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 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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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쇼핑
"실례합니다." 통역이 우리의 관심을 끌려고 한 번 더 말을 붙인다. 나는 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행복하시냐고 물으십니다." 통역이 말한다. 상상이 간다. 그들의 호기심이. 저 여자들은 행복할까?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대답을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채 우리를 바라본다. 그들의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여자들이 더 심하지만,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비밀이고 금기이기에, 그들은 더 흥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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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대기실
"이 늙은이들 대부분은 제대로 일을 치르지도 못해요. 아니면 불임이거나." 나는 헉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금지된 단어를 입 밖에 내다니. '불임'. 이제 불임의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오직 애를 낳을 수 있는 여자와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있을 뿐. 그게 법이다.
"피부가 부드럽군요. 때가 된 겁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면 아기가 생길 거요. 아까운 배란기를 낭비할 이유가 있소? '자기', 1분이면 충분해요." 한때는 자기 아내를 부르던 말이었을 텐데.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하지만 사실 그건 일반적인 명칭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자기'니까. 나는 주저한다. 그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 자신을 바쳐 내게 봉사하려 하는 것이다. "당신네들이 겪는 고통을 그냥 보고만 있자니 끔찍해요." 그는 중얼거린다. 진심 어린, 진심 어린 동정의 목소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는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동정이며 이 모든 일들을. 두 눈은 동정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지만, 한 손은 초조하고 성급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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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낮잠
비둘기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한 번 쫄 때마다 옥수수가 한 알씩 나왔고, 두 번째 그룹은 두 번에 한 알씩 옥수수가 나왔으며 세 번째 그룹은 정해진 원칙이 없었다. 담당자가 옥수수 배급을 끊으면 첫 번째 그룹은 상당히 일찍 포기했고, 두 번째 그룹은 그보다 약간 늦게 포기했다. 하지만 세 번째 그룹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버튼을 쪼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야 옥수수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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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집안 식구들
이렇게 버터를 바르고 있으면, 피부를 보드랍게 하기 위해 버터를 바르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탈출하게 될 거라고, 언젠가는 다시 사랑이든 욕망이든 사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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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밤
내가 겪은 일들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씌어 있으리라. 전언에는 그 이야기도 꼭 씌어 있으리라.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바로 이 전갈이다. 나는 전갈의 존재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들이 전부 사실일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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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출생일
먼저 그들은 여자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후, 출산을 촉진하고, 회음부를 절개해 열었다가 다시 꿰맨다. 그것이 전부다. 마취제조차도 쓰지 않는 것이 아기에게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해 주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리니(창세기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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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출생일
재닌은 아직도 후산의 통증에 마를 대로 말라 버린 초라한 눈물을 힘없이 흘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환희에 차 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승리다. 우리가 해낸 거다.
젖가슴이 탱탱하게 아파왔고, 심지어 젖이 약간 새기까지 했다. 가짜 젖, 간간이 이런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벤치에 앉아 이송되어 간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어져 빨간 옷 뭉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는 아파한다. 우리 모두 무릎 위에 유령 하나씩을,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흥분이 사그라진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실패와 대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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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영혼의 두루마리
문제는, 보관할 데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방에 보관하면 되잖소. 당연하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들킬 거예요. 누군가 찾아내고 말 거예요. 어째서? 정말 모른다는 듯 그가 물었다. 정말 모르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지 실제 상황에 대해 정말로 무지한 기미를 비춘 건, 이번이 처음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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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영혼의 두루마리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지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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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이세벨의 집
"그분은 안 되는지도 몰라."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사령관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하느님? 하느님이라면, '안 하실지도'라고 말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불경한 말이다. 안 되고, 못 하는 건 오직 고집스럽게 몸을 열지 않고, 훼손되고 결함 있는 여자 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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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이세벨의 집
앞가슴에 방울 술이 달린 까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웨이트리스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들 바빠 보여서 부르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보았다. 모이라였다. 분수대 근처에 모이라가 다른 두 여자와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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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이세벨의 집
차라리 모이라가 '이세벨의 집'을 폭파시켜서, 그 속에 있던 사령관 50명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대담무쌍하고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끝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엄청난 일을,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이라가 결국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끝을 맺기나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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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이세벨의 집
"불을 꺼야겠군." 사령관은 침울해져서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으로 말한다. 나는 그가 불을 끄기 전 잠깐 그의 모습을 본다. 제복이 없으니 그는 말린 물건처럼 더 왜소하고 늙어 보인다. 문제는 내가, 그를 대할 때 보통 때 그를 대하던 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대체로 나는 그와 할 때 불감이다. 분명 여기서는 이런 김빠진 결말과 진부함 말고 우리 사이에 뭔가 있어야만 할 텐데. 연기해 봐. 머릿속으로 스스로에게 고함을 쳐 댄다. 기억할 거 아냐. 빨리 끝내지 않으면 밤새도록 여기 있어야 한다고. 어서 네 몸을 이리저리 뒤치고, 소리가 들리도록 밭은 숨을 쉬어야 해.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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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
이와 관계해서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기막힌 여성 통제 기관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해야겠습니다. 림프킨의 자료에 따르면 저드는 처음부터 출산을 비롯한 여타 목적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비용이 절감되는 방법은 여성들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위 '전통적 가치'를 진심으로 신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부수적 이득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지요. 권력이 귀해지면, 아주 하찮은 권력이라도 유혹적이거든요. 또한 부정적인 유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거나 불임이거나 나이 든 독신 여성들의 경우 아주머니로 봉사하면서 잉여 인력이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면 악명 놓은 '콜로니'로 보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오브프레드"의 탈출을 도운 것이 분명한 "닉"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일을 처리한 방식을 보면 그는 '언더그라운드 피메일로드'와는 별개의 단체이지만 관련이 있던 단체 '메이데이 지하 조직'의 일원으로 보입니다. 후자는 전적으로 구출 작전을 수행했으며, 전자는 세포 조직이었습니다.
모든 사학자들이 알고 있듯이, 과거는 위대한 암흑이오, 메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속에서 목소리들이 우리를 찾아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들은 그들이 온 세상의 어둠에 흡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선명한 빛 속에서는 그 목소리를 정확히 해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박수갈채)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