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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면서도, 인상적인, 감정을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감정과다에 주의하십시오.
환멸
1. 제목 그대로 입니다. 최근에 느끼는 감정을 압축하고 되새기다보니 환멸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2. 지친 것도 아닌데 지쳤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기대가 꺾입니다. 언제는 무성했는지도 몰랐는데 무성의해지고, 건조해집니다. LLM과 생태계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3. 더 이상 새로운 모델이 나왔다고 해서 재밌지가 않습니다. 더더욱 열광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으며, 그에 대해 요동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충격' '뒤쳐진다' '큰일났다'고 버즈워드를 띄우는 사람들을 보면 그 건조함만큼의 혐오감이 듭니다. 이전에는 3.5에서 4로 올라올 때만해도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였습니다. 2.0 Flash는 그 자체로 재밌었고, 23년에 작성한 CoT 프롬프트를 기반으로 발전한 추론형 모델은 우리를 아득히 지금의 이 먼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뿐입니다. 모델을 보는 시각 자체가 건조해짐을 느낍니다. 그저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기계였구나 싶습니다. 4. 그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니 LLM이 이상이 아니라 그냥 '기술'로 보입니다. 기술이라면 으레 당연한 것들 (e.g. 추상화, 프로토콜) 등이 진행중이고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를, 환상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티 하나 없이 그대로의 직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LLM에 대한 인사이트와 대단한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냥 그저 밥먹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제게 그 직업이 가지는 의미는 그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양쪽의 사람들에게도 모두가 이 일을 할 때 동일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실제 문제들은 뭔지가 더 고민이 됩니다. LLM 생태계가 발전하다가 무슨 새로운 것이 일어날 지는, 사실 기대가 잘 되지 않습니다. Agent라고 나오는 수많은 챗봇과 에이전트를 다뤄보면서, 내 삶에 도움이 될지언정, 영화 HER에서 나올법한. 눈에 안보이더라도 인격 비슷한 조각이라도 있어보이지도 않아보입니다. 그저 제가 쓴 프롬프트에 기반해서 천의 천, 만의 만의 모델 너머의 텍스트에서 평균적인 무언가가 툭하고 나오고, 그게 내가 하는 일에 쓸만하다는 건조한 사실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모델은 더 작거나 더 큰 파라미터를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해내고, 더 효율적이고 좋은 추론을 할겁니다. 어떤 직업은, 사라졌다는 소식도 없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 일을 사람이 아닌 LLM에게 맡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가 별로 기대되지 않습니다. 5. 내가 서있는 대상과 생태계를 건조하게 바라보니 Myth 도 보였습니다. 특히나 LLM은, 무언가 대단한 기대감을 갖고 오기 좋습니다. 전지한 신의 모습이나, 정답을 주는 안내자도, 친구나 상담사의 모습도 투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것들이 다 사람을 모티브로 하는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말이 통하면, 대상의 매커니즘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상을 씌우곤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말하든 들어줄 것이라 한 편으론 착각합니다. 본질적으로 확률연산기가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는 시점부터 프롬프트는 혼란에 쌓이기 시작하고,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섞입니다. 예전에는 혹했다면, 이제는 신기해하지도 흥미가 가지도 않습니다. 처음에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한다고 할 때에 있던, 계몽을 해야한다는 대단한 사명감도 흩어진 지 오랩니다. 그저 흘려보낼 뿐입니다. 6. 솔직히 말해서, 현실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환멸은 기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과정에서 오는 불편하고도 필연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환상이 벗겨지면 남는 건 종종 건조한 기술의 알맹이뿐이니까요. 이게 좋다거나,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이라거나, 인류사에 남는 충격적인 발전(9할이 개소리인) 하는 말들은 자칫 공허한 위로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 테이블에서 남는 건 요구사항에 대한 에러율이나, 벤치마크, 해결해야하는 테스크와, 가늠정도로 어림잡는 토큰 사용량 정도니깐요. 그렇다면 환멸의 끝에 반드시 뭔가 새로운 게 기다리고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많은 기술이 한창의 거품을 지나면 그저 평범한 현실로 돌아옵니다. 과장된 기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 기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편리한 도구가 될 뿐이죠. 프롬프트 엔지니어 역시 특별한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사업을 하지 않는 한, 저와 같이 인하우스에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익힌 노동자가 될 가능성도 큽니다. 특별할 게 없고, 혁신적일까도 싶습니다. 그저 다른 수많은 기술직처럼 정해진 일을, 적당히 잘하면 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제일 잘하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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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o_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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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 & 요즘생각
1. 이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뿌듯하면서도,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하다는 것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감사함이 먼저였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저 조차도 어딘가에서 취직을 하여, 실제로 제품을 만드는 '인하우스 프롬프트 엔지니어'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고민했습니다. 반은 비전으로, 나머지 반은 오기로 시작한 직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얼마나 갈 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습니다. 대개는 '이 다음에 어떤 일을 하지? 재취직은 가능할까?'라는 생각으로 수렴되었죠. 그런 의심을 잠재우고, 특별한 가시적인 성과가 생긴 것 같아서, 또 그 성과를 제 자신과,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군에 몸담거나 관심있으신 분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뿐입니다. 복잡하다는 것은 취업을 선택하면서 비중이 줄어들거나, 거절해야만 하는 외주와 프로젝트, 선택지도 생겼다는 점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내키지도 않는 거절메일들을 쓸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단단하게 안정적으로 살아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이고, '정말 연이라면 언제든 만나서 같이 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 힘듬과 복잡한 생각들을 삼킬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감사하고 다행인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장의 인식도 넓어진 만큼,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필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점입니다. 이러한 분들과 소통을 하고, 실제로 외주를 맡아보면서, "내가 헛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지나오며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LLM으로 무엇을 만들고, 할 수 있고, 가치있는 것을 생산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와 같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들이 자신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많은 '돕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저를 도왔던 분들과 비교하면 이 분들의 도움은 달랐습니다. 이 분들의 도움, 더 구체적으로는 인정과 리스펙트는 그 분들이 원하는 자리에서 짊어지며 얻어가는 것들이었습니다. 힘들었던 시간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깎이고 다듬어지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둥글어진 자리에 타인의 마음이 들어오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자만하지는 않아야함을 느낍니다. 이리저리 일을 하면서, 최근 기술 스텍에 대해서 많이 쌓지 못했습니다. 일을 하다보니 동료가 나보다 압도적인 우월함을 자랑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는 문제정의에, 누군가는 사업에, 누군가는 내가 LLM으로 닿을 수도 없는 지식과 시각에서 내려보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알곤 합니다. 협력이란 걸 이래서 하는구나라고 프리랜서여서 혼자가 편했던 저를 굽히고 꼬며 두들기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항상 평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나고 나면 또 싫지는 않고, 문제가 있다면 약간 조금 덜 어울려 산 제 문제겠거니 합니다. 자만하지는 않되, 새롭게 시작하는 자리에서도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군의 앞서 달려나가는 기수 중 한 명으로, 잘 열심히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2. "그래서 요즘 무슨 일을 하길래 글도 없느냐?" 라면, 바빴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일 있는 걸 쳐내고, 그 와중에 해보고 싶은 건 시간을 쪼개면서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2월에는 전형을 썼던 기업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12월부터 면접보던, 그 회사가 맞습니다. 타의에 의해서 마시는 고배는 더욱 쓰립니다. 한 몇 일은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꼴을 당하나 자책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남는 게 없을 것 같아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일희일비해서 내내 매달리면 이런 일도 겪고 하는데, 한 번 심각하게 안좋은 것을 맛보았으니 이보다 더 미친 짓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요. 뭐, 그렇긴 합니다. 먹고사는 건 많이 어려워지고, 위험한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잘 살아 있네요. 그렇다고 제가 그 회사를 용서하거나 잊었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외주/사이드 프로젝트를 3개를 굴립니다. 2건은 진행 중, 1건은 검토 단계입니다. 따로 잔잔한 일도 들어오기도 하구요. 바쁘고 쳐지고 힘들지만, 어떻게든 해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2-3월을 문자 그대로 '버텼기에' 지금의 기회들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나 되돌아보며 생각합니다. 3. 기술 생태계는 좀 더 빠르게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두드러진 특징도 보입니다. 아래는 최근에 메모한 잡생각을 올려봅니다. LLM은 이제 친숙해졌습니다. 유료로 결제를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이제 조금 더 익숙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과연 300 달러가 가치있는 소비냐라고 묻는 것이라면, 일단 돈을 내고 소비할 준비 자체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LLM이 과연 쓸모있느냐는 이제 그렇다고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고, 이제 '더 뛰어난 지능과 결과물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라는 쪽으로 그 흐름이 거의 넘어오는 듯 합니다. Agent는 이제 식상한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Agent는 두 가지 직군에서 크게 관심을 보인 키워드였기 때문입니다. 개발자와 사업직군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한 쪽은 기술적인 발전과 설계, 구현에 열광하고, 사업직군은 '이를 어떻게 팔아먹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대중은 사실 이 영역에서 빠져있지요. 그렇기에 많은 플랫폼에서 Agent는 다른 이름으로 한 번 감싸서 이해하기 쉬운 활용처로 포장되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Agent 이외의 다른 이름과 다른 키워드를 붙이며, 특화된 활동만을 제공하는 패키지에 가깝습니다. MCP는 이전의 유행어들과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우선 이 키워드는 개발자를 위한 키워드가 맞습니다. 프로토콜이란게 원래 그렇죠. 우린 밥먹듯 크롬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쓰면서 HTTP 프로토콜이 어떤 구조로 통신을 주고 받는지 모릅니다. 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직접 구현을 해보았거나, RFC를 읽어보았거나, 아니면 WireShark같은 프로그램으로 자기 컴퓨터를 들락날락하는 통신을 뒤집어 까본 사람이라는 것이겠죠. 그런 것을 생각하면 MCP의 유행은 좀 유별나긴 합니다. 개발자는 물론이고, 인플루언서, 조금은 관심있을 만한 비개발자들도 달라붙고 있습니다. 키워드에 유행을 타는 일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이전과는 그 양상이 다릅니다. 중요한 차이점은 비개발자도 간단하게 참여해서 Smithery에 있는 MCP 서버를 긁어와서 사용해볼 수 있는, 참여가 가능한 구조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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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o' 프로젝트를 하면서
요새 '돌로플래닛'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프로덕트는 여성향 웹소설 형식의 가상의 남자친구 AI companion. 기능 개발하면서 숨도 돌릴 겸. 요새 느끼고 메모한 걸 정리. 0. 세상에 쉬운 거 없다. 이건 정말 진짜다. 그리고 겉보기에도 쉬워보이는 것도 실제로 뛰어들면 쉽지 않은 게 꽤 있다. 그리고 지금 프로젝트가 그런 것 같다. 초기에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커피챗을 하면서, 전반적인 챗봇 서비스에 대해 어드바이스를 해드리며 Rofan.ai와 같은 서비스들에 대해 '으휴, 저 LLM 래퍼 뚝딱으로 돈 개많이 버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해보니깐 쉽지만은 않다. (머쓱) 강건하면서 잘되는 서비스를 단번에 만들어내는 경험은 언제나 어려운 것 같다. 거기에 충분히 발전된 수준의 좋은 컨텐츠를 올리는 건 더욱 어렵다. 프롬프트가 2만자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기능을 유지하는 것도, 디버깅과 업데이트를 하면서 사라지거나 미약해지는 기능들을 관리하는 것은 더더 어렵다. 이걸 좋은 컨텐츠의 방향으로 온전하게 무언가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더더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언제나 우리끼리만 '와~~~ 잘된다~~'하는 건 쉬운데, VoC의 컴플레인은 혹독하고 피드백은 날카롭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맛없는 식당은 조용히 발길을 끊는 것처럼, 라이브 서비스도 그러하다. 그래서 계속 매일 새벽마다 로그를 보면서 새로이 올라오는 로그의 양이나 얼마나 많은 유저가 실제로 채팅을 하는지 의식하고 있다. 그래도 반응이 아예 없지는 않고,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획을 그을 수 있는 한 번 도전해볼만한 컨텐츠라서 계속 힘을 쏟아보기로. VoC의 컴플레인을 직접 받아내는 팀원이 있으니, 이슈를 해결하지 못하는 오늘 같은 날이 더 미안하다. 1. 개발을 잘하는 것과 발상을 전환하는 것. 그리고 어떤 걸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건 다 별개의 요소다. 감성적이면서 웹소설 주요 소비층인 2030 여성향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로판' 웹소설이나 nsfw 컨텐츠에 대한 이해가 나에게는 전혀 없었다. 개발이면 코드만 치면 되지만, '프롬프트는 생성하는 것이 곧 컨텐츠'이니 컨텐츠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세상에나, 내가 이걸 한다고 하트시그널이나 환승연애 같은 프로그램의 담화와 사건 흐름을 분석하고, 19금인 탑*이나 레*코믹스에 돈을 주면서 nsfw 만화를 긁어보고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 그런데 그런 컨텐츠들이 보다보면 소비자가 어떤 정서와 텐션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데에 도움이 되긴 된다. 앞으로 테스트 시나리오와 최소 기대수준을 보면서 신규기능에 대한 Ground level을 설정할텐데, 그 땐 더 도움이 되겠지. 또 좋은 팀원에게서 많이 배운다. 연차가 완전 오래되신 시니어 마케터분의 상황대처 인사이트나, CTO분의 가설수립과 검증기반 개발, 대표의 컨텐츠 이해에 대해서 너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배워야 할 점이다. 언제나 나랑 다른 사람과 마주할 때 배우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지금은 수입이나 다른 건 약속하지 않아도 사람 때문에 잘하고 싶어지는 프로젝트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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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
2024년. 일만 하고 연구하고 억지로 안읽히는 논문보고, 그러다 어거지로 방법을 찾아서 삽질하고, 삽질한 것으로 집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지새우고, 그러고 반복. 경험. 경험. 또 나은 경험. 그렇게 살다가보니깐 누군가의 눈에 띄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더 깊은 경험으로 초대받고, 그러고 또 누적되는 경험. 경험의 희귀도나 깊이와 넓이는 저마다 어느정도 달라도, 이런 시퀸스로 살아온 것 같다. 지금은. 약간 버겁다. 버거워도 도망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되려 맞서고 싶고, 물러서지 않고 싶다. '너는 안될거야'라는 목소리가 들리면 '네가 뭔데'하고 들이받는다. 그러고 또 쌓이는 경험. 2024년을 그렇게 정리했다. 정리하고 보니, 주위에서 사람들이 생겼다. 사람들이 어디서 내 이름을 들어봤다고 한다. 난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난 내 앞의 문제만 열심히 보고, 드릴링한 것 밖에 없다. 반복적으로 하다가 보니, 더 잘하는 것처럼 비춰지나보다. 난 아직 정말 진심으로 부족한데. 그렇게 사람이 모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보니, 지나가는 교차점이 되기도 하고, 되려 내가 누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이젠 작게나마 어떤 컨텐츠를 만들고 모일 구실을 찾고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주위에 오고, 더 나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겠지. 그리고, 처음의 반복. 경험. 경험. 사람. 그리고 경험. 반복. 모인 사람들과 더 큰 문제를 같이 풀고. 그리고 같이 경험을 쌓고. 또 반복. 이런 사이클을 얼마나 타야할까? 그렇게 몇 년을 하다가 보면, 이제야 처음 문을 여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직군도 어느정도 우리가 해온 것으로 인정받고, 그 경계를 확고히 그릴 수 있었으면 하는 자그마한 내 꿈에, 또 자그마한 획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싶었다. 반복만 하면 될까. 그러면 경험과 사람은 쌓이고, 확장하고, 그러면 그 꿈에 닿을 수 있을거니.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까? 무얼 목표로 두고 살까?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너머를 보아야하나? 다른 산을 찾아야 하나? 이 우물을 다 팠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파야할까? 아니면 더 깊게 파던 우물을 파야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년의 버킷리스트를 생각해보기 전에 펜을 멈추었다. "궁극적으로 무얼 위해 이걸 하고 있나? 잘 산다는 건 뭐지?" 사실 그러던 참에 오늘 저녁에 이걸 우연히 봤다. 댓글에 있는 한 마디에 머리가 멍했고 눈물이 났다. "난 한 잔의 샴페인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겁먹고 살아왔는데", 막상 마지막 순간 그게 중요할까? 너무 조심하지 않았니? "그러게요. 사실 던지지 말란 법도 없는데, 앞으로 던지지는 않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쏟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보다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삶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마지막이 성큼 다가올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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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음
"맞아요, 저도 이렇게 일상에 드문드문 하는 생각들이 유튜브 콘텐츠가 되긴 하는데." "그죠. 평소에 메모 같은 거 많이 하시잖아요?" "많이 해요. 근데 또 요즘에는 저도 그게 고민이었거든요. 뭔가 답습하는 느낌." "음. 근데 그거는 이제 답습한다는 느낌은 약간 본인만 느끼는 경우가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 이런 얘기들을 사실 아티스트나 이런 창작하시는 분들은 되게 고민 많이 하시잖아요." "그죠." "보면은 너무 잘하고 계시고, 사실 이게 스타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건데... '어, 계속 발전을 또 꾀하시는구나' 하면서. 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근데 그게 너무...... '답습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게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친구가 예전에 했던 졸업 작품에 되게 기억에 남았던 게 비디오 아트 였는데, 이런 말을 계속 쓰는 거예요. 엄마, 제가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쓸데없는 일은 아니에요. 그걸 계속 쓰는 거예요. 되게... 너무 뭔지 아시겠죠? 그니까 이게 딱 아웃풋이 되기 전에 진짜 쓸데없는 일 같잖아요." "맞아요." "근데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사실 아직 그 증명을 외롭게 이어가는 분들이 또 많으실 것 같아요. 사실 의심이 진짜 힘든 건데. 그런 시기를 지날 때 어떻게 좀 이겨낼 수 있었는지, 그걸 묻는 분들이 항상 많이 계시더라고요." "어쨌든 다시 그 터널을 이제 좀 다시 또 돌아오게 되는데 '기록'인 것 같아요. 결국 기록이다." "아, 그 항아리 게임처럼..." "항아리 게임처럼." "이게 쓸데없는 게 아니었다." "그지? 맞아, 이런 이게 쓸데없는 게 아니었고, 또 약간 터널에서 긴 터널을 지나다 보면, 어느 쪽이 내가 왔던 곳이고 내가 나가야 하는 곳인지 헷갈릴 때가 있잖아요.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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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대하는 법
11월 1일에 퇴사를 했습니다. 뭐, 그건 그거고. 퇴사를 하게 된 동기는 여러가지지만, 감정적 부침도 한 몫 했습니다. 그동안을 정리하면서 좋은 것을 보려고 했고, 좋은 책을 보려고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한 두달 지낼 어느정도의 목돈도 있어 방에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과 새 책장을 주문했습니다. 책을 보고, 커피를 내려마시면서 그동안의 감정들을 하나씩 켜켜이 보고 있었습니다. 인생책들 중에 하나인,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시 한 번 정독했습니다. 5년마다 다른 감상을 주기에, 그 5년을 맞이하며 읽은 파우스트는 여전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는 분의 간단한 작업 몇 가지를 도와드렸습니다. 정말 옆에서 보면 많이 배우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깐요. 정말 좋은 결과물을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최선만 다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에 대한 마음이, 그 무엇보다 더 큰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주어진 것은 감사함 뿐이었지만. 다만 개인적으로 그 결과물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평가를 내릴 때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당장 집어던져서 휴지통에 쳐넣고 싶다'의 동의어입니다. 중간에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고, 그동안 쌓은 경험이 이거 밖에 안되었나 싶어서 무력감에 하루 종일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받으시는 분이 고맙다고 하여도 또 제가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여도, 그건 제 기준에서 명확한 실패였으니깐요. 그러다 일이 마무리될 즈음에 특강이 잡히고, 이런 저런 외주 제안이 들어와서 검토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어진 건 없지만서도,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싶어서 항상 소통을 열어놓고 있었거든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서 실기시험을 2시간 치른다는 회사도 있어서 다닐 생각은 없어도 시험이 궁금해 면접을 신청했죠. 뭐, 조건을 잘 맞춰준다면 안 다닐 이유가 없긴 합니다만,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깐, 그리고 재미있어 보였으니깐.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있었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웠다 더웠다 변덕을 부리던 때에, 조부상을 맞았습니다. 가족사가 복잡해서, 제 기억에서 가족이라는 단어와 엮인 좋은 기억은 대개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머니과 함께 한 기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기억의 두 번째 조각이 사라지면서, 애써 가족과 소원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내려갔다 정리하고 올라왔습니다. 내려올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갔지만, 올라올 때는 가슴을 부여잡고 올라왔습니다. 그러고 쉼없이 서울로 와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강의 준비를 하는데. 운동선수의 Yips 마냥 계속 멈춰섭니다. 흘러가는 생각이고, 키보드의 올라간 손이고, 모든 것이요.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해서 몇 일 동안은 풀어주려고 갖은 방법을 써봤습니다. 보고싶었던 숲을 보고자 강릉으로 하루 내려가 오죽헌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인센스 스틱'같은 생전에 사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안정요법을 처방하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처방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사람이 '펑'하고 터져서 멈춰섭니다. 무언가 막 뒤섞인 그 감정의 굴레는 그 한 꺼풀도 풀어짐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게 무언지 해석하지도 풀어내지도 못한 채 그저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꾸역꾸역 하나씩 있는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바위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사실 이런 상황까지 치달으면서도 저는 제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고, 놀랍게도 지금까지도요. 미안함과 슬픔, 부정적 감정을 말하는 건 미성숙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슬픔은 대개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 내지는 '돌이켜 회피해야 할 것' 내지는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하였죠. 어쩌면 발전하는 인간상을 보여야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현대의 사회상에서, 이런 초인적인 인간상이 각광받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슬픔을, 마치 결착을 지어내어 극복해내어야 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실존하는데에도 불구하고 '없다' 해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게 맞을까요?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취미를 갖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스스로 긍정적인 사고와 멘트로 최면을 걸고, 좋은 '방법'을 찾는데 지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쨌든 삶은 흘러갈 겁니다. 이번 주엔 강의 준비도 해야죠. 저녁에는 외주작업을 설득하기 위한 아주 소규모 테스팅 결과도 정리해서 던져줘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옆에서는 한 무리의 스태프 개발자 분들이, RAG가 어쩌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어쩌고, LLM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열띄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그렇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가진 분들이 많겠죠. 앞으로 흐를 시간선 위에서 만날, 제 결과물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은 해결하고 다시오도록 하지요. "'슬픔'을 대하는 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글입니다. 이 이야기 뒤의 결말이 정리되면, 이어서 쓰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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