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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구 저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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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제주 도장깨기(updated. 24/09/13)
참고사항 제주공항/제주시청 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도는 순서입니다. 별 3개는 '한 번 쯤 가볼 만하다'라는 뜻입니다. 별 3개를 기준으로 개인적인 만족감을 반영해 점수를 매깁니다.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다 싶은 곳은 점수 안 매기고 그냥 삭제합니다. 제주공항/제주시청 [식당] 도브다이브 (퓨전음식 레스토랑) ★★★★ 산아 (퀄리티 좋은 중식 요리주점) ★★★★★ 효퇴국수국밥 (웨이팅 있지만 회전 빠른 고기국수) ★★★ 갱이네보말칼국수 (보말칼국수) ★★★☆ 라스또스따스 (존맛 타코) ★★★★ 카고크루즈 (비건 옵션 가능한 양식집) 오롯 (정갈한 한식) ★★★☆ 집아페 (가성비 좋은 일식) 라이터스 블럭(수제버거 브런치) 정대 (숙성회, 전복파스타 등 요리주점) 신해바라기분식 (맵기 조절 순두부찌개) ★★★ 올리다버거 (수제버거)
병연
앞으로 난 어떤 시간을 쌓아갈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OO로서의 XX'라는 표현을 쓰려면 OO과 XX가 이질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에 오류가 날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음식으로서의 김치찌개"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내 되물을 것이다. "그럼 김치찌개가 음식이지, 뭔데?" 마치 음식과 김치찌개가 전혀 다른 부류인 듯 얘기하는 데서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쓰임은 보통 이렇다. "음식으로서의 애벌레" 또는 "어린 날 추억으로서의 김치찌개" 딱 봐도 '대체 뭔 소리야?' 궁금해지지 않는가.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어떠신지. 하루키는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각 직업에서의 영역 배타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갖고 포용력을 보이는 인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며 "소설 따위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일의 기본적인 양상"일 뿐이라는 변명을 덧붙이면서도 기본적으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기는 태도를 유지한다. ​ 하지만 제목에서 예고하고 있듯 하루키는 소설가를 엄연한 직업으로 분류한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설가에게는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시각화도 언어화도 안 되는 종류의 것"으로서 직접 겪은 이들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능과는 다른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 자신 소설가로 수십 년을 살아온 하루키가 푸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가가 된 계기, 문학상, 오리지낼리티, 소설 쓰는 법, 체력, 학교와 교육, 해외 진출 등에 대한 생각을 덤덤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방점까지 확실히 찍어가며 전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꿈꾸는 이는 물론 소설가가 아닌 일하는 사람 모두가 나름의 통찰을 얻을 수 있게 쓰였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 누가 공감하지 못할까. ​ 하루키는 1949년에 태어났다. 68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71년에 결혼했다. 74년에 개업한 재즈바는 79년 등단하고도 2년 더 운영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데뷔 40주년(2019)을 훌쩍 넘긴 올해에도 새로운 장편소설을 출간한다. 한 인간의 수십 년은 아득한 우주의 시간만큼이나 경이롭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대가의 권위는 시간에서 나온다는 점을 부인할 명분이 없다. 앞으로 난 어떤 시간을 쌓아갈지 고민했다. 눈앞의 문제 따윈 가소로워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밑줄 그은 문장을 보려면? 아래 박스를 클릭!
병연
널 위한 희생: 증국상 <소년시절의 너>
학교는 시험만 잘 보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엄마는 시험만 잘 보면 우리 인생도 달라질 거라며 기대한다. 우등생인 첸니엔에게 시험으로 가는 길은 양옆에 절벽을 둔 외길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도 꾹 참아야만 한다. 시험을 못 보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반면 시험만 잘 보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처럼 첸니엔이 배운,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희생뿐이다. 샤오 베이의 삶은 이미 밑바닥이다.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기에 목적도 없다. 그런 그에게 첸니엔이라는 목적이 나타난다. 이제 샤오 베이의 목적은 ‘첸니엔의 목적 달성’이 된다. 평범한 삶을 얻으려는 첸니엔을 위해 샤오 베이가 할 수 있는 건 희생뿐이다. 그의 계산으로 그건 해볼 만한 거래다. 왜? 자기 삶은 이미 밑바닥이니까. 뭔가 더 해줄 수 없을 때 인간은 대부분 비슷한 선택을 한다. 내가 가진 전부를 주자. 하지만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전부를 딛고 일어설 만큼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샤오 베이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란다. 사실 첸니엔은 알고 있었을 테다. 시험이라는 관문과 평범한 삶이라는 대가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샤오 베이와 자신의 삶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허상임을 알면서도 단지 매달릴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라는 현실에 매달렸다. 그를 보며 첸니엔은 깨달았을 테다. 자신 또한 허상이 아닌 현실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현실은 다름 아닌 샤오 베이라는 것을. 이제 둘은 상대방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자기 삶이 나아지기 위한 조건으로 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희생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게 스스로를 희생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상대방이 생각하는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 위한 조건을 해치는 것과 같다. 아직 어린 그들은 이처럼 슬픈 역설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것이 역설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위태롭게 전진한다. 바로 앞이 절벽이 아니길 바라면서. 여기까지. 위기를 세팅하는 과정만으로도 사회상 고발이라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너무 쉬운 방법으로 풀어냈다는 것과 그렇게 다다른 곳이 뻔한 공익적 결말이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냐는 말에 "둘은 너무 어리잖아요"라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내는 어른의 존재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지 않은가.
병연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옥스퍼드 초엘리트>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난리치더니 결국 사고쳤네’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이 좀 경박한가? 내 한계다. 죄송하다. 다행히 책은 그렇게 쓰이지 않았다. 명확한 문제의식과 고유의 관점, 탄탄한 취재, 잘 훈련된 저널리스트의 깔끔한 문장이라는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훌륭한 논픽션이다. 부제를 같이 보자. 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클리셰 짙은 단어들의 집합에 심드렁하다가도 뭐가 이리 거창한가 싶어 따져보면 책 내용에 충실한 제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 멋진 제목은 카피라이팅의 영역이지만 독서 후에 와 닿는 제목은 한줄평의 영역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선호한다. 왠지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읽어보자. 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저자인 사이먼 쿠퍼는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로 ‘옥스퍼드 출신(그 중에서도 일부 그룹)’을 지목하고 그들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엘리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저자인 사이먼 쿠퍼 역시 옥스퍼드 출신이기에 가능했던 저술일 테다. 그나저나 ‘초’는 왜 붙을까? 엘리트가 아니라 초엘리트인 이유 말이다. 그 연유를 설명하기 위한 기나긴 논증이 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다. 조금만 읽어봐도 옥스퍼드 출신이면서 현재 영국의 정치인 혹은 언론인 등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은 시간 인터뷰한 것이 느껴진다. 좀 스포하면 저자는 이들 엘리트들이 엘리트로 추대되는 것이 능력이나 전문성 등과 별 상관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Chums’다. ‘chum’은 ‘친구’라는 뜻인데 우리가 익히 아는 ‘friend’에 비해 비격식적이고 남성중심적 단어라고 한다. 나는 이쪽이 좀 더 함축적인 제목이고, 그래서 카피라이팅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어쨌건 ‘Chums’는 영국 사회 지도층이 이권 카르텔 같은 게 아니라 꽤 많은 걸 공유하며 끈적하게 엮여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그사세’라고나 할까. 사립학교를 나와 옥스퍼드에 입학하고 옥스퍼드 유니언(동아리)에서 활동하다 졸업 후에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브렉시트’는 당연한 결과다. 이것을 내 식대로 요약한 게 이 글의 맨 첫 부분에 쓴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이 놀라운 점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게 쓰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독서 경험인 만큼 직접 겪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 📚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밑줄 그은 문장을 보려면? 아래 박스를 클릭!
병연
인플루언서와 커뮤니티: 존 리비 <당신을 초대합니다>
혼자서 커뮤니티를 표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이중인격이 아닌 이상). 물론 여러 사람이 모였다고 무조건 커뮤니티라고 말하지도 않죠. 그 사람들이 모인 이유, 목적, 방식 등 다양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비로소 커뮤니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수의 사람’은 커뮤니티의 필요조건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커뮤니티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커뮤니티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들을 데려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데려온 이들을 계속 머물게 하려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린 커뮤니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존 리비의 『당신을 초대합니다』를 읽었습니다. 위 질문들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대답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커뮤니티 기본서로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인플루언서와 커뮤니티의 관계를 중점으로 리뷰했습니다. 존 리비는 영향력, 인간관계,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행동과학자입니다. 다양한 업계의 리더들을 모은 ‘인플루언서 디너’를 운영했죠.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그런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책입니다. 사람들을 모으려면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할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목표 달성을 위해 커뮤니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려줍니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만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띠지에서 강조하는 “글로벌 기업 CEO, 노벨상 수상자, 할리우드 스타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한 저자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저와 너무 먼 이야기거든요. ‘그들이 사는 세상’이 뭐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고요. 성공한 사람이 성공을 거머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전하는 성공담은 평범한 제게 매우 제한된 통찰만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아래 대목을 살펴보고 ‘속는 셈 치고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나는 수백 번의 저녁식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참석자들에게 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깊고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 IT기업에는 개별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었고, 일반 기업에는 보다 건강한 기업문화를 조성해 주었으며, 스타트업에는 고객들과 의미 있고 지속적인 관계를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세일즈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었다. 비영리재단의 경우는 대의에 충실한 후원자 모임을 구성하여 지원했다. - 존 리비,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하 같은 책) 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진술입니다. 책을 통해 소개하는 것은 특정한 조건을 갖춘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적당히 응용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죠. 단순히 자기 인맥 자랑하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정작 저에게는 별 도움도 안 될 흰소리만 늘어 놓을 것 같진 않다는 신뢰감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할 만한 인플루언서들을 네 그룹으로 분류한 다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룹이 어딘지 철저히 따져볼 것을 주문합니다. 그들을 만나는 방법이나 유의미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라는 것이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유명인이나 거물들과 어울리면 멋지고 근사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관계는 대부분 당신의 목표 달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삶의 질을 개선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관계를 개발하고 싶다면 마크 저커버그를 알아 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경우엔 학교 학과장이나 교육 지도자 같은 커뮤니티 인플루언서와 사귀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즉, 오피니언 인플루언서나 커뮤니티 인플루언서보다 글로벌 인플루언서를 사귀는 것이 반드시 더 좋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무조건 다른 그룹보다 우위인 그룹은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인생과 커리어, 사업체를 위해 당신이 무엇을 원하느냐이다.
병연
커뮤니티 매니저 채용공고 분석해보니
직군으로서 커뮤니티 매니저는 앞으로 더 세세하게 분류될 것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비교적 최신의 개념이다. 시장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시작점은 불과 2010년대에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관심사 기반의 네트워킹에 대한 니즈와 자기계발 및 성장에 대한 니즈를 겨냥해 트레바리 같은 유료 모임 서비스가 나타났다. 온라인에서는 무신사와 스타일쉐어, 오늘의집 같은 서비스가 성공하면서 커뮤니티에 커머스 기능을 붙이는 모델이 자리를 잡았다. 커뮤니티 매니지먼트도 새롭게 등장한 일이었다. 레퍼런스가 없으니 기업은 제각기 상황에 따라 커뮤니티 매니저의 주요 업무와 필요 역량 등을 다르게 정의했다. 공유 오피스 기업인 위워크의 커뮤니티 매니저, 커머스 기업인 오늘의집의 커뮤니티 매니저, 모임 플랫폼 기업인 문토의 커뮤니티 매니저, 콘텐츠 플랫폼 기업인 플로의 커뮤니티 매니저는 같은 이름으로 다른 일을 한다. 커뮤니티 매니저는 '직군'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라고 모두 같은 디자이너가 아니듯 커뮤니티 매니저라고 모두 같은 커뮤니티 매니저가 아니다. 디자이너에 비해 짧은 역사로 인해 커뮤니티 매니저라는 직군이 세세하게 분류될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은 뭉뚱그려서 얘기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곧 정리되지 않을까? 네이버와 카카오가 커뮤니티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걸었으니. 양적 성장이 끝난 네이버와 카카오는 질적 성장을 노리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양대 IT기업으로서 그들의 행보에는 과도할 정도로 큰 사회적 관심이 쏟아진다. 어쩔 수 없다. 두 기업의 서비스 이용자 집단은 사실상 대한민국 국민과 일치한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커뮤니티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걸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왜 그럴까? 먼저 ‘이용자 집단이 대한민국 국민과 일치’하는 상태에 대해 살펴보자. 언뜻 보면 궁극에 다다른 상태인 듯하다. 그러나 기업에게는 한편으로 굉장히 두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이용자 수를 늘리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이용자 수를 늘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성장이 정체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배부른 소리다.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니까. 그정도 되면 리스크 관리만 잘해도 이용자 수가 빠질 일은 없다. 네트워크 효과로 인한 대체불가능성 때문에 강력한 락인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은 늘 신성장 동력을 찾는다. 그 유명한 붉은 여왕 가설이 나올 타이밍이다.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해” 양적 성장이 안 되니 성장 전략의 초점은 질적 성장으로 간다. 이용자 한 명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단적인 예가 카카오의 오픈채팅 활성화 전략이다. 지인과의 대화방에 그치지 않고 불특정 다수와의 대화방도 열 수 있다면? 이용자 한 명이 카카오톡에서 맺는 관계의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네이버의 오픈톡도 맥락을 같이한다. 현재 네이버와 카카오가 커뮤니티를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용자를 그냥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잘 모으고 싶기 때문이다. 관심사와 같은 명확한 기준을 바탕으로 잘 분류된 이용자 집단은 그 자체로 훌륭한 자산이다. 광고나 쇼핑 등으로 연결하기도 용이한 것은 물론 플랫폼의 영향력을 더욱더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할 것이다.
병연
‘질러야 한다’라는 신호: 박찬용,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을 읽고
얼마 전 비싼 반바지를 한 벌 샀다. 굳이 ‘비싼’ 반바지라고 쓴 이유는 자랑하려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비싸기 때문이다. 비이커(BEAKER) 매장에서 발견한 스튜디오니콜슨 제품으로 통이 크고 무릎을 살짝 넘기는 길이에 면 80% 린넨 20%로 만들어진 반바지다. 무신사 기준 할인가 396,990원(정가 595,000원). 난 아울렛에서 마지막 재고를 샀는데 35만원 정도 줬다. 개인적으로 비이커에서 산 첫 번째 제품이다. 지금까지 내게 비이커는 심리적 가격 상한선을 높이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산 반바지도 특출나게 비싼 편이 아니다. 그러니 여길 돌아다니다가 코스(COS)나 아르켓(ARKET)에 가면 제품 가격이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코스나 아르켓도 일반 SPA브랜드에 비하면 다소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느 정도 금액까지는 ‘비싼 건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물론 그 ‘정도’는 각자의 취향이나 경제력에 따라 달라질 테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많은 돈을 투자할 만한 확고한 취향이 없다. 최저가만 고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력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감당 가능한 선에서 비싼 걸 고를 수 있고 그러려고 한다. 물론 내가 산 반바지는 그 선을 넘어간다. 그럼에도 이 바지를 산 이유는 당연히 있다. 우선 ‘통이 크고 무릎을 살짝 넘기는 길이의 반바지’를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지난 봄에 별 생각 없이 입어봤던 제품이 의외로 마음에 딱 들었다. 사이즈가 좀 작았다. 평소라면 ‘살 더 빼면 되지’ 라며 샀을 텐데, 그러기엔 또 비쌌다. 내려놓을 수밖에. 그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었다. 만듦새도 훌륭했다. 허리는 밴딩 처리돼 있는데 굉장히 쫀쫀하게 느껴졌다. 지금보다 허리 사이즈가 커지든 작아지든 핏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듯했다. 적당한 두께와 답답하지 않은 소재까지 모든 요소가 흡족했다. 특히 실제로 입었을 때 허리부터 골반까지 이르는 부위를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무엇보다 스튜디오니콜슨 자체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있었다. 물론 그래도 비싸다. 하지만 ‘질러야 한다’는 신호가 너무 강력했다. 인생에 가끔 찾아오는 이러한 신호는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특히 취향 개발에 힘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굴러들어온 기회다. 내 경우엔 그 신호를 받아들인 결과가 늘 취향 개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충분히 개발된 취향 내부에선 기호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받아든 기호가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나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이 좀 더 개선될 것 같다. ‘비싼 건 이유가 있다’를 넘어 그 이유를 더 구체화해 나가는 계기로 삼으면 될까? 이건 이래서 비싸고, 저건 저래서 비싸다는 것을 찾아보고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도 해보고 납득도 해보면 어떨까. 적어도 나 자신이 만족하면서 낭비처럼 보이지도 않는 건강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사실 물건의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그에 합당한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과장 좀 보태면 현대 미술에 감동할 능력을 가진 사람만큼 희귀할 테다. 한편으로는 억울하다. 현대 미술이야 애초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도 안 든다. 물건은? 일평생을 사고 쓰고 버리며 지내왔는데 우리는 여전히 쇼핑에서 적잖은 실패를 경험하니까. 하지만 박찬용 에디터의 책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은 바로 이런 생각을 고쳐먹게 해준다. 사실 우리는 현대 미술을 접하지 않은 만큼 제대로 된 쇼핑을 해본 적이 없다고 일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바 현명한 소비 생활이란 스스로 소비와 물건에 대한 문답을 지속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건을 둘러싼 복잡한 질문 사이에서 답을 내야 하는 사람은, 아울러 물건 사이에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나름의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다. 그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산다면 평생 각종 마케팅용 신화와 마케팅 이벤트에 파묻힌 채, 자신이 파묻혀 있는 줄도 모르고 소비자본주의의 부품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미 그렇게 체제의 잠재 부품으로 살아가고 있을 테고. - 박찬용, <좋은 물건 고르는 법>
병연
하방 저지와 디스리스펙: 맨스티어 디스전의 의미
코미디 크리에이터 ‘뷰티풀너드’는 얼떨결에 한국 힙합의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낸 장본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뷰티풀너드는 코미디 레이블 ‘메타코미디’ 소속 크리에이터다. 2명의 멤버(최제우, 전경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현재 힙합과 래퍼를 소재로 한 페이크다큐 ‘언더그라운드’에서 힙합그룹 ‘맨스티어’의 멤버(케이셉 라마, 포이즌 머쉬룸) 역할로 출연 중이다. 단순히 콘텐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힙합 음원을 발매하고 라이브 공연도 하니 일종의 ‘부캐’인 셈. 맨스티어는 ‘일반 대중이 느끼는 한국 래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화신이다. 이 캐릭터를 통해 묘사되는 질 낮은 말투와 행동, 알맹이 없는 가사, 각종 사회적 물의 등 사례별로 그에 해당하는 래퍼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댓글창이 공감에서 비롯된 웃음으로 가득한 이유다. 사실 한국 래퍼의 부정적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수요는 이미 존재했다. ‘쇼미더머니’ 무대에서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며 광역 도발을 시전한 이찬혁이나 뽀글머리에 꿀벌 같은 옷을 입고 “증오는 빼는 편이야 가사에서 질리는 맛이기에”라고 내뱉는 고등학생 김하온이 반향을 일으켰던 것만 봐도 그렇다. 뷰티풀너드는 그러한 수요를 풍자로써 충족시킨 것이다. 세계관 기반의 캐릭터쇼로 서사까지 착실하게 쌓아갔다. 게다가 맨스티어의 랩 실력과 곡 수준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중이 반응했다. 지난 2월 말 선보인 ‘AK47’의 뮤직비디오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현재 조회 수 1000만에 다가섰다. 그야말로 대박 음원. 적지 않은 래퍼들도 이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맨스티어는 클럽에서 직접 공연을 했으며 최근엔 힙합플레이야페스티벌 무대에도 서며 라이브 실력을 증명했다. 그렇게 그들은 ‘국힙을 정리’ 해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맨스티어는 일종의 하방 저지선이 됐다. 한국 래퍼들은 웃음거리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맨스티어만큼 진지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최소한’ 맨스티어만큼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야 했다(물론 ‘훌륭한’의 기준은 흥행 여부가 아니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맨스티어의 말투, 행동, 태도 같은 것들이 묻어나지 않는지 검열해야 했다. 모든 게 다 뛰어난 기획력을 가진 코미디언이 의도한 결과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개인적으로는 ‘아니다’에 한 표).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 버렸다. 문제는 풍자를 기반으로 한 하방 저지는 당사자 의도와 상관없이, 특히 대중의 반응을 얻을 경우에는 디스리스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풍자 자체가 타인의 결점이나 현실의 부정적인 면모를 꼬집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단순히 조롱의 근거로 소모하는 이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뷰티풀너드의 풍자가 영원히 선을 넘지 않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pH-1이 맨스티어 디스곡 ‘BEAUTIFUL’을 통해 짚은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내 식대로 해석하면, “너희들의 콘텐츠는 충분히 재밌고 나 또한 좋아했다. 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 지금 이게 진짜로 너희들이 바랐던 상황인가? 크리에이터라면 자신의 콘텐츠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풍자가 존중을 잃으면 조롱밖에 남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우리도 고민이 많으니 같이 생각해보자.” 이를 두고 ‘긁’이라고 한다면, 맞다. 긁힌 거. 하지만 그건 필연적인 결과다. 원래 특정 집단에 덧씌워진 멸칭은 대개 그것으로 묘사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부터 타격하기 마련이다. 맨스티어에게 ‘긁힌’ 또 다른 래퍼, 이센스가 이해되는 이유다. 물론 그가 쏟아낸 모든 발언을 긍정하긴 어렵다. 다만 “진지하게 하는 사람 기분 개좆같게” 만드는 행태를 더는 참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병연
미켈 아르테타: 묵묵하지만 욕심을 갖고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팀 아스날의 감독 미켈 아르테타는 선수 시절 단 한 번도 국가대표에 선발된 적이 없다. 그의 나라인 스페인에는 유명한 선수가 많았다. 당대 최강의 팀 FC바르셀로나를 이끄는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있었다. 그 라이벌 팀인 레알 마드리드부터 리버풀, 바이에른 뮌헨 등 세계적인 팀에서 내내 주전으로 활약한 사비 알론소도 있었다. 아스날을 먹여살리다 FC바르셀로나로 떠난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명단에 겨우 이름을 올리는 수준이었다. 스페인이 2008년 유로, 2010년 월드컵, 2012년 유로까지 제패하는 걸 보는 아르테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르테타는 묵묵히 축구를 했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에게는 조금 밀릴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꽤 유명한 선수였다. 일찍이 유럽 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2005년 EPL 팀 에버튼에 합류해 차곡차곡 평판을 쌓았다. 2011년에 같은 리그의 아스날로 이적한 뒤엔 핵심 선수이자 주장으로 5시즌을 뛰었다. 말년에는 경기력이 다소 떨어져 실제 출전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베테랑으로서 리더십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팀을 뒷받침했다. 아르테타의 선수경력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더없이 안정적인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그래서 매우 이상적인. 그를 수식하기 위해 쓴 표현이 ‘꽤 유명한’에 그치는 게 섭섭하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선수였다. 아르테타는 육각형 미드필더였다. 측면과 중앙 어느 위치에 두든지 곧잘 소화해내며 공격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에버튼에서 그를 빼고 전술을 구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스날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경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기여했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제각각인 동료들 혹은 상대팀의 전술이나 기세에 따라 달리 흐르는 경기 양상에 맞춰 필요한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했다. 탁월한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재할 때 오히려 자연스럽게 존재감이 느껴지는 유형이었다. 이런 이들은 대체로 ‘묵묵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틀렸다. 그 두 가지는 아무 관계 없다. 당연히 아르테타도 욕심을 냈다. 2011년 아르테타의 아스날 이적은 다소 급박하게 진행됐다. 이적 시장이 닫히기 직전에 계약이 확정되면서 전 소속팀인 에버튼은 그의 대체자를 구할 시간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에버튼 감독과 팬들은 “더 늦기 전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아르테타를 비난하지 않았다. 무려 7시즌 동안 에버튼에서 최선을 다한 그의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중요해서 다시 말한다. 아르테타는 꽤 유명하고 훌륭한 선수였다. EPL에서 오랜 기간 꾸준히 경기에 나서 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이른바 ‘월드클래스’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높은 명예를 추구할 자격은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아르테타는 아스날에서 2014년, 2015년 연속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바랐던 대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뛰었다. 매번 16강에 그쳐 아쉽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때의 아스날은 1996-1997 시즌 이래 한 번도 EPL 4위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강팀이었다. 아르테타의 마지막 시즌인 2015-2016시즌에는 준우승까지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은퇴한 다음 시즌 5위로 밀려난 아스날은 이후 8위까지 떨어지면서 유럽 대항전도 못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짧지 않은 암흑기를 보낸 아스날은 지난 2022-2023시즌 2위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부활을 이끈 것이 감독으로 돌아온 아르테타라는 점이 재밌는 포인트다. 아르테타는 은퇴 후 곧바로 맨체스터 시티의 코치로 부임했다. 우상이었던 펩 과르디올라 감독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2019-2020시즌 중간에 우나이 에메리 아스날 감독이 경질됐고 전부터 아스날과 접촉이 있었던 아르테타가 새로운 감독으로 합류했다. 아르테타 역시 단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경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의 지휘 아래 그라니트 자카, 부카요 사카 같은 기존 선수들이 제몫을 해냈고 마르틴 외데가르드, 토마스 파티, 벤 화이트, 아론 램스데일, 가브리엘 제수스, 올렉산드르 진첸코, 레안드로 트로사르 등 영입한 선수들도 성공적으로 적응하면서 팀은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믿고 활용할 수 있는 선수풀에서 자신이 영입한 선수와 기회를 준 선수의 비중을 높이고 그로써 이전과 눈에 띄게 다른 성과를 내면 감독의 팀 장악력은 기하급수로 확대된다. 누구를 영입하고 방출할 것인지, 누구를 주전으로 쓰고 후보로 쓸 것인지 등의 결정에 권위가 실리므로. 아스날 감독으로서 아르테타의 가장 큰 성취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안목이 좋았다. ‘어떤 선수를 영입할 것인가?’와 ‘어떤 선수에게 기회를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결과가 따라왔다. 말년의 아르센 벵거와 경질된 에메리가 끝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를 아르테타는 끝내 풀어냈다.
병연
독서모임 기획자가 일하는 법
독서모임 기획자의 일은 독서모임을 만들고 팔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의아한 눈빛을 보냅니다. 의사나 판사나 변호사처럼 한 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있습니다("독서모임을 만들고 팔고 운영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보통 그것을 한번에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대체 누가 돈 내고 독서모임을 한단 말이야?'라는 생각부터 드니까요. 머리 박고 일할 때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한번 고민이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직한다면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커리어 플랫폼을 켜면 직무를 선택하는 단계에서 이미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길이 좀 보일까. 그런데 다양한 사람 누구? 마케터끼리 모이고, 디자이너끼리 모이고, 개발자끼리 모이는데, 나는 대체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나. 혼란 다음 혼란입니다.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나.'라는 질문이 실마리가 됐습니다. 독서모임 기획자도 '기획자'라는 걸 새삼 환기했죠. 그중에서도 플레이어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요한 기획자, 예컨대 도서 편집자 같은 직업과 업무 형태가 비슷합디다. 그래서 그에 비추어 독서모임 기획자의 세 가지 업무 패턴을 뽑아봤는데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타인의 콘텐츠를 다룬다. 둘째, 나의 관심과 세상의 관심 사이에서 줄타기 해야 한다. 셋째, 호흡이 길다. 오늘은 첫 번째 패턴, '타인의 콘텐츠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타인의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 독서모임 기획자(이하 '기획자')의 일은 독서모임을 기획하고 팔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진행'은 기획자가 아닌 진행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기획자의 업무 최우선 순위에 '진행자 섭외'가 있습니다. 섭외 후보군을 꾸리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섭외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은 '인물'과 '주제' 두 가지입니다. 어떤 기준인지에 따라 기획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섭외, 기획의 방향이 잡히는 순간 섭외는 섭외 대상의 기본적인 정보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인터뷰나 강연을 한 적 있다면 워딩을 잘 살핍니다. 책을 비롯해 특정 콘텐츠를 예로 든 부분이 있다면 더 좋습니다. 맥락을 더 풍성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최근 동향 확인도 필수입니다. 요즘 관심 갖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도 하고 혹시나 문제 되는 부분이 없을지 파악해야 하죠.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사람과 함께 만들 수 있는 독서모임 주제 서너 가지를 뽑습니다. 일차적으로 OK 된다면 섭외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완성도 높은 기획안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설득이 안 된다면 그것까지 읽지도 않으니까요. 정성을 다하는 것과 엄한 데 리소스를 쓰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본적인 설명만 적어도 메일은 상당히 길어집니다. '그래서 너랑은 이런 주제로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라는 내용은 기껏해야 2~300자 정도 되는 문단 하나에 압축적으로 녹여야 하죠. 섭외 시도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게 기본입니다. 회신을 받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고 또 그 중에서도 일부만 제안을 수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섭외 하나하나가 실제 서비스로 이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전제해야 합니다. 최대한 많이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해 어중간한 대상을 섭외해버리거나(어떻게 팔 거예요?) 공들여야 할 대상에 어중간한 기획으로 접근했다가 거절 당하면(시도 안 하느니만 못 하죠)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기획의 방향은 섭외를 시도하는 순간에 틀이 잡힙니다. 물론 논의 과정에서 세부적으로 조정할 수는 있겠지만 섭외 대상의 전문 분야, 관심사, 인지도 같은 것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섭외가 기획자의 최우선 업무인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충분한 신청자를 모아 실제로 모임이 진행돼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냥 기획자와 섭외 대상의 리소스만 낭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서로 민망하기도 하고요. 최대한 피해야 할 상황입니다. 발굴하든지, 모셔오든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섭외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대중적인 영향력은 높지 않지만 자기만의 관점이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과 독서모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매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획을 뽑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세페이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왜 이 주제를 알아야 하는지, 이 주제를 아는 데에 특히 이 책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주제로 이 책들을 읽을 때 이 사람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총 세 가지 층위의 설득을 해내야 합니다. 중요해서 다시 강조합니다. '이 사람'과 '이 주제'로 '이 책들'을 읽어서 좋은 점을 어필해야 합니다. 한 부분이라도 설득이 되지 않으면 신청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세페이지와 마케팅 방향도 그 연장선에서 이뤄지죠. 특히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이 사람'입니다. 예컨대 똑같이 『규칙 없음』을 읽더라도 누구와 읽는지에 따라 주목하는 지점이 다르고 들려주는 경험이 다릅니다. '이 사람'이 기업의 대표인지 C-Level인지 팀장인지에 따라 다르고, '이 사람'이 속한 기업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다르고, '이 사람'의 기업이 속한 산업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자연히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중심으로 설득 포인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유명한 사람. 사실 이 경우엔 기획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입니다. 유명인과 몇 시간이고 대화하는 시간을 연속해서 가질 수 있다는 경험만으로도 고객에겐 매우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볼까요. '아이유'와 독서모임을 한다는데 어떤 주제로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유심히 살핀 다음 신청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획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이때의 기획은 '유명한 사람' 당사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모시지 못해 안달일 텐데, 그저 그런 기획으로는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눈에 띌 만큼 높은 금액을 제시하든지). 그의 입장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획을 찾아내야 합니다. 재밌는 것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물론 여기서 '유명한'의 기준이 예로 들었던 아이유는 아닙니다) 그가 충분한 가치를 주지 못한다거나 그것을 보완할 정도의 기획이 따라 붙지 않는다면 전체 완주율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리텐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그리고 게으릅니다. 움직이게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보상과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독서모임으로 아젠다 세팅하기 사람이 아니라 주제를 타깃해 기획하기도 합니다. 큰 그림을 그린다는 측면에서 기획의 주도권을 조금 더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글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주제를 타깃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NFT, 암호화폐, 블록체인과 같은 신기술이 주목 받고 있네? 이 분야에 대해 선제적으로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은 누굴까? 토론의 정수는 정치에 있는 것 아닐까? 이왕이면 의회 정치 경험자가 리딩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디 없을까? 젠더는 우리 사회가 꼭 다뤄야 할 이슈인데. 단호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토론을 이끌어 줄 사람이 있을까?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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