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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여행

병연

요즘 정병연은

1.
속초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저와 동생은 9시에 출발했고 부모님은 경북 김천에서 5시에 출발했습니다. 사실 속초를 도착지로 찍는다면 소요 시간이 크게 차이나진 않습니다(여행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서울 4시간, 김천 4시간 30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왜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섰을까.
2.
절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이 합류하기 전에 원주 구룡사, 영월 법흥사에 들렀다 올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그 다음 일정도 절인데. 만나자마자 점심을 먹었습니다(식당은 정가네메밀막국수입니다. 절 방문 일정은 고정값이기 때문에 그 동선에 맞춰 급하게 찾은 곳인데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짧지만 웨이팅도 했어요. 추천합니다).
3.
평창 월정사를 둘러본 뒤 속초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었습니다. 물론 술도 한 잔 했죠. 다음 날 아침에 순두부를 먹고 또 다른 절로 향했습니다. 속초 신흥사와 양양 낙산사입니다. 이틀만에 절 다섯 곳이라니. 이쯤 되면 이번 여행은 ‘속초 여행’보다는 ‘강원도 절 투어’라고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자연스레 불심이 차오릅니다.
4.
33관음성지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의 절 중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그리고 이 절들을 순례할 수 있게 만든 책자가 있습니다. 책자를 들고 종무소에 가면 인증 도장을 찍어줍니다. 여기에 포함된 강원도 소재 절은 총 다섯 곳입니다. 네. 저희 부모님이 이틀 사이에 다녀가신 곳들이죠. 멀리 강원도까지 오시는 김에 한번에 해치우려고 하셨던 겁니다!
5.
참고로 이 33이라는 숫자는 우연히 정해진 게 아닙니다. 33은 불교에서도 의미 있는 숫자인데요. 관세음보살이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 불교의 관음 성지 순례 역시 서부 지역의 33개의 절을 방문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죠. 물론 저희 부모님은 순례자라기보다는 국내 여행 다닐 겸 참여하는 라이트 유저지만요.
6.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33관음성지 순례에 이용(?) 당한 셈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님과 가는 가족여행은 자칫 효도 여행에 그칠 수도 있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자연스럽게 여행의 책임(?)을 분담하게 되니까요(아빠는 3년 뒤에는 꼭 튀르키예에 가자고 노래를 부릅니다).
7.
언젠가는 전적으로 저와 동생이 책임지는 효도 여행을 다니겠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꺼이 할 수 있죠.
8.
예전에 갔던 여행에서 엄마는 운전석에 앉은 나와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뒤에서 바라보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20년 전에는 그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바뀐 위치가 새삼스러웠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았던 그 시기를 이제 아이들이 사는구나.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윤회구나. 이렇게 우리는 돌아가는 것이구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구나. 하늘로 돌아간다면 오늘을 떠올리며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참, 아름다웠더라

지난 레터 이후에

<옥스퍼드 초엘리트> 독후감을 썼습니다.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올해의 책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책. 명확한 문제의식과 고유의 관점, 탄탄한 취재, 잘 훈련된 저널리스트의 문장이라는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풀칠 홈페이지 콘텐츠 중 하나인 풀터뷰의 첫 번째 콘텐츠를 발행했습니다. 정당이라는 일터: 김예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만 풀칠 홈페이지는 아직 공사 중이어서 부득이하게 제 홈페이지에 올린 버전으로 링크를 걸었습니다. 인터뷰이는 제 지인인데요. 참 많이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던 사이인데 새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또 신선했습니다. 새로운 면을 알게 돼 즐거웠습니다. 역시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박찬용 에디터의 <모던 키친> 북토크에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이 분이 쓴 많은 글을 읽었는데, 제 스타일에 딱 맞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육성도 들어보고 말할 때 표정을 어떻게 짓는지, 풍기는 분위기는 어떤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로는 글을 읽을 때 또 다른 재미가 생기거든요. 어땠냐고요? 글과 참 비슷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말랑한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재밌는 시간이었습니다.
뱅크시 전시에도 다녀왔는데요.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뱅크시와 그의 작품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잘 정리된 기사 한 편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링크를 걸려고 했는데 제가 읽은 기사를 찾을 수가 없네요. SNS에서 피드 내리다가 본 거라 따로 저장해두지 않았나봅니다). 실제 현장이라는 맥락에 엮여 들어가는 게 뱅크시 작품의 본질인데,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작품의 원본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쩔 도리 없는 한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시 보고 나오면서 YES24 장바구니에 뱅크시 책을 담았습니다.
"그런 거는 일기장에나 써라" 에서 '그런 거'에 해당하는 것들 모음집에서는 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피드 게시물 또는 스토리를 포함해 무작정 휘갈긴 생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신나게 그러모았습니다.
🍎
존 루빈스타인은 달리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레이, 당신의 원칙은 375개나 됩니다. 그렇게 많으면 원칙이 아니죠. 토요타에는 14개의 원칙이 있고, 아마존의 원칙도 14개예요. 성경에는 10개가 있고요. 375개는 원칙이 아니라, 작업 매뉴얼입니다.”
앞서 말했듯 사이먼 쿠퍼의 <옥스퍼드 초엘리트>를 다 읽었고요.
같은 작가의 다른 책 <바르사>까지 해치웠습니다. <바르사>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 팀 FC바르셀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바르사’는 FC바르셀로나의 애칭입니다). 원래 스포츠 팀은 연고지와 강한 관계성을 갖기 마련인데요. 아마 바르사는 그 극단의 사례에 해당할 겁니다. 그렇다 보니 단순히 축구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범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옥스퍼드 초엘리트>와 마찬가지로 어떤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데서 상당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서 경험으로는 아주 긍정적이네요. 어쩔 수 없이 해외 축구, 특히 바르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면 다소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반대로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축구를 지배한 리오넬 메시와 바르사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김초엽 작가의 <아무튼, SF게임>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어디선가 게임을 ‘매체’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그때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뭔가 알랑말랑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독후감을 써보면서 더 파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1>은 답보 상태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 나가는 중입니다.
새롭게 읽기 시작한 책은 황석희 번역가의 <번역: 황석희>입니다. 아직 몇 편 읽지는 않았는데요. 무난한 직업+일상 에세이인 것 같습니다. 문장이 편안해서 술술 읽히네요. 시작 예정인 책도 두 권 있습니다. 한 권은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의 <야망계급론>. 박찬용 에디터의 서평을 보고 담아뒀던 책입니다(<옥스퍼드 초엘리트>를 이 분이 쓴 서평을 보고 읽게 됐습니다). 다른 한 권은 파르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입니다. 저는 잘 모르는 분인데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됐습니다. 확실히 혼자 읽으면 안 읽을 책도 독서모임에서는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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