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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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장강명,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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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터틀맨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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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화살
실제로 걔는 좀 졸렬하게 굴었지. 사랑을 인질로 삼았어.
"너 나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면 그냥 내 옆에서 한국에 있어 주면 안 돼? 호주에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해?"
난 그 말을 이렇게 받았지.
"너도 나 사랑한다며. 나 사랑하면 날 따라서 호주에 가면 안 돼? 기자가 되는 게 그렇게 중요해?"
지명이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건 안 되겠다고 하더라. 자기는 기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이제 내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고도 했어.
"호주에 가는 게 너의 꿈이구나."라고 그는 맥없이 중얼거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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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화살
그리고...... 어차피 공부 제대로 하려는 애들은 처음부터 호주로 유학 오지 않아. 솔직히, 호주가 공부하러 오는 데냐?
그러니 한국 남자애들은 호주 사람들 앞에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정에 굶주리고 자존심은 다칠대로 다친 남자애들 눈에, 내가 큰누나처럼 보였나 봐. 시니컬하지만 딱히 권위 의식은 없잖아, 내가. 또 푼수 기질도 다분하니까 그런 게 사람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던 거지. 게다가 뭣 모르는 애들은 내가 영어를 되게 못한다고 생각했거든. 사실은 발음이 후져서 그렇지, 지들보다는 훨씬 잘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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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이스 점프
"나, 오늘로 만 서른이 됐어. 하루 종일 생각했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런데 결론은 너였어. 내가 인생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 뿐이야. 너더러 당장 한국에 돌아오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여기서 계속 너를 기다리려고 해. 평생을 기다려도 괜찮아. 사랑해, 계나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가슴이 진정이 안 되게 두근두근 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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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블로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언젠가는 우리가 달빛 아래 볏짚을 든 채 마주치게 돼 있었어.
파블로는 결국 하와이처럼 생긴 섬에 도착해.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파란 바다 앞에 모래사장이 있고 야자수가 있고 거북이가 다녀. 마지막 장면이 이래. 파블로가 선글라스를 쓰고 야자수 사이에 해먹을 쳐서 그 위에 누워 있는 거야. 음료수를 마시고 부채를 부치면서. 그 아래 이런 멋진 글귀가 있었어.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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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십자성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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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십자성
재인이 뻐기면서 "한국에서는 아직 목소리 큰 게 통해. 돈 없고 빽 없는 애들은 악이라도 써야 되는 거야."라고 하더라. 하, 정말 그런 거야? 돈 있고 빽 있고 막 떼쓰고 그러면 안 되는 것도 되고 막 그러는 거야, 여기서는?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악다구니도 못 쓰는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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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이를테면 물려받을 만한 경제력을 지닌 부모가 있거나(재력), 명문대를 나왔다거나(학력), 빼어난 외모(체력)라도 타고 났든가 해야 한다. 그나마 이 중에 하나라도 있어야 노년에 빈궁을 면할 여지가 생긴다. 심각한 문제다. 한데 이보다 큰 문제가 있다. 생득적인 재력이 전제되면, 사교육과 성형을 통해 학력과 체력은 후천적으로 쉽게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타고난 재력이 없다면, 나머지는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인생 역전을 빌며 매주 복권 사는 사람만 는다. 공정에 기댈 수 없는 사회에서, 우연에 기대는 현상의 증가는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