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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밥 먹자고 하는 일

풀칠
밥심에 대하여
요리를 밥벌이로 하는 내겐 밥이라는 게 어떤 마음이 담긴 물건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 마음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그러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중고 마켓에 내놓았을 때의 찡한 마음과 비슷하다. 온 마음을 다해 요리에 다가가면 오히려 너무 과한 맛과 식감이 담긴다. 기껏 마음 한가득 담아 줬는데 ‘너무 과해’라는 말로 돌아오다니. 미운 생각이 들어 접시째로 비닐봉지에 쏟아 넣어 대충 묶어 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니 뭐든 적절한 것이 좋다. ‘모든 걸 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조화로운 맛과 잘 어우러진 식감을 가진 한 접시가 완성된다. 얼떨떨하지만 기분은 좋다. 몸을 한껏 웅크려 스스로를 꼭 안아주고 싶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요리들을 하나씩 완성해가다보면 그것이 꼭 ‘마음의 똥’ 같다는 생각이 든다. 꿈에도 나올 정도로 골몰했던 것이 한 접시로 정리돼 나오면 아주 오랫동안 참은 변비가 해결된 느낌이 든다. 요리들이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순간, ‘꼭 너의 역량을 다 해내고 사라져’라는 왠지 슬픈 작별 인사를 보낸다. 요리에 마음을 담는 정도를 조절하는 법에 익숙치 않았던 시절에는 자주 몸이 아팠다. 마치 뼈가 마시멜로로 변한 듯 스스로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바쁜 점심 시간이 끝나면 온몸에 요리의 흔적이 남는다. 각종 재료를 끓이고 튀기고 굽는 과정을 증명하는 흔적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기라도 한다면 나의 체력도 떨어지고 요리의 맛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요리에 담아내는 마음 하나로 12시간의 근무와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 욕심이었다. 늦느니 일찍, 부족하느니 여유 있게 임하는 성격으로, 마음을 덜하느니 더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잘못이었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늘 그러한 상황이 반복된다.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너무 행복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몇 번이고 복기를 한 탓에 온몸에 도파민이 퍼졌다. 자주 날밤을 샜다. 명상 영상이나 지루한 책들을 활용해보기도 했지만 이미 균형을 놓쳐버린 것을 되돌리기에는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은 영상 기술을 배워보고 싶어 온라인 클래스들을 둘러보다 충동적으로 클래스와 영상 편집 프로그램 구독권을 샀다. 노트북도 애초 계획된 문서 작성용이 아닌 영상 편집용 노트북을 샀다. 한동안 통장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나는 지르는 용기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연애 반대편에서 평형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 하지만 기울어진 균형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기울어진 균형은 그것을 기울게 한 무언가를 향한 정반대의 마음을 통해 돌려놓을 수 있다. 나를 잠 못들게 했던 행복감과 도파민은 시간이 지나며 연애가 안정적인 시기에 접어 들면서 자연스럽게 편안함이 되었다. 잠도 잘 자고 삼시 세끼도 잘 챙겨 먹게 됐다. 클래스와 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손대지 않은 지 오래고 노트북으로는 문서 작성만 하고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다시 밥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밥심’은 밥으로 얻는 힘일까, 밥을 향한 마음일까.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밥으로 신체의 에너지를 얻기도 하지만 나는 밥을 통해 마음의 방향과 정도를 가늠하기도 한다. 밥에 대한 마음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밥 먹을 시간이다. 발행일 2023년 11월 29일 글 윰마토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62호 : 🥙밥심에 대하여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진순 둘, 진매 하나
과음한 다음 날엔 어김없이 과식을 한다. 일종의 주사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더 마실 수 없을 때까지 먹어치운다. 음주를 통해 느끼는 쾌락에 속아 1일 치 이상의 에너지를 끌어다 태운 탓에 평소보다 큰 허기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배가 찢길 듯한 포만감이 들면 그때서야 뒤뚱뒤뚱 침대로 걸어간다. 풀썩 쓰러져 눕는다. 그 상태로 숙취가 해소되길 기다린다. 물론 설거지는 뒷전이다. 예전엔 이렇게 날린 하루 끝에 현타를 맞기도 했지만 이 짓도 10년 이상 반복하니 적응이 됐다. 그래, 이런 날까지 포함해 내 인생이지. 어른스럽게 넘긴다. 메뉴는 보통 라면이다. 해장엔 라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편의점에 간다. 라면 코너 앞에 서서 매대에 붙은 각종 행사 할인 안내문을 꼼꼼히 읽는다. 대부분 ‘2+1, 교차가능’ 옵션이다. 다양한 선택지에 잠시 망설이지만 보통 진라면 순한맛(이하 진순) 두 개와 매운맛(이하 진매) 한 개를 집는다. 진라면의 강점은 무난한 맛과 저렴한 가격. 그냥 먹어도 괜찮고 어떤 재료와 섞어도 적당히 어울린다. 행사 할인 품목에서 빠진 걸 본 적도 없다. 물론 그만큼 안 나간다는 거겠지. 가끔 스프 상태가 영 별로인 제품이 걸릴 때도 있다. 꽝! 진순 두 개를 끓인다. 후루룩후루룩. 컨디션이 좋으면 햇반도 하나 말아먹는다. 끝. 진매는 그대로 찬장에 들어간다. 나중에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울 일이 생기면 꺼내 먹는다. 진매는 감당 가능한 최대치의 매운맛이다. 보통 한국인들은 신라면을 매운맛의 기준으로 삼지. 매운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에서도 ‘어느 정도 매워요?’라는 질문에 신라면을 비교 상대로 말해주곤 한다. ‘신라면 정도’라는 대답이 나오면 바로 포기한다. 백이면 백 내 수준을 넘어서니까. 신라면보다 덜 맵다고 하면 겨우 도전해볼 마음이 생긴다. 진매가 딱 그 정도다. 신라면보다 아주 미세하게 덜 매운맛. ‘신라면이나 진매나 비슷한데’라고 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매운 걸 잘 먹거나 못 먹는 것이다. 난 둘을 구별한다. 이쯤에서 닉네임 얘기를 해볼까. 나는 ‘아매오’다. ‘야매오’, ‘아메오’, ‘야메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뭐 하여튼. 혹시 ‘아매오’의 뜻이 뭔지 아시는지? 생각보다 맞히기 어렵다. 정답은 “아! 매워!”다. 좀 빨갛다 싶은 음식만 나오면 먹는 내내 “아! 매워!”를 연발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나보다. 친구들은 기회만 생기면 “아! 매워!”를 대신 외쳤다. 거기서 따온 닉네임이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아, 그게 그런 뜻이었어요? 아니, 근데 그렇게 매운 걸 못 먹어요?” 몇몇은 좋아하는 음식을 묻곤 한다. 그럼 나는 답한다. “순두부요.”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와 마라탕(샹궈)가 한국인의 입맛을 고장냈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생애 처음으로 마라샹궈를 먹었다. 물론 맵기 조절이 되니까 가능한 도전이었다. 몇 단계? 0단계! 친구들은 ‘그게 마라샹궈니? 양념소불고기지’라고 했다. 사실 맵기로 따지면 진매에도 못 미친다. 진순 정도? 하지만 지레 겁먹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 내겐 작지만 큰 한 걸음이었다. 그 뒤로 맵기를 한두 단계 올려 먹어봤다. 심지어 얼마 전엔 훠궈도 먹었다(백탕 위주였지만). 생각보다 먹을 만한데? 아직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는 못 먹어봤다.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볼 마음은 있다. 불닭볶음면 러블리핫이라든지, 엽기떡볶이 착한맛이라든지. 물론 난 여전히 매운 것을 못 먹는 편에 속한다. 분명하다. 다만 내 생각보다는 잘 먹는 듯하다. 사실 나는 ‘매운 것을 못 먹는 나’라는 정체성에 몰두했던 게 아닐까. ‘아매오’라는 닉네임까지 지어가면서.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와 마라탕(샹궈)을 먹어보지 않은 것도 “저는 그것들은 입도 안 대봤어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랬던 거 아닐까. 마치 MBTI 결과에 맞춰 살려고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입맛은 변한다. 또 모르지. 과음한 다음 날 편의점에서 집어드는 라면 조합이 진매 둘, 진순 하나로 바뀔지도. 아예 틈새라면이나 사리곰탕으로 갈 수도 있다. 진순파와 진매파로 나뉜 대립구도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는 게 입맛뿐일까. 체질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가치관도 변한다. 많은 것이 변한다. 그래서 삶은 다이내믹하다. 한 사람의 삶이 그럴진대 여러 사람이 부대껴 사는 세상은 두말 할 필요 없다. 타인이 변했다고 실망하지 말자. 나도 변했으니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존재하는 것.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발행일 2023년 11월 22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61호 : 🍜순한 맛과 매운 맛 사이의 나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리틀포레스트를 찾아서
일본에서 원작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진 뒤, 국내에서 리메이크돼 상영된 적 있는 <리틀 포레스트>는 나에게 장르가 판타지로 분류된다. 도시의 삶에서 지쳐 조용한 시골로 내려간다는 설정 때문이 아니다. 바로 주인공이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릴 적 요리왕 비룡을 보고 자란 세대지만 나에게 살면서 가장 희박하게 해본 일상 행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요리라고 답할 것이다. 기숙사에 살며 구내식당 밥을 먹던 대학생 시기나 맛없는 짬밥을 먹던 군인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부엌이 딸린 방에서 혼자 산 세월이 5년이 넘어가는 데 이토록 요리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는 점에서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이다. 사극 <대장금>에 나오는 장금이처럼(나는 대장금 세대이기도 하다. 요리란 얼마나 유구하고 보편적인 행위인지.) 혀에 미각을 잃은 거냐고 물어본다면 내 혀는 아주 팔팔하고 싱싱해서 퇴근길에 마라탕과 탕후루로 이어지는 단짠단짠의 폭력성 속에서도 여전히 그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야근을 하고 귀가하는 직장인에게 요리와 설거지는 너무 귀찮고, 인스턴트나 배달 음식의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다. 조금 비싸더라도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거나, 집에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행위는 너무나 안락하고 편안하다. 그래도 여기까지만 말하면 너무 사람이 지저분하고 게을러 보이니 약간의 변명을 더하자면 요리라는 행위는 나에게 너무 낯선 것이다. 서두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판타지 얘기했듯이 요리란 나에게 너무 어렵고 내가 해낼 수 없는 그 무엇 같다. 무얼 만들지 결정하고 그에 필요한 재료를 떠올리고 그걸 실제로 모아놓고 다듬고 시간을 들여 가공하는 행위 말이다. 내가 요리를 너무 거장하고 대단한 것으로 올려치기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요리라는 일종의 프로젝트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계속해서 밖에서 요리를 사먹으며 일종의 아웃소싱을 하는 것인데 언제나 그렇듯 혼자 무언가를 해낼 수 없을 때 오는 난처한 순간들이 있다. 주말 아침 아무 생각 없이 단골 분식집에 갔다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마주한다든가 계속 피로함을 느껴 무언가 든든하고 건강한 무언가를 먹고 싶은데도 딱히 사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느낄 때 말이다. 그런 순간엔 나도 직접 요리라는 걸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야근과 잔업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요리와도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대학생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대부분의 하루키 소설에는 늘 직접 요리를 해먹는 인물이 등장했다. 요리는 하루키 세계관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어른이 된 나에게 재즈나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파스타를 만드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최근에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직장 동료 집들이를 간 적이 있는데 집주인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직접 차린 것이었다. 이미 상다리가 부러질 듯 했는데 그는 나를 앉힌 뒤에도 잠깐이면 된다며 면을 삼고 찌개의 간을 보고 후라이팬에 튀김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모든 요리가 너무 맛있었던 것도 충격이지만 요리라는 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얼마나 큰 환대의 몸짓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그래서 남몰래 꾸고 있는 꿈이 있다. 내년 새해 계획으로 써먹으려고 아껴둔 것이지만. 그건 바로 요리를 배워보는 것인데 과연 가능할까. 어디 가서 감히 말하기는 부끄러운 목표지만 풀칠에만 조심스레 적어본다. 언젠가는 퇴근 후에 여유롭게 요리를 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그리고 누군가에게 대접할 수 있기를. 발행일 2023년 11월 15일
풀칠
우거지 같은 순간들
내장탕인지 우거지탕인지 정체 모를 국밥을 퍼먹으며 오래 전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들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아저씨들의 애틋한 사연은 어째서 군대 이야기인 건지. 팟캐스트의 진행자였던 그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우거지를 지독히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소상하게 설명한 뒤 목소리를 한 톤 높여 군대에서의 일화를 풀어놓았다. 삶은 꼭 아이러니 투성이라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우거지가 하필 부대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음식이었다고 했다. 허기를 달랠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입에 욱여넣을 훈련소 시절이었기에 맛을 도통 알 수 없는 희멀건 우거지탕을, 그는 꾸역꾸역 입에 넣곤 했단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길게 자라난 손톱과 발톱을 바라보며 새삼 끔찍한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내가 싫어하는 우거지가 지금 내 몸을 구성하고 있겠구나'하는. 평소 차분하던 목소리가 유독 그 썰을 풀던 순간 크게 요동쳤기 때문일까. 그 팟캐스트가 끝난 지도 벌써 몇 년 전인데. 코끝이 시린 날 뜨끈한 국물을 입안 가득 밀어넣을 때면 꼭 그 대화를 떠올린다. 뭐랄까, 평소에 우거지를 좋아하면서도 그 오묘한 감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 한마디에 아프리카 코끼리의 멸종위기론부터 거대한 맘모스를 사냥하던 인류 조상님들의 위대함을 단숨에 떠올리는 ‘생각폭격기’인 나는, 식도로 흘러간 이 음식의 종착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금 먹은 우거지가 손톱과 발톱이, 각질과 세포가 되겠구나. 어제 먹은 순두부우동은 역시 배때기에 들어갔을 테고. 어쩐지 등가죽에까지 살이 포동포동 해지는 걸 보면 그제 먹은 마라떡볶이는 분명 어깻쭉지에 들어갔을지 몰라, 그런 시시한 상상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음식들이 온몸 구석구석 닿는다고 상상하니 좋든 싫든 입안에 들어가는 모든 존재가 애틋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최악의 순간들까지도 뇌를 부유하는 신경세포 어딘가에 틀어박혀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겠구나. 그것들이 어떻게든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겠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간다. 전에 없던 안정감을 쥔 요즘 내가 지나온 순간들을 종종 회상하곤 한다. 옛 회사에서 직장동료에게 했던 사소한 실수부터 입사 직후 내 손으로 대차게 말아먹은 프로젝트, 친한 친구에게 선을 넘었던 실언들까지. 정신의학과에서는 이것을 두고 ‘스몰 트라우마’라고 부르는데, 작지만 깊은 상처를 남긴 일상의 경험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라 한다. 이전에는 흑역사를 떠올리려면 생각의 초입에서부터 수치심을 미처 참아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는데. 요즘엔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꾸역꾸역 버텨내며 부끄러운 과거를 대면하려고 애쓴다. 그런 지난한 일들을 끄집어 내려는 건 내게는 일종의 통렬한 반성이자 과거 청산의 의식인 셈이다. 실수한 동료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안함에 한숨을 내쉬거나 하이볼을 마실 때마다 된통 망쳐 놓은 프로젝트가 떠올라 뜨끔해지는 것도 이제는 지쳤기 때문이다. 내게 마치 ‘우거지’와도 같은 과거들, 스몰 트라우마를 한 바구니씩 길어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스물의 나는 왜, 스물 여섯의 나는, 서른의 나는 또 왜 그랬을까. 그때보다 조금은 더 단단해진 지금이라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타임루프 소재의 영화가 늘 말해주듯 그때 저지른 실수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나’임을 이제는 잘 안다. 며칠 전 부동산에 새로운 집의 계약을 하러 갔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새 집인 만큼 환기를 잘 해주어야 한다고. 콘크리트가 굳는 데에는 족히 6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환기를 자주자주 해주라는 당부를 듣고 또 들었다. 그 단단한 콘크리트마저도 완벽히 굳어지기 위해서 꾸준한 관심과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 또한 지난 과오를 다락방에 쑤셔 박아두지 말고 대면해야 한다고, 그런 다짐을 한다. 아침 머리 셋팅이 유난히 잘 된 날. 지하철이 때마침 도착하거나 비싸게 사 먹은 커피가 아깝지 않는 맛을 낼 때. 지금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순간이면 맛없는 우거지도, 멋없는 나의 과거조차도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발행일 2023년 11월 8일
풀칠
곱창맨 이야기
이건 매주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새벽마다 곱창을 시켜 먹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편의상 곱창맨이라고 하자. 곱창맨은 매일 점심 회사 사람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샐러드와 야채 주스를 배달시켜 먹는다. 스터디의 종류는 다양하다. 영어, 마케팅, 스프레드시트, 두꺼운 책같이 읽기 등등. 저녁에도 보통 회사 사람들과 샐러드를 시켜 먹는다. 곱창맨은 일이 아주 많다.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일이 많으므로, 곱창맨은 자정을 훨씬 넘겨서 퇴근을 한다. 집에 도착하면 곱창볶음과 치즈 볶음밥을 배달시킨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것들을 먹는다. 매주 수요일, 곱창맨의 식사를 늘어놓고 보면 현대인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회사 동료와 함께 밝은 사무실에서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샐러드를 두 끼 연속으로 먹어놓고선, 하루가 끝나기 직전에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니까. 야심한 새벽, 깻잎 위에 볶음밥과 곱창과 마요네즈를 얹은 다음-그 죄악의 덩어리를 맥주와 함께 삼키는-침대에 붉은 소스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는-흉포한 야생의 곱창맨의 마음엔 무엇이 있나. 곱창이라는 ‘루틴화된 일탈’의 정체는 무엇인가. 곱창맨에게 물어보자. 곱창맨 : 제가 곱창을 먹는 이유는 유혹에 굴복했다던가 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제 의지로 모든 것을 망쳐버려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낮 동안 샐러드를 먹으며 쌓은 ‘건강 포인트’를 매몰비용 처리할 위험을 감수하고요. 유혹에 넘어가는 것과 결정을 내리는 것엔 상당한 차이가 있죠. 전자는 곱창의 노예임을 수줍게 고백하는 것이고, 후자는 고개를 쳐들고 ‘내겐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수요일 새벽에 곱창을 시키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인지를 증명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짐승 같은 몰골로 곱창을 먹는 순간을 통해 저는 인간성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2 이번 수요일에도 곱창맨은 새벽에 퇴근을 한다. 오늘의 곱창맨은 유난히 더 지쳐 보인다. 그의 부하직원 중 누군가 어떤 일로 눈물을 보인 것일까. 아니면 그의 상사가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던진 것일까? 아니면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기엔 부족한 능력을 실감하고 심란해진 것일까? 곱창맨은 피로하다. 그러나 이 피로는 밤거리를 걷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피로다. 오늘 곱창맨은 배달을 시키는 대신 방문포장을 하기로 한다. 늦은 시간이지만 곱창가게엔 불이 켜져 있다. 기름이 잔뜩 낀 유리창 너머로 두건을 뒤집어쓴 건장한 곱창가게 주인이 철판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다. 곱창맨은 곱창가게 주인을 바라본다. 곱창맨과 곱창가게 주인은 동년배처럼 보인다.매주 수요일마다 나의 인간성을 증명해 주는 사람. 새벽까지 불판 앞에서 곱창과 야채를 볶는 사람. 곱창맨은 그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