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월하정인이라는 그림을 아시나요? 아마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서 조선 미술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쯤은 보셨을 거예요. 희미한 달빛이 어린 담장 아래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과 등불을 손에 든 선비 하나가 은밀하게 만나는 그 그림이요. 그 그림엔 이런 글이 적혀있다죠.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 달빛 흐린 밤 삼경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는 뜻입니다. 월하정인은 후대 사람들에게서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불륜일 것이다, 여인은 기생이다, 아니다 기생은 아니고 그냥 밤 늦게 만나야 하니 은밀히 만날 것이다…
〈선비는 능소화를 아는가〉의 도입부를 봤을 때 저는 월하정인을 떠올렸어요. 그러나 이 글의 도입부가 좀 더 매혹적이고,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좀 더 서늘하며 위험한 느낌이 듭니다.
여름, 장마철, 밤, 비, 달빛, 능소화.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때맞춰 나타난 정혼자와 당황은커녕 선비를 연모한다며 당당히 파혼을 입에 올리는 소혜. 상황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질적이고도 도발적이죠. 비가 와서 소리가 묻히면서도 한밤중에 두 사람의 모습, 그리고 정혼자인 욱재의 모습은 또렷이 보일 정도로 달은 밝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장면을 보면 독자는 욱재의 현장 목격이 소혜의 의도였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쩐지 월하정인의 글귀가 떠오르더라고요.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