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도둑맞은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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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박완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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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어머니가 별로 소리도 내지 않고 한껏 느릿느릿 수저를 놀리면서 의치를 빼놓은 흐물때기 입을 이상한 모양으로 우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먹는다는 것이 무슨 저주받은 의무로 느껴져 나는 미처 배가 부르기도 전에 식욕부터 가셨다. 나는 먼저 수저를 놓고 어머니의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왈칵왈칵 치미는 혐오감을 되새김질했다.
나는 어머니가 싫고 미웠다. 우선 어머니를 이루고 있는 그 부연 회색이 미웠다. 백발에 듬성듬성 검은 머리가 궁상맞게 섞여서 머리도 회색으로 보였고 입은 옷도 늘 찌든 행주처럼 지쳐빠진 회색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회색빛 고집이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있노라는 생활 태도에서 추호도 물러서려 들지 않는 그 무섭도록 탁탁한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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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글쎄 말이야. 그놈의 태엽만 틀면 술을 마시는 게 처음엔 신기하더니만 점점 시들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하더군. 그놈도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는 눈치였어. 그래서 그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게야.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태엽만 틀면 그 시시한 율동을 안 할 수 없고....... 한없이 권태로운 반복, 우리하고 같잖아. 경아는 딸라 냄새만 맡으면 그 슬픈 '브로큰 잉글리시'를 지껄이고 나는 딸라 냄새에 그 똑같은 잡종의 쌍판을 그리고 또 그리고."
그는 몸을 떨었다.
이제 그는 나 때문에 떨고 있지는 않았다. 성당 앞까지 왔다.
"사람이고 싶어. 내가 사람이라는 확인을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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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방바닥에 쌓인 흙덩이와 아스러진 기왓장 위에 어머니가 길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고 나는 휑하니 뚫린 지붕의 커다란 구멍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으로 처참한 광경을 또렷이 보았다.
검붉게 물든 호청, 군데군데 고여 있는 검붉은 신혈, 여기저기 흩어진 고깃덩이들. 어떤 부분은 아직도 삶에 집착하는지 꿈틀꿈틀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싱싱한 젊음들이 어쩌면 저렇게 무참히 해체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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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놔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냐. 나를 통해 아버지나 오빠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용감한 고아가 돼봐. 경아라면 할 수 있어.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떳떳하고 용감한 고아로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봐. 사랑도 꿈도 다시 시작해 봐."
그는 훌쩍 가버렸다. 우리는 둘만이 남겨졌다. 고아끼리인 셈인가. 고아들은 남을 사귀기에 서투르다. 내가 먼저 일어나고 우리는 같이 다방에서 나왔지만 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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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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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근처
부처님께서는 '바르게 깨달은 이, 해탈한 이야말로 예배받기에 합당한 이'라고 하셨으니 절에 와서 절을 하는 건 지극히 마땅한 일이고, 그래서 절을 절이라 부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여자들이 부처님을 온갖 번뇌, 집착, 욕심으로부터 해탈한 분으로 숭앙하고, 저다지도 간절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봐주기는 암만해도 좀 민망한 것이, 절하는 데만 열중해 있는 여잘수록 뭔가 물욕적인 것을 짙게, 탁하게 풍기고 있었다. 마치 복중에 온몸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땀방울처럼 염치없이 끈적끈적하고도 번들번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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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근처
듣는 사람 없는 곡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주도 문상객이 있어야 곡을 할 게 아닌가?
친척들 중에도, 친구들 중에도 그까짓 이십 년 전의 난리 때 일어났던 일을 대수로운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땅을 도봉 지구에 사두는 게 더 유리한가 영동 지구에 사두는 게 더 유리한가에 있었고, 사채놀이의 수익이 더 높은가 증권투자의 수익이 더 높은가에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어떡하면 더 잘살 수 있나에 대해 곤충의 촉각처럼 예민할 따름이었다.
내가 아는 이는 다 나보다 부자인데도 내 곡성을 들어줄 수 있을만큼 한가한 이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남보다 더 나은 집, 더 앞서는 문화 시설에의 경주로 막벌이꾼보다 더 지쳐 있었고, 그들이 가진 것은 늘 그들의 욕망에 훨씬 미치지 못해 거러지보다 더 허기가 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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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와 워커
"나는 더 비참해지고 싶어. 그래서 고모나 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술이니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것이 결국엔 어떤 보상이 되어 돌아오나를 똑똑히 확인하고 싶어. 그리고 그걸 고모나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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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
우리도 그렇게 살아요, 네. 우리 식군 노인도 없고 아이도 없고 다 벌 수 있잖아요. 서로 기대지 않고 다 나가서 벌면 못 살 것도 없단 말예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식구들을 붗투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냐 우리가 너한테 기댈까 봐, 안 기댄다 안 기대 두고 보렴 하더니 그 다음 날 내가 공장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식구는 죽어 있었다. 가을이라곤 하지만 노염이 가시지 않은 무더운 날, 방에 연탄을 피워놓고 문틈은 꼭꼭 봉하고 네 식구가 나란히 죽어 있었다.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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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
"여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도둑놈은 더구나 아냐.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실 뿐이야. 아들자식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걸 걱정하셔서 방학 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듣겠어?"
"우리 아버진 좋은 분이야. 요즈음 세상에 보기 드문 분이지. 자식들에게 호강 대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으셨던 거야. 덕택에 나는 이번 방학에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어."
"글쎄 하룻밤에 연탄 반 장을 애끼자고 체운을 나누기 위한 남자를 한 이불 속에 끌어들이는 여자애가 다 있더라고 말야. 물론 끌려들어간 남자가 나였단 소리는 빼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집에 데려다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다가 쓸 만하면 어디 야학이라도 보내자고 하시잖아.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해. 이건 끔찍할 뿐더러 부끄러운 생활이야. 연탄을 애끼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이는 생활을 너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돼."
암 부끄럽고 말고.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당장 이 몸이 수증기처럼 사라질 수 있으면 사라지고 싶게 부끄럽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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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
나는 그를 쫓아 보내고 내가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다는 스스로 뽐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방은 좀 전까지의 내 방이 아니었다. 빗발로 얼룩덜룩 얼룩진 채 한쪽이 축 처진 반바지,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난 더러운 벽지, 자크가 고장 난 비닐 트렁크, 절뚝발이 날림 호마이카 상,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와 서로 결박을 짓고 있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우그러진 양은 냄비와 양은 식기들ㅡ, 이런 것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끼지 못한 암담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