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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Grit Han
양귀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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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외침
취미는, 없다.
나는 이 취미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취미란 단어는 악취미의 줄임말과 같은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람들이 진짜로 즐기는 유희는 고상한 것보다는 다분히 악의적인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커피 전문점 사장의 진짜 취미는 유부녀 홀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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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외침
그랬으므로 지금 내게 나타난 두 명의 남자와도 나는 당연히 몹시 무덤덤하게 만났다. 유치해질 순간은 얼마든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감상적이고 유치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세는 약간 과장되게 말한다면 내가 지닌 굳건한 세계관이었다. 내게 친구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은 다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감상과 유치함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적대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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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외침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한다. 특히 열대여섯 되는 어린애들이 텅 빈 머리로 앵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대고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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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있는 풍경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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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몰의 아버지
어느 날은 부엌문 앞에 서서 망연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는 적도 있었다. 한 달 만에 귀가하는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게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그렇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또 어떤 날은 나보다 먼저 빈집에 들어와 툇마루에 물끄러미 앉아있는 아버지와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회색 옅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보면 나는 언제나 심장이 쾅쾅 울리곤 했었다.
그럴 때,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기를 좋아했다.
”여, 안진진.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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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그 십 분의 의미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이모는 자신의 언니를 참담한 불행 속에 넣은 사람임에도 언니의 남편, 즉 나의 아버지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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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과장법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푸르른 일몰의 시간, 사방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그 시간, 그 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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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주리
진모의 행동을 꾸짖는 천사의 얼굴은 엄격했다. 그건 옳은 말이었다. 졸개들과 더불어 연적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갈겨대는 짓 따위는 해서는 안 될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남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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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주리
나는 이모를 위로하기 위해 주리와 어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아주 아름다운 쪽으로 깔끔하게 편집해서 들려주었다.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은 서슴없이 왜곡도 했다. 이모는 내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모 역시도 자신의 감정을 편집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전화를 끊으면서 이모가 문득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진진아…….”
”응? 왜요?”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너한테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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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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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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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그에게 거듭거듭 다짐했던 대로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술이 깬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하는 말들이 모두 다 진실이었듯이.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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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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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다음날
이럴 때는 내가 부자여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나는 부자여야 옳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의 곤궁함에 대해서는 더욱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막차를 타는 바람에 단골도 못 잡고, 늘어나는 재고와 까탈스러운 일본인 상대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내 어머니 속사정 따윌랑 절대 털어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남김없이 다 솔직해버리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은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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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사람들은 의외의 사건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건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현실로 드러날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예감 속에 오늘이나 내일은 없다. 오직 ‘언젠가’만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인데.
아버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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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은밀한 어둠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쉽다.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키며 나는 마침내 아무렇게나 부려진 아버지의 팔을 잡고 내 손과 아버지 손의 크기를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그랬었다. 두 개의 손바닥이 딱 맞아야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맞지 않으면 영원히 아빠와 딸 사이인지도 모르고 슬프게 살아가야 한다고. 그때까지 반쪽의 비밀을 잘 간직하며 살라고 내 아버지가 그랬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아버지의 팔목을 잡고 손바닥을 맞추는 연습을 했었지만 연습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연 잠 속에서 현실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어머니가 말했던 이상한 아버지의 실체를.
”누,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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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나, 여기서 그만 이 생을 끝내기로 했다.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
진진아.
너무 빠르게, 너무 늦게도 내게 오지 마.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줘.
page.291
모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의 보잘것없는 삽화들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액자 안에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 걸어놓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이모부는 건재하다. 이모의 엄청난 배신으로 상처는 입었으나,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애쓰는 기차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다.
삶의 사소한 사건은 갇혀있는 진모에게도 일어났다. 결국 비둘기가 떠난 것이다. 진모가 쏟아놓은 순애보의 대사를 사실로 믿은 비둘기는 눈물을 머금고 호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비둘기의 언니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둘기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릴 줄 몰랐던 진모의 상심은 컸다.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젠 완전히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고 쉴 새 없이 헛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도무지 철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도 어머니의 삶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도왔다. 부쩍 말수가 줄고 홀로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 안진진의 우울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준다.
page.296
모순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