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에 퇴사를 했습니다. 뭐, 그건 그거고. 퇴사를 하게 된 동기는 여러가지지만, 감정적 부침도 한 몫 했습니다. 그동안을 정리하면서 좋은 것을 보려고 했고, 좋은 책을 보려고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한 두달 지낼 어느정도의 목돈도 있어 방에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과 새 책장을 주문했습니다. 책을 보고, 커피를 내려마시면서 그동안의 감정들을 하나씩 켜켜이 보고 있었습니다. 인생책들 중에 하나인,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시 한 번 정독했습니다. 5년마다 다른 감상을 주기에, 그 5년을 맞이하며 읽은 파우스트는 여전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는 분의 간단한 작업 몇 가지를 도와드렸습니다. 정말 옆에서 보면 많이 배우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깐요. 정말 좋은 결과물을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최선만 다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에 대한 마음이, 그 무엇보다 더 큰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주어진 것은 감사함 뿐이었지만. 다만 개인적으로 그 결과물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평가를 내릴 때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당장 집어던져서 휴지통에 쳐넣고 싶다'의 동의어입니다. 중간에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고, 그동안 쌓은 경험이 이거 밖에 안되었나 싶어서 무력감에 하루 종일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받으시는 분이 고맙다고 하여도 또 제가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여도, 그건 제 기준에서 명확한 실패였으니깐요. 그러다 일이 마무리될 즈음에 특강이 잡히고, 이런 저런 외주 제안이 들어와서 검토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어진 건 없지만서도,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싶어서 항상 소통을 열어놓고 있었거든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서 실기시험을 2시간 치른다는 회사도 있어서 다닐 생각은 없어도 시험이 궁금해 면접을 신청했죠. 뭐, 조건을 잘 맞춰준다면 안 다닐 이유가 없긴 합니다만,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깐, 그리고 재미있어 보였으니깐.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있었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웠다 더웠다 변덕을 부리던 때에, 조부상을 맞았습니다. 가족사가 복잡해서, 제 기억에서 가족이라는 단어와 엮인 좋은 기억은 대개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머니과 함께 한 기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기억의 두 번째 조각이 사라지면서, 애써 가족과 소원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내려갔다 정리하고 올라왔습니다. 내려올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갔지만, 올라올 때는 가슴을 부여잡고 올라왔습니다. 그러고 쉼없이 서울로 와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강의 준비를 하는데. 운동선수의 Yips 마냥 계속 멈춰섭니다. 흘러가는 생각이고, 키보드의 올라간 손이고, 모든 것이요.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해서 몇 일 동안은 풀어주려고 갖은 방법을 써봤습니다. 보고싶었던 숲을 보고자 강릉으로 하루 내려가 오죽헌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인센스 스틱'같은 생전에 사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안정요법을 처방하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처방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사람이 '펑'하고 터져서 멈춰섭니다. 무언가 막 뒤섞인 그 감정의 굴레는 그 한 꺼풀도 풀어짐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게 무언지 해석하지도 풀어내지도 못한 채 그저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꾸역꾸역 하나씩 있는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바위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사실 이런 상황까지 치달으면서도 저는 제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고, 놀랍게도 지금까지도요. 미안함과 슬픔, 부정적 감정을 말하는 건 미성숙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슬픔은 대개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 내지는 '돌이켜 회피해야 할 것' 내지는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하였죠. 어쩌면 발전하는 인간상을 보여야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현대의 사회상에서, 이런 초인적인 인간상이 각광받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슬픔을, 마치 결착을 지어내어 극복해내어야 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실존하는데에도 불구하고 '없다' 해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게 맞을까요?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취미를 갖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스스로 긍정적인 사고와 멘트로 최면을 걸고, 좋은 '방법'을 찾는데 지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쨌든 삶은 흘러갈 겁니다. 이번 주엔 강의 준비도 해야죠. 저녁에는 외주작업을 설득하기 위한 아주 소규모 테스팅 결과도 정리해서 던져줘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옆에서는 한 무리의 스태프 개발자 분들이, RAG가 어쩌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어쩌고, LLM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열띄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그렇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가진 분들이 많겠죠. 앞으로 흐를 시간선 위에서 만날, 제 결과물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은 해결하고 다시오도록 하지요. "'슬픔'을 대하는 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글입니다. 이 이야기 뒤의 결말이 정리되면, 이어서 쓰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