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Created by
  • Grit Han
알베르 카뮈, 민음사
page.35
1부
푸르죽죽해진 입술은 촛농 같았고 눈꺼풀은 무겁게 아래로 처지고 숨은 단속적으로 짧아지고 멍울의 통증 때문에 사지가 찢기는 듯하고, 자기 몸 위로 이불을 끌어 덮고 싶어 하는 듯, 아니면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그를 끊임없이 불러 대기라도 하는 듯, 수위는 자리 속 깊이 몸을 쪼그리고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려 숨 막혀 하는 것 같았다. 마누라가 울고 있었다.
"이제 그럼 가망이 없는 건가요, 선생님?"
"죽었습니다." 하고 리유가 말했다.
page.51
1부
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 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page.66
1부
그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확고한 자신을 갖기 어려운 '권리'라는 말이라든가, 자기 몫을 요구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맡고 있는 보잘것없는 직책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당돌한 성격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는 '약속'이라는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한편 '호의', '청원', '감사' 같은 용어들은 자기의 인격적인 자존심을 손상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page.97
2부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도 거의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관심하게 살던 아들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 하나에도 자기들의 모든 불안과 후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고 뚜렷한 앞날도 보이지 않는 그 급작스러운 이별에 우리들은 망연자실한 채 아직 그토록 가까우면서도 어느새 그토록 멀어져 버린,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 하루하루의 삶을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그 존재의 추억을 뿌리칠 능력도 없어진 형편이었다.
page.108
2부
대중들은 말하자면 비교의 기준치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 지난 뒤 그동안의 사망자 수의 증가가 확실해졌을 때에는 비로소 여론도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5주에는 321명, 제6주에는 34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적어도 그 증가율은 사태를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망자의 증가도 충분하지는 못했는지 시민들은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그것은 필시 가슴 아픈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카페에서, '양질의 술은 세균을 죽인다'라는 광고문을 써 붙이자, 알코올이 전염병을 예방해 준다는 것이 세간에 이미 상식처럼 여겨져 오던 차라,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매일 밤 2시쯤 되면 카페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당히 많은 주정꾼들이 거리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서로 낙관적인 얘기들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page.170
2부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느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page.223
3부
같은 시내에서도 특히 피해가 심한 구역을 격리하고 직무상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외에는 외출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조치가 유난스럽게 자기네들에게만 불리하게 취해진 일종의 약자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과 비교해 보면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마치 무슨 자유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곤란한 순간에 부닥쳐도,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네들보다 덜 자유롭다는 것을 상상하고는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
page.289
4부
또 어떤 것은 역사상 대규모로 발생한 페스트와 비교를 하고, 거기에서 비슷한 점(예언에서는 그것을 불변의 사실이라고 불렀다)을 따서, 그것들 역시 전자에 못지않은 괴상한 계산을 해 가지고, 거기서 현재의 시련에 관한 교훈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민의 구미를 가장 많이 당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묵시록의 어느 어법으로 알려 주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는데, 그 하나하나는 이 도시에서 지금 겪고 있는 사건으로 볼 수도 있었고, 또 그 복잡성 때문에 온갖 다른 해석도 가능한 것들이었다. 매일같이 노스트라다무스와 성 오딜을 들먹였고, 또 번번이 성과를 거두었다.
page.308
4부
게다가 투기가 성행해서, 일반 시장에 부족한 가장 긴요한 생활필수품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래서 빈곤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처지에 놓였지만, 반면에 부유한 가정들은 부족한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페스트가 그 역할에서 보여 준 것 같은 효과적 공평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사이에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을 텐데, 페스트는 저마다의 이기심을 발동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다 불공평의 감정만 심화한 것이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page.329
4부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워했어요. 아무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측에 끼어들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몸 한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고, 우리들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age.376
5부
그는 그때에도 이미,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온 사람들의 침대에 감돌고 있던 그 침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디서나 똑같은 휴지부였으며, 똑같이 장엄한 막간이었고, 전투 뒤에 언제나 찾아오는 똑같은 진정 상태였다. 그것은 패배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너무나도 진하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일치하는 침묵이었기 때문에, 리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평화 그 자체를 치유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