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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설교😌
[세상의 소금인가? 소금 기둥인가?] *잠깐묵상 | 창세기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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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물건을 버리고도 미련을 못 버리면 버린 곳을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미련을 못 버리면 그 사람이 떠난 자리를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버렸다고 버린 것이 아니고, 떠났다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나온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남은 미련까지 버려야 다 버린 것 아닐까요?
세상 즐거움과 세상 자랑, 그것이 세상의 즐거움이고 세상의 자랑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문화 산업에 의해, 세상에 의해 주입된 즐거움과 주입된 기쁨인데도 불구하고 순전히 나로부터 샘솟는 즐거움과 내 안에서 생성된 기쁨이라고 착각합니다. 이 착각을 주체성의 환상이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은 세상이 허락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흡족함의 중독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딱 한 번 맛보는 것만으로도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마치 도박 판에 처음 뛰어든 사람이 첫 판에 돈을 따는 기쁨을 맛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일부러 돈 맛을 보게하는 배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실력으로 딴 줄 압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을 떠났지만 미련이 남았습니다. 소돔에 사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거주지가 소돔이라는 것이 그녀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즐거움과 자랑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결국 그녀는 미련한 소금 기둥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소금 기둥이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그녀의 미련한 실존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 채 매일을 살아갑니다. 광야의 소금 기둥이 될 것인가?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인가? 하는 가능성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뒤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어디를 돌아봐야 할까요? 롯의 아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돌아봤다면 어땠을까요?
매일 내가 돌아보는 것이 무엇인지가 내 정체성을 결정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 5:13)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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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에 시작된 인테리어 공사] *잠깐묵상 | 창세기 28장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 28:11) 이날, 야곱의 인생에 해가 졌습니다. 이날 졌던 해는 20년 후, 야곱이 얍복나루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올 때 다시 뜹니다(창 32:31). 장장 20년동안 야곱의 인생은 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해가 떠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야곱이 봤다는 것을 강조하는듯 창세기 28장 12-13절은 '보다'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야곱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16) 이 말을 듣는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쫓겨가는 야곱이었습니다. 제대로 묵을 곳도 없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5-16)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장자권에 눈이 멀어 정작 봐야할 것을 못 보고 살아온 야곱은 그때서야 하나님을 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창 28:18-19)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집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삼으신 야곱의 인생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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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나님이 하셨을까?] *잠깐묵상 | 창세기 27장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창 27:20) 거짓말 한번 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니요. 야곱은 어머니와 짜놓은 사기극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순발력이 좋아서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 우리도 신앙생활하며 많이 듣고 많이 하는 말입니다. 동일한 표현에 여러 용례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실컷 늘어 놓고는 겸손한 척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로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도들에게 헌신과 헌금을 요구할 때도 '이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될대로 되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하실겁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동의는 되지 않지만, 교회 분위기상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관례적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내 주민번호와 이름을 도용해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 이름으로 하고 다닌 정황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인의 명의를 본인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일은 엄연한 불법입니다. 십계명 제 3계명에는 하나님의 명의 도용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따라서 함부로, 아무 때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내면 깊숙이 인정되기까지 잠잠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요엘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가 여호와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남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기에 때로는 아껴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고, 이름의 격에 맞게 말할 때, 그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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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기 소개] *잠깐묵상 | 창세기 24장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창 24:34)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름이 박탈됩니다. 감옥에 가면 죄수는 이름 대신에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이름으로 불릴 자격을 박탈당하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시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름은 그저 표식이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것, 그것이 이름입니다. 창세기는 이름이 유독 많이 나오는 책입니다. 창세기 중간 중간에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족보가 등장합니다. 무려 9개의 족보에 사람 이름만 수백 명입니다. 야곱이나 요셉처럼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가 기록으로 남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름 한 단어만 남긴 채 그가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떠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됐건 이름 하나는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 종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활약이 장장 67절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 한 번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경도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소개한 전부였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로 남은 그의 짧은 자기 소개를 가만히 묵상해 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할 수 있는 자기 소개의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엔딩 크레딧 끄트머리 한 구석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 세상 일을 할 때나 필요한 노력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시켜 주셨다는 것,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분들이 지금도 많이 계시는 줄 압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서 사람이 기억 못할 뿐이지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