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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굳이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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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병연은(24.07.16)
1.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2박 3일, 마지막 날 오전에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므로 짧은 편이죠. 그래도 꽤 알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식사 덕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볍게 소개.
2.
첫째 날 점심은 서귀포시에 위치한 식당 센트로에서 먹었습니다. 4인이었고 수비드 제주 돼지, 감자 뇨끼, 비스크 크림 파스타, 조개 파스타, 로메인 샐러드를 골랐습니다. 점심 식사에는 1인당 음료 한 잔이 포함돼 있습니다.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어요. 손님은 전부 도민이었습니다. 하긴 제주도까지 와서 굳이 양식을 먹을 이유가 없긴 하죠. 그래도 맛집이긴 한 것 같습니다. 2시에 방문했는데 세 팀 정도 있었고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도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시더라고요. 실제로 맛도 좋습니다.
3.
저녁은 제주시청 인근 중식 이자카야 산아에서 먹었습니다. 나름 관계자(?)라서 권해드리기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래도 맛은 확실합니다. 송이관자, 칠리새우,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아, 여기도 손님 대부분이 도민입니다. 만약 가보시게 되면 아시게 되겠지만, 관광객이 머물 만한 동네가 아니거든요. 아, 한 블럭 뒤에는 갱이네보말칼국수라는 데가 있습니다. 여긴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맛집인 것 같아요. 라마다호텔에서 잠을 자고 산아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갱이네에서 아점을 드시면 딱이겠네요.
4.
둘째 날 점심은 제주시청 바로 옆에 있는 라스또르따스에서 먹었습니다. 멕시코 음식점입니다. ‘제주도에서 굳이…?’ 싶긴 하죠? 어쨌든 관광객과 제주도민 모두가 인정한 맛집입니다. 저는 까르니따스, 뜨리빠, 부리또를 먹었습니다. 까르니따스와 부리또는 기본 타코입니다. 구성이 기본이라는 거지 맛은 꽤 좋습니다. 제주 한우 곱창을 활용한 뜨리빠는 정말 맛있더군요. 달고기(생선)를 쓴 뻬스까도가 이 날 안 된다길래 2안으로 주문한 건데 아주 훌륭했습니다. 아, 고수가 들어가는데 뺄 수도 있습니다.
5.
저녁은 한림에 있는 육고깃집에서 먹었습니다. 뼈갈비세트가 주력인데 등심덧살에 대한 평가도 좋습니다. 저는 2인팟이라 뼈갈비세트만. 고기를 구워먹고 있으면 뼈에 붙은 고기를 따로 구워서 내옵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역시 고기는 뼈에 붙은 고기인가…아참, 한림점이 본점인데요. 제주시에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맛에 크게 차이는 없지만 왠지 본점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접근성은 제주시가 더 나을 테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6.
‘굳이…?’ 싶은 메뉴와 ‘굳이…?’ 싶은 동네의 조합은 색다른 제주도의 맛을 알려줬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일로 제주도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굳이…?’ 싶은 것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몇 년에 한 번 여행으로 찾는 경우였다면 저 역시 안전한 선택을 했겠죠. ‘굳이…?’ 싶은 선택지는 가장 먼저 배제했을 게 분명합니다. 당연히 그게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정석만으로도 일정을 채우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원래 변주나 응용은 따분한 기초 위에서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7.
제 딴에는 평소의 나답지 않은 과감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암요. 물론입니다. 삶의 모양이 다양한 이유는 각자 쌓아온 선택의 모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테니까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굳이…?’ 싶은 것들을 허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굳이…?’ 싶은 선택지가 소거된 삶은 아무래도 ‘다양한 삶의 모양’에 기여하기 어려우니까요. 돌연변이가 진화를 만드는 원동력인 것처럼 내 경험에서도 가끔씩 돌연변이가 하나 쯤 나와줘야 합니다.
8.
앞으로도 제주도를 자주 갈 겁니다(당장 9월 초에도 방문 계획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주 가는가? 그에 대해서는 따로 전해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제주도에 관해서는 꽤 재밌는 포지션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1년에 3~4회는 꼭 제주도를 가는데 제주도민도 아니고, 이주민도 아니고, 순수하게 제주도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을 좋아해서 여러 곳을 다니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모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경계 위에 서 있는 느낌이죠.
9.
그래서 말인데요. 고백하자면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제주도에서 굳이…?’라는 이름으로 디에디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겁니다. 작년 이맘때 생각했던 것 같군요…엇, 잠시만요. 지금 ‘굳이 버킷리스트라고 할 것까지 있나…?’, ‘굳이 그런 걸 글로 써야 해…?’, ‘굳이 디에디트인 이유는 뭐지…?’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넣어두십시오. 왜냐면 저도 아직 그 답을 모르니까요. 원래 ‘굳이…?’ 싶은 건 떠올리는 게 먼저고 언젠가 직접 해본 다음 이유를 깨닫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지난 레터 이후에
돌아온 풀칠의 에세이를 썼습니다. 🍔아이스버거는 혁신인가 [풀칠 186호] ‘더운 날에 더운 음식을 먹어서 더위를 이겨낸다’라는 발상은 일종의 ‘혁신’이라고 봤습니다. 언뜻 봐서는 말이 안 되는데(더 덥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납득했고 그러한 습관을 들였고 결과적으로 복날이라는 문화로 이어졌으니까요.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혁신이란 무엇인가?
<일론 머스크>의 일부를 재구성했습니다. 의사결정권자에게 주관식으로 물어선 안 됩니다 에서 읽어보실 수 있는데요. 트위터 신뢰 및 안전 팀 소속이었던 요엘 로스가 혐오 발언으로 차단된 계정을 복구하고 싶다는 일론 머스크에 대응한 일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의사결정권자와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우고 싶더라고요.
잡소리도 조금씩 쌓아가고 있습니다. 궁금하면 여기를 클릭 → "그런 거는 일기장에나 써라" 에서 '그런 거'에 해당하는 것들 모음집
문장 수집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오터레터라는 뉴스레터를 새로 구독했는데 흥미로운 글이 많습니다. 스크랩을 많이 했네요. 한 달에 6,600원인데 결제를 하면 이전 글도 모두 볼 수 있으니 한 번 쯤 살펴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 자의식을 버려야해.

그가 말하는 자의식이란 무엇인가. 나이, 직업, 성별, 바쁜 일상과 그에 대한 투정과 걱정, 스스로를 옥죄는 목표와 기준. 나를 둘러싼 ‘추상적인’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물론이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서 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만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 오지윤, EGO(보낸이 오지윤)
드디어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를 다 읽었습니다. 누구의 인생이든 편집하면 나름대로 힘을 가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일론 머스크라는 문제적 인물은 대체 몇 명 분의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싶습니다. 이번 주에 독서모임을 합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새롭게 읽고 있는 책은 두 권입니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1>, 사이먼 쿠퍼의 <옥스퍼드 초엘리트>입니다.
<인간의~>는 예전 직장 동료와의 대화를 계기로 집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현재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저와 되게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 분이 추천한 책이라고 하니 왠지 궁금해지더라고요. 마침 애인의 책장에 꽂혀 있길래 곧바로 시작했습니다.
<옥스퍼드~>는 박찬용 에디터의 서평 보리스 존슨의 '에포트레스 시크'(아레나옴므플러스)을 읽고 담아뒀던 책인데 마침 밀리의서재에 있었습니다. 추천합니다. 재밌어서 쭉쭉 읽고 있습니다. 이런 논픽션을 읽을 때면 한국 버전으로 쓰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분명 어딘가에 누가 이미 써놨을 텐데...
답답장 드립니다
사나: 나눠주신 손석구 배우 인터뷰에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제 식으로 요약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협업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내놓는 것,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아주 작은 공간, 그러나 그 안에서는 잘 노는 것'. 예술가라 함은 천방지축 제 맘대로 노는 일만 할 것 같은데, 실은 굉장히 부자유하고 눈치보는 상황에서 역량을 내야 하는 작업이고... 그마저도 안전한 곳을 찾으면 복이고요. 예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이 그렇지 않나 생각도 되고.
소비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저도 요즘 씀씀이가 헤퍼져 고민이 큰데, 실은 씀씀이를 줄여 근근이 사는 것과 늘려서 헤롱대며(별루 헤롱댈 만큼 쓸 자원도 없지만요)사는 것... 큰 차이가 있나, 있대도 그 나름의 복이 있다라고... 말씀드리며 생각을 맺네요.
병연: 흔히 예술가 하면 떠올리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은 이미지는 완전한 환상, 많이 양보해야 극히 드문 예외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긍정(혹은 찬사)하는 것은 극화된 콘텐츠(특정 예술가를 다룬 다큐 포함)를 제외한 어디서도 본 적 없네요. 무형이든 유형이든 금전이든 비금전이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모두 다 노동과 비슷한 모습을 한 것 같아요. 대부분의 영역이 그렇지 않나 생각되는 것도 그 이유일까…
소비는, 그렇네요. 큰 차이가 있나? 있대도 그 나름의 복이 있지 않을까? 완전히 납득되는 말입니다.
이한빈: 병연님의 글은 힘이 있어요. 어떤 힘이냐, 병연님의 시선을 따라가고 싶어지는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살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발상에 대한 이야기는 발화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데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코 후비적거리며 귓등으로 흘렸을 이야기도 병연님이 이야기하면 오호라, 하면서 듣고 싶어지는, 모든 생각을 꽤나 흥미롭게 풀어내는 놀라운 재능이 있으십니다.
오늘 빈티지 시계 이야기도 그랬네요. 저는 얼마 전 천연 가죽 구두를 하나 샀는데, 16만원 짜리를 우연찮게 구한 VIP 쿠폰을 사용해 13만원에 구입했거든요. 매우 합리적인 소비라 생각해 흐뭇하게 지인에게 자랑했는데, 쿠폰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꺼내기도 전 '가격이 16만원'에서 깜짝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분야에는 이 정도 금액을 쉽사리 쓰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변명처럼 들렸다면 기분탓입니다). 어느 순간 내 소비의 기준이 높아진 것일까, 아니면 온갖 신발을 신어봤으나 이 브랜드에 대한 소비는 이성이 흐려진 사람이 된 것일까(발이 매우 편한 가죽 구두를 파는 브랜드입니다.),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봤던지라 병연님의 시계 이야기가 몹시 재밌었습니다.
재밌게 쓰려고 노력해주신건가요? 그것 또한 좋습니다. 독자를 의식하면서도 솔직하게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타고난 재능 없이는 어려운 일이잖아요. 아니, 재밌게 봤다는 한마디를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에세이 한 편이 되었군요. 재능 만땅인 병연님 글을 보고 나면 이렇게 저도 글을 쓰고 싶어지는지라, 여러모로 어떻게든 되겠지가 도착하는 날을 즐겁게 기다리게 됩니다. 건승하셔요. 오래오래 글 써주세요.
병연: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이거 (광고) 아닙니다. 한빈 님, 고맙습니다. 얘기해주신 것이 힘이 되기도 하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그러네요. 저와 저의 글에 대해 이만한 관심을 갖고 잘 조립된 물건처럼 튼튼한 느낌을 주는 언어로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시니 참 신나네요. 제가 쏟아냈던 말과 글을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혼자 끄적이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빈 님처럼 같이 읽고 같이 쓰는 사람들이 있어서, 또 그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고 저도 그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드문드문 써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한빈 님도 건승하셔요. 오래오래 글 써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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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전기차
요즘 정병연은 전기차 화재를 다룬 뉴스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1일이었죠. 인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로부터 시작된 화재가 대규모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화재는 약 8시간 뒤에 잡혔는데 주변 차량 140여대가 손상됐고 아파트 주민 22명이 유독 가스 등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네요. 정전으로 인해 인근 행정복지센터 등에 설치된 임시시설로 대피한 사람도 많았고요. 전기차를 향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의도와 무관하게 신체와 재산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타인의 의도도 아닙니다. 이번 사고는 주행 중이거나 충전 중이 아니라 주차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불이 붙었습니다. 전기차 화재는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른다는 인식을 강하게 남겼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진화도 어렵고요. 실제로 전기차 화재 발생 확률이 내연기관차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이나 스프링클러 등으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은 갑자기 폭발하는 차량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과 전소된 주변 차량을 찍은 이미지에 밀려 설득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전기차를 지하주차장에서 퇴출하자는 의견이 득세하는 것을 보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냥 치워버리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할까요? 평소에 타고 다니는 차량이 전기차입니다. 아무래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해당 이슈를 좀 더 예민하게 바라봤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충분히 이해되기도 합니다. 개인으로서 저 또한 전기차가 무서우니까요. 말 그대로 언제 터질지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내연기관차를 탈 때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화재를 포함한 사고는 언제나 제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나니까요. 인간이 만든 그 무엇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비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리스크는 남겠죠. 하지만 리스크의 소멸은 불가능합니다. 관리되는 리스크와 그렇지 않은 리스크가 있을 뿐이죠. 리스크 관리를 위해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두루 시도해봐야 합니다. 앞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테고요. 모든 신기술은 언제나 부작용을 동반했고 이것을 최소화 하는 과정을 거쳐 우리 일상에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와 시도 끝에 ‘퇴출’이라는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퇴출은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퇴출과 같은 결정일까요? 아니요. 완전히 다릅니다. 검토된 경우의 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검토된 경우의 수는 그 자체로 강력한 논리가 됩니다. 어떤 경우도 검토하지 않고 내린 결정에는 검토되지 않은 경우의 수가 미련처럼 영원히 따라붙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른 뒤 반복될 거란 얘기죠. 그래서 참 안타깝습니다. 왜 깔끔하고 뒤탈없는 단순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걸까요?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봐서 그런 걸까요? 물론 단순한 문제에는 단순한 해결책이 답이긴 합니다만…이번 전기차 화재 건은 관련 기사만 조금 찾아봐도 그렇지 않던데요. 답답합니다, 답답해!(여러 글 중 가장 좋았던 글을 공유합니다. 해당 문제를 다양하게 분석하고 해결 방안과 여러 대안을 제시하는 글입니다) 사실 전기차를 글감 삼아 쓰려고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라식(라섹) 수술과 엮어서 ‘유경험자는 충분히 만족하는데 무경험자가 괜히 트집잡는 것’에 대해 꼬집어 보고 싶었습니다. ‘리버스 라떼’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전기차와 라식(라섹)에 더해 한 가지 사례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묵혀두고 있었는데…뜬금없는 내용으로 써먹어버렸네요.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언젠간 쓰겠죠. 지난 레터 이후에
병연
가족 여행
요즘 정병연은 속초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저와 동생은 9시에 출발했고 부모님은 경북 김천에서 5시에 출발했습니다. 사실 속초를 도착지로 찍는다면 소요 시간이 크게 차이나진 않습니다(여행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서울 4시간, 김천 4시간 30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왜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섰을까. 절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이 합류하기 전에 원주 구룡사, 영월 법흥사에 들렀다 올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그 다음 일정도 절인데. 만나자마자 점심을 먹었습니다(식당은 정가네메밀막국수입니다. 절 방문 일정은 고정값이기 때문에 그 동선에 맞춰 급하게 찾은 곳인데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짧지만 웨이팅도 했어요. 추천합니다). 평창 월정사를 둘러본 뒤 속초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었습니다. 물론 술도 한 잔 했죠. 다음 날 아침에 순두부를 먹고 또 다른 절로 향했습니다. 속초 신흥사와 양양 낙산사입니다. 이틀만에 절 다섯 곳이라니. 이쯤 되면 이번 여행은 ‘속초 여행’보다는 ‘강원도 절 투어’라고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자연스레 불심이 차오릅니다. 33관음성지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의 절 중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그리고 이 절들을 순례할 수 있게 만든 책자가 있습니다. 책자를 들고 종무소에 가면 인증 도장을 찍어줍니다. 여기에 포함된 강원도 소재 절은 총 다섯 곳입니다. 네. 저희 부모님이 이틀 사이에 다녀가신 곳들이죠. 멀리 강원도까지 오시는 김에 한번에 해치우려고 하셨던 겁니다! 참고로 이 33이라는 숫자는 우연히 정해진 게 아닙니다. 33은 불교에서도 의미 있는 숫자인데요. 관세음보살이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 불교의 관음 성지 순례 역시 서부 지역의 33개의 절을 방문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죠. 물론 저희 부모님은 순례자라기보다는 국내 여행 다닐 겸 참여하는 라이트 유저지만요.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33관음성지 순례에 이용(?) 당한 셈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님과 가는 가족여행은 자칫 효도 여행에 그칠 수도 있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자연스럽게 여행의 책임(?)을 분담하게 되니까요(아빠는 3년 뒤에는 꼭 튀르키예에 가자고 노래를 부릅니다). 언젠가는 전적으로 저와 동생이 책임지는 효도 여행을 다니겠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꺼이 할 수 있죠. 예전에 갔던 여행에서 엄마는 운전석에 앉은 나와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뒤에서 바라보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20년 전에는 그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바뀐 위치가 새삼스러웠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았던 그 시기를 이제 아이들이 사는구나.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윤회구나. 이렇게 우리는 돌아가는 것이구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구나. 하늘로 돌아간다면 오늘을 떠올리며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참, 아름다웠더라 지난 레터 이후에
병연
안목
요즘 정병연은(24.06.30) 돈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경제력과 경제관념은 제각각입니다. 당연히 ‘많이’의 기준도 다 다를 테죠. 그러니 얼마를 썼냐고 묻지 마시길. 대신 본인이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금액을 떠올려 보세요. 조금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이번 달 지출액은 평소보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큽니다. 아, 집이나 차를 사진 않았습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마 안 쓴 거 같긴 하네요. 적어도 수십만원, 많게는 백만원이 넘어가는 물건들(!)을 며칠 동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이젠 살 거 다 사고 참을 건 다 참았습니다). 그러다보니 10만원 쯤 되는 가격 차이는 비교 요소조차 안 되더군요. 남들은 결혼 준비할 때나 할 법한 경험을 체험판으로 겪어봤습니다. 재밌다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마냥 재밌다고 할 수 없겠죠? 지금 즐겨야겠습니다. 마케터는 온갖 소비를 해봐야 한다죠? 출처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유명한 마케터 분들이 쓴 책이나 출연한 유튜브 영상에서 접했을 말입니다. 소비자가 돈을 쓰게 만드는 일을 하는 만큼 그 스스로 소비자가 돼 돈을 열심히 써봐야 ‘영감’과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그로써 업무에 나만의 ‘취향’을 녹여 ‘트렌드’를 따르는 게 아닌 이끌 수 있다는 류의 얘기죠. 솔직히 당시에는 ‘맞는 말이긴 한데 좀 공허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는 마케터가 아닙니다만…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지출을 하고 나니 그런 조언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일부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얼마 전 방문했던 서울시 성수동에 위치한 빈티지 가구점 오드플랫(@oddflat)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사실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구입할 의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구경만 하다 나왔고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평소의 저라면 꿈에서도 안 했을 고민을 합니다. 벽걸이 시계 때문입니다. 마침 이 레터를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을 기준으로 오드플랫 인스타그램에 가장 최근 게시물로 올라와 있네요. “아서 우마노프(Arthur Umanoff)가 디자인한” 수동 시계라고 합니다. 수동 시계란? “태엽을 키로 몇 바퀴 돌려주어야 시계추가 멈추지 않고 진동하게 되고, 이 진동의 힘으로 바늘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선명하고 단단한 외형과 무게감 있는 색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앞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는지 사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시계 보고 계시나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아, 네, 네. 너무 예뻐서요…”라고 흘렸습니다. 사실 51:49로 ‘사지 않는다(사면 안 된다)’라는 결정을 내린 터라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차였습니다. 어딘가 신난 얼굴로 이런 저런 설명을 하시는데…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한 녀석을 들일 형편이 못 됩니다…어색하게 웃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인스타 글을 보니 “이런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이 시계는 너무 멋지게 생겼습니다”라고 쓰셨네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수고가 이 시계를 더 멋지게 만드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빈티지-아날로그 썸띵은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기술이 소거해 버린 불편함에 그 ‘멋짐’의 일부를 기대고 있기도 하니까요. 어쨌건 이 시계는 사장님도 관심 갖고 살피는 제품이었던 것입니다. 인정 받은 느낌이 들어 으쓱했네요(아님). 참고로 시계의 가격은 110만원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겠죠. 헉,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게 가장 놀랍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빈티지 시계에 그만한 돈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별 거 아닌 듯하지만 사실 대단히 큰 변화입니다. 훗날 제가 빈티지 가구와 인테리어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면 아마도 그 시작점으로는 지금 이 시기를 지목할 겁니다. 누군가 태생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안목’도 사실 이처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계기에서 불꽃 튀듯 피어났던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뭐랄까, 그것은 자의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을 가진 일종의 덕통사고라고 할까…? 흠. 그나저나 거실 한쪽 벽이 유독 허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