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
1. 제목 그대로 입니다. 최근에 느끼는 감정을 압축하고 되새기다보니 환멸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2. 지친 것도 아닌데 지쳤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기대가 꺾입니다. 언제는 무성했는지도 몰랐는데 무성의해지고, 건조해집니다. LLM과 생태계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3. 더 이상 새로운 모델이 나왔다고 해서 재밌지가 않습니다. 더더욱 열광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으며, 그에 대해 요동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충격' '뒤쳐진다' '큰일났다'고 버즈워드를 띄우는 사람들을 보면 그 건조함만큼의 혐오감이 듭니다. 이전에는 3.5에서 4로 올라올 때만해도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였습니다. 2.0 Flash는 그 자체로 재밌었고, 23년에 작성한 CoT 프롬프트를 기반으로 발전한 추론형 모델은 우리를 아득히 지금의 이 먼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뿐입니다. 모델을 보는 시각 자체가 건조해짐을 느낍니다. 그저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기계였구나 싶습니다. 4. 그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니 LLM이 이상이 아니라 그냥 '기술'로 보입니다. 기술이라면 으레 당연한 것들 (e.g. 추상화, 프로토콜) 등이 진행중이고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를, 환상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티 하나 없이 그대로의 직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LLM에 대한 인사이트와 대단한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냥 그저 밥먹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제게 그 직업이 가지는 의미는 그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양쪽의 사람들에게도 모두가 이 일을 할 때 동일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실제 문제들은 뭔지가 더 고민이 됩니다. LLM 생태계가 발전하다가 무슨 새로운 것이 일어날 지는, 사실 기대가 잘 되지 않습니다. Agent라고 나오는 수많은 챗봇과 에이전트를 다뤄보면서, 내 삶에 도움이 될지언정, 영화 HER에서 나올법한. 눈에 안보이더라도 인격 비슷한 조각이라도 있어보이지도 않아보입니다. 그저 제가 쓴 프롬프트에 기반해서 천의 천, 만의 만의 모델 너머의 텍스트에서 평균적인 무언가가 툭하고 나오고, 그게 내가 하는 일에 쓸만하다는 건조한 사실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모델은 더 작거나 더 큰 파라미터를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해내고, 더 효율적이고 좋은 추론을 할겁니다. 어떤 직업은, 사라졌다는 소식도 없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 일을 사람이 아닌 LLM에게 맡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가 별로 기대되지 않습니다. 5. 내가 서있는 대상과 생태계를 건조하게 바라보니 Myth 도 보였습니다. 특히나 LLM은, 무언가 대단한 기대감을 갖고 오기 좋습니다. 전지한 신의 모습이나, 정답을 주는 안내자도, 친구나 상담사의 모습도 투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것들이 다 사람을 모티브로 하는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말이 통하면, 대상의 매커니즘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상을 씌우곤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말하든 들어줄 것이라 한 편으론 착각합니다. 본질적으로 확률연산기가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는 시점부터 프롬프트는 혼란에 쌓이기 시작하고,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섞입니다. 예전에는 혹했다면, 이제는 신기해하지도 흥미가 가지도 않습니다. 처음에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한다고 할 때에 있던, 계몽을 해야한다는 대단한 사명감도 흩어진 지 오랩니다. 그저 흘려보낼 뿐입니다. 6. 솔직히 말해서, 현실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환멸은 기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과정에서 오는 불편하고도 필연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환상이 벗겨지면 남는 건 종종 건조한 기술의 알맹이뿐이니까요. 이게 좋다거나,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이라거나, 인류사에 남는 충격적인 발전(9할이 개소리인) 하는 말들은 자칫 공허한 위로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 테이블에서 남는 건 요구사항에 대한 에러율이나, 벤치마크, 해결해야하는 테스크와, 가늠정도로 어림잡는 토큰 사용량 정도니깐요. 그렇다면 환멸의 끝에 반드시 뭔가 새로운 게 기다리고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많은 기술이 한창의 거품을 지나면 그저 평범한 현실로 돌아옵니다. 과장된 기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 기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편리한 도구가 될 뿐이죠. 프롬프트 엔지니어 역시 특별한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사업을 하지 않는 한, 저와 같이 인하우스에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익힌 노동자가 될 가능성도 큽니다. 특별할 게 없고, 혁신적일까도 싶습니다. 그저 다른 수많은 기술직처럼 정해진 일을, 적당히 잘하면 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제일 잘하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지만요.
- Two_Jay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