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민주, 이게 진짜 너야?
조용하고, 소심하고, 눈에 안 띄는 학생. 어린 민주킴은 친구 한명 없었어요. 온종일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했죠. 순정만화 속 소공녀처럼 큰 눈망울의 캐릭터를 스케치북 가득 채웠어요. 예쁘고 사랑 받는 ‘상상 속의 나’였죠.
만화가를 꿈꿨지만 재능은 없었어요. 사생대회에서 간신히 장려상 받는 정도. 딸의 장래가 걱정됐던 어머니는,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냅니다. 중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배워야 했죠.
스무살, 털실처럼 얇아진 예술의 끈을 민주킴이 다시 붙잡습니다. 디자인전문학교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 들어갔어요. 상상력을 팔레트 삼아 그려낸 옷을, 누군가 입는다는 게 짜릿했어요.
패션을 좀 더 배워볼까 싶어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 지원합니다. 20점 만점에 11점.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죠.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위치한 사립 대학.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 런던 센트럴세인트마틴과 함께 세계 3대 패션학교로 불린다.
민주킴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림에 재능은 없었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림을 꾸준히 그렸기에, 패션 디자인에 발들일 수 있었다. ⓒ앤아더스토리즈
만화적 상상력으로 현실을 위로할래
학교는 ‘천재들의 소굴’ 같았답니다. 민주킴은 이들 사이에서 ‘뭘 표현해야 할지’ 몰랐어요. 1학년 땐 옷에 온갖 화려하고 독특한 장식을 넣었더니, 교수가 한마디 했죠. “지금 H&M 디자인하니? 네 작품에 민주킴이 어디 있니?”
“앤트워프는 예술적, 독창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학교예요. 나만의 철학을 끄집어내야 개성있는 결과물이 나온다고 가르쳤죠. 전 평생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뭘 원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교수님들은 늘 저를 탈락감으로 여기셨죠.”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민주킴은, 모든 질책을 배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때부터 ‘나다움’에 대해 찾아나섭니다.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 주눅들었던 어린 시절, ‘만화 속 주인공’처럼 주목받고 싶었던 꿈이 떠올랐죠.
민주킴은 생각합니다. ‘나처럼 좌절하는 여성들에게 용기를 줘야겠다’고. 패션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다짐했죠. 어릴적 좋아하던 만화나 영화, 옛날 사진을 꺼내보며 옷을 디자인하기 시작합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민주킴은 H&M 디자인 어워드에 덜컥 우승합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교수도, 동기들도 놀랐어요. 우승 컬렉션 ‘디어 마이 프렌드Dear My Friend’를, 전 세계 13개국 H&M 매장에 한정 판매할 기회도 얻었죠.
*민주킴이 직접 스케치한 캐릭터를 ‘친구Friend’라고 정의했다.
H&M은 민주킴의 동화적인 상상력을 높이 샀어요. 둥근 실루엣의 검은 양털 망토, 과장된 곡선의 무거운 니트, 몬스터의 양손이 몸을 감싸는 듯한 털달린 아이보리색 크롭티까지. 전부 민주킴이 상상해 그려낸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만화와 비디오 게임, 귀여운 인형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는 나. 그게 진짜 내 모습이더라고요. 만화 속 비현실적인 색채와 실루엣을 옷에 녹였어요. 그 뒤론 패션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죠. 예쁘다, 못생겼다는 말 대신 ‘너답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거든요.”
민주킴이 2013 H&M 디자인 어워드에서 공개한 컬렉션, ‘디어 마이 프렌드’. 민주킴이 평소 좋아하던 만화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화 속 상상력과 캐릭터 실루엣을 표현했다. ⓒ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