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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구 저쩌구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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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초엘리트>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난리치더니 결국 사고쳤네’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이 좀 경박한가? 내 한계다. 죄송하다. 다행히 책은 그렇게 쓰이지 않았다. 명확한 문제의식과 고유의 관점, 탄탄한 취재, 잘 훈련된 저널리스트의 깔끔한 문장이라는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훌륭한 논픽션이다.
부제를 같이 보자. 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클리셰 짙은 단어들의 집합에 심드렁하다가도 뭐가 이리 거창한가 싶어 따져보면 책 내용에 충실한 제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 멋진 제목은 카피라이팅의 영역이지만 독서 후에 와 닿는 제목은 한줄평의 영역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선호한다. 왠지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읽어보자. 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저자인 사이먼 쿠퍼는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로 ‘옥스퍼드 출신(그 중에서도 일부 그룹)’을 지목하고 그들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엘리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저자인 사이먼 쿠퍼 역시 옥스퍼드 출신이기에 가능했던 저술일 테다.
그나저나 ‘초’는 왜 붙을까? 엘리트가 아니라 초엘리트인 이유 말이다. 그 연유를 설명하기 위한 기나긴 논증이 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다. 조금만 읽어봐도 옥스퍼드 출신이면서 현재 영국의 정치인 혹은 언론인 등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은 시간 인터뷰한 것이 느껴진다. 좀 스포하면 저자는 이들 엘리트들이 엘리트로 추대되는 것이 능력이나 전문성 등과 별 상관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Chums’다. ‘chum’은 ‘친구’라는 뜻인데 우리가 익히 아는 ‘friend’에 비해 비격식적이고 남성중심적 단어라고 한다. 나는 이쪽이 좀 더 함축적인 제목이고, 그래서 카피라이팅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어쨌건 ‘Chums’는 영국 사회 지도층이 이권 카르텔 같은 게 아니라 꽤 많은 걸 공유하며 끈적하게 엮여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그사세’라고나 할까.
사립학교를 나와 옥스퍼드에 입학하고 옥스퍼드 유니언(동아리)에서 활동하다 졸업 후에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브렉시트’는 당연한 결과다. 이것을 내 식대로 요약한 게 이 글의 맨 첫 부분에 쓴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이 놀라운 점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게 쓰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독서 경험인 만큼 직접 겪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
📚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밑줄 그은 문장을 보려면? 아래 박스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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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획기적인 브루잉커피: 그린루스카
무언가에 대한 인식폭이 외부 자극에 의해 별안간 확장될 때가 있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다. ‘획기적’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쓴다. 고수를 즐기기 시작한 건 제주시청 인근 레스토랑 도브 다이브에서 광어 셰비체를 맛봤을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내게 고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추가하지 않는 식재료였다. 광어 셰비체에는 기본적으로 고수가 들어가므로 혼자였으면 별 생각없이 먹었을 테지만 고수를 먹지 않는 해린이와 함께였기 때문에 빼달라고 요청했다. 사장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럼 고수를 따로 덜어드릴 테니 맛이라도 보시겠어요? 그게 이 메뉴의 킥이라서 절대 못드시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쯤 드셔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했다. 굳이 됐다고 할 이유도 없었고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에 진정성이 느껴져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로 내 세계는 달라졌다. 획기적이었다. 제주공항 근처에 위치한 카페 그린루스카에서 마신 브루잉커피(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도 그런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커피 문외한이라 보통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기본이 보장하는 만족도의 최저선에 안주하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 브루잉커피를 마실 때면 커핑 노트를 유심히 읽는다. 음. 이 맛이 이런 맛이라고? 봐도 모른다. 봐도 모르겠으니 굳이 몇 천 원 더 주고 마실 이유가 없다. 그러니 또메리카노, 또메리카노. 그런데 그린루스카에서 왜 브루잉커피를 시켰더라? 아메리카노가 메뉴에 없었던 것 같다(정확하진 않음). 커피는 잘 모르고 굳이 고르자면 산미가 있는 걸 고르는 편이라고 하니 원두를 세 개 추천해 주셨다. 맛 설명 부분을 천천히 살펴봤다. 눈에 들어온 게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라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그 조합은 물론 수박이 세 번 연속 나오는 게 웃겼다(정해진 작성법에 따른 것이겠지만…). 자리에서 카페 인스타그램을 훑다보니 사장님이 커피를 가져다 주셨다. 뭐라 설명해 주셨으나 기억은 안 난다. 고개는 열심히 끄덕였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 이렇게 정확한 설명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리스타가 의도한 커피 맛을 그대로 느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날의 원두 상태와 브루잉 방식과 나의 피로도 또는 포만감 같은 것들이 잘 조합된 결과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우의 수를 뚫어냈다. 딴 게 중요한가. 그거면 된 거지. 감동적이었다. 나도 커피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획기적이었다. 앞으로 나는 브루잉커피에 좀 더 도전해보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러고 보면 몇 번 경험한 뒤 ‘이건 내 스타일 아니야’라고 결론 내리고 마음 속 창고 안에 처박아둔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중에 우연한 계기로 나를 사로잡을 것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한번 들춰볼 수 있도록 창고 문을 단단히 잠가두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브 다이브의 광어 셰비체와 그린루스카의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 준 교훈이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 보답으로 드릴 게 “정말 잘 먹었(마셨)습니다”라는 인사뿐이었다. 이 글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고. 덧) 그린루스카라는 상호는 그린과 루스카를 붙여 만들었다. 그린은 사장님이 좋아하는 초록색. 루스카는 빈티지 잔으로 유명한 아라비아핀란드의 초기모델 중 하나로 핀란드어로 가을(낙엽, 단풍, 갈색 등등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테리어 톤을 그린&브라운으로 잡으셨다고. 그런데 우리가 앉았던 러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바닥에는 보라돌이가 빼꼼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쪽에는 나나와 뚜비가 보였다. 감각적인 인테리어 사이에 튀어나온 예전 공간의 흔적에 웃음이 나왔다. 한정적인 예산은 오래된 건물이 품고 있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노력한 현재 사이를 이어준다. 그건 또 그거대로 썩 나쁘지 않은 듯하다.
병연
앞으로 난 어떤 시간을 쌓아갈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OO로서의 XX'라는 표현을 쓰려면 OO과 XX가 이질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에 오류가 날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음식으로서의 김치찌개"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내 되물을 것이다. "그럼 김치찌개가 음식이지, 뭔데?" 마치 음식과 김치찌개가 전혀 다른 부류인 듯 얘기하는 데서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쓰임은 보통 이렇다. "음식으로서의 애벌레" 또는 "어린 날 추억으로서의 김치찌개" 딱 봐도 '대체 뭔 소리야?' 궁금해지지 않는가.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어떠신지. 하루키는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각 직업에서의 영역 배타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갖고 포용력을 보이는 인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며 "소설 따위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일의 기본적인 양상"일 뿐이라는 변명을 덧붙이면서도 기본적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기는 태도를 유지한다. ​ 하지만 제목에서 예고하고 있듯 하루키는 소설가를 엄연한 직업으로 분류한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설가에게는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시각화도 언어화도 안 되는 종류의 것"으로서 직접 겪은 이들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능과는 다른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 자신 소설가로 수십 년을 살아온 하루키가 푸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가가 된 계기, 문학상, 오리지낼리티, 소설 쓰는 법, 체력, 학교와 교육, 해외 진출 등에 대한 생각을 덤덤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방점까지 확실히 찍어가며 전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꿈꾸는 이는 물론 소설가가 아닌 일하는 사람 모두가 나름의 통찰을 얻을 수 있게 쓰였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 누가 공감하지 못할까. ​ 하루키는 1949년에 태어났다. 68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71년에 결혼했다. 74년에 개업한 재즈바는 79년 등단하고도 2년 더 운영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데뷔 40주년(2019)을 훌쩍 넘긴 올해에도 새로운 장편소설을 출간한다. 한 인간의 수십 년은 아득한 우주의 시간만큼이나 경이롭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대가의 권위는 시간에서 나온다는 점을 부인할 명분이 없다. 앞으로 난 어떤 시간을 쌓아갈지 고민했다. 눈앞의 문제 따윈 가소로워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밑줄 그은 문장을 보려면? 아래 박스를 클릭!
병연
널 위한 희생: 증국상 <소년시절의 너>
학교는 시험만 잘 보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엄마는 시험만 잘 보면 우리 인생도 달라질 거라며 기대한다. 우등생인 첸니엔에게 시험으로 가는 길은 양옆에 절벽을 둔 외길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도 꾹 참아야만 한다. 시험을 못 보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반면 시험만 잘 보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처럼 첸니엔이 배운,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희생뿐이다. 샤오 베이의 삶은 이미 밑바닥이다.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기에 목적도 없다. 그런 그에게 첸니엔이라는 목적이 나타난다. 이제 샤오 베이의 목적은 ‘첸니엔의 목적 달성’이 된다. 평범한 삶을 얻으려는 첸니엔을 위해 샤오 베이가 할 수 있는 건 희생뿐이다. 그의 계산으로 그건 해볼 만한 거래다. 왜? 자기 삶은 이미 밑바닥이니까. 뭔가 더 해줄 수 없을 때 인간은 대부분 비슷한 선택을 한다. 내가 가진 전부를 주자. 하지만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전부를 딛고 일어설 만큼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샤오 베이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란다. 사실 첸니엔은 알고 있었을 테다. 시험이라는 관문과 평범한 삶이라는 대가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샤오 베이와 자신의 삶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허상임을 알면서도 단지 매달릴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라는 현실에 매달렸다. 그를 보며 첸니엔은 깨달았을 테다. 자신 또한 허상이 아닌 현실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현실은 다름 아닌 샤오 베이라는 것을. 이제 둘은 상대방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자기 삶이 나아지기 위한 조건으로 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희생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게 스스로를 희생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상대방이 생각하는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 위한 조건을 해치는 것과 같다. 아직 어린 그들은 이처럼 슬픈 역설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것이 역설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위태롭게 전진한다. 바로 앞이 절벽이 아니길 바라면서. 여기까지. 위기를 세팅하는 과정만으로도 사회상 고발이라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너무 쉬운 방법으로 풀어냈다는 것과 그렇게 다다른 곳이 뻔한 공익적 결말이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냐는 말에 "둘은 너무 어리잖아요"라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내는 어른의 존재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