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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5/02/17 환경과 연구에 대한 단상
대전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친구들, 물리학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만났다. 대학에 들어와 내가 잃어버린 능력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물리학을 공부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과 열정을 품은 후배들을 보니 마음 한켠이 다시 뜨거워졌다. 고등학교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은데, 그렇다 보니 카이스트에 방문할 때마다 친정집에 다녀오는 기분이 든다. 서울대에 진학한 것이 후회되지는 않지만, 만약 카이스트에 갔더라면 훨씬 안정적으로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분명 환경의 영향,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강철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절 주위에 뛰어난 사람들,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는 것을 대학에 들어가 코로나를 겪고 나서야 알았다. 연구란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똑똑한 사람들을 만나 기쁨을 느끼는 친구, 가보지 못한 지식의 영역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친구, 혹은 그냥 재미있는 퍼즐을 풀고 싶어하는 나까지, 괴거보다 조금 구체적인 연구관을 갖고 갈라지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니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으로 나의 방향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결심을 내린 것 같다.
  • 이준영
2025/02/08 여행의 이유
나는 김영하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최애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수필집 『여행의 이유』를 뽑는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90년대부터 활발하게 여행을 다닌 김영하는 자신의 여행의 이유를 낯선 곳에서 환영받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호텔에 들어가면 처음 보는 직원이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나를 위해 준비된 편안한 침대와 방이 있으며, 현지를 돌아다니면 사회적 위치나 시선 따위에 신경쓰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 현세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이처럼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안전하게 받아들여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계속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항상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읽자마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에게 여행은 일종의 귀향과도 같다. 현실 세계에서는 무언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일찍 자겠다는 목표는 침대에만 누우면 산산히 깨진다. 일찍 일어나야지, 운동 꾸준히 해야지, 목표한 만큼 공부해야지, 등등...또 사람들은 어떤가? 나는 능력에 비해 인복이 많은 편이라고 항상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인간관계가 피곤하고 어렵다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 현실의 일부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완결되어 작동하는 여행지에 방문한 나에게는 그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다. 나의 친구들 중에서는 이러한 책임과 의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즐기는 친구들이 제법 많다.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광전사 같은 인간들은 분명 존재하고, 덕분에 내 친구들은 승승장구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탁월한 종족으로 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자주 도망쳐 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한없이 소시민적인 삶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 그렇다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강철 같은 의지와, 한없이 편안한 도망자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불교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다룬 적이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질문은 석상경저선사라는 유명하기로 유명한 스님께서 제자와 주고받은 선문답이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달마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에게서 직계로 내려오는 인도의 명망있는 스님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쪽 중국 땅으로 떠나 선불교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이 있는 곳에서 수행에 힘써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데, 달마는 왜 굳이 동쪽으로 가야만 했는가? 그의 여정은 도주인가 모험인가? 내가 가진 결론은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달마는 동쪽으로 떠나지 않았어도 된다. 인도에 남아 열심히 절에서 수행을 했더라도 그는 열반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그냥 그것이 전부이다. 그는 여정을 떠난 것이지 도주한 것도 모험을 떠난 것도 아니고, 다른 의미에서 그는 애초에 극락을 떠난 적이 없기도 했다. 나 또한, 학자로서 정진하는 것도 소시민적 쾌락을 채우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허무주의로 바뀌어 버리기 쉽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신경망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것은 강렬한 욕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온함은 나의 가능성을 갉아먹는, 어딘가 비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가 되는 것이요, 때문에 그러한 도피에서 언젠가는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나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면도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이 공존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고, 이 욕망을 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번갈아 가며 욕망을 충족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길에 혼술을 하며 읽던 책을 끝냈다. 술은 역시 최고다. 하루를 알차게 마무리하고 입술에 알코올이 닿는 그 순간, 나는 고통을 잊고 자유와 여유를 되찾는다. 이게 지금 내가 떠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여행이며,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 화두는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 한성 친구들에게도 추천한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간단하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심지 벌칙을 약하게 정한 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짧더라도 꾸준히 쓰는게 목표였지만, 아쉽게 된거지~
  • 이준영
2025/02/02.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MBTI 전문가인 친구 왈, E인지 I인지는 뱃속에서 상당 부분 결정되어 유년기에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감각 추구 기간 동안 외부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얻으면 I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E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 어릴 적 흰색 보도블럭만 밟는다거나, 손가락을 배배 꼬는 따위의 일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텐데, 이제 거기에 심취할 수 있으면 완전한 I 성향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를 그닥 선호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나는 태어나 자라길 완벽한 I로 태어났다. 사람보다 책이 친한 시절이 더 길었고, 지금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기가 쭉쭉 빨려 힘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다 보니 감각에 온전히 심취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스물다섯이나 먹고 폴짝대며 횡단보도 색을 맞추는 것은 내 체면이 도무지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책이나 음악을 통해 자극을 얻는 것은 물론 좋지만 필연적으로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학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아카데미아에는 끝없는 퍼즐이 순한맛부터 매운맛까지 모든 단계와 종류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으로 돈을 번다고? 이것 만 한 직업이 있겠느냐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갈대 같은 것, 막상 책이나 논문을 펼치면 또 놀고 싶기도 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나의 소명과 쾌락 사이를 진자운동하며 고뇌하는 것, 학문적 엘리트와 행복한 소시민 사이에서 나는 늘 갈등한다. 인터넷이나 자기계발서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든 삭제하라는 메시지를 내세운다. 소시민을 혐오하며 기계처럼 살든, 아니면 욜로족이 되어 완전히 즐기는 삶을 살든 한쪽 극단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진리는 회색지대에 있다. 그렇다면 회색지대의 어디쯤에 내가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관건일 터인데,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qualitative case study다. 지금 인턴을 하는 연구실은 다행히도 본받고 싶은 사람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이 아주 많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나름의 워라밸을 발견하시고, 모두들 연구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망치라 말씀하시지만...그래도...사랑하시죠? 우리 교수님은 소시민적 삶을 어마어마하게 축소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기는 싫지만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욜로적인 삶은 살아 봤으니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겨울방학을 그렇게 한 번 보내 볼 생각이다. 주말에 출근하고, 연구에 빠져 워라밸을 내팽개치고 (건강도 안 좋아지시는 것 같기도 하다), 잡념을 억제하고 언제나 hyperfocus 상태를 유지하는 사이언스의 화신! 그래서 일요일 오후에 출근을 해 보았다. 종종 주말 출근을 해 온 적이 있기는 하지만, 루틴으로 만들어 본 적은 없으니까. 미리 뇌를 예열하고, 일주일치 딴짓(장문의 심지를 쓰는 등의)을 몰아 하고, 다음주 일정을 상상해 놓는 것은 분명 능률을 올려 주는 구조적 장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실의 슬픈 점은 영혼을 바친다고 해도 멤피스토텔레스가 나타나 그 보상이 얼마만큼인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겨울 방학을 기회삼아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
  • 이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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