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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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박주영,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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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적응과 망각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암울한 현실을 애써 잊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고픈 본능은 집요하다. 상대가 아무리 숱한 악행을 저질러도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쉽게 포기하고 용서한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 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발길을 돌린 건 아이의 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머니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을 게다. 면발 한 올 한 올에 어머니와 자신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게다. 아이들이 모두 친절한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짜장면은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은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영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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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직업여성이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하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세상 모든 남성과 성관계를 하지는 않는다. 술집에 다니는 여성들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과학적 통계 역시 없다. 똑똑한 커리어우먼이 상황을 조리 있게 표현한다거나, 시골 할머니가 수치를 덜 느낀다거나, 세련되게 표현된 고통만 진짜고 어눌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는 연구도 없다. 법정에서 내가 본 고통은 대부분 눌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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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법규정은 전문가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하다. 세법같이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법도 있다. 그러나 성범죄사건에서 수범자에게 부과된 정언명령이나 금지규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그리 복잡한 기술이 아니다. 간단하고 단순하다. 다른 사람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지지 말라. 폭력이나 협박, 이와 동일시할 수 있는 힘을 사용해 간음하지 말라. 무엇이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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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변곡점의 세찬 파동이 인생을 드높게 쏘아올릴지, 바닥으로 처박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생이라는 함수의 변곡을 예감하고, 그 파고에 기꺼이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수평 그래프로 사는 삶이 평온한 것 같지만 어쩌면 그런 삶은 삐 소리와 함께 벌써 생의 종지부를 찍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고유의 파동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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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노동은 신성한 행위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사람의 생명은 하나같이 고귀하다는 말은 정치적 레토릭이거나 환상이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일 뿐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노동의 강도가 세고 위험할수록 현장은 더럽고 아슬아슬하며, 직업은 그 숫자만큼이나 귀천에 차이가 있다.
생명도 직업에 따라 다른 값이 매겨진다. 민사재판에서 판사의 주된 일 중 하나는 생명이나 신체에 값을 매기는 일이다. 사람이 누군가의 잘못으로 죽거나 다쳐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제기되면, 법원은 신체감정을 통해 노동능력을 얼마나 상실했는지, 그 사람의 월수입이 얼마인지를 조사하고, 정신적 고통까지 계량한 다음 몸값이나 목숨값을 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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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개가 아니다
소수자 보호에 대한 담론은 인류애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취급받는 나조차 열두어 시간만 날아가면 '노 이을리시'라고 무시당하는 유색인종일 뿐이다. 다수자의 지위는 불안정해서 시공과 잣대만 슬쩍 바꿔도 바로 역전된다.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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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부탁받은 정의
김수영 시인은 1968년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인생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흙바닥에 널브러져 누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멸하듯 우리도 한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고, 흙바닥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