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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설교😌
[왜 가나안 땅이었을까?] *잠깐묵상 | 여호수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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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이토록 위험한 땅인데, 하나님은 왜 자꾸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려 하셨을까요?
사실 가나안 땅은 황무지에 가깝습니다. 좋은 땅도 아니었고 발전된 땅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막 지역에 비해 목축하기 좋은 땅이라는 말도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땅의 비옥함을 선물하고 싶으셨다면 아브라함을 굳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발원지역입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라는 두 개의 강이 제공하는 비옥함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애굽은 어떻습니까? 나일강 문명의 발원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괜히 그 비옥한 땅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끌어내셔서 비교거리도 되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 땅에 보내시려는 의도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5장 16절입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고많은 땅들 중에서 가나안 땅이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가나안 땅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상태가 도를 넘었기 때문에 그 땅에 대한 징벌적 차원에서 히브리 민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전쟁을 어렵게 치러야 했던 이유입니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 전체가 일종의 사전 교육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하면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의 위험성을 거듭 강조했고, 죽기 직전까지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애시당초 풍요와 번영을 선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좁은 문, 좁은 길로 부르셨습니다. 전쟁터로 부르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우르나 애굽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은 물질적 풍요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나일강의 풍요로움을 선망하게 됩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 16:13)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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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인가? 복음인가?] *잠깐묵상 | 사사기 8장
'클리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학이나 음악, 영화 등의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뻔한 설정, 예측 가능한 전개, 틀에 박힌 대사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출생의 비밀이나 연인의 가족 간에 얽힌 원한, 위기의 순간 주인공이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 등이 있습니다. 음악에서는 2-5-1과 같은 전형적인 코드 진행이 클리셰에 해당합니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잘 통하니까 클리셰가 되었습니다. 진부하고 뻔하긴 하지만 클리셰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인기와 흥행을 보증하는 값을 톡톡히 하기 때문에 작가나 연출가들은 클리셰를 적절히 이용하여 작품을 만듭니다. 특히 대중 문화 속에서 클리셰는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대중 문화는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를 클리셰처럼 이용한다면 어떨까요? 메시지 본연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저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복음적 표현이나 성경적 표현을 이용하는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삿 8:23) 이 말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기드온에게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기드온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기드온 자신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심지어 금 에봇을 제작함으로서 그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 뿐만 아니라 종교적 권력까지 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닌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성도들의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나 장치들이 있습니다. 대형 집회의 찬양인도자들이 내뱉는 멘트, 박수를 유도하기 위한 제스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음악적 빌드업도 일종의 클리셰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 고통, 희생과 같은 개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분위기 띄우기 용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회 분위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성도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한 바울의 이야기는 헌신 설교의 예화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클리셰는 교회 문화에 익숙한 종교인을 만들고, 복음은 하나님과 친숙한 신앙인을 만듭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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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거품] *잠깐묵상 | 사사기 4장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탁월한 지도자 곁에 있거나 부흥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는 뭔가 좀 변화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부재하거나, 부흥의 분위기가 사그라들면 언제 그랬냐는듯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입니다. 에훗이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80년간 평화를 누렸습니다. 13명의 사사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물한 인물입니다. 80년 동안이나 탁월한 영적 지도자와 함께 했다면 사람들의 영적 수준도 상당히 올라갔을 것 같은데, 에훗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동안 자신들이 뭐라도 된 것 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실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예수님을 배신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도대체 3년 동안 그들은 뭘 배웠던 것일까요?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호언장담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십자가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산산조각나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신 영적으로 고양된 느낌을 보장하는 여러 종교적 활동 뒤에 숨는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좋은 신앙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름 있는 교회에 다니면 내 신앙도 교회의 이름값만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십자가 앞에 서 봐야 압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예배에 빠지지도 않고, 헌금도 하고 구제와 봉사에 열심을 쏟아도, 십자가를 맞딱뜨린 적이 없다면, 그 앞에서 내 실체에 처절하게 실망해본 적이 없다면, 내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저 교양생활이나 고상한 취미생활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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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요구하다] *잠깐묵상 | 사사기 1장
유다 지파의 갈렙은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브론 남쪽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그런데 헤브론과 그 이남 지역은 정복에 욕심을 낼 만큼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질 때, 땅에 대한 우선권을 쥔 롯은 헤브론 반대쪽을 향했습니다. 선택권이 있다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땅이 헤브론이었습니다. 갈렙은 그런 땅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며 개척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갈렙은 자기 딸을 걸고 황무지 개척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결국 옷니엘이라는 장수가 기럇 세벨을 점령하고는 갈렙의 딸, 악사를 얻습니다. 이제 갈렙은 남부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사위를 따라 딸을 떠나보냅니다. 가장 척박한 땅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5) 딸이 샘물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 갈렙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심 아까워서 주기 싫었는데 마지 못해 샘물을 주었겠습니까? 윗샘과 아랫샘 뿐만 아니라 더 줄 것은 없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다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다 주고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부모에게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다 커버려서 더 이상 부모의 지원이 필요 없는 자식에게는 호주머니 속의 사탕이라도 꺼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케이던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