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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수_삼상19:1-7_요나단이 실제로 심히 좋아한 사람이 누구게요?

○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니다
오늘 본문 삼상 19장은 왕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이 명령을 내리며 시작한다.
다윗을 죽이라(1절)
어제 18장 끝(29절)에 예고된 다윗을 향한 사울의 본격적인 대적(大敵) 행위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다윗은 바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다윗은 이 죽음의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게 될까? 그 이야기가 오늘 묵상 본문 삼상19:1~7이다. 다윗은 어떤 기지(機智)로 이 위기를 빠져나갈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이니, 뒤따르는 이야기는 이에 대한 다윗의 대응이 당연할 것만 같다. 그런데 웬걸? 다윗은 뒷전으로 밀리고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여 이 죽음의 명령을 뒤집어 삶으로 구원해 낸다. 바로 요나단이다. 그 아버지의 아들인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닌 요나단이 오늘 하나님의 큰 구원의 통로로 등장한다.
○ 좋아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 뒤에 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이것이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1절)
요나단이 아버지인 왕 사울의 ‘죽이라’는 명령에 대적(大敵)한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왜 ‘심히 좋아하므로’인지에 대한 이유는 없다. ‘심히 좋아하므로’라는 사실만 있다. 아무튼 요나단은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다윗에게 이 명령도 귀끔해 주고, 외진 곳에 숨어 있으라고 하며, 자신의 계획을 나눈다. 그리고 사울 앞에서, 아버지이자 왕인 사울이 죽이라고 명한 다윗의 ‘칭찬’부터 시작한다.
어찌 이게 가능하까? 세상 말로 이게 ‘심히’ 좋아한다고 가능한 일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로’ ‘심히’ 좋아해야 가능할까? 부모-자식 관계도 아닐 뿐더러, 사실 둘이 친구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지 않았는가? 이 요나단의 ‘심히 좋아하므로’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고, 무엇을 위한 사랑일까?
이 요나단의 사랑은 그가 사울 앞에서 하는 말에 조심씩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 사실 다윗이 아니라 아버지, 사울을 먼저 사랑하고 있어요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4절)
요나단의 첫 말이다. 아버지에게 한 첫 말은, ‘범죄하지 마옵소서’이다! ‘다윗을 살려 주세요, 아버지!’가 아니었다. 요나단은 제일 먼저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못하게, 죄를 막고 선 것이다. 요나단은 말은 ‘범죄하지 마옵소서’로 시작해, ‘범죄하려 하시나이까(5절)’로 끝난다. 아버지가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는데, 요나단은 아버지가 죄를 범하는 것을, 악을 행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요나단은, 지금 다윗에 앞서, 아버지 사울 구원하려 나선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 내 사랑이 큰 구원으로 향하기를 바라요
요나단의 사랑은 인간적인 차원의 우정만은 아니었다. 요나단의 사랑은 세상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한 어느 한쪽만을 향한 사랑도 아니었다. 요나단의 사랑은 모두를 향해 모두를 위한 사랑이었다. 다윗도, 사울도 모두 살려내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요나단은 다윗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 사울 앞에서 서서 하나님의 “큰 구원(5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나단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하나씩 하나씩 고해 올린다.
아버지, 다윗에게 죄를 짓지 마세요. 다윗이 아버지에게 한 일은 선한 일이었어요. 아시잖아요? 걔는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어요.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온 이스라엘을 위해 “큰 구원”을 이루셨잖아요. 아버지도 이를 보고 기뻐하셨잖아요. 그런데 어찌 이유 없이 걔를 죽여 무죄한 피를 흘리려고 하세요. 왜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죄를 지으려 하세요.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다’의 애통한 심정으로 지금 아버지의 죄를 끊어 아버지를 살리려 하고 있다. 지금 아버지는 악령에 붙들려 있는데, 그 악령을 쫓아낼 수 있는 건, 이 목숨 건, ‘구원의 말’ 외엔 없었다.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6절)
요나단의 말속에 ‘살아 계신 여호와’가 함께 하셨고, 그 말을 들으며 사울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6절)’을 느낀 것이다! 이렇게 사울은 아들을 구원의 통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짓지 않았고, 죄에서 건짐 받았다.
○ 하나님을 심히 좋아하므로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도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7절)
이렇게 끝났다. 다윗은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었는데, 정작 자신이 한 일은 없었다.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해서 숨어 있었고, 숨어 있다 보니 상황 종료되어, 요나단이 다시 데리러 왔고, 지금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다(7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
이게 하나님을 심히 좋아해서, 죄를 심히 미워하고, 사람을 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선을 이루고,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10:27)
이게 사랑의 근원이고 순서이며 질서이다.
○ ‘나(我)-병’에 걸린 환자
나도 ‘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누구를 심히 좋아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나는 그때 분명 그/그녀를 심히 좋아하므로, 그/그녀를 위한 말이나 행동을 했다. 당연히 사랑의 말이고 행동이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과 행동에 대해 나는 종종 이런 말들을 돌려받았다. “너 좋아서 한 거잖아!” “결국 널 위해 한 거잖아!” 그런 말을 돌려받을 때, 사랑조차 사랑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그녀의 돌 같은 마음 밭, 가시 같은 마음 밭을 욕했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어!”라는 맹세와 함께, 사랑을 차갑게 거두었다.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거라고.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그런데 오늘 알았다. 내 사랑의 문제를. 나는 ‘누구를 심히 사랑하는 나’를 먼저, 심히 사랑하는 병자다. ‘나(我)-병’에 걸린 환자. 지금 이 상태로 내가 요나단의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나의 유익을 위해 다윗을 변호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다윗을 위해서도 아니다. 걔가 없으면 내 인생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친구를 위해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는 ‘나’를 갖고 싶어서. 내가 사랑이라 여기는 생각이나 감정은 이 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 큰 구원
하나님은 이 아침 요나단의 ‘심히 좋아하므로’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신다. 사랑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모두를 말이다. 사랑은 하나님-구원을 향한 사랑일 때 구체적인 ‘사랑하다’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아침 나는 애통하다. 내 사랑은 내 옳고 그름과 편의와 이익과 정욕으로 비벼져 있어서! 그러니 이 아침 나는 애통해야 한다. 주 사랑을 내게도 달라고, 요나단처럼. 사람 살리는 그 사랑을.
오늘도 말씀으로 제게 말씀해 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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