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2 초월적 사랑에 관하여
나는 오타쿠는 아니다. 그렇지만 에반게리온은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부정할수록 더 강한 낙인이 찍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어제 멋들어진 연극을 보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급한 초대에도 함께 연극을 관람해 준 최민우 군에게 이 글을 바친다. 사회대 연극동아리 연극당에서 하는 <쿠일라>라는 공연이었다. 고등학교 후배가 연출을 맡았다길래 보러 갔는데.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원하고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과학이나 종교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다양한 생각거리가 있지만, 나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놀기에 통달한 자이다. 20대의 시간과 자본의 한계 안에서 해 볼 수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해 보았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요즘 유행한다는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고독한 인간, 강한 인간을 강조하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강해질 필요가 있나 반문하게 된다. 대철학자의 치밀한 학문적 성과에 학부생이 뭐라 할 수 있겠냐마는, 혀가 긴 데에는 켕기는게 있으니까 그런거다. 세속적이고, 친구도 만들고 하면서 사는 삶이 훨씬 편하고 즐겁다. 에반게리온도 이런 고민에 대한 작품이다. 우리는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어떤 근본적인 한계에 처해 있고, 한편으로는 어떤 행운을 얻게 되는가? 결말부에서 이카리 신지는 우주적 존재와의 융합을 통해 이러한 고민을 탈출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한계 속애서 상처받기보다 인연이라는 행운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한다. 오타쿠를 방 밖으로 끌어내는 선택, 그것이 에반게리온의 테마라고 생각한다. 신지가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는 논증은 성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러려면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부터 쓰러뜨려야 하는데, 그럼 철학교수를 하고 있을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며, 우리가 처한 생물학적인 본능과 조건은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사랑하고 자신을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쿠일라>는 이런 욕구가 어떤 디테일한 면을 갖는지를 파고든다. 에반게리온과는 반대로 사회에서 신성한 방 속으로 들어가는 작품이다. 어머니 여신에게 빙의한 연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온 지구를 희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음악과 연출도 좋고 배우분들도 다들 너무 잘하셔서 재미있었다. <쿠일라>에서는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두 가지라고 본다. 나를 향한 조건 없는 초월적 사랑, 여신의 사랑이자 여신과 융합하면 영원히 얻게 될 사랑이다. 또다른 사랑은 연인 주월로 대표되는 인간과의 사랑 조건이 붙는 사랑이다. 어느 날 주월이 쿠일라에게 빙의되면서 태인은 주월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온 인류를 쿠일라에게 융합시키는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신지에게 인류 보완 계획은 일종의 도피처였지만, 쿠일라에서 '여신 쿠일라'와의 융합은 주도적 선택이다. 나는 이러한 사랑을 향한 욕망이 우리의 생물학적 기원과 연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가지가 우열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두 가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조건적으로 사랑에 빠져 무조건적 사랑을 줄 수도 있는 것이고, 무조건적 사랑의 실천이 조건적 사랑으로 증폭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둘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심지어 이러한 욕망은 해소되는 순간 공허해진다. 생물학적 인정욕구는 끊임없이 샘솟을 것이고, 모든 자극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평형상태는 거시적으로 잔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잔잔한 마음에서 기쁨을 느끼는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이준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