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Sign In

[프로필]

풀칠
프로필 사진 건너편의 섬
1 프로필 사진에 자기 얼굴을 더 이상 걸어둘 수 없게 된 이들이 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스스로가 사무치게 싫어졌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세계에 대한 힌트를 누구에게도 제공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자기 삶에 밖에 내비쳐도 괜찮은 것이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지로 ‘나’를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걸 수도 있다. 셀피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과 머릿속을 떠다는 생각이 동시에 나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새삼스러워져서 도저히 프로필 사진을 설정해 둘 수가 없는 거다. 이런 경우엔 프로필 사진을 비워둬야 한다. 누가 그랬던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고. 혹은 그냥 셀카를 찍기가 부끄러워 질만큼 나이를 먹은 걸 수도 있다. 사진을 건지도록 도와주던 친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이따금씩 청첩장을 줄 때나 만나는 사이가 되고 나면 프로필 사진 한 장 건지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친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랜만에 살펴본 친했던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몇 달째 비어있는 걸 보면 약간은 그를 걱정하게 된다. 천사 같던 나의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 혹시 운이 없어서 지옥의 한가운데에 불시착해버린 게 아닐까. 어쩌다 부대끼게 된 악마들에게서 소중한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친구의 내면에선 무언가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서점의 매대에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 비수처럼 놓인 문장을 들어 스스로의 심장에 박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때 난 균열 때문에 더 이상 자아를 하나로 유지할 수가 없게 됐고, 대표된 자아와 대표되지 않은 자아 사이의 권력 투쟁에 고통받고 있는 건 아닐까. 텅 빈 프로필 사진은 정체성의 영토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 이처럼 비어있는 프로필 사진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텍스트 중 하나다. 2 하지만, 얼굴이 걸려있지 않다고 프로필 사진이 아예 비어있는 건 또 아니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바다다. 짙푸른 수평선 위로 조금 덜 푸른빛의 하늘이 펼쳐져 있는, 육지의 어느 부분에서 찍은 사진인지 가늠할 수 없는 두 덩이의 파란색. 프로필 사진은 ‘나’라는 국가의 국경선일 수밖에 없으므로, 프로필 사진이 바다인 사람은 곧 섬이다.
풀칠
제가 어디까지 보이시나요?
카카오톡 멀티프로필 하나당 최대 500명까지 대상 설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사실 나도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지만 어쩌다보니 알게 됐다. 그런고로 지금 나는 총 3개의 멀티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1500명의 사람들에게 나는 단 한 장의 프로필과 배경으로 전달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상념에 가끔 사로잡힌다. 마감 노동자지만 영업에 가까운 일을 하다 보니 회사 밖 사람을 많이, 그리고 자주 만나는 편이다. 연락 또한 잦다. 전화나 메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가장 품을 덜 들일 수 있는 건 역시 카톡이다. 한 두 번은 예의상 문자를 보내지만 휴대폰으로 문자 하나하나 정성스레 쓰고 있을 여력이 없기에 서로 암묵적으로 PC 카카오톡을 활용한다. 일로 만난 사이인데 카톡을 하는 게 맞을까. 사회 초년생 시절엔 이런 이상한 고집을 가지고 꾸역꾸역 문자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어느 날 상대가 말했다. 마감도비님, 그냥 편하게 카톡으로 연락 주셔도 됩니다. 어쩐지 참고 참다 타이르듯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일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카톡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언젠가부터 나는 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멀티프로필을 적용하게 됐다. 이런 사진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였다. 내가 여름휴가 때 어딜 갔고, 최근에 무슨 글귀를 읽었으며, 무슨 노래로 내 기분을 나타내고 싶은지 감출 수 있어서 편했다. 처음엔 ~주임, ~ 대리, ~ 과장 등 직책으로 저장된 사람들을 일거에 멀티프로필 적용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랬는데 연차가 쌓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났더니 멀티프로필이 하나 둘 씩 늘어나게 됐다. 결국 이젠 이게 멀티프로필인지 내 진짜 프로필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이게 진짜 내 프로필 아냐?’ 그래서 회사 폰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편이다. 물론 ‘회사’ 폰이니까 그 나름의 불편함은 있겠으나(혹시 회사 폰을 쓰는 풀칠러분이 있다면 후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번거롭게 이 사람은 일로 만난 사람, 이 사람은 원래(?) 인간관계, 이 사람은 일로 만났지만 친한 사람,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람, 이 사람은 누구야... 따위의 고민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 하나의 폰으로 두 개의 연락처를 사용하는 ‘투폰’ 서비스를 권한 친구가 있었다. 사실 그때는 뭘 그렇게 칼같이 선을 긋나 싶었다. 그때 그 친구 말을 들을 걸. 지금은 이미 늦은 듯하다. 이젠 연락처를 분리해야 한다고 하면 업무용 연락처를 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 사적인 연락처를 새로 하나 만드는 게 더 간단한 일이 됐기 때문이다. 최근엔 번호이동을 하면 지원금을 많이 준다고 해서 혹했다가 같은 고민에 휩싸여 일찌감치 포기했다. 한번은 꽤 친하다고 생각한 업계 사람으로부터 멀티 프로필 설정이 돼 있는 걸 알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해는 가면서도 의외랄까. ‘오호, 이 사람과 나는 이 정도 사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내가 이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게 돼서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지니게 돼 사이가 더 돈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고민이나 번뇌도 실은 나라는 사람이 타인에게 쓰는 감정과 에너지의 효율이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터놓고 나를 보여주면 어때. 혹은 어차피 남남인데 그냥 선 긋고 살면 어때. 이런 양 극단의 생각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닌다. 사실 올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세 번째 멀티프로필마저도 할당량을 모두 채우게 되었다. 네 번째 멀티프로필을 만들어야 하는 나. 프로필이란 무엇일까.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묻고 싶어진다. 당신에게 나는 어디까지 보이나요? 발행일 2024년 3월 20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78호 : 👁️제가 어디까지 보이시나요?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3분 자기소개
한 회사에 다닌지 햇수로 삼 년째. 개인사로도 최장 기록이다. 업무에 적응하지 못할 헤맬 때는 여기서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고, 반대로 일이 슬슬 익숙해져 나태해질 즈음엔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어찌저찌 버텨냈다. 이제는 포트폴리오를 어떤 폴더에 두었는지도 가물가물해질 지경.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나 자신을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이 새삼 겁났다. 자기소개라 하니 떠오르는 스몰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이직을 준비하며 한 회사의 면접(*풀칠 26호) 자리였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주절거리기 시작했고 나머지 기억은 잊었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궁금해하지도 않을 법한 것들을 나불거렸던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끔찍해서 아예 그쪽으로 흐르는 시냅스를 절단해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좋아하는 가수와 영화감독 소개를 마무리하고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과 야구팀을 나열하는 장면이다. 내가 그렇게 광대짓을 하는 동안 책상을 사이에 둔 대표라는 양반은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순전히 망한 대답을 해버린 내 기분 탓이라고 믿었지만, ‘당신이 누군지 다 아니까 솔직히 말하세요’라는 그의 말로 그게 비웃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망할 인간! 아니, 나조차도 나를 제대로 모르는데 처음 보는 양반이 다 꿰뚫어 보는 냥 굴다니. 지금 돌이켜 봐도 그 오만함이 괘씸하기만 하다. 당시 면접장을 내뱉었던 저주(망할 인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회사는 제대로 우상향하지 못한 채 비실비실 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못난 마음인 건 알지만 ‘그때 합격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종종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에 나를 소개하는 일은 되도록 피해왔지만, 언젠가는 다시 할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 초에 세운 목표에 다시 시동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건 포트폴리오에 쌓인 먼지를 털고 미뤄둔 내용들을 채워 넣는 일이다. 당장 이직을 꿈꾸는 건 아니지만 이때 즈음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고 싶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간 몇 개의 회사를 거치며 어설프게나마 배워온 것들.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대가리 박고 일하며 체득한 잔재주들. 그런 것들로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이마를 짚으며 지난 프로젝트 내용을 정리하는 동안 새로운 차원의 고민이 시작됐다. 이런 것들을 두고 나의 정체성이라 주장할 수 있나. 경력이나 프로젝트를 나열하고 나면, 그것들의 총합이 내가 되는 걸까. 애초에 온전히 내가 했다 말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긴 한 걸까. 노트의 여백이 지워질수록 공포감이 더해졌다. 그때 즈음 읽던 책에서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맞닥뜨렸다. 그가 말하길 우리의 정체성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정의되는 거라고 했다. ‘초록불이 켜지면 길을 건넌다’와 같이 하나의 동일한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같은 행동을 하지만, 제각기 다른 감정을 갖는다고. 누군가는 기쁠 수도 다른 사람은 우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감정이 곧 그 사람인 거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순간순간 느끼는 기분을 들여다보면 나도 모르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재미 삼아 사는 거라는 로또 낙첨되면 예상보다 크게 실망한다거나(일확천금에 기대감이 큰 편) 빈속에 진한 모닝커피를 때려 넣으며 농도 짙은 길티플레져를 즐긴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이다. 여태껏 혼자만의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믿어왔는데, 실은 아끼는 사람과 있는 시간을 훨씬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당장의 내 기분을 추리하는 재미로 산다.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기분을 잘못 어림짐작해버려 오버텐션인 상태로 실언을 내뱉기도 하지만. 그때 느끼는 무안함 또한 나인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니 당분간 이불킥은 없다. 발행일 2024년 3월 13일 글 파주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77호 : 🙋3분 자기소개 하겠습니다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이력서 상시 오픈 시대
“링크드인에 첫 글을 썼습니다” 최근 몇 달 링크드인 피드에 위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 자주 보였다. 이미 읽은 글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끌올된 건가 싶어 게시 일자를 보면 방금 올라온 것인 경우가 많았다. 작성자들의 스펙은 다양하고 화려하다(적어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리고 대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가입만 해놓고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다른 분들이 편하게 올리시는 걸 보고 용기를 얻어 일단 무엇이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이후 하나같이 그대로 마무리 되는 출사표형 게시글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링크드인에 첫 글을 썼습니다”라는 글은 유독 링크드인에서만 포착된다. 예컨대 “브런치 작가가 됐습니다”라는 글은 브런치보다는 블로그나 인스타나 스레드 같은 데서도 종종 보인다. 그런데 “링크드인에 첫 글을 썼습니다”라는 글은 다르다. 오직 링크드인에서만 보이는데 마치 거기가 링크드인이 아닌 다른 플랫폼인 것처럼 군다. 괜한 반항심에 나는 그냥 냅다 올렸다. 그런데 조금 써보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링크드인이라는 플랫폼 특성에 매우 충실히 복무한 결과였다. 복잡해 보이는 온라인 공간이지만 결국 마이페이지와 게시판으로 요약 가능하다. 우리가 거기서 활동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대부분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는 행위와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로 이뤄져 있다. 이 두 가지 행위에 어떤 가이드를 주는지에 따라 수많은 온라인 공간들이 갖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결정됐다. 대표적인 가이드는 공개범위다. 두 가지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공개범위가 다른 각각의 온라인 공간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자신의 정보와 다양한 형태의 기록은 꾸준히 업데이트 된다. 정보와 기록은 오프라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반복적인 업데이트는 스스로를 빚어내는 자기담론으로 기능하며 ‘온라인 정체성'을 형성시킨다. 이러한 자기담론은 다시 우리의 현실 속 사회적・전문적 위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그에 대한 반응에 반응하는 한편 오프라인으로 연결되는 다양한 층위의 네트워크를 쌓아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은 이제 꽤나 일반적인 루프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이 “링크드인에 첫 글을 썼습니다”라는 글을 링크드인에 올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네트워킹 파티에 참석해 건네는 첫 인사’였던 것이다. 사실 링크드인 자체가 비즈니스 플랫폼이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모여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직장인 페르소나를 뒤집어 쓰고 온다(아마 그들도 인스타, 페북, 스레드, 엑스, 블로그, 브런치 등등등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말투를 쓸 테다). 게다가 나의 동료가 될 수도 있는 사람과 리크루터와 헤드헌터들이 득실거린다. 정중하게 인사부터 해야지. 아이고, 힘들다. 현재 소속된 회사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혹시 모를 가능성(그것이 이직이 됐건 업계 네트워크 형성이 됐건)을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별도로 해야 한다니. 물론 그것이 필수조건은 아닐 테다. 하지만 필수조건이 아닌 것을 필수조건인 것처럼 부추기는 것이 상품의 본령이다. 그리고 지금은 상품이 많아도 너무 많은 시대다. 링크드인 같은 온라인 서비스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세상엔 각종 강연, 모임 등 ‘회사 밖 활동’에 신경 쓰게 만드는 것들 천지다. 『커뮤니티 자본론』이라는 책에서는 지방의 일자리 경쟁력이 서울・수도권에 비해 떨어지는 배경으로 ‘성장 기회를 주는 커뮤니티 자본의 격차’를 지목한다.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좋은 기업 한두 개 갖고 있는 것은 큰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즉 비슷한 수준의 좋은 기업들이 모여 있는 규모가 곧 커뮤니티 자본인 셈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요즘 청년’들에게 이직은 커리어 향상의 주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설사 실제로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가능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온라인이고 오프라인이고 다들 ‘언제든지 이직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삶을 산다. 나도 그러한 상태를 유지해왔다. 이력서는 늘 최신으로 업데이트 하며 상시 오픈해둔다. 내 프로필을 조회한 사람의 커리어, 그가 속한 회사가 현재 채용 중인 포지션, 리크루터나 헤드헌터를 통해 들어온 구체적인 제안 등을 근거로 ‘타인의 관점으로 본 나의 커리어’를 그려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커리어지만 그렇게 해온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건 사실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그 과정을 거쳐 ‘당분간 이직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러니까 핵심은 이직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기회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의지다(’압박감’이라고 썼다 지웠다. 그것을 압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꽤 많기 때문에). 그것은 인적자본과 자기계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보다 사회적인 성격을 갖췄을 때 나타나는 형태가 아닐까. 링크드인 피드가 꼭 가면무도회장처럼 느껴졌던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발행일 2024년 3월 6일
Made with Slash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