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도감
오늘도 괴물을 만났다. 괴물을 마주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 언제인지 이제 기억조차 안 난다. 온 천지에 괴물들이 가득 차 있다. 아래층에 사는 괴물은 내 발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나를 싫어한다. 아무리 살살 걸어 다녀도 그에겐 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도 아래층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우리, 청력이 고도로 발달한 두 괴물은 각자의 둥지에서 서로를 저주하며 살고 있다. 어디 집뿐인가, 아침에 지하철을 타러 가면 그야말로 괴물 파티다. 냄새나는 괴물, 발 밟는 괴물, 밀치는 괴물, 몰래 방귀 뀌는 괴물. 회사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괴물답게 구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곳의 규칙은 속으로는 서로가 괴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겉으로는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벌거벗은 임금님인 셈인데, 회사의 괴물들은 모두가 최고 수준의 괴물로 평가받아야만 하는 자기만의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 서로의 면전에 대고 “야, 이 괴물아!” 하고 소리치지 않는다. 괴물을 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모순을 견디느라 사시사철 신경이 곤두서있는 불쌍한 괴물들. 하지만 이 덕분에 회사는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다 보니, 자연스레 괴물의 유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괴물의 분류학이라고나 할까. 괴물의 첫 번째 유형은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다. 면접장에서, 어색한 점심시간에, 우연히 동선이 겹친 퇴근길에 자기의 삶에 대해 인상적인 스피치를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생각한 괴물일 확률이 높다. 이들의 징그러운 특성은, 회사를 ‘레버리지’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나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괴물의 총합이므로, 회사를 레버리지 한다는 것은 곧 옆자리에 앉은 괴물의 시간을 레버리지 한다는 뜻도 된다. 날이 갈수록 회의는 많아지는데 생산성이 떨어진다면 어쩌면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 특히 번성해서 일 수도 있다. 자기의 커리어를 위해 당연히 남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 괴물이다. 이 부류의 괴물들은 운이 좋다면 꽤 유명해져서 어떤 세미나나 컨퍼런스의 연사로 초대되기도 한다. 팔짱 낀 포즈로 활짝 웃고 있는, 광고 소재에 박제되어버린 괴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괴물의 두 번째 범주는 삶의 의미를 어디 다른 곳에 두고 다니는 자들이다. 이 간을 빼놓고 다니는 토끼 같은 작자들은 어디 다른 곳에 의미를 미리 빼놓고 출근한다. 이들이 삶의 의미를 주로 숨겨놓는 장소는 애인, 주식, 은밀한 창작욕 등등. 이 범주의 괴물들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사냥해야만 하는 육식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명적이다. 비유하자면 수심이 얕은 수영장 같달까. 이들에게 섣불리 다이빙하지 말지어다. 두개골이 깨질지도 모르니. 삶의 의미를 아주 잃어버린 괴물도 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괴물들은 회사에서도 밖에서도 중요한 것이 없다. 커리어도 월급도 휴식도 이들에겐 목표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 괴물들이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대중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괴물들은 아무도 없는 탕비실에서, 늦은 시간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막 자리를 떠나기 시작한 회의실에서 조용히 한숨을 쉰다. 그렇게 허무라는 이름의 독은 은밀하게 공기 중에 섞여든다. 수가 많진 않지만, 회사를 삶의 의미로 삼는 괴물들도 있다. 이들은 회사의 수많은 괴물들 중에서도 괴물로 불린다. 이들은 누구보다 회사에 진심이고, 그 회사의 구성원인 다른 괴물들에게도 진심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괴물들은 이들을 싫어한다. 관심사가 다른 괴물을 좋아하기란 원래 쉽지 않은 법이니까. 회사 말고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괴물들은 회사 안에선 고독해지고, 회사 밖에선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괴물. 남을 위해 일하는 괴물. 무엇도 위하지 않는 괴물. 회사를 위해 일하지만 정작 회사로부터 미움받는 괴물까지. 회사는 괴물의 종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일종의 생태계다. 우리는 서로의 괴물이 되어, 상호작용하며 이 생태계를 유지 보수하고, 그렇게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한다. 괴물들이 집에 돌아가는 저녁시간이 되면 나는 생각한다. 어쩌다 우린 다 같이 괴물이 되고 말았을까? 모두가 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을 텐데, 사람으로 태어났고 매 순간 사람 구실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사람대접받기에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선택들을 축적하며 살아왔을 텐데 대체 어디서 삐끗한 걸까. 괴물은 어쩌다 이 세상의 주민이 되었나. 역시나 괴물로 꽉 차있는 지하철. 지하철 안에서 눈을 감고 다른 괴물들이 뿜는 열기를 느낀다. 이 열기를 느끼면서도 그 출처를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새삼 비정하게 느껴진다. 같은 칸의 괴물들에 대해서 나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삶이란 것도 지하철에서 겪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차를 잡아타고, 선택이긴 하지만 별다른 의도가 없는 움직임으로 어떤 객실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가까이에 있으되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괴물들을 만나고. 어쩌다 누군가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같은 역에서 내리란 법은 없고. 이 여행이 길어질수록 남는 것은 작별 인사를 세련되게 하는 법뿐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서글퍼진다. 그럴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괴물들에게 말을 건네본다. 육성으로 하면 미친놈처럼 보일 게 분명하니깐 텔레파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