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는
1. 올해는 프롬프트를 쓴 해였습니다. 딱히 멋진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냥 썼습니다. 많이 쓰면 늘 줄 알았는데, 많이 쓴것 같지도 않고, 쓴다는 사실 자체가 실력을 보장하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썼습니다. 거의 생활처럼 썼고, 일처럼 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다 보니 문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좋아졌다기보다는, 어딘가에서 한 겹이 벗겨진 쪽에 가까웠습니다. 2. 2025년에도 LLM은 정말 거침없는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따라가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울 것은 더 많아지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늘어갑니다. 이제는 내가 투여하는 비용보다 더 많은 걸 투여해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들도 생겨났습니다. 클로드 코드의 토큰을 몇 천 만씩 쓰고, 다수의 에이전트를 자신의 삶에서 굴리는 삶이란 어떨까요? 아직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3. 대신에 그냥 프롬프트를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한 해 동안 '일'이란 게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포지션의 운은 따라주었지만, 프롬프트를 쓰는 제 능력은 그에 미쳤을까 물어본다면 당당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았습니다. 그래도 떠도는 동안은 걱정되었고, 어려웠지만, 굶어죽진 않아 다행입니다. 오히려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새 직업을 하는 순간엔 언제나 굶어죽을 각오는 했었으니, 이정도면 좋게 말해 최악보다는 양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 그와는 달리, LLM으로 만들어내는 것들을 보면서, 한 해 동안 내적인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무서워지더군요. LLM이 만든 콘텐츠를 보면, 예전처럼 "와, 잘 썼다"가 먼저 오지 않습니다. 내용이 틀려서라기보다 너무 쉽게 그럴듯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한 글들과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오고, 링크드인이나 레딧, 스레드와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정말 많은 포스트들이 나오지만, 시간을 들여서 읽을 것들이 귀해집니다. 그럴듯한 것들을 파보면, 이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썼는지 의아할 정도의 균열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이 되면, 문장이 주는 감각은 빨리 마르고 피로해집니다. 5. 그걸 보면서 제 방향성을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프롬프트는 우리의 생각을 가능하게 하지만, 되려 우리의 생각이 가능해진 세상에서는 그 그럴듯함이 오히려 우리를 옥죄는 것은 아닌지. 그 선두에 서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보고 살아가야 할까요? 저무는 12월에는 그 질문이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들어왔습니다. 6. 어쩌면 나는 외움에서 배움을 시작한 어문학도의 관성을 아직 완전히 벗어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배움은 이해에서 나고, 이해는 앎과 기억에서 나는 것을 보며 문장들을 암기하고 빗어낸, LLM 이전 세대의 배움에서요. 7. 어쩌면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번역을 할 때, 텍스트의 무게감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배상안 판결에서 숫자 하나가 틀리면 누군가의 삶이 바뀌고, 외국 대법원의 판례 한 줄에 몇 년 뒤 망하는 회사를 보았습니다. 종이 위에 무게없이 올라온 텍스트가 그제서야 무거워졌습니다. 무겁고, 무서웠습니다. LLM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에는 그 무게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게를 느끼는 주체가 없습니다. 패턴을 인식하고, 확률을 계산하고, 그럴듯하게 이어붙입니다. 그건 이해가 아니죠. 적어도 내가 아는 이해는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무게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암기와 이해의 관성에서 시작해서, 텍스트가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사람. 잘하긴 하는데, 더 잘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여전히 필요한 자리라고 아직도 생각합니다.
- Two_Jay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