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영하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최애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수필집 『여행의 이유』를 뽑는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90년대부터 활발하게 여행을 다닌 김영하는 자신의 여행의 이유를 낯선 곳에서 환영받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호텔에 들어가면 처음 보는 직원이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나를 위해 준비된 편안한 침대와 방이 있으며, 현지를 돌아다니면 사회적 위치나 시선 따위에 신경쓰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 현세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이처럼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안전하게 받아들여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계속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항상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읽자마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에게 여행은 일종의 귀향과도 같다. 현실 세계에서는 무언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일찍 자겠다는 목표는 침대에만 누우면 산산히 깨진다. 일찍 일어나야지, 운동 꾸준히 해야지, 목표한 만큼 공부해야지, 등등...또 사람들은 어떤가? 나는 능력에 비해 인복이 많은 편이라고 항상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인간관계가 피곤하고 어렵다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 현실의 일부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완결되어 작동하는 여행지에 방문한 나에게는 그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다. 나의 친구들 중에서는 이러한 책임과 의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즐기는 친구들이 제법 많다.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광전사 같은 인간들은 분명 존재하고, 덕분에 내 친구들은 승승장구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탁월한 종족으로 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자주 도망쳐 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한없이 소시민적인 삶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 그렇다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강철 같은 의지와, 한없이 편안한 도망자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불교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다룬 적이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질문은 석상경저선사라는 유명하기로 유명한 스님께서 제자와 주고받은 선문답이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달마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에게서 직계로 내려오는 인도의 명망있는 스님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쪽 중국 땅으로 떠나 선불교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이 있는 곳에서 수행에 힘써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데, 달마는 왜 굳이 동쪽으로 가야만 했는가? 그의 여정은 도주인가 모험인가? 내가 가진 결론은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달마는 동쪽으로 떠나지 않았어도 된다. 인도에 남아 열심히 절에서 수행을 했더라도 그는 열반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그냥 그것이 전부이다. 그는 여정을 떠난 것이지 도주한 것도 모험을 떠난 것도 아니고, 다른 의미에서 그는 애초에 극락을 떠난 적이 없기도 했다. 나 또한, 학자로서 정진하는 것도 소시민적 쾌락을 채우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허무주의로 바뀌어 버리기 쉽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신경망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것은 강렬한 욕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온함은 나의 가능성을 갉아먹는, 어딘가 비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가 되는 것이요, 때문에 그러한 도피에서 언젠가는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나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면도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이 공존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고, 이 욕망을 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번갈아 가며 욕망을 충족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길에 혼술을 하며 읽던 책을 끝냈다. 술은 역시 최고다. 하루를 알차게 마무리하고 입술에 알코올이 닿는 그 순간, 나는 고통을 잊고 자유와 여유를 되찾는다. 이게 지금 내가 떠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여행이며,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 화두는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 한성 친구들에게도 추천한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간단하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심지 벌칙을 약하게 정한 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짧더라도 꾸준히 쓰는게 목표였지만, 아쉽게 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