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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on&The lamb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 1장2절
🏃🏻‍♀️
우당탕탕 런닝크루
목표 : 21.095km +a
연습일정 : 주 2~3회 개인인증 / 월 1~2회 합동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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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위에 굳게 서리라
성경 필사, 음성, 캡쳐등
하루 통독한 것에 대한 자유로운 인증
[자본주의와 희년] *잠깐묵상 | 레위기 25장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빚이 50년마다 초기화되는 경제 제도입니다. 희년은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속죄일이란 지난 1년간 쌓였던 모든 죄가 해결되는 날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날로부터 빚 탕감의 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빚 해결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유의미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러한 희년 정신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구절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해결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해결해 주소서"가 됩니다. 죄와 빚이 각각 서로에게 메타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시행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눅 4:18-19).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행하신 희년은 제도성을 띄지 않는다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으로, 빚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빚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전체 통화량보다 대출액이 항상 많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빚을 창출해야만 부가 창출됩니다. 경제 성장률이라는 것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의미하고,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것도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의 순환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는 아닙니다. 돈에 집약된 인간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스러운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경제의 선순환과 탐욕의 악순환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대 속에 희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희년 구현의 희망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년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희년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냄새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이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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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설교 속에 전시된 하나님] *잠깐묵상 | 레위기 16장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레 16:23)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의 옷차림과 다른 옷차림으로 지성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사장이 입어야 하는 옷차림 규정이 레위기 16장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단 한번도 에봇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제사장은 평소에 세마포 속옷 위에 에봇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봇의 원단에는 푸른색, 자주색, 붉은색, 금색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슴에는 열두 종류의 보석이 달려 있고, 양 어깨에도 호마노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제사장 관복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이 에봇을 벗은 채 세마포로 된 옷만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머리에도 세마포 관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마포만을 두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대개는 시체를 세마포로 두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은 세마포 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레위기의 동물 희생 제사는 단순히 동물만 죽이는 도축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동물의 죽음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레위기가 기록되었다면 소나 양, 염소 대신에 반려 동물의 희생 제사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반려 동물이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려 동물이 나를 대신해서 희생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예배의 의미가 훨씬 깊이 체감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부인 없이 위로와 회복의 감동만 있는 예배는 공연이나 전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찬양과 설교 속에 멋있게 전시된 하나님을 관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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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 *잠깐묵상 | 출애굽기 26장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출 26:1) 성막은 총 4겹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덮히는 막은 가늘게 꼰 베 실로 짠 천이었습니다. 이 천에다가 푸른 색, 자주 색, 붉은 색 실로 천사 무늬를 정교하게 수놓았습니다. 안쪽에서 두 번째 막은 염소의 털로 만들었고 별다른 무늬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 막은 숫양의 가죽이고 가장 바깥쪽의 네 번째 막은 해달의 가죽입니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가장 안쪽의 성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방직기가 있어서 좋은 원단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에 천이라는 것은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만큼 천이 귀했다는 것입니다. 길이 12.6m, 너비 1.8m짜리 천을 5개 만드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할까요? 게다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천사 무늬를 수놓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유일하게 유채색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성막 공정 중에 가장 세심한 디테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을 들여서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가 염소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을 덮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아름다운 부분을 아무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안쪽을 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내밀하고 은밀한 곳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삶에 성막 하나 잘 만드는 일입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곳을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할까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라야 내면이 가꾸어집니다. 왼손이 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겉치장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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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하루치만 주시는 이유] *잠깐묵상 | 출애굽기 16장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출 16:19-20)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신 날이 없었습니다. 만나를 먹느니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서 노예 음식을 먹는 편이 낫겠다고 사람들이 망언을 일삼았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만나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노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 아닙니다. 잘했다고 더 받을 수 있거나 잘못했다고 깎이거나 하는 인센티브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런 만나에 의외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 치고 너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났습니다. 기왕에 주시는 것, 방부처리를 잘 해서 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금요일에 내리는 만나는 이틀을 둬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증거궤 항아리에 넣어둔 만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 끄떡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만나의 유통기한을 늘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간단한 일이었을텐데 하나님은 일부러 만나를 썪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나의 공급 목적에는 식용 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만나는 은혜인 동시에 시험지였습니다.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았습니다. 약간의 산도(pH)변화에도 색이 변해버리는 리트머스 용지처럼, 만나는 약간의 욕심에도 상태가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욕심을 체크할 수 있는 측정기로 만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또 다른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욕심이 들어가는 순간 부패가 시작됩니다. 우리 삶의 결핍은 은혜가 부족해서일까요? 욕심이 들어가니까 늘 부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 부리다가 잃어버린 은혜가 적지 않습니다. 감사와 절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천연 방부제입니다. 은혜는 만나처럼, 햇살처럼, 공기처럼, 내리는 비처럼 모든 이에게 언제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다만 욕심 부려서 은혜를 상하게 하는 사람과 감사와 절제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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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마크최 목사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다' 설교중
'좋은말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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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고, 기록을 기억하다] *잠깐묵상 | 출애굽기 13장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출 13:6) 만약에 모든 기억을 잃고 단 몇 가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간직하시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억은 잃어버리고 삽니다. 작년 365일, 8750시간을 모조리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작년 한 해의 기억 조각을 전부 이어 붙인다 한들 800시간에도 한참 못미칠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순간에 펜을 들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변성과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현재를 느끼는 온도가 달라집니다. 미래에 대한 질감이 달라집니다. 추억을 안고 사는 사람과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 430년의 노예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기억입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추억으로 바뀌는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요청하십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광야를 걸어갈 힘이 될 것이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은 매년 절기를 지켰습니다. 무교절을 지키고 무교병을 구워먹었습니다. 무교절 예식을 거행할 때면 마치 그 때의 구원 현장에 서있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무교병 굽는 냄새를 맡고 맛을 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을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기억하라고 주신 자리가 기도의 자리입니다. 구원 받은 감격을 회상하고 은혜 받으며 흘린 눈물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 기억이 희미해지면 하나님 나라와 의가 막연해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기억을 너머 기록이 필요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기억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교절은 무엇이고 나의 무교병은 무엇입니까?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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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는 것을 구하는 기도]*잠깐묵상 | 출애굽기 6장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출 6:12)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미움이 눈녹듯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말입니다. 말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무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모세도 이것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라오 앞에 서기가 더 두려웠을 겁니다.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를 설득하기는 커녕 자신의 말실수 때문에 도리어 일을 크게 그르칠까봐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 4:10)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출 6:12)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출 6:30) 모세의 이런 걱정은 타당해보입니다. 파라오 앞에서 어버버했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하는 중대한 일에 왜 입이 둔한 모세를 세우셨을까요? 파라오는 애시당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말 잘하면 될 일, 조리있게 설득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파라오는 사람이 죽어나가야 마음을 고쳐먹을까 말까 한 사람입니다. 말로 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파라오를 설득하는데 언변 능력은 없어도 되는 능력치였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도 모세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인데 꼭 있어야 한다며 그거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나야말로 말이 잘 안통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못 알아들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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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어긋나서 받은 축복] *잠깐묵상 | 창세기 48장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 48:14) 유대인들에게는 오른손이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오른손이란 존귀와 영광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의 오른손은 언제나 장남을 향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오른손을 장남의 머리 위에 얹고 축복하는 행위는 아버지의 영적, 경제적 권위 모두를 장남에게 상속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야곱의 임종때가 가까워지자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 앞에 섭니다.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 앞에 장남 므낫세를, 왼손 앞에 차남 에브라임을 세웠지만 야곱은 손을 바꾸어 얹습니다. 야곱의 오른손이 차남에게 올라간 것입니다. 축복 받을 자격이 없는 차남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오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손이 늘상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돈이 되는 일, 정보가 모이는 곳, 이익이 될만한 사람에게 언제나 손길이 갑니다.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는 곳을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손을 뻗을 만하니까 손을 뻗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오른손이 있습니다. 구원과 평안, 은혜와 자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오른손을 뻗을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른손은 당신의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를 향했습니다. 손을 엇바꾸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엇갈린 자리,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손이 엇갈린 사건,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오른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오른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나에게 왼손을 내밀었다고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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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지나 화해로] *잠깐묵상 | 창세기 42장
https://youtu.be/tAgZI9BSNAI?si=LujaNBSN5pOUb0hb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창 42:21) 미운 사람이 사라질 때 미움도 함께 사라지면 참 좋겠지만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내 안의 미움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사라지면 맘 편할 줄 알았던 형들은 22년이란 세월동안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 미움을 해결할 기회도 함께 사라져버릴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기회가 사라진 자리엔 후회가 남습니다. 다행스러운건 후회하고 있던 그들에게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화해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용서는 혼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했던 그가, 나를 미워했던 그가 내 눈 앞에 있어야 가능한 것이 화해입니다. 형들에게도, 요셉에게도 이제 그 기회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쪽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기회를 지혜롭게 붙잡습니다. 그리고 형들에게도 이 시간이 기회일 수 있도록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형들이 알게 되었을 때 형들이 느껴야 할 죄책감과 수치심, 공포심이 어떨지를 알기에 요셉은 먼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형들을 대합니다. 형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갇혀서 지난 세월 숨겨왔던 미안함과 후회에 직면하고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사실 이것은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를 너머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자마자 그 죄를 해결할 방법부터 제시하셨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하나님에게 등돌린 인간을 용납하시기로 하나님은 이미 결정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나의 죄성에 직면하고 하나님의 용납을 나도 용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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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과 일임의 적절한 균형] *잠깐묵상 | 창세기 34장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창 34:23) 세겜은 정착민들이었고 야곱의 가족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세겜 땅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발급해 주자고 세겜이 세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문이 자기네 땅에 정착하게 되면 세겜성의 경제 규모가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였습니다. 기업으로 치면 M&A 제안입니다. 세겜성의 자산 규모, 경제 규모가 커진다는 말에 솔깃했던 세겜성 남자들은 야곱측의 요구대로 모두가 할례를 받습니다. 추장 세겜이 이렇게까지 일을 밀어 붙이는 이유가 그저 아내 한 명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세겜성 주민들은 알리 만무했습니다. 3일 뒤에 자신들에게 무슨 재앙이 닥칠지 모른 채, 그들은 추장의 말을 수용합니다. 지도자의 결정과 그것을 아무 검증 없이 수용한 주민들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창세기 34장으로부터 읽습니다. 말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세겜 개인의 탐욕이 서려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세겜성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 삼은 것입니다. 세겜성 주민들이 맞이한 이번 비극은 주민들이 적극 나서야 할 일을 지도자에게 일임했다가 발생한 참상입니다. 동시에 이번 일은 아버지 야곱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을 아들들에게 맡겼다가 생긴 참상이기도 합니다. 나서야 할 아버지가 나서지 않고 나서지 말아야 할 아들들이 나서서 피바람이 불고 말았습니다. 야곱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들이 아버지를 믿지 못해 생긴 비극이고, 세겜성 입장에서 보면 추장을 너무 믿어서 생긴 비극입니다. 지도자를 믿고 맡겨야 할 일인데 사사건건 간섭하다가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대로 각자가 목소리를 내야 할 일인데 리더를 믿고 맡겼다가 배가 침몰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4장을 묵상하며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봅니다. 참여와 일임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나라이기를 기도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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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밝은 아버지, 딸의 어두운 그늘] *잠깐묵상 | 창세기 31장
라반은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는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인 셈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향할 때, 그는 아마도 외삼촌 라반이 자기에게 다정했던 엄마와 비슷한 성정의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카가 자기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자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제안했습니다. 야곱이 아무 대가 없이 성실하게 일을 해주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임금 제안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야곱을 정식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빌드업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야곱의 처지와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야곱에게 지극히 불리한 근로계약을 체결한 횟수만 지난 20년간 열 번에 달했습니다. 라반이 성사시켰던 최고의 딜은 둘째 딸을 연모했던 야곱의 순정을 이용해서 야곱의 노동력을 후려쳤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일로 라반은 14년 동안이나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야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집 못갈 것 같았던 첫째 딸의 결혼마저도 단번에 해결해버립니다. 성경에 라반이 처음 등장했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나홀의 동네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의 종을 영접했던 사람은 리브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빠 라반이었습니다. 원래 딸의 결혼에는 아버지가 관여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왜 그토록 적극적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종에게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사례를 알고 그때의 라반을 다시 보니 그때도 라반은 여동생의 결혼을 수익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의 결산이 무엇입니까?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창 31:14-15) 두 딸의 평가, 이것이 라반이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삶의 결산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형통이란 무엇일까요? 인생 잘 산다는건 어떤 것일까요? 세상이 점점 돈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색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힘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밝히는 것이 진정 우리 인생을 밝혀줄 수 있을까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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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ild 5. 박지범 선교사님 @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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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에 시작된 인테리어 공사] *잠깐묵상 | 창세기 28장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 28:11) 이날, 야곱의 인생에 해가 졌습니다. 이날 졌던 해는 20년 후, 야곱이 얍복나루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올 때 다시 뜹니다(창 32:31). 장장 20년동안 야곱의 인생은 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해가 떠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야곱이 봤다는 것을 강조하는듯 창세기 28장 12-13절은 '보다'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야곱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16) 이 말을 듣는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쫓겨가는 야곱이었습니다. 제대로 묵을 곳도 없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5-16)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장자권에 눈이 멀어 정작 봐야할 것을 못 보고 살아온 야곱은 그때서야 하나님을 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창 28:18-19)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집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삼으신 야곱의 인생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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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나님이 하셨을까?] *잠깐묵상 | 창세기 27장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창 27:20) 거짓말 한번 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니요. 야곱은 어머니와 짜놓은 사기극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순발력이 좋아서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 우리도 신앙생활하며 많이 듣고 많이 하는 말입니다. 동일한 표현에 여러 용례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실컷 늘어 놓고는 겸손한 척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로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도들에게 헌신과 헌금을 요구할 때도 '이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될대로 되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하실겁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동의는 되지 않지만, 교회 분위기상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관례적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내 주민번호와 이름을 도용해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 이름으로 하고 다닌 정황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인의 명의를 본인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일은 엄연한 불법입니다. 십계명 제 3계명에는 하나님의 명의 도용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따라서 함부로, 아무 때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내면 깊숙이 인정되기까지 잠잠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요엘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가 여호와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남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기에 때로는 아껴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고, 이름의 격에 맞게 말할 때, 그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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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기 소개] *잠깐묵상 | 창세기 24장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창 24:34)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름이 박탈됩니다. 감옥에 가면 죄수는 이름 대신에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이름으로 불릴 자격을 박탈당하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시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름은 그저 표식이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것, 그것이 이름입니다. 창세기는 이름이 유독 많이 나오는 책입니다. 창세기 중간 중간에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족보가 등장합니다. 무려 9개의 족보에 사람 이름만 수백 명입니다. 야곱이나 요셉처럼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가 기록으로 남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름 한 단어만 남긴 채 그가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떠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됐건 이름 하나는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 종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활약이 장장 67절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 한 번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경도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소개한 전부였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로 남은 그의 짧은 자기 소개를 가만히 묵상해 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할 수 있는 자기 소개의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엔딩 크레딧 끄트머리 한 구석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 세상 일을 할 때나 필요한 노력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시켜 주셨다는 것,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분들이 지금도 많이 계시는 줄 압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서 사람이 기억 못할 뿐이지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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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인가? 소금 기둥인가?] *잠깐묵상 | 창세기 19장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물건을 버리고도 미련을 못 버리면 버린 곳을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미련을 못 버리면 그 사람이 떠난 자리를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버렸다고 버린 것이 아니고, 떠났다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나온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남은 미련까지 버려야 다 버린 것 아닐까요? 세상 즐거움과 세상 자랑, 그것이 세상의 즐거움이고 세상의 자랑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문화 산업에 의해, 세상에 의해 주입된 즐거움과 주입된 기쁨인데도 불구하고 순전히 나로부터 샘솟는 즐거움과 내 안에서 생성된 기쁨이라고 착각합니다. 이 착각을 주체성의 환상이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은 세상이 허락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흡족함의 중독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딱 한 번 맛보는 것만으로도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마치 도박 판에 처음 뛰어든 사람이 첫 판에 돈을 따는 기쁨을 맛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일부러 돈 맛을 보게하는 배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실력으로 딴 줄 압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을 떠났지만 미련이 남았습니다. 소돔에 사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거주지가 소돔이라는 것이 그녀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즐거움과 자랑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결국 그녀는 미련한 소금 기둥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소금 기둥이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그녀의 미련한 실존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 채 매일을 살아갑니다. 광야의 소금 기둥이 될 것인가?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인가? 하는 가능성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뒤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어디를 돌아봐야 할까요? 롯의 아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돌아봤다면 어땠을까요? 매일 내가 돌아보는 것이 무엇인지가 내 정체성을 결정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 5:13)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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