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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풀칠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오늘도 어김없이 스마트폰 화면에 타깃광고가 날아들었다. <일 잘하는 PM이 되고 싶다면>, <눈치껏 못 배웁니다, 일센스>. 읽기만 해도 일잘러가 될 것 같은 매력적인 제목들이 당장 구독료를 결제하라고 들이댄다. 일은 못해도 돈 쓰는 거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해내는 나는 단번에 결제창까지 다다랐다. 습관처럼 간편결제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퍼뜩 정신이 들어 손가락을 놀려 팝업창을 재빠르게 닫았다. '카피를 참 영약하게도 잘 뽑았네'라는 감상 뒤에 어제 데드라인에 쫓겨 엉망으로 넘기고 온 그지 같은 슬로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이른 아침부터 쌩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쓴 커피를 넘기면서 며칠 전 SNS에서 보았던 직장인 밸런스 게임을 떠올렸다. 나 빼고 다 천재인 팀에서 숨쉬듯 자괴감 느끼기 vs 내가 유일한 희망인 팀에서 혼자 밭 가는 소처럼 일하기 밸런스 게임의 가장 애석한 점은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게임 속에서는 우하하 팡파레를 외치며 '밭 가는 소'를 택했는데 현실은 전자(숨 쉬듯 자괴감 느끼기)의 삶에 가까웠다. 엘레베이터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스테디셀러 작가, 옆 팀에 있다는 N만 유튜버... 굳이 그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 회사에서 자괴감을 느낄 거리는 공기처럼 무궁무진했다. 당장 나만 빼고 죄다 일잘러인 팀원들과 일하다 보면 내 밥값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감이 무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오늘도 근무시간 내내 노션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투두리스트를 작성했건만 반도 해내지 못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해치웠어야 했던 일을 잔뜩 남겨둔 채 집으로 도망치며 지하철이 꼭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야지 진짜.' 무능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다가도 내일 쳐내야 할 일을 아른거렸다. '그래, 일단 내일 일은 끝내고 나서 죽어야지.' 저녁 8시 정각에 맞춰 2030 직장인을 정조준 한 듯한 광고가 눈치 없이 팝업창을 띄웠다.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라니. 영악함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바야흐로 일잘러의 담론이 득실거리는 시대다. 그들처럼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콘텐츠를 뒤져보다 보면 세상에는 나 빼고 죄다 일잘러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잘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일못러로 사는 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다들 일을 즐기는 방법, 자신의 성과를 연봉협상에 이용하는 요령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월급값만 겨우 해내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일잘러의 시대에서 일못러로 나고 자란 스스로가 꼭 도태된 돌연변이 같았다. 분명 세상의 절반이 일잘러라면 그 절반은 일못러일 텐데, 나 같은 사람들은 죄다 어디로 다 숨어버린 건지. 일못러들은 다들 죄인의 심정을 한 채로 집에 돌아가 벽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느라 바쁜 걸까. 그렇다면 나도 어딘가에 머리를 냅다 들이박고 숨어버려야 하는 걸까. 자책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사회에서 만난 선배A와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숨 쉬듯 자괴감을 느끼는 근황을 토로했다. "사무실에서는 숨이 잘 안 쉬어져. 들숨에는 자괴감이 밀려들어 오고 날숨에는 자존감이 숭숭 빠져나가는 거 같아." 하소연을 무심하게 듣던 선배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풀칠
세이브포인트
확실히 나이가 든 모양이다. 어느 분기점을 지나면 시간이 곱절은 더 빠르게 흐른다던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지점을 지났는지 요즘 들어 시간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게 체감된다. 며칠 전에는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년 마찬가지기는 했다만 올해는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는데. 서랍 깊숙한 곳에 묵혀둔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이내 올해 1월에 호기롭게 적었던 포부를 찾았다. 빼곡하게 적힌 캘린더를 보자마자 괜히 펼쳤다는 후회가 들었다. 만다라트 표까지 작성해 가면서 해내야 할 것들을 긴 목록으로 작성해 두었는데, 그중에서 제대로 해낸 게 단 하나도 없어서다. 어제까지의 나를 두고 혀를 차며 한심해 하는 사이 일주일이 또 금방 지나갔다. 이제 올해 남은 시간은 겨우 93일이었다. 하루가, 한 주가, 또 한 달이 지나가는 속도가 두려웠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느 날은 구글에 '시간이 빠르게 가는 이유'를 검색하기도 했다. 시간의 가속을 체감하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검색된 자료의 수가 상당했고 첫 줄에 걸린 '소소한 건강 상식'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몸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줄어든다고. 그러면 뇌 안에서 일하는 신경세포들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거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을 빠르게 느낀다는 세세한 설명으로 가득했지만 우둔한 나는 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스크롤을 아래로 굴렸다. 시간이 제멋대로 내달린다고 느끼는 건 비단 세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물리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가 없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특히나 사람들이 실제로 세월의 가속을 체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어릴 때만큼 많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아마 오래 살아가면서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 많아졌을 거고, 그러다 보니 행복의 역치 값이 커지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일일 테지. 반대로 말하면 인상적인 기억이 풍성할수록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속절없이 떠나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최근 인상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연초에 하려던 계획이 일찍이 망하긴 했지만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극적으로 행복했던 순간도, 충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회사와 집만 오갔던 게 문제였을까. 분명 집에서 소소하게 즐거움을 누리거나 회사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낀 적도 적지 않았는데. 감히 행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일을 떠올리려 하니 괜스레 뒷골이 아려왔다. 여행을 떠나고 페스티벌에 갔던 몇 해 전 가을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명함 주는 방법도, 전화받는 것도 서툴렀던 1년 차. 계획없이 이직을 감행해 커리어가 된통 꼬여버린 것만 같았던 2년 차 때는. 분명 불안감에 떨긴 했지만 재미가 없지도, 행복에 무감하지도 않았는데. 그때와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업무로부터 도망칠 숨구멍을 요령껏 잘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그르치곤 '망했다'는 말이 절로 터져나왔을 때도, 심각하게 좆됐음을 감지했을 때도 감정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를. 이를테면 내게는 엽떡(반드시 오리지널맛에 베이컨을 추가해야 한다)이나 마라탕, 홈런볼 같은 것들이 일종의 세이브포인트였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영상이나 흠모하는 작가에게서 받은 사인도 종종 나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켓몬 센터의 역할을 해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내가 향한 세이브포인트는 제법 잘 작동했고, 덕분에 지금까지 휘청거리면서도 잘 걸어왔다. 세이브포인트라는 거창한 네이밍이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소소한 일들이지만 그렇기에 힘든 순간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상사에게 된통 깨진 날이나 나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터덜거리며 돌아온 날에도 호쾌한 '배달의 민족 주문!' 하나면, 신경 써서 재생한 음악 한 곡이면 다시금 정신력을 회복했다. 최근에 시간이 멋대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요즘 들어 쉽게 긴장하고 심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도 모두 세이브포인트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회복력'이 관건이니까. 딱딱해져 가는 뇌가 지금 당장 세이브포인트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나의 썩은 몸에게 언질을 주는 것 같았다.
풀칠
연휴에 나눈 얘기들
근래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을 하나만 꼽자면, 저번 주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5일이나 되는 이번 연휴를 연휴답게 즐길 수 있었다. 어딜 다녀야 쉬는 날도 있는 법이니까. 출근 제안을 거절했다면 남의 떡만 쳐다보며 쓰디쓴 입맛만 다시는 5일이 되었을 것이다. 5일은 긴 시간이다. 누군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나는 이번 연휴에 꽤 많은 얘길 나눴다. 1 첫째 날엔 옷장을 만났다. 지난 1년 동안은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쩍 볼 일이 많아졌다. 옷장 : 그래…출근하니까 어때? 나 : 그냥 그래. 1년 전에 퇴사할 때 세운 목표는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다시 출근하는 거니까. 아침마다 네 안을 뒤적일 때마다 포기 선언을 하는 기분이야. 옷장 : 나는 네가 양말을 신어서 좋은데…. 나 : 나는 양말이 싫어.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일자리엔 '티어'가 있잖아. 경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한, 그냥 돈 하나만 보고 하겠다고 한 일인데도 양말을 엄청 잘 챙겨 신고 나가게 된단 말이지. 1년의 시간을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후진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동화 속 탕자들은 한바탕 방황하고 나면 대박을 내거나 쪽박을 차더라도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던데… 옷장 : 그건 동화니까. 현실은 동화보다 빡세서 현실이고. 오늘은 양말 안 신니? 나는 대충 갠 빨래를 던져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
풀칠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
봄은 어느새 목련을 지나 벚꽃을 향해 질주 중이었다. 자정 무렵 퇴근길의 공기는 아직 제법 쌀쌀했다. 수입맥주 네 캔과 안주로 고른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삐 걷는 나를 부각시키기로 작정한 듯 골목길은 필요 이상으로 깜깜하고 조용했다. 편의점과 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코인 세탁소 앞을 지나치는데, 문득 그저 그런 시시한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과자와 비닐봉지를 한 프레임에 담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설렘이 가득한 꽃 사진들 사이로 이딴 사진이라니. 어쩐지 꽃밭에 쓰레기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혹시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모를 테지만, 그럴 때면 꼭 스스로 면박을 주게 된다. 뭐 자기 자신이 최후의 레드팀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 최근 3주 간 주말마다 결혼식이 있었다. 대학교 후배, 고등학교 친구, 사촌 동생 순서로 날이 잡혔는데 내 입장에서는 알고 지낸 기간에 따른 순서이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지나온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혼을 남일처럼 여겼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벌써 자기 평생의 배필을 선택했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소감에 당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도 내가 신기해”라고 똑같이 반응했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법과 제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잡아준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 생각에 결혼은 더하기의 계약이라기보다는 빼기의 계약이다. 서로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담보로 잡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의 모든 계약 중 당사자 구속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책임. 그게 문제였다. 인생의 큰 결정을 해 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상대적으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임져야 할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매한 책임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반복하는 내가 답답했다. 딱히 남들보다 어깨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더 얹을 것도 없으니 본인만 건사하면 되는데, 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시시한 어른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나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살게 되는 것. 답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맥주 한 캔의 알딸딸함에 기대 억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짱구 아빠에게 맥주란 고단한 하루의 결승선이었으리라.”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내게 맥주란 간이쉼터에 불과했다. 아마 짱구 아빠가 마시는 맥주와 내가 마시는 맥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낼 것이다. 교훈적으로 글을 끝내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블라…”라는 문장이 나올 타이밍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못 쓰겠다. 대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경험상 모든 것은 정말로 지나갔고, 무엇이든 남았다. 이 말이 체념을 뜻하진 않는다. ‘Keep Going’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견디는 것. 그 시간이 새긴 흔적을 궤적 삼아 고민하고 결정한 딱 그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발행일 2021년 3월 31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5호 :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일상력
1 아무래도 존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존버는 내가 키우는 스투키의 이름이다.) 존버의 화분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길래 길다란 줄기를 살짝 당겨봤더니 '뽕'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뿌리가 통째로 뽑혀버렸다. 그러고 보니 청록색의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스투키가 생기 없는 연두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달 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식물에 설탕물과 탄산수로 매주 정성 어린 부관참시를 하고 있던 셈이다. 미동도 비명도 없이 명을 다한 존버의 사체를 화장지에 고이 싸서 종량제봉투에 던져 넣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존나 버티지 못한 채 존버는 떠나버렸다. 식물을 곧잘 시들게 하는 편이라며 구매를 망설이던 나에게 '이 녀석을 죽이기는 쉽지 않을걸요'라던 판촉사원의 도발 섞인 말이 떠올랐다. 햇빛을 많이 쐬지 않아도, 심지어 물을 주는 것을 까먹어도 된다기에 냉큼 구입했던 건데. 이름을 'John Burr'라 지은 것도 다 끈질기다는 생명력 때문이었는데. 그 쉽지 않다는 일을 가뿐히 해낸 스스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2 곱게 죽지 못한 존버의 망령이 이 집에 깃든 걸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힙합 아티스트의 영상에서 뜬금없이 나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나무가 죽으면'이라는 말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나무가 죽은 거야. 잘 안 죽는 건데. 나무가 죽는 걸 보니까 내 생활 패턴이 나무에 대입해서 보이는 거지. 만날 늦게 자고 햇볕 안 보려고 암막커튼을 쳐두고... 아, 내가 잘못되고 있구나.' '나무가 죽는 건 그만큼 내 생활에 여유가 없다는 거 같아. 내 거실에 놓인 나무 한 번 바라볼 여유가 없는 거야.' 소금과 우원재는 나무의 죽음이 곧 일상이 파괴됐음을 알리는 경고 같은 거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나무가 죽었다는 건, 본인이 그만큼 엉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거라고. 나는 존버의 죽음을, 혹은 일상이 망가진 현실을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존버의 생명력을 의심하며 구글링을 해봤지만 스투키 뒤에는 '키우기 쉬운'이나 '생명력 강한', '질긴'이라는 키워드가 뒤따를 뿐이었다. 나 또한 정말 엉망으로 살고 있구나. 내 삶도 정말 실시간으로 개박살이 나고 있구나. 여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풀칠
잃어버린 근본을 찾습니다
최근 말 한마디에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꽤나 매서운 질문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이직하셨는데 여기도 1년 다닐 건 아니죠?” “담당했던 업무가 조금씩 다르던데, 경력이라고 봐야 할까요?” 3년차 경력과 3개의 직장, 3개의 직무. 고단수인 인사담당자에게는 잡스러운 경력을 찰흙 붙이듯 얼기설기 엮어 제출한 이력서가 손쉬운 먹잇감처럼 보일 게 뻔했다. 약점을 간파 당하면 이내 날선 질문들이 귓가로 들어와 뇌리에 콕콕 박힌다. ‘그러니까요, 그게 말이죠...’ 그럴 때마다 미처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어물거리며 답변하기 시작한다. 면접이 진행되며 질의의 난이도가 고조됨에 따라 심박 수가 치솟고 호흡마저 가빠진다.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고 이미 수차례 당했는데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구질구질한 변명에 가까운 답을 늘어놓고 나서야 굳어있는 면접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만 안 쉬었다 뿐이지, 마스크 위쪽의 표정만으로도 이미 이 면접이 망했다는 걸 직감할 수 있다. 복싱은 잘 모르지만 어설프게 가드를 올린 채 원투 펀치를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그 뒤로 결정타가 날아든다. “다음 질문드릴게요. 파주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대뜸 이쪽의 근본을 물어오는 근본 없는 질문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듯 면접관을 빤히 쳐다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친절한 눈빛을 띈 자비심 없는 면접관은 똑 부러지는 말투로 질문을 재차 던진다. ‘그 항목은 자기소개서에 충분히 적어두지 않았나요? 분량이 모자랐나요?’라고 되묻고 싶지만, 이미 입이 절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저기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고요. 책 모으는 걸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걸 그보다 조금 더 좋아하고... 영화도 그럭저럭 좋아해요. 또, 한화이글스랑 리버풀 팬이고... 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멍청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주접스럽게 나열하고 말았다. 나조차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몽땅 내뱉고 나서야 시야가 돌아왔다. 면접관을 표정을 보자마자 이 면접의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면접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집으로 돌아와 애꿎은 베개와 이불을 두들겨 댄 것만큼은 확실하게 떠오른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뒤에야 쪽팔림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이불 걷어차는 걸 그만두고 나를 한방에 넉다운시킨 그 질문을 곱씹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면접에서 떠벌거린 것처럼, 나의 취향이 나를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퍼스널 브랜딩이 득세하는 시대라는데 본인도 제대로 자랑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시대에 뒤처진 모지리가 아닐까. 아니,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설명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나는 어떤사람인가. 차라리 스무 살 때의 내가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워낙 하고 싶은 게 많았던 투지 넘치는 시기였으니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답하지 않았을까. 좋아하던 게 무엇인지 맹렬하게 쫓던 스물다섯 때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답변을 찾을 수 있었을 거 같다. 사회(직장)의 쓴맛을 찔끔 맛봤을 뿐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기엔 그 분야에 나보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인재들이 즐비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덕업일치에 실패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고, 취향에 대한 애착도 전과 같이 않아서 '이거 없으면 못 산다' 싶은 것도 딱히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몇 년 사이에 나는 열정도 취향도 변변찮은 심심한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풀칠
‘건강’이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진 맙시다.
결국 번아웃이 찾아왔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기미는 있었다. 매주 수요일쯤 되면 탈진이 찾아왔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거의 좀비처럼 죽지 못해 업무를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누가 나에게 맡겨둔 것 마냥 대형 프로젝트가 내 앞으로 밀려왔다. 어렵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속으로 앓으며 야식을 먹듯 야근을 해야 했다. 어느 정도 내 욕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놈의 완벽주의. 일은 많은데 꼼꼼하게 처리하고 싶은 맘에 늦은 밤까지, 어떤 날은 새벽까지 업무를 붙들고 있었다. 마치 대학생 시절 과제를 해치우듯이. 하필, 이라고 해야 할지 때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대형 프로젝트를 앞둔 월요일 아침. 눈을 뜨면서 단박에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침부터 손발에 힘이 없어서 겨우겨우 출근과 아침회의를 마쳤고 무척 창백한 얼굴로 팀장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병원에 다녀오라던 팀장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집에 가서 쉬라는 얘길 해줬다. 이직 후 처음으로 낸 병가였다. 코로나 걱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래도 호사스러운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정확히 내가 겪었던 경험이 번아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말 그대로 ‘번아웃’이라는 말이 내 상태에 가장 적절한 표현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한 데 집중하기 어려웠고 두통과 매스꺼움이 찾아왔다. 온 몸이 퉁퉁 붓는 것과 동시에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번아웃, 더 정확하게는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치면 각종 글이 쏟아진다. ‘풀리지 않는 피로’, ‘20대 번아웃’, ‘번아웃 진단법’, ‘무기력증 극복하기’ 등등. 비단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마 주니어 직장인들에게 번아웃 증후군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때 내가 풀칠 멤버인 파주님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 우리는 사무실에서 챙겨먹어야 하는 영양제며 도수치료의 효능 따위를 공유하곤 했으니까. 어느 밤엔가 둘 다 퇴근 후 몹시 지쳤고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다음 날 출근이 걱정돼 캔에 든 탄산음료로 건배를 했던 밤이 생각난다. 대학생 땐 어른들에게서 젊을 땐 사서 고생하는 거라던 얘기를 자주 들었다. 대전에서 일하며 남들보다 뒤쳐져있다고 열등감을 느끼던 시기에는 젊을 때 고생해야 노후가 편하다는 얘기가 그렇게 뼈아플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일하면서 남들과 겨우 비슷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내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고 있었는지,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았다. 병가를 내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아주 가까운 미래만을 보고 있었구나, 하고. 당장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 가까운 시일에 내 업무에 대한 평가는 좋을지 몰라도,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방식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건강’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아야지, 되새기며 혼곤하게 잠에 들었다. 병가 다음날인 화요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프지 말자.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풀칠
무능감 극복기
1 직장인이 되고 나서 새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면, 매주 월요일 퇴근길에 로또를 사는 것이다. 대학생 때 저런 건 불행한 사람들이나 사는 것이라며 대차게 비웃곤 하던 내가 로또 사기를 습관의 하나로 삼는다는 것은 불행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왜 직장인이 되면서 불행하게 되었던가. 이유는 간단하다. 월급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것은 벌기 이전엔 까짓것 없어도 인생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지만 막상 벌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나는 이 돈만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혔다. 내가 지금 받는 2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론 사치를 부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럭저럭 건실한 미래ㅡ취미생활도 즐기고, 차도 사고, 집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도 하고ㅡ조차 요원함은 굳이 경제학과를 나오지 않아도 계산할 수 있었다. 미래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에 맡기고 불행하지 않기란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또를 살 만큼의 불행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나를 무엇보다도 불행하게 만든 것은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나누는 대화였다. 점심시간 스몰토크의 단골 소재가 회사 욕일 수밖에 없는 것은 중소기업의 생리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회사 욕의 결론이 묘하게 자조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이놈의 회사...문과를 나온 게 죄지”. 이 집단적 자조의 기저에 흐르는 생각은 우리는 무능하고, 무능해서 이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패배주의였다. 요약하자면 나는 작은 월급이, 그로 인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행했으며 무엇보다도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나의 무능에서 찾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패배주의 때문에 불행했다. 로또는 이 모든 불행을 한 큐에 날려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이었다. 2 이번 월요일에도 퇴근길에 복권가게에 들렀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남자가 자동 5게임짜리 복권을 받아들고 떠나는 걸 좇다가 길가에 잠시 세워둔 그의 차에 눈이 간다. 벤츠다. 벤츠 끄는 사람들도 로또를 사는구나. 희망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처지 안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나도 로또 당첨되면 벤츠나 사볼까. 아니다, 앞코에 마크가 없으면 아반떼랑 벤츠랑 구별도 못하는 ‘차알못’ 주제에 무슨 벤츠는 무슨 벤츠. 하기야 내 인생이 벤츠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러다가 갑자기 내 인생에도 잠시 벤츠가 머물렀었던 때가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취업 전에 여행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애나는 꽤나 ‘히피적’인 사람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이 시대에 굳이 굳이 몇 백 키로미터를 걷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히피스러운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하지만 애나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례자 사무소가 있는 생장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지만 애나는 거기서 800km 떨어진 프랑스 리옹의 자기네 집 현관에서부터 걸었다. 마라톤 대회도 아닌데 시작 지점을 정해놓은 게 우습다는 이유였다(이런 저항정신이야 말로 히피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애나는 걷는 하루 종일 군인들이 군가 부르듯이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우렁차게 노래를 불러댔다(히피는 뮤직을 사랑한다). 애나는 노래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 노래만 파는 타입이었는지 늘상 같은 노랠 불렀는데 이 노래의 제목이 바로 벤츠였다. 우드스탁의 아이콘, 제니스 조플린의 메르세데스 벤츠. 애나는 좀 특이하긴 하지만 활기 넘치는 길동무였다. 나 같은 샌님도 기꺼이 록밴드의 세션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우리의 무대는 이런 식이었다. "오 주여(합창) / 나한테 사주지 않을래요(짝) / 멀셰디스 벤츠를(돌림노래) / 내 친구 들은 전부 포르쉐를 몰아요. 나는 보상받아야 해요(짝) / 내 평생 죽도록 일했고 도와 주는 놈들도 없어요(하이라이트, 진지하게 열창) / 그러니 주님(완급조절 중요) / 제게 사주지 않을래요 / 멀셰디스 벤츠를(관객 모드로 전환해서 열심히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