀아? 무슨 놀이인지 말해주겠니?"
"그냥 놀이요, 원장님."
"숨바꼭질이겠지. 네 나이에 숨바꼭질이라니. 놀이가 끝난 다음에 널 꺼내줄 생각은 안 했다니?"
아이는 눈을 돌려 섬뜩한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왜 우는 거야? 그냥 실수잖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
"네, 원장님."
"그게 뭐였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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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미사는 길게 느껴졌다. 펄롱은 딱히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멍하니 한 귀로 들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았다. 강론 동안에는 눈으로 「십자가의 길」 성화를 훑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성모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고, 두 번 넘어지고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히는 그림들. 축성이 끝나고 앞으로 나가 영성체를 받아야 할 때가 되었으나 펄롱은 벽에 붙어 서서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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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까 친척인 거 알겠네요."
"네?"
"닮았어요." 여자가 말했다. "네드가 삼촌이에요?"
한동안 펄롱은 그대로 앉아 굴뚝 통풍관보다 더 높이 솟은 헐벗은 나무 우듬지, 바람에 움찔거리는 나뭇가지를 지켜보다가, 갈색 종이로 손을 뻗어 민스파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거의 반 시간 정도, 어쩌면 더 오래 그렇게 앉아서 여자가 한 말, 닮았다는 말을 곱씹어 보며 생각 속에서 불을 지폈다. 생판 남을 통해서 알게 되다니.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ㅡ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ㅡ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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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의자에서 옆으로 이동한 펄롱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며 네드와 닮은 데가 있는지 찾았다. 닮은 데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윌슨네 집에 있던 여자가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고 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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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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