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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구 저쩌구
독서모임 기획자가 일하는 법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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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기획자의 일은 독서모임을 만들고 팔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의아한 눈빛을 보냅니다. 의사나 판사나 변호사처럼 한 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있습니다("독서모임을 만들고 팔고 운영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보통 그것을 한번에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대체 누가 돈 내고 독서모임을 한단 말이야?'라는 생각부터 드니까요.
머리 박고 일할 때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한번 고민이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직한다면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커리어 플랫폼을 켜면 직무를 선택하는 단계에서 이미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길이 좀 보일까. 그런데 다양한 사람 누구? 마케터끼리 모이고, 디자이너끼리 모이고, 개발자끼리 모이는데, 나는 대체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나. 혼란 다음 혼란입니다.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나.'라는 질문이 실마리가 됐습니다. 독서모임 기획자도 '기획자'라는 걸 새삼 환기했죠. 그중에서도 플레이어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요한 기획자, 예컨대 도서 편집자 같은 직업과 업무 형태가 비슷합디다. 그래서 그에 비추어 독서모임 기획자의 세 가지 업무 패턴을 뽑아봤는데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타인의 콘텐츠를 다룬다. 둘째, 나의 관심과 세상의 관심 사이에서 줄타기 해야 한다. 셋째, 호흡이 길다.
오늘은 첫 번째 패턴, '타인의 콘텐츠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타인의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
독서모임 기획자(이하 '기획자')의 일은 독서모임을 기획하고 팔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진행'은 기획자가 아닌 진행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기획자의 업무 최우선 순위에 '진행자 섭외'가 있습니다. 섭외 후보군을 꾸리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섭외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은 '인물'과 '주제' 두 가지입니다. 어떤 기준인지에 따라 기획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섭외, 기획의 방향이 잡히는 순간
섭외는 섭외 대상의 기본적인 정보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인터뷰나 강연을 한 적 있다면 워딩을 잘 살핍니다. 책을 비롯해 특정 콘텐츠를 예로 든 부분이 있다면 더 좋습니다. 맥락을 더 풍성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최근 동향 확인도 필수입니다. 요즘 관심 갖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도 하고 혹시나 문제 되는 부분이 없을지 파악해야 하죠.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사람과 함께 만들 수 있는 독서모임 주제 서너 가지를 뽑습니다.
일차적으로 OK 된다면 섭외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완성도 높은 기획안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설득이 안 된다면 그것까지 읽지도 않으니까요. 정성을 다하는 것과 엄한 데 리소스를 쓰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본적인 설명만 적어도 메일은 상당히 길어집니다. '그래서 너랑은 이런 주제로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라는 내용은 기껏해야 2~300자 정도 되는 문단 하나에 압축적으로 녹여야 하죠.
섭외 시도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게 기본입니다. 회신을 받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고 또 그 중에서도 일부만 제안을 수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섭외 하나하나가 실제 서비스로 이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전제해야 합니다. 최대한 많이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해 어중간한 대상을 섭외해버리거나(어떻게 팔 거예요?) 공들여야 할 대상에 어중간한 기획으로 접근했다가 거절 당하면(시도 안 하느니만 못 하죠)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기획의 방향은 섭외를 시도하는 순간에 틀이 잡힙니다. 물론 논의 과정에서 세부적으로 조정할 수는 있겠지만 섭외 대상의 전문 분야, 관심사, 인지도 같은 것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섭외가 기획자의 최우선 업무인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충분한 신청자를 모아 실제로 모임이 진행돼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냥 기획자와 섭외 대상의 리소스만 낭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서로 민망하기도 하고요. 최대한 피해야 할 상황입니다.
발굴하든지, 모셔오든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섭외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대중적인 영향력은 높지 않지만 자기만의 관점이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과 독서모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매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획을 뽑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세페이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왜 이 주제를 알아야 하는지, 이 주제를 아는 데에 특히 이 책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주제로 이 책들을 읽을 때 이 사람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총 세 가지 층위의 설득을 해내야 합니다. 중요해서 다시 강조합니다. '이 사람'과 '이 주제'로 '이 책들'을 읽어서 좋은 점을 어필해야 합니다. 한 부분이라도 설득이 되지 않으면 신청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세페이지와 마케팅 방향도 그 연장선에서 이뤄지죠.
특히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이 사람'입니다. 예컨대 똑같이 『규칙 없음』을 읽더라도 누구와 읽는지에 따라 주목하는 지점이 다르고 들려주는 경험이 다릅니다. '이 사람'이 기업의 대표인지 C-Level인지 팀장인지에 따라 다르고, '이 사람'이 속한 기업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다르고, '이 사람'의 기업이 속한 산업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자연히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중심으로 설득 포인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유명한 사람. 사실 이 경우엔 기획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입니다. 유명인과 몇 시간이고 대화하는 시간을 연속해서 가질 수 있다는 경험만으로도 고객에겐 매우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볼까요. '아이유'와 독서모임을 한다는데 어떤 주제로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유심히 살핀 다음 신청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획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이때의 기획은 '유명한 사람' 당사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모시지 못해 안달일 텐데, 그저 그런 기획으로는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눈에 띌 만큼 높은 금액을 제시하든지). 그의 입장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획을 찾아내야 합니다.
재밌는 것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물론 여기서 '유명한'의 기준이 예로 들었던 아이유는 아닙니다) 그가 충분한 가치를 주지 못한다거나 그것을 보완할 정도의 기획이 따라 붙지 않는다면 전체 완주율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리텐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그리고 게으릅니다. 움직이게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보상과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독서모임으로 아젠다 세팅하기
사람이 아니라 주제를 타깃해 기획하기도 합니다. 큰 그림을 그린다는 측면에서 기획의 주도권을 조금 더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글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주제를 타깃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NFT, 암호화폐, 블록체인과 같은 신기술이 주목 받고 있네? 이 분야에 대해 선제적으로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은 누굴까? 토론의 정수는 정치에 있는 것 아닐까? 이왕이면 의회 정치 경험자가 리딩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디 없을까? 젠더는 우리 사회가 꼭 다뤄야 할 이슈인데. 단호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토론을 이끌어 줄 사람이 있을까? 등등등.
이러한 기획&타깃을 통해 나름대로 아젠다를 세팅해 나간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단순한 모임 플랫폼이 아니라 일종의 미디어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외적인 영향력이 크지 않겠지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데는 큰 명분으로 작용하죠. 생각해보면 살롱 문화 자체가 단순히 네트워킹에만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모여 사회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공론장으로서 역할했다는 것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내용의 전문가, 나는 형식의 전문가
'진행'은 진행자의 몫입니다. 학원 강사가 대신 시험을 칠 수 없고, 면접 코치가 대신 면접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기획자가 실제 모임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지요. 기획자는 철저하게 서포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임의 주제와 함께 읽을 책은 물론 당일에 나누는 대화까지 기본적으로 진행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독서모임의 형태로 잘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행자와 기획자가 상하관계에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임을 론칭하기로 했을 때부터는 둘 사이의 관계를 협업 관계로 봐야 합니다. 일방향적인 강의가 아니라 다대다 토론이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콘텐츠는 그의 것이지만, 독서모임이라는 형식에 대해서는 내가 전문가죠.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진행자의 콘텐츠를 돋보이게 하고 그가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본인이 잘 아는 것과 상대가 잘 아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서부터 효과적인 협업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자기 업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상대방도 나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콘텐츠를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저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다양하게 제안할 줄 아는 여유야말로 독서모임 기획자가 가져야 할 프로페셔널함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에이전시 업무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영업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오랜 기간 설득합니다. 1:1로 협업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연락을 주고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기도 합니다. 친해지면 섭외할 만한 사람을 소개 받기도 합니다. 혹은 섭외하고 싶은 사람에게 보다 쉽게 가 닿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지금은 좀 어렵다'고 하면 '하반기 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하!'라며 철판 깔 줄 알게 되고, '잊지 않고 또 왔습니다'라는 말도 능글맞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거절 당하면 어쩌냐고요? 괜찮습니다. '2~30분만이라도 시간을 내주시면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며 한 번 더 질척거릴 수 있게 되거든요. 그렇게 만나 뵈어서 '나는 안 되지만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해 주겠다'는 답을 받아낸 적도 있습니다. 적당히 마감을 쪼는 타이밍과 방법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영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맨땅에 헤딩, 커뮤니케이션, 협업에 대한 숙련도가 늘지 않을래야 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영업의 자질이 아주 없을 경우 수행하기 어려운 직무입니다. 사무실에서 노트북 두드리는 시간 만큼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시간도 많다는 걸 알아둬야 합니다.
독서모임 기획자도 내 것에 대한 미련이 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타인의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은 대개 '내 것'에 대한 열망을 남들 모르게 키워가는 듯합니다. 타인의 글을 매만지던 도서 편집자가 결국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보이곤 하는 것처럼요. 독서모임 기획자는 어떨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더군요. 직접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획자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배웁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모이는 서비스인데, 사람은 많고 그만큼 케이스도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일종의 현장학습, 업무 역량을 키우는 중요한 경험이라고 여기며 임하는 중입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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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질러야 한다’라는 신호: 박찬용,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을 읽고
얼마 전 비싼 반바지를 한 벌 샀다. 굳이 ‘비싼’ 반바지라고 쓴 이유는 자랑하려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비싸기 때문이다. 비이커(BEAKER) 매장에서 발견한 스튜디오니콜슨 제품으로 통이 크고 무릎을 살짝 넘기는 길이에 면 80% 린넨 20%로 만들어진 반바지다. 무신사 기준 할인가 396,990원(정가 595,000원). 난 아울렛에서 마지막 재고를 샀는데 35만원 정도 줬다. 개인적으로 비이커에서 산 첫 번째 제품이다. 지금까지 내게 비이커는 심리적 가격 상한선을 높이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산 반바지도 특출나게 비싼 편이 아니다. 그러니 여길 돌아다니다가 코스(COS)나 아르켓(ARKET)에 가면 제품 가격이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코스나 아르켓도 일반 SPA브랜드에 비하면 다소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느 정도 금액까지는 ‘비싼 건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물론 그 ‘정도’는 각자의 취향이나 경제력에 따라 달라질 테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많은 돈을 투자할 만한 확고한 취향이 없다. 최저가만 고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력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감당 가능한 선에서 비싼 걸 고를 수 있고 그러려고 한다. 물론 내가 산 반바지는 그 선을 넘어간다. 그럼에도 이 바지를 산 이유는 당연히 있다. 우선 ‘통이 크고 무릎을 살짝 넘기는 길이의 반바지’를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지난 봄에 별 생각 없이 입어봤던 제품이 의외로 마음에 딱 들었다. 사이즈가 좀 작았다. 평소라면 ‘살 더 빼면 되지’ 라며 샀을 텐데, 그러기엔 또 비쌌다. 내려놓을 수밖에. 그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었다. 만듦새도 훌륭했다. 허리는 밴딩 처리돼 있는데 굉장히 쫀쫀하게 느껴졌다. 지금보다 허리 사이즈가 커지든 작아지든 핏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듯했다. 적당한 두께와 답답하지 않은 소재까지 모든 요소가 흡족했다. 특히 실제로 입었을 때 허리부터 골반까지 이르는 부위를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무엇보다 스튜디오니콜슨 자체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있었다. 물론 그래도 비싸다. 하지만 ‘질러야 한다’는 신호가 너무 강력했다. 인생에 가끔 찾아오는 이러한 신호는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특히 취향 개발에 힘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굴러들어온 기회다. 내 경우엔 그 신호를 받아들인 결과가 늘 취향 개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충분히 개발된 취향 내부에선 기호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받아든 기호가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나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이 좀 더 개선될 것 같다. ‘비싼 건 이유가 있다’를 넘어 그 이유를 더 구체화해 나가는 계기로 삼으면 될까? 이건 이래서 비싸고, 저건 저래서 비싸다는 것을 찾아보고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도 해보고 납득도 해보면 어떨까. 적어도 나 자신이 만족하면서 낭비처럼 보이지도 않는 건강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사실 물건의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그에 합당한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과장 좀 보태면 현대 미술에 감동할 능력을 가진 사람만큼 희귀할 테다. 한편으로는 억울하다. 현대 미술이야 애초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도 안 든다. 물건은? 일평생을 사고 쓰고 버리며 지내왔는데 우리는 여전히 쇼핑에서 적잖은 실패를 경험하니까. 하지만 박찬용 에디터의 책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은 바로 이런 생각을 고쳐먹게 해준다. 사실 우리는 현대 미술을 접하지 않은 만큼 제대로 된 쇼핑을 해본 적이 없다고 일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바 현명한 소비 생활이란 스스로 소비와 물건에 대한 문답을 지속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건을 둘러싼 복잡한 질문 사이에서 답을 내야 하는 사람은, 아울러 물건 사이에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나름의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다. 그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산다면 평생 각종 마케팅용 신화와 마케팅 이벤트에 파묻힌 채, 자신이 파묻혀 있는 줄도 모르고 소비자본주의의 부품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미 그렇게 체제의 잠재 부품으로 살아가고 있을 테고. - 박찬용, <좋은 물건 고르는 법>
병연
하방 저지와 디스리스펙: 맨스티어 디스전의 의미
코미디 크리에이터 ‘뷰티풀너드’는 얼떨결에 한국 힙합의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낸 장본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뷰티풀너드는 코미디 레이블 ‘메타코미디’ 소속 크리에이터다. 2명의 멤버(최제우, 전경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현재 힙합과 래퍼를 소재로 한 페이크다큐 ‘언더그라운드’에서 힙합그룹 ‘맨스티어’의 멤버(케이셉 라마, 포이즌 머쉬룸) 역할로 출연 중이다. 단순히 콘텐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힙합 음원을 발매하고 라이브 공연도 하니 일종의 ‘부캐’인 셈. 맨스티어는 ‘일반 대중이 느끼는 한국 래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화신이다. 이 캐릭터를 통해 묘사되는 질 낮은 말투와 행동, 알맹이 없는 가사, 각종 사회적 물의 등 사례별로 그에 해당하는 래퍼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댓글창이 공감에서 비롯된 웃음으로 가득한 이유다. 사실 한국 래퍼의 부정적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수요는 이미 존재했다. ‘쇼미더머니’ 무대에서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며 광역 도발을 시전한 이찬혁이나 뽀글머리에 꿀벌 같은 옷을 입고 “증오는 빼는 편이야 가사에서 질리는 맛이기에”라고 내뱉는 고등학생 김하온이 반향을 일으켰던 것만 봐도 그렇다. 뷰티풀너드는 그러한 수요를 풍자로써 충족시킨 것이다. 세계관 기반의 캐릭터쇼로 서사까지 착실하게 쌓아갔다. 게다가 맨스티어의 랩 실력과 곡 수준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중이 반응했다. 지난 2월 말 선보인 ‘AK47’의 뮤직비디오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현재 조회 수 1000만에 다가섰다. 그야말로 대박 음원. 적지 않은 래퍼들도 이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맨스티어는 클럽에서 직접 공연을 했으며 최근엔 힙합플레이야페스티벌 무대에도 서며 라이브 실력을 증명했다. 그렇게 그들은 ‘국힙을 정리’ 해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맨스티어는 일종의 하방 저지선이 됐다. 한국 래퍼들은 웃음거리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맨스티어만큼 진지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최소한’ 맨스티어만큼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야 했다(물론 ‘훌륭한’의 기준은 흥행 여부가 아니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맨스티어의 말투, 행동, 태도 같은 것들이 묻어나지 않는지 검열해야 했다. 모든 게 다 뛰어난 기획력을 가진 코미디언이 의도한 결과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개인적으로는 ‘아니다’에 한 표).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 버렸다. 문제는 풍자를 기반으로 한 하방 저지는 당사자 의도와 상관없이, 특히 대중의 반응을 얻을 경우에는 디스리스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풍자 자체가 타인의 결점이나 현실의 부정적인 면모를 꼬집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단순히 조롱의 근거로 소모하는 이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뷰티풀너드의 풍자가 영원히 선을 넘지 않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pH-1이 맨스티어 디스곡 ‘BEAUTIFUL’을 통해 짚은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내 식대로 해석하면, “너희들의 콘텐츠는 충분히 재밌고 나 또한 좋아했다. 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 지금 이게 진짜로 너희들이 바랐던 상황인가? 크리에이터라면 자신의 콘텐츠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풍자가 존중을 잃으면 조롱밖에 남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우리도 고민이 많으니 같이 생각해보자.” 이를 두고 ‘긁’이라고 한다면, 맞다. 긁힌 거. 하지만 그건 필연적인 결과다. 원래 특정 집단에 덧씌워진 멸칭은 대개 그것으로 묘사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부터 타격하기 마련이다. 맨스티어에게 ‘긁힌’ 또 다른 래퍼, 이센스가 이해되는 이유다. 물론 그가 쏟아낸 모든 발언을 긍정하긴 어렵다. 다만 “진지하게 하는 사람 기분 개좆같게” 만드는 행태를 더는 참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병연
미켈 아르테타: 묵묵하지만 욕심을 갖고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팀 아스날의 감독 미켈 아르테타는 선수 시절 단 한 번도 국가대표에 선발된 적이 없다. 그의 나라인 스페인에는 유명한 선수가 많았다. 당대 최강의 팀 FC바르셀로나를 이끄는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있었다. 그 라이벌 팀인 레알 마드리드부터 리버풀, 바이에른 뮌헨 등 세계적인 팀에서 내내 주전으로 활약한 사비 알론소도 있었다. 아스날을 먹여살리다 FC바르셀로나로 떠난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명단에 겨우 이름을 올리는 수준이었다. 스페인이 2008년 유로, 2010년 월드컵, 2012년 유로까지 제패하는 걸 보는 아르테타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르테타는 묵묵히 축구를 했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에게는 조금 밀릴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꽤 유명한 선수였다. 일찍이 유럽 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2005년 EPL 팀 에버튼에 합류해 차곡차곡 평판을 쌓았다. 2011년에 같은 리그의 아스날로 이적한 뒤엔 핵심 선수이자 주장으로 5시즌을 뛰었다. 말년에는 경기력이 다소 떨어져 실제 출전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베테랑으로서 리더십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팀을 뒷받침했다. 아르테타의 선수경력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더없이 안정적인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그래서 매우 이상적인. 그를 수식하기 위해 쓴 표현이 ‘꽤 유명한’에 그치는 게 섭섭하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선수였다. 아르테타는 육각형 미드필더였다. 측면과 중앙 어느 위치에 두든지 곧잘 소화해내며 공격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에버튼에서 그를 빼고 전술을 구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스날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경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기여했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제각각인 동료들 혹은 상대팀의 전술이나 기세에 따라 달리 흐르는 경기 양상에 맞춰 필요한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했다. 탁월한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재할 때 오히려 자연스럽게 존재감이 느껴지는 유형이었다. 이런 이들은 대체로 ‘묵묵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틀렸다. 그 두 가지는 아무 관계 없다. 당연히 아르테타도 욕심을 냈다. 2011년 아르테타의 아스날 이적은 다소 급박하게 진행됐다. 이적 시장이 닫히기 직전에 계약이 확정되면서 전 소속팀인 에버튼은 그의 대체자를 구할 시간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에버튼 감독과 팬들은 “더 늦기 전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아르테타를 비난하지 않았다. 무려 7시즌 동안 에버튼에서 최선을 다한 그의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중요해서 다시 말한다. 아르테타는 꽤 유명하고 훌륭한 선수였다. EPL에서 오랜 기간 꾸준히 경기에 나서 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이른바 ‘월드클래스’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높은 명예를 추구할 자격은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아르테타는 아스날에서 2014년, 2015년 연속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바랐던 대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뛰었다. 매번 16강에 그쳐 아쉽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때의 아스날은 1996-1997 시즌 이래 한 번도 EPL 4위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강팀이었다. 아르테타의 마지막 시즌인 2015-2016시즌에는 준우승까지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은퇴한 다음 시즌 5위로 밀려난 아스날은 이후 8위까지 떨어지면서 유럽 대항전도 못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짧지 않은 암흑기를 보낸 아스날은 지난 2022-2023시즌 2위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부활을 이끈 것이 감독으로 돌아온 아르테타라는 점이 재밌는 포인트다. 아르테타는 은퇴 후 곧바로 맨체스터 시티의 코치로 부임했다. 우상이었던 펩 과르디올라 감독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2019-2020시즌 중간에 우나이 에메리 아스날 감독이 경질됐고 전부터 아스날과 접촉이 있었던 아르테타가 새로운 감독으로 합류했다. 아르테타 역시 단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경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의 지휘 아래 그라니트 자카, 부카요 사카 같은 기존 선수들이 제몫을 해냈고 마르틴 외데가르드, 토마스 파티, 벤 화이트, 아론 램스데일, 가브리엘 제수스, 올렉산드르 진첸코, 레안드로 트로사르 등 영입한 선수들도 성공적으로 적응하면서 팀은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믿고 활용할 수 있는 선수풀에서 자신이 영입한 선수와 기회를 준 선수의 비중을 높이고 그로써 이전과 눈에 띄게 다른 성과를 내면 감독의 팀 장악력은 기하급수로 확대된다. 누구를 영입하고 방출할 것인지, 누구를 주전으로 쓰고 후보로 쓸 것인지 등의 결정에 권위가 실리므로. 아스날 감독으로서 아르테타의 가장 큰 성취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안목이 좋았다. ‘어떤 선수를 영입할 것인가?’와 ‘어떤 선수에게 기회를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결과가 따라왔다. 말년의 아르센 벵거와 경질된 에메리가 끝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를 아르테타는 끝내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