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Sign In

회사에 괴물이 산다

‘괴물’이라는 단어를 보셨을 때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아니면 여러 다양한 영화에 등장하는 가지각색의 괴물들? 괴물에 대해 쓰면서 '나 자신', 혹은 '불안' 같은 것들이 꼭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일상을 괴롭히는 괴물은 무엇인가요? 저희들이 말이죠...
풀칠
괴물도감
오늘도 괴물을 만났다. 괴물을 마주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 언제인지 이제 기억조차 안 난다. 온 천지에 괴물들이 가득 차 있다. 아래층에 사는 괴물은 내 발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나를 싫어한다. 아무리 살살 걸어 다녀도 그에겐 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도 아래층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우리, 청력이 고도로 발달한 두 괴물은 각자의 둥지에서 서로를 저주하며 살고 있다. 어디 집뿐인가, 아침에 지하철을 타러 가면 그야말로 괴물 파티다. 냄새나는 괴물, 발 밟는 괴물, 밀치는 괴물, 몰래 방귀 뀌는 괴물. 회사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괴물답게 구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곳의 규칙은 속으로는 서로가 괴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겉으로는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벌거벗은 임금님인 셈인데, 회사의 괴물들은 모두가 최고 수준의 괴물로 평가받아야만 하는 자기만의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 서로의 면전에 대고 “야, 이 괴물아!” 하고 소리치지 않는다. 괴물을 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모순을 견디느라 사시사철 신경이 곤두서있는 불쌍한 괴물들. 하지만 이 덕분에 회사는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다 보니, 자연스레 괴물의 유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괴물의 분류학이라고나 할까. 괴물의 첫 번째 유형은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다. 면접장에서, 어색한 점심시간에, 우연히 동선이 겹친 퇴근길에 자기의 삶에 대해 인상적인 스피치를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생각한 괴물일 확률이 높다. 이들의 징그러운 특성은, 회사를 ‘레버리지’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나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괴물의 총합이므로, 회사를 레버리지 한다는 것은 곧 옆자리에 앉은 괴물의 시간을 레버리지 한다는 뜻도 된다. 날이 갈수록 회의는 많아지는데 생산성이 떨어진다면 어쩌면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 특히 번성해서 일 수도 있다. 자기의 커리어를 위해 당연히 남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 괴물이다. 이 부류의 괴물들은 운이 좋다면 꽤 유명해져서 어떤 세미나나 컨퍼런스의 연사로 초대되기도 한다. 팔짱 낀 포즈로 활짝 웃고 있는, 광고 소재에 박제되어버린 괴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괴물의 두 번째 범주는 삶의 의미를 어디 다른 곳에 두고 다니는 자들이다. 이 간을 빼놓고 다니는 토끼 같은 작자들은 어디 다른 곳에 의미를 미리 빼놓고 출근한다. 이들이 삶의 의미를 주로 숨겨놓는 장소는 애인, 주식, 은밀한 창작욕 등등. 이 범주의 괴물들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사냥해야만 하는 육식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명적이다. 비유하자면 수심이 얕은 수영장 같달까. 이들에게 섣불리 다이빙하지 말지어다. 두개골이 깨질지도 모르니. 삶의 의미를 아주 잃어버린 괴물도 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괴물들은 회사에서도 밖에서도 중요한 것이 없다. 커리어도 월급도 휴식도 이들에겐 목표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 괴물들이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대중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괴물들은 아무도 없는 탕비실에서, 늦은 시간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막 자리를 떠나기 시작한 회의실에서 조용히 한숨을 쉰다. 그렇게 허무라는 이름의 독은 은밀하게 공기 중에 섞여든다. 수가 많진 않지만, 회사를 삶의 의미로 삼는 괴물들도 있다. 이들은 회사의 수많은 괴물들 중에서도 괴물로 불린다. 이들은 누구보다 회사에 진심이고, 그 회사의 구성원인 다른 괴물들에게도 진심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괴물들은 이들을 싫어한다. 관심사가 다른 괴물을 좋아하기란 원래 쉽지 않은 법이니까. 회사 말고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괴물들은 회사 안에선 고독해지고, 회사 밖에선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괴물. 남을 위해 일하는 괴물. 무엇도 위하지 않는 괴물. 회사를 위해 일하지만 정작 회사로부터 미움받는 괴물까지. 회사는 괴물의 종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일종의 생태계다. 우리는 서로의 괴물이 되어, 상호작용하며 이 생태계를 유지 보수하고, 그렇게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한다. 괴물들이 집에 돌아가는 저녁시간이 되면 나는 생각한다. 어쩌다 우린 다 같이 괴물이 되고 말았을까? 모두가 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을 텐데, 사람으로 태어났고 매 순간 사람 구실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사람대접받기에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선택들을 축적하며 살아왔을 텐데 대체 어디서 삐끗한 걸까. 괴물은 어쩌다 이 세상의 주민이 되었나. 역시나 괴물로 꽉 차있는 지하철. 지하철 안에서 눈을 감고 다른 괴물들이 뿜는 열기를 느낀다. 이 열기를 느끼면서도 그 출처를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새삼 비정하게 느껴진다. 같은 칸의 괴물들에 대해서 나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삶이란 것도 지하철에서 겪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차를 잡아타고, 선택이긴 하지만 별다른 의도가 없는 움직임으로 어떤 객실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가까이에 있으되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괴물들을 만나고. 어쩌다 누군가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같은 역에서 내리란 법은 없고. 이 여행이 길어질수록 남는 것은 작별 인사를 세련되게 하는 법뿐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서글퍼진다. 그럴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괴물들에게 말을 건네본다. 육성으로 하면 미친놈처럼 보일 게 분명하니깐 텔레파시로.
풀칠
혼자 달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가장 많이 한 고민은 ‘나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을까’였고, 그 다음은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끝내야 할까’였다. 쉽게 말해 그동안 직장인으로서 나의 세계에는 ‘일’과 ‘나’ 밖에 없었고 이 둘의 싸움이었다. 일이 이기거나 내가 이기거나. 팽팽한 싸움의 결과는 대부분 내가 지는 걸로 결판이 났지만 칼로 벤 것처럼 깔끔했다. 내가 이기면 자축을 하며 하루를 마감했고 내가 지면 분을 삭이며 다음 날을 기약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작년 말 새로운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팀 막내를 탈출했다고, 드디어 일을 덜게 됐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새로운 고민에 휩싸이게 됐다.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하고 매듭짓는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혼자 뛰던 달리기가 2인3각 경기로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2인3각? 발이 많아지면 좋지.’ 드디어 우군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대도 함께 커졌다. 부사수와 함께 힘을 합쳐 ‘일’을 해치우는 그런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을 꿈꿨다. 서로가 이심전심 맡은 일을 다 끝내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그런 모습을 말이다. 처음엔 부사수가 일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다짐했었다. 업무를 차근차근 알려주고 시간이 지나면 부사수가 웬만큼 자기 몫을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사수의 업무 처리에 자꾸 눈이 갔다.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요건 요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업무 결과물에 말을 얹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부터 내 ‘코멘트’의 양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 안에 꼰대 본능이 눈을 뜨고 만 것일까. 한번 피드백을 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말이 많아졌다. 이건 이렇게 하세요, 저건 그렇게 하면 안돼요. 마치 터진 둑처럼 말이다. 아침에 업무를 시작할 때 메신저를 통해 A, B, C 하세요 하고 선언하듯 말을 거는 내 모습을 보며 약간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부사수와 함께 일하는 게 회사에서 부여한 나의 새로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이 2인3각 경기를 매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부사수가 합을 맞출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북돋아줘야 하나, 이 속도로는 같이 뛰어줘야 한다고 엄포를 놓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일과 부사수를 둘 다 들쳐 메고 내가 혼자 뛰어야 하나.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지만 속이 찝찝하기만 할뿐 시원하게 해결되는 건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생각과 같은 강도로 일을 할 거라 지레짐작한 것부터가 이기적이고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줬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신뢰는 ‘가불’이라고. 일단 믿고 맡기고 먼저 쳐준 값은 나중에 받는 거라고. 일을 같이 한다는 건 그런 거라고.
풀칠
불안을 불안해하면 불안해지기만 할 뿐
한동안 똥 씹은 표정인 채로 살았다. 내가 붙잡고 있는 일이 돌연 쓸모없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잔뜩 구겨진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재택근무를 하는 날도 잦아졌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빈둥거리다가 간신히 출근을 했다.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게 루틴이라면 루틴이 됐는데 매번 다른 음식을 주문했지만 대부분 비슷한 맛이 났다. 책상에서 먼지를 털어내듯 그날의 업무를 해치우고 나면 방바닥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들이었다. 답답한 건 원인이 불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회사 일이 많아 고단한 것도 개인사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닌데. 길을 걷다가 난데없이 맨홀에 빠져버린 것만 같은 더럽고 막막한 기분이었다. 습관처럼 켠 유튜브창에는 ‘슬럼프’나 ‘번아웃’, ‘우울’ 같은 키워드들이 떠다녔다. 이미 바닥에 다다른 의지를 간신히 붙잡아가며 영상을 하나하나 틀어봤지만 어느 것 하나 내 상태를 기깔나게 진단해 주진 못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라는, 소개팅 거절 멘트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잔뜩 비참해지기만 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파악하는 알고리즘이 어느 날부터 ‘불안’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영상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 즈음 보게 된 게 바로 나영석 PD가 진행하는 시청자 고민상담 영상이었다. 삶이 너무 불안하다는 20대 시청자의 질문에 영상 속 나 PD는 잔뜩 고양된 목소리로 답변을 시작했다. 본인도 “네가 고민할 게 뭐 있어. 너 나영석이잖아.”라는 말들을 듣지만 곧 50대인 본인도 불안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나 PD는 이런 말을 인용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그 지옥은 타인은 모르는 지옥이다”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궁 속에 빠진 것만 같던 내 상태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내가 빠진 지옥은 불안이었다. 잠깐 나영석 PD에 대해 고백하자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하는 것마다 족족 성공해 내는 천재 PD’ 정도로만 생각했지 솔직히 호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독한 <무한도전> 키즈였기 때문에. 엘지트윈스팬이라면 두산베어스를 미워할 수밖에 없듯 마치 숙명처럼 그에게 도끼눈을 뜨고 있던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미워하기엔 나도 민망한 나이가 됐고 이전에 품었던 미움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다. 오히려 요즘엔 오랜 시간 동안 정상의 위치를 지켜가고 있는 그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모니터에 띄어두는 게 바로 나영석 PD의 영상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이 아니고, 바로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상들 말이다. 할미입맛을 가진 김대명 배우를 따라다니는 <맛따라 멋따라 대명이따라>부터 ‘불통의 신’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소통의 신>, 회사돈으로 팀원들과 원데이클래스를 즐기는 것 같은 <에그문화센터>까지. 시간이 날 때면 이 영상들을 라디오처럼 틀어둔다. 라디오 DJ라고 해도 손색 없을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저절로 이너피스가 되는 느낌. 나도 모르는 새에 지천명이 목전인 이 아저씨의 팬이 되어버린 걸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본 건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 박사를 초대한 에그문화센터다. AI가 콘텐츠 시장에 들이닥칠 미래를 준비하겠다며 데이터로 미래를 가늠하는 도사님을 초빙한 것인데, 영상 속 나 PD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보였다. 이미 이뤄놓은 것도 충분히 많으면서 저 양반은 아직도 일이 그렇게나 고픈 걸까. 송길영 박사가 미래엔 관리자가 AI로 대체될 것이란 전망을 하자 나영석PD는 묻는다. 슬픈 사슴의 눈을 한 채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이내 송길영 박사는 이렇게 답한다. “걱정마세요. 이미 스트리머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풀칠
반면교사는 없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와 대거리를 벌인 날이면 니체가 했다는 멋진 말을 퇴근길 지하철(1호선) 안에서 떠올리곤 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어쩌구 심연도 나를 저쩌구… 나는 부하 직원을 저렇게 대하지 않아야지. 알고 있다. 실은 상사가 옳았을 확률이 더 높다. 더 많은 경력을 가진 그의 판단력은 이제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한 나보다는 예리했을 것이다. 직책을 고려하면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테니 우리 팀이 놓인 상황을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가끔 예외가 있긴 하지만…예외는 드물기 때문에 예외라고 부른다. 나는 내가 일반・보통・평범에서 벗어난 상황을 그렇게 자주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처럼 상사와 한 판 붙은 팀원 A가 있다. 그와 상사 뒷담을 하다보면 갑자기 혼자 설득이 되는 묘한 순간이 온다. 상사의 말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을 A가 말하고 있고, A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결론적으로 상사가 맞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동급인 동료를 통해 들으면 이해하고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그래서 상사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탓한다. 돌이켜보면 상사에게 가졌던 불만은 대개 내용보다 그걸 전달하는 방식 쪽으로 향했다(생각보다 까라면 까는 스타일이다). 방금 중얼거려봤는데 “알겠는데…대체 왜 그렇게 말하는 거?”라는 대사가 왠지 입에 익숙한 걸 보니 더욱더 확신이 든다. 이때 ‘전달하는 방식’은 단순히 싸가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도 포함되긴 하지만 다양한 요소가 있다.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설명했는지, 맥락을 충분히 공유했는지,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해줬는지 등. 듣는 입장에서는 그런 게 왜 그렇게 잘 들렸는지, 말하는 상사는 이걸 모르는지, 대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지 않으리 다짐했다. 타산지석이니라. 저것만 피하면 중간은 가겠지. 그러나 반면교사는 없다. 사실 우리는 익숙한 것의 반대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허둥지둥하게 되고 허둥지둥하다 보면 익숙한 대로 하게 된다. 상사의 위치에서 커뮤니케이션 할 때 그제서야 혼자 몰래 수치심을 느낀다.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꼭 예전의 상사를 보는 것 같아서. 그 사람도 몰랐던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자신도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를 이해 못 했을지도 있겠구나. 이제야 깨달아요. 역시 직접 겪어봐야 안다. 자신이 혐오하던 모습을 다른 데도 아닌 스스로에게서 발견했을 때 마치 괴물이 된 것처럼 느끼기 마련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리더십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듯하다. ‘초보 팀장’을 겨냥한 콘텐츠가 잘 팔리는 배경도 짐작이 간다. 반면교사가 아닌 정면교사를 찾고 싶은 거겠지. 그저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서. 참 어렵다. 일을 잘하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도.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괴물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발행일 2024년 4월 3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80호 : 🧑🏾‍🏫반면교사는 없다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