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을 괜히 한번 셈해보게 만드는 연말. 숫자는 착실히 늘어나는 데, 이것만으로는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을 때면 다른 셈법을 궁리하게 된다.
어렸을 때 하던 CD게임에는 '세이브 포인트'라는 것이 있다. 절벽도 넘고, 몬스터도 잡고, 날아오는 단검 같은 것들도 피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공중에 떠 있는 노트에 손을 갖다 댄다. 그러면 잠시 화면이 멈추고, 이전으로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불가역적인 갱신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이런 '세이브 포인트'들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시간의 속도에 멀미도 하고 같은 곳을 맴돌다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경험치를 쌓고 쌓아 결국엔 과거의 역류를 막는 둑을 쌓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 불가역적인 갱신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새로운 막을 플레이할 때의 두근거림을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 속절없이 나이만 더하고 있다는 생각에 휩싸일 때. 세이브포인트를 만드느라 집중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 나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고, 그래서 시간이 쏜살같이 빨리 흐르는 것이라고.
한 살 더 먹길 기다리고 있는 11월, 누군가의 진짜 삶의 길이는 세이브 포인트의 개수로만 파악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코믹한 생각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또 하루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