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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잃어버린 근본을 찾습니다
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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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말 한마디에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꽤나 매서운 질문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이직하셨는데 여기도 1년 다닐 건 아니죠?”
“담당했던 업무가 조금씩 다르던데, 경력이라고 봐야 할까요?”
3년차 경력과 3개의 직장, 3개의 직무. 고단수인 인사담당자에게는 잡스러운 경력을 찰흙 붙이듯 얼기설기 엮어 제출한 이력서가 손쉬운 먹잇감처럼 보일 게 뻔했다. 약점을 간파 당하면 이내 날선 질문들이 귓가로 들어와 뇌리에 콕콕 박힌다. ‘그러니까요, 그게 말이죠...’ 그럴 때마다 미처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어물거리며 답변하기 시작한다. 면접이 진행되며 질의의 난이도가 고조됨에 따라 심박 수가 치솟고 호흡마저 가빠진다.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고 이미 수차례 당했는데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구질구질한 변명에 가까운 답을 늘어놓고 나서야 굳어있는 면접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만 안 쉬었다 뿐이지, 마스크 위쪽의 표정만으로도 이미 이 면접이 망했다는 걸 직감할 수 있다. 복싱은 잘 모르지만 어설프게 가드를 올린 채 원투 펀치를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그 뒤로 결정타가 날아든다.
“다음 질문드릴게요. 파주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대뜸 이쪽의 근본을 물어오는 근본 없는 질문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듯 면접관을 빤히 쳐다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친절한 눈빛을 띈 자비심 없는 면접관은 똑 부러지는 말투로 질문을 재차 던진다. ‘그 항목은 자기소개서에 충분히 적어두지 않았나요? 분량이 모자랐나요?’라고 되묻고 싶지만, 이미 입이 절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저기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고요. 책 모으는 걸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걸 그보다 조금 더 좋아하고... 영화도 그럭저럭 좋아해요. 또, 한화이글스랑 리버풀 팬이고... 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멍청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주접스럽게 나열하고 말았다. 나조차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몽땅 내뱉고 나서야 시야가 돌아왔다. 면접관을 표정을 보자마자 이 면접의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면접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집으로 돌아와 애꿎은 베개와 이불을 두들겨 댄 것만큼은 확실하게 떠오른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뒤에야 쪽팔림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이불 걷어차는 걸 그만두고 나를 한방에 넉다운시킨 그 질문을 곱씹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면접에서 떠벌거린 것처럼, 나의 취향이 나를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퍼스널 브랜딩이 득세하는 시대라는데 본인도 제대로 자랑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시대에 뒤처진 모지리가 아닐까. 아니,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설명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나는 어떤사람인가. 차라리 스무 살 때의 내가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워낙 하고 싶은 게 많았던 투지 넘치는 시기였으니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답하지 않았을까. 좋아하던 게 무엇인지 맹렬하게 쫓던 스물다섯 때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답변을 찾을 수 있었을 거 같다. 사회(직장)의 쓴맛을 찔끔 맛봤을 뿐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기엔 그 분야에 나보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인재들이 즐비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덕업일치에 실패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고, 취향에 대한 애착도 전과 같이 않아서 '이거 없으면 못 산다' 싶은 것도 딱히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몇 년 사이에 나는 열정도 취향도 변변찮은 심심한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몇 주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지만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재능도 열정도 애매한 맹추. 자기PR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시류에 도태된 밥통. 고작 질문 하나에 자기혐오에 빠지고 무너지는 게 억울해서라도 꾸역꾸역 답을 찾아내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서야 그런대로 괜찮은 답을 하나 길러냈다.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 나는 이거다, 하고 냉큼 단정 짓지 않는 인간이 되기로. 뭐든 쉽사리 확신하지 않기로. 스스로 내 근본을 하나로 퉁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발행일 2021년 1월 27일
파주
*이 에세이는 풀칠 제 26호 : 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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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
연휴에 나눈 얘기들
근래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을 하나만 꼽자면, 저번 주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5일이나 되는 이번 연휴를 연휴답게 즐길 수 있었다. 어딜 다녀야 쉬는 날도 있는 법이니까. 출근 제안을 거절했다면 남의 떡만 쳐다보며 쓰디쓴 입맛만 다시는 5일이 되었을 것이다. 5일은 긴 시간이다. 누군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나는 이번 연휴에 꽤 많은 얘길 나눴다. 1 첫째 날엔 옷장을 만났다. 지난 1년 동안은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쩍 볼 일이 많아졌다. 옷장 : 그래…출근하니까 어때? 나 : 그냥 그래. 1년 전에 퇴사할 때 세운 목표는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다시 출근하는 거니까. 아침마다 네 안을 뒤적일 때마다 포기 선언을 하는 기분이야. 옷장 : 나는 네가 양말을 신어서 좋은데…. 나 : 나는 양말이 싫어.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일자리엔 '티어'가 있잖아. 경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한, 그냥 돈 하나만 보고 하겠다고 한 일인데도 양말을 엄청 잘 챙겨 신고 나가게 된단 말이지. 1년의 시간을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후진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동화 속 탕자들은 한바탕 방황하고 나면 대박을 내거나 쪽박을 차더라도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던데… 옷장 : 그건 동화니까. 현실은 동화보다 빡세서 현실이고. 오늘은 양말 안 신니? 나는 대충 갠 빨래를 던져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
풀칠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
봄은 어느새 목련을 지나 벚꽃을 향해 질주 중이었다. 자정 무렵 퇴근길의 공기는 아직 제법 쌀쌀했다. 수입맥주 네 캔과 안주로 고른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삐 걷는 나를 부각시키기로 작정한 듯 골목길은 필요 이상으로 깜깜하고 조용했다. 편의점과 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코인 세탁소 앞을 지나치는데, 문득 그저 그런 시시한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과자와 비닐봉지를 한 프레임에 담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설렘이 가득한 꽃 사진들 사이로 이딴 사진이라니. 어쩐지 꽃밭에 쓰레기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혹시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모를 테지만, 그럴 때면 꼭 스스로 면박을 주게 된다. 뭐 자기 자신이 최후의 레드팀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 최근 3주 간 주말마다 결혼식이 있었다. 대학교 후배, 고등학교 친구, 사촌 동생 순서로 날이 잡혔는데 내 입장에서는 알고 지낸 기간에 따른 순서이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지나온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혼을 남일처럼 여겼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벌써 자기 평생의 배필을 선택했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소감에 당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도 내가 신기해”라고 똑같이 반응했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법과 제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잡아준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 생각에 결혼은 더하기의 계약이라기보다는 빼기의 계약이다. 서로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담보로 잡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의 모든 계약 중 당사자 구속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책임. 그게 문제였다. 인생의 큰 결정을 해 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상대적으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임져야 할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매한 책임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반복하는 내가 답답했다. 딱히 남들보다 어깨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더 얹을 것도 없으니 본인만 건사하면 되는데, 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시시한 어른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나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살게 되는 것. 답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맥주 한 캔의 알딸딸함에 기대 억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짱구 아빠에게 맥주란 고단한 하루의 결승선이었으리라.”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내게 맥주란 간이쉼터에 불과했다. 아마 짱구 아빠가 마시는 맥주와 내가 마시는 맥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낼 것이다. 교훈적으로 글을 끝내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블라…”라는 문장이 나올 타이밍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못 쓰겠다. 대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경험상 모든 것은 정말로 지나갔고, 무엇이든 남았다. 이 말이 체념을 뜻하진 않는다. ‘Keep Going’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견디는 것. 그 시간이 새긴 흔적을 궤적 삼아 고민하고 결정한 딱 그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발행일 2021년 3월 31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5호 :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일상력
1 아무래도 존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존버는 내가 키우는 스투키의 이름이다.) 존버의 화분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길래 길다란 줄기를 살짝 당겨봤더니 '뽕'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뿌리가 통째로 뽑혀버렸다. 그러고 보니 청록색의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스투키가 생기 없는 연두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달 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식물에 설탕물과 탄산수로 매주 정성 어린 부관참시를 하고 있던 셈이다. 미동도 비명도 없이 명을 다한 존버의 사체를 화장지에 고이 싸서 종량제봉투에 던져 넣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존나 버티지 못한 채 존버는 떠나버렸다. 식물을 곧잘 시들게 하는 편이라며 구매를 망설이던 나에게 '이 녀석을 죽이기는 쉽지 않을걸요'라던 판촉사원의 도발 섞인 말이 떠올랐다. 햇빛을 많이 쐬지 않아도, 심지어 물을 주는 것을 까먹어도 된다기에 냉큼 구입했던 건데. 이름을 'John Burr'라 지은 것도 다 끈질기다는 생명력 때문이었는데. 그 쉽지 않다는 일을 가뿐히 해낸 스스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2 곱게 죽지 못한 존버의 망령이 이 집에 깃든 걸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힙합 아티스트의 영상에서 뜬금없이 나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나무가 죽으면'이라는 말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나무가 죽은 거야. 잘 안 죽는 건데. 나무가 죽는 걸 보니까 내 생활 패턴이 나무에 대입해서 보이는 거지. 만날 늦게 자고 햇볕 안 보려고 암막커튼을 쳐두고... 아, 내가 잘못되고 있구나.' '나무가 죽는 건 그만큼 내 생활에 여유가 없다는 거 같아. 내 거실에 놓인 나무 한 번 바라볼 여유가 없는 거야.' 소금과 우원재는 나무의 죽음이 곧 일상이 파괴됐음을 알리는 경고 같은 거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나무가 죽었다는 건, 본인이 그만큼 엉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거라고. 나는 존버의 죽음을, 혹은 일상이 망가진 현실을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존버의 생명력을 의심하며 구글링을 해봤지만 스투키 뒤에는 '키우기 쉬운'이나 '생명력 강한', '질긴'이라는 키워드가 뒤따를 뿐이었다. 나 또한 정말 엉망으로 살고 있구나. 내 삶도 정말 실시간으로 개박살이 나고 있구나. 여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