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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상문
+ 2025/08/02 오후 7시 : 쓰려고 했는데 잊어버린 내용이 있어서 파란 글씨로 추가했습니다.
작년에 트위터 탐라 너머로, 해당 웹온리전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로판(서양)이라는 소재는 웹툰이나 웹소설로나 몇 작품 감상해보았을 뿐, 직접 집필을 할 수 있을 만큼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깊지 않았고 당시 해당 소재에 대한 흥미도 약간 시들해졌던 상태였던지라 그냥 흘려보냈더랬죠. 감상회 직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웹온리전 계정에 있는 사이트로 들어가보니 아쉽게도 몇몇 작품들이 비공개처리되었거나 링크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느리개님이 보내주신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였는데, 우리 모임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게 느껴졌네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카논과 세지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다소 전형적인 인물들이죠. 융통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충성심 가득한 기사단장과 모두가 흠모하는 아리땁고 연약한 아가씨. 필연적으로 손에 피를 묻힐 수 밖에 없는 기사와 어느 쪽으로 보아도 무결해보이다못해 탄생의 신처럼 느껴지는 아가씨. 로맨스 소설에서 꽤 인기있는 양상의 인물 조합이네요.
(추가된 부분입니다.) 아가씨에게는 영 관심이 없어보이던 카논이 세지를 보자마자 세상에 마치 그 한 명밖에는 남지 않은 듯이 반응하는 부분의 묘사도 로맨스 소설다운 사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느리개님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술술 읽히는 편인데, 세지의 외향을 묘사할 때는 온갖 찬란하고 탐미적인 비유들이 줄줄 이어져서 누가 보아도 카논이 세지에게 반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더하여 이 부분이 이전과 이후 문장들과도 상반되어 카논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죠. 묘사 직후에 오는 "탄생의 신이 카논을 굽어보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끝나기까지, 저도 함께 숨을 참고 세지를 바라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런 인물들의 이면에는 항상 숨겨진 사연이 있는 법이죠. 카논은 승리만을 바라보는 냉혈한 같지만 자신과는 상반된 여인, 세지를 만난 그날 밤에 악몽을 꿉니다. 그 꿈을 살펴보면 피난을 가는 행렬과 전쟁의 승리 뒤에 남은 처참한 죽음이 있죠. 붉은 색은 강렬한 태양의 빛, 영양분을 품은 풍유로운 대지의 색으로 탄생의 신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적에게서 흘러내리는 피와 전쟁으로 생긴 수많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같은 붉은 색이라도 세지의 머리칼은 잔잔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들판의 잔디, 푸른 하늘 아래에서 풍성하게 굽이치는 반면에 카논의 꿈 속에서 본 붉은 머리칼의 소유자들은 전쟁을 피해 가는 무고한 민간인, 카논이 죽여야하는 적, 카논이 죽인 적이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지가 제국민이 아니라 점령지에 세운 보호소의 아가씨라는 점입니다. 보호소는 제국의 입장에서는 자비를 베푼 격이 되겠지만, 과연 모스보 왕국의 입장에서도 그러할까요? 피난민과 적국 기사들의 붉은 머리칼이 유난히 붉은 세지의 머리칼과는 정말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까요? 모두가 우러러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걸어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풍요와 평화와 탄생의 화신과도 같은 세지는 아스파르 제국에게 아무런 적의도 품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 전쟁통에서도 손에 흙 한 줌 묻히지 않은 말랑하고 보드라운 손을 지녔으며 풍성한 머리칼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는 아가씨가 평범한 신분일 수 있을까요? 심지어 제국에서 태어났으면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는 미모를 가진 여인이?
카논이 이를 깨닫는 순간 아마 안온하던 평화는 와장창 깨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 부분이 전체 분량 약 5만자에서 1만 6천자 정도라고 하셨으니 앞으로 갈 길이 꽤 먼데, 그냥 그렇게 뚝딱거리는 기사단장과 양을 모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만 끝난다면 이후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지루해지겠죠. 여기까지 쓰고 나중에야 느리개님이 써주신 글 설명을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세지는 몰락귀족이었군요. 어쩌면 카논은 세지의 원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복수를 위한 의도적인 접근인지, 아니면 세지조차도 몰랐던 로미오와 줄리엣 뺨 치는 눈물 어린 사랑이 될 지는 두고봐야하겠지만요.
걱정하셨던 부분인 도입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글의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는 괜찮게 느껴졌으나, 카논의 성정에 관한 내용을 뒤에서 나오는 설명에서 좀 더 가져왔어도 좋아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입부에서는 카논이 사고를 친 부하 기사들에게 기합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논이 그들을 엄히 벌한 이유는 전시에 군의 기강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기사단장으로서 첫 출전인 카논에게 부하들의 일탈은 작게는 기사 직위 박탈부터 크게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도입부에서 카논이 느낀 감정은 복합적이죠. 단순히 사랑과 자비가 부족했다고 말하기에는 카논도 부하들을 제법 아끼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여기에 더하여 카논이 세지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묘사가 짤막하게 들어갔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인정 기사단 합류를 인정할 정도인 녀석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하는 식으로요. 물론 그 관심이 세지를 만나기 전까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카논에게 중요한 건 기사들의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사실이지, 전시의 기사단장에게 그 기강을 흐트리게 만든 원인에 대한 분석까지 할 여유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아리땁다는 아가씨에 대해 찰나라도 궁금해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것만으로 이후에 카논이 세지에게 반하는 이유에 대한 개연성을 끌어올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재밌었어요! 세계관이나 인물 구성도 흥미로웠고요. 뒷 이야기…링크…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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