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역설, 디지털을 딛고 다시 '디기아수'
인류 역사상 지식과 정보가 가장 빠르고 풍부하게 생산되는 시대의 한가운데 놓여진 느낌입니다. 검색창에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생성형 AI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면 복잡한 개념을 설명한 글과 이미지, 표와 코드, 발표자료까지 몇 초 만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한때는 며칠씩 걸렸을 자료조사와 문서 작성이 이제는 몇 분 안에 끝나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영역에도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PPT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수많은 문서들을 내가 직접 모두 작성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흐릿해져가는 것도 같죠. 분명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와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필요한 정보를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고 느낍니다. 읽을거리는 넘쳐나는데 정작 끝까지 읽고 싶은 글은 찾기 어렵고, 검색 결과는 많지만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미지와 영상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태로 생산되지만, 보고 나서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생기는 피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생성형 AI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디지털 생태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팽창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는 물론이고 이미지, 영상, 음악, 코드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직접 만들어야 했던 수많은 결과물이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생산됩니다. 과거에는 콘텐츠를 하나 만드는 데 시간과 노동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AI를 통해 무한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생산의 속도가 빨라진 만큼 그 결과물의 가치까지 함께 높아진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의 현상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읽을 가치가 있는 것,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누군가의 경험과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을 골라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디지털 공간에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보 사이에서 의미 있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우리의 시간과 집중력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이프오브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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