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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토스트 : 어느 요리사의 어린 시절
Grit Han
나이젤 슬레이터, 디자인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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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트
하지만 자기에게 토스트를 만들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학교에 반바지를 입혀 보내는 것과 같은 엄청난 실수가 있더라도, 앞니가 거칠고 딱딱한 토스트 가장자리를 뚫고 들어가 그 속의 쿠션처럼 희고 말랑말랑한 빵에 안착하는 순간 그런 실수들은 대단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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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시 포테이토
엄마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버터향이 나는 매시 포테이토를 만들어 훈제 돼지고기나 양고기 요리 옆에 커다란 구름 언덕처럼 쌓아두었다. 엄마가 절대 실패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음식이 바로 매시 포테이토였다.
그날따라 감자는 입자가 거칠고 짜고 축축하면서도 건조한 감이 있어서, 입안에 넣으니 가루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매시 포테이토 맛이 이상해, 엄마.” 나의 첫 마디에 엄마는 조용하고 단호하며 굉장히 화난 어조로, 그리고 이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답했ㄷ. “나이젤… 그냥 먹어라.”
엄마가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그 불쾌한 음식을 박박 긁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냉동 완두콩이 담겨있었던 봉지 밑에 생전 처음 보는 갈색과 검정색 봉지가 있었다. 그 봉지에 커다란 크림색 글씨로 인쇄된 이름은 ‘캐드베리 스매시’였다.
* Cudbury’s Smash: 조리되어 있는 매시 포테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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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틀러
세틀러든, 보글거리는 카올린과 모르핀이든, 파이프든 간에 아빠의 입안에는 늘 역겨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 세 가지가 없을 때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아주 가끔 아빠가 입맞춤을 해줄 때마다 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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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서비스 담배
삼촌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 게임 할까? ‘6펜스를 찾아라’라는 게임이야.”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조프 삼촌이 은화를 숨겼다. 나는 맨 먼저 우리가 ‘긴 의자’라고 부르던 소파 밑을 들여다보았고, 그 다음에는 쿠션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틀렸어.”
나는 삼촌이 앉아 있는 쿠션을 손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또 가까워졌다.” 삼촌의 바지 주머니는 손이 쑥 들어갈 만큼 넓게 벌어져 있었지만 허벅지 위쪽에서는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 나는 삼촌의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어 허벅지를 더듬었다.

(중략)

내 손은 그 물체의 끝까지 내려갔다. 끝부분은 조금 더 불룩하고 부드러웠다. 손가락이 끝부분에 도달한 순간 6펜스 동전의 감촉을 느꼈다. 삼촌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답에 가까워, 가까워. 그래, 그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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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우리 집에서 먹는 콩은 서프라이즈표 건조 완두콩이었다. 그 콩은 너무 얇고 가벼워서 빈 상자로 착각할 만큼 얇고 가벼운 흰 정사각형 상자에 담겨 있었다. 엄마는 평생 그것만 기다리던 사람처럼 서프라이즈 완두콩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서프라이즈 완두콩은 20분 동안 끓는 물에 삶아도 진짜 콩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엄마의 요리는 늘 그림자 요리였다. 원래 그 요리와 겉모습만 닮아 있고 속은 누군가 훔쳐간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놀라운 점(Surprise)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 Surprise Peas: 바로 조리해서 먹는 건조 완두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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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찹
“미안하다, 나이젤.” 식탁에 있지도 않은 얼룩을 행주로 닦아내며 엄마가 말했다. “당분간 학교에 남아서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엄마가 지금은 힘들어서 너를 못 챙겨주겠어. 좀 나아지면 다시 집에 와서 식사를 하렴. 미안하다, 아가.”
엄마가 방금 총을 꺼내 나를 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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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원사가 온 날
조시는 나에게 실망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였다. 나는 조시가 곁에 있는 매 순간을 사랑했기에, 조시가 연못의 초록색 개구리밥을 치울 때나 잔디밭에서 민들레를 뽑아낼 때나 아빠의 특별한 달리아의 시든 꽃송이를 잘라낼 때 옆에 서 있곤 했다.
조시가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내가 들어가면 그는 곧바로 동작을 멈추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조시는 잡지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우리 둘은 조시의 오토바이 좌석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조시는 내 뒤에 앉아서 두 팔로 나를 감싸고 천천히 잡지를 넘겨주었다. 잡지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시는 말했다.
어느 날 나는 부모님 침실로 뛰어 들어가서 나가서 놀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아빠는 화를 내면서 다음부터 노크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조시는 내게 알몸을 들켜도 언짢아하지 않는다고 아빠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엄마와 아빠가 얼굴을 마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다음 주에 나는 여느 때처럼 조시를 만나려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조시의 오토바이는 없었고, 정원에는 웬 깡마른 아저씨가 장미 덤불 위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잡초를 실은 외바퀴 수레가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랫입술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리 비켜라. 내가 바쁜 거 안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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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플랜
증오로 양념한 음식이 세상에 있다면 아주머니가 차려준 식사가 바로 그랬다. 생계를 위해 남의 집 화장실을 닦아야 하는 삶에 대한 증오. 성미 까다로운 남자애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데 자기 자식들에게는 해주지 못하는 처지에 대한 증오. 나의 월요일 점심식사로 설로인 스테이크를 구워주고 자신은 집에 돌아가서 살찐 양의 목을 삶아 당근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오.
page.162
민스 파이 2
“엄마, 나랑 약속했잖아!”
”아가, 미안하다. 장 보러 갈 때 깜빡했어.”
”엄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내 방으로 뛰어 올라가서 문을 쾅 닫고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엄마가 잊어버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page.181
훈제 대구
아빠가 들어왔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새로 이발한 머리. 애프터셰이브. 아빠의 생선은 이제 두 장의 유리접시 사이에 끼워져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빠 어디 갔다 왔어? 다 소용없게 됐잖아.”
”아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상태로구나.”
아빠가 앉아서 식사를 시작하자 나는 부엌에서 나왔다. 원래 저건 특별한 만찬이어야 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 저녁에 아빠가 늦었단 말인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아빠는 차 마시는 시간에 훈제 대구를 먹은 적이 없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뜨겁고 거대한 물결처럼. 조금 있다가 아빠가 다 먹었는지 보려고 부엌에 들어갔더니 아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page.185
생일 케이크
어른들은 어떤 아이의 엄마가 죽으면 그 아이를 대하는 말투까지 바꾼다. 좀 마자란 아이, 또는 유리로 만든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엄마를 잃은 아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확대경 밑에 놓고 분석한다. 사람들이 대문자로 말하는 것처럼 느낀다. 엄마를 잃은 아이는 모든 감각이 한 단계 발달한 것처럼 사소한 일들에도 마음을 많이 쓴다. 그해 나의 생일 파티가 없으리라는 것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열 살 생일 파티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아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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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스 No.6 (새나간 비밀)
포터 아주머니가 언제부터 우리 집 청소를 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되었다. 내가 점심 때 집에 돌아오면 수요일만 빼고 날마다 금방 다림질한 냄새가 났고 직접 만든 식사가 있었다.
그녀와 아빠는 서로에게서 눈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딱딱하고 서먹서먹하고 관습에 맞는 것이었지만 눈으로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알고 지내면서 둘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 같았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실수요 오만이다. 그 언어는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아프고, 차가운 얼음처럼 확실해서 두 사람이 부엌칼로 내 가슴을 푹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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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사탕
내가 산책로 옆의 상점에서 꽃무늬 셔츠를 사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빠는 단칼에 거절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다들 네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할 게다.”
아빠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언제나처럼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엄격하고 성질 사납고 때로는 차가운 남자가 자신이 하느님과 대화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학교 종교교육 교사로서 비오는 날 나를 태워다준 적도 있는 마티노 양처럼 온순하고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인 줄만 알았다. 아니면 우드필드에서 날마다 예배를 주재하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대는 기린 같은 거트리지 아저씨 같은 사람이든가. 자기 자식에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키는 남자가 어떻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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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넛윕 2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나는 골칫거리였고 한 쌍의 연인에게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아빠의 앞길에 아들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아들은 그가 극진히 사랑했던 아내, 하지만 이제는 제발 좀 잊고 싶은 아니를 끊임없이 연상시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우린 잘 지내고 있는데?” 내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 우리는 숲 바로 앞까지 올라왔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안 되겠니? 물론 조안은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여기 살 거니까, 네가 그게 싫다면 너를 시설에 보낼 수밖에 없단다.”
밤에는 비밀스러운 마법을 발휘하던 그 장소가 낮에는 아주 초라하고 현실적으로 보여서 자못 충격이었다. 아빠의 눈이 바닥을 향하는가 싶더니, 마치 누군가가 실크 반바지에 뜨거운 다리미를 올려놓은 것처럼 아빠의 이마에 갑자기 주름이 잡혔다. 이윽고 그 색깔이 내 목을 타고 올라와 귀까지 번져갔다. 뜨겁고, 빨갛고, 창피한 색깔. 냉정한 한낮의 햇빛 속에는 반짝이는 별들도, 먼 곳의 불빛들도 없었다. 벌거벗은 엉덩이도, 쩍 벌린 다리도, 숨죽인 신음소리도 없었다. 다 쓰고 버린 콘돔 수백 개와, 개똥 무더기 몇 개와, 수십 개나 되는 월넛윕 포장지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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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단다.” 말투로 미루어보아 마틴 아저씨는 몇 시간 동안 그 말을 연습한 듯했다. “아빠가 오늘 아침 테니스를 치다가 그만….” 조안이 차 있는 곳으로 오더니 차문을 열고 두 팔로 나를 얼싸안았다.
”이제 우리 둘 뿐이란다, 아들아.” 조안이 불쑥 말했다. ‘아들’이라는 대목에서 조안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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