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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오렌지와 빵칼
Grit Han
청예,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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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시간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 시간이란,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거나, 꽃을 개화시키고 쇠락시키는 모든 것을 포함하여, 시대나 역사와 같은 광의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때로는 단지 하루와 이틀 그리고 사흘 정도의 개별적인 단위로서만 존재하기도 하며, 시야를 밝히고 또 암전시키는 드넓은 개념.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은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람을 미워했다. 나 또한 그런 은주는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은주를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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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25마트의 질 나쁜 민낯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미간이 고장 난 스프링처럼 삐걱거렸다. 저런 가게는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오직 저렴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품을 계속 소비해주는 동네 사람들도 각성해야만 하지. 우리는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선택을, 더 많은 고민을 품는 것이 진정한 시민 의식이라고 생각하기에 절대 25마트 제품을 소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대량 생산, 기계 생산, 환경 파괴, 불공정 수출입, 비위생 제조. 그 모든 딱지를 달고 있음에도 25마트의 빵은 나루터의 무가당, 친환경, 비건 빵을 가뿐히 이겼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루터의 식빵은 9,500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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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내가 이성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은주의 말을 따르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했다. 이 세상에 나와 은주 두 명만 살아 있고 심판이 진행된다고 가정해 보자. 신은 주저 없이 내 정수리 위에다 벼락을 떨어뜨릴 것이다. 나쁜 인간 쪽은 역시 나일 테니까.
스스로를 파렴치한 인간이라 정의하면서도, 심지어 은주를 본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도, 나는 한심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남의 것처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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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은주는 사소한 것들을 모조리 지켜내지 않으면 그 어떤 신념도 무결해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그 말은 완전했고, 그야말로 무결했으니까. 내게 거침없이 손가락을 뻗는 세계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건 나의 응당한 업보였다.
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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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그가 내미는 반지를 받아야만 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 눈물겨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게 나의 본분이었다. 우리는 5년 된 연인이며 그가 이 순간을 암시했을 때조차 나는 진심의 몫을 닭목처럼 비틀어 지하에 묻어버렸으니까.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자초?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라니까, 제발. 오영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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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중요한 물건. 중요하지 않은 물건. 중요할지도 모르는 물건. 중요하지 않을 게 확실하지만 좋아 보이는 물건. 중요하지도 좋아 보이지도 않지만 그저 싼 물건. 담고, 또 담고, 계속 담고, 오늘만큼은 대기업 총수의 잔고가 내 것인 듯이 담고 또 담고, 절약하러 와서는 또 돈을 썼다며 후회하는 일 따위는 내일로 미뤄두고 계속해서 담고, 여기에 당신들을 한껏 무시하는 태도로 눈알을 굴리는 나 따위는 물건의 그림자로 취급하며 담고 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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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이건 환희였다.
고역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삶은 그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안전하다는 기쁨이, 내 삶은 구질구질한 자들보다 곱절은 더 찬란하다는 안도가, 더러운 것들을 발로 짓뭉갤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 폭죽처럼 터졌다. 이따위 인생들에 비하면 수원을 싫어하고, 아이를 싫어하고, 고양이를 싫어한 나의 과오는 과오 축에도 끼지 못하리라.
샤덴 프로이데(* schadenfreude. 남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그들의 불행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 일말의 책임 또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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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도덕적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완전히 도덕적일 수 없다. 또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전에는 그 누구도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 *No one can be perfectly free till all are free. No one can be perfectly moral till all are moral. No one can be perfectly happy till all ar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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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나는 추락할 때도 단정치 못한 추리닝을 입고 싶다. 하지만 은주 너는 멋진 셋업 정장에 로퍼를 신어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때는 꽝, 하고 아프기만 할 테지. 그때야말로 우리는 동등해진다.
나는 너를 존중할 수 있다.
단 네가 나를 존중할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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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