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주권자란 무엇이 비상사태인지를 결정하는 자다.>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한 말이라고 한다. 어느 날 나는 어디선가 이 문장을 읽었고, 그때부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싶어졌다. 그래, 비상사태인 거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 사이에서, 사람이 꽉꽉 차있는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퀭한 눈으로 모니터 앞에 목을 빼놓고 앉아있는 동료들 한가운데에서, 여태까진 한 번도 내어보지 못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거다. "비상!!" 그러면 사람들의 고개를 돌려 동그란 눈으로 내게 설명을 요구하겠지. ‘무엇이 비상이란 말입니까?’ 모두가 수긍할 만한 비상사태에 대한 근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직장인답게 레퍼런스 수집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거 비상인데’라는 혼잣말을 하게 만드는 상황을 모으자. 첫 번째로 수집한 비상사태는 보일러 계기판에 떠 있는 A 코드다. 보일러를 밤새 틀어놨는데도 바닥이 찬 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계기판엔 온도 대신 A라는 문자가 떠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누수 알림이란다. 바닥 어디에선가 물이 새고 있다는 뜻이다. 화장실에선 얼음장같이 찬물만 쏟아진다. 손이 깨질 것 같다. 아, 집주인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선뜻 고쳐주겠다고 할까. 일단 머리도 감아야 하는데. 아아, 비상이다. 두 번째로 수집한 비상사태. 출근 전에 매일 들르는 카페가 문을 안 열었다. 지각의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들렀었는데 이 무슨 낭패인가. 출근 전에 단골 카페 주인의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말을 듣는 건 내겐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업무 지구에 멋진 카페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내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나는 그 인사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는 연극에 먼저 참여하고 나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에서의 역할에도 기꺼이 충실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씻지도 못하고, 커피도 못 마시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공기가 무겁다. 내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전에 누군가 이미 비상사태를 선포해버린 것 같다. ‘소식 들었어요? A가 퇴사한대요”. 퇴사한다는 옆 팀 직원은 나랑은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내가 아침마다 들르는 카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 괜히 정이 가던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낯빛이 좀 어두웠던 것 같다. 뭐 예비 퇴사자의 낯빛이야 죄다 비슷하겠지만. 퇴사자가 요 근래 들어 부쩍 많아진 것 같다.비상. 비상. 그래도 내가 퇴사를 한 건 아니니 일을 해야 한다. 업무용 메신저를 키고, 오늘 할 일을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나면 본격적인 업무 시간이다. 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를 조금 먹었다. 대출이 생겼고 뱃살이 생겼고 염증 물혹 용종 낭성 결절이 생겼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염증이 쌓인 만큼 경력도 조금은 쌓였을까? 회의에서 방어적으로 굴기, 팀장에게 내가 한 일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하기, 연차 타이밍 잡기 같은 노하우는 확실히 조금 쌓였다. 하지만 똑똑하기로 치면 일을 시작하기 전이 조금 더 똑똑했던 것 같다.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수 있는 종류의 똑똑함은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때가 더 똑똑했던 것 같다. 메일을 한번 쓸 때마다, 누군지도 모르는 고객을 위해 프로모션을 준비할 때마다, 회의에서 핏대를 한번 세울 때마다 똑똑함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손실을 어서 알아차리고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해야 할 텐데. 지금 노트북을 덮고 한번 외쳐 보는 거다. 여러분. 비상입니다. "여러분. 비상입니다!" 아뿔싸. 나보다 팀장이 조금 더 빨랐다. 팀장이 비상사태를 선포한 이유는 이러하다. <월말이 다 되어가는데 매출이 목표보다 훨씬 미달하므로 비상이다.> 그런데 그 목표는 팀장이 스스로 정한 목표다. 목푯값은 언제나 지난달보다 조금씩은 더 높고, 그래서 우리는 목표를 달성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얄궂은 점은 우리가 목표 달성엔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난달보다는 조금씩 더 많이 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장하는 실패자'들인 셈이다. 성장하는 실패자들이 모인 집단에선 비상사태가 곧 일상일 수밖에 없다. 한번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나면 우리 실패자들은 비상사태 극복을 위해서 모질게 힘을 쓴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날은 모두가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퇴근을 한다. 그래도 밤이 되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 나도 내일의 나에게 잔업을 떠넘기기로 결심하고 퇴근을 한다. 하루 종일 비상사태로 가득 차 있었는데, 끝내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품고.역시나 '비상'과 '일상'은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비상사태의 총합으로 이뤄진 게 일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비상'과 '일상'이 나눠져있는 게 아니라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게 효력이 있을리 없다. 비상이라고 소리친다고 한들, 그 목소리가 누구에게 들리기나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집 바닥 어디에선가 물이 새고 있고 그래서 내가 머리를 못 감았고 커피를 먹지 못했다는 사실은 동료들 중 누구도 모른다. 나 또한 옆 팀 사람이 퇴사한 이유를 모른다. 내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면 고개를 돌려 반응해 줄 사람이 있긴 있을까. 그래도 내일은 내일의 비상사태가 찾아오겠지. 그러면 나는 비상구를 슬쩍 통과해 옥상으로 갈 것이다. 옥상에는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사람 한 둘쯤은 늘 있다. 얼굴 없는 풍경이 되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내일 옥상에 올라가면, 이전엔 한 번도 내보지 못했던 큰 소리로, "비상!!!" 하고 외칠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어떤 얼굴들을 마주칠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