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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다음에 찾아온 여름

풀칠
한밤의 침입자
낮에 뜨겁게 달궈진 더위가 밤에도 식지 않고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무더웠던 2024년 여름의 밤. 평화로웠던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그래도 잘 때는 에어컨을 꺼야지’하는 생각에 낮부터 쉼 없이 돌아가던 에어컨을 송풍으로 돌리고 실외기가 있는 베란다로 나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실외기를 베란다 밖으로 내놓지 못한다. 단지의 미관을 해친다나 뭐라나... 그 덕분에 베란다는 실외기가 내뿜는 뜨거운 열풍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집은 창가에 놓인 실외기의 송풍구와 베란다창의 방충망이 반대여서 에어컨을 키고 끌 때마다 수동으로 방충망과 열린창의 위치를 반대로 바꿔줘야 한다. 방충망과 창을 교차해서 바꾸려는 찰나, 창 너머 어둠 속에서 습하고 뜨거운 공기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지이이이익 지이이익’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린 방충망 틈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성격인데, 어둠 속에서 나를 덮쳐오는 거대한 실루엣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를 순식간에 지나쳐 거실로 진입한 녀석은 굉음과 함께 공중을 정신없이 배회하다 형광등에 안착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괴생물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매미였다. 그것도 지금껏 내가 본 어떤 곤충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매미. 나는 매미가 그렇게 큰지 처음 알았다. 손가락만한 크기에 드론 같은 매끄럽고 탄탄한 몸집, 가늘고 기다란 느낌의 다른 곤충들과 달리 형광등 불빛 아래 영접한 매미는 흡사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중세기사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지금껏 집에 출몰한 수많은 벌레를 잡아왔지만 이 녀석한테는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거실 한켠에서 바닥에 늘러붙어 있던 고양이가 침입자를 발견하고는 사냥꾼으로 돌변해 매미를 향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냥이의 펀치보다 매미가 더 빨랐다. 매미는 고양이를 피해 다시 거실 책장 뒤 좁은 틈으로 사라졌다. “지지직” “냐아아아오!” “츠츠지이” “냐아오오오오옹!” 매미와 고양이가 만들어내는 환장의 하모니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낚시대 장난감과 비닐봉지를 준비했다. 낚시대 장난감으로 책장 뒤를 휘적이자 매미가 책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밤중에 소동이 녀석에게도 힘들었는지 매미는 더 이상 날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비닐봉지로 집어들었다. 거실에서 베란다까지 가는 몇 발짝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마냥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내 모든 오감은 활성화되어 얇은 비닐막을 사이에 두고 전해지는 몸부림치는 매미의 감촉, 발광할 때마다 내지르는 지이익, 지이익 소리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간신히 창밖으로 매미를 놓아주자 매미는 단발마 같은 소리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남은 것은 장난감 낚시대와 비닐봉지로 무장한 나와 동공이 최대로 확장되어 콧김을 내뿜는 흥분한 고양이, 그리고 뜨거운 습기로 가득한 열대의 밤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매미의 위용이 잊히지 않아 월루 활동으로 매미에 대해 좀 알아봤다. 한국에는 다양한 매미가 산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로 우는 매미는 참매미다. 매앰매앰매앰울다가 끝에 매애애애앰하고 리듬감 있는 울음소리가 특징이다. 말매미는 쐐애애애애액~하고 가장 시끄럽게 울다가 갑자기 뚝 그친다. 말매미는 그 요란한 소리만큼이나 몸집도 크다. 나를 공포에 떨게 한 녀석이 바로 이 말매미였던 것 같다. 그밖에도 애매미, 소요산매미, 쓰름매미, 깽깽매미 등 모두 자신들만이 울음소리를 가지고 있다.
풀칠
불안하지 않은 삶이 가능할까
실업자로 보내는 늦여름 2024년 여름, 세 번째 직장에서 퇴사했다. 근속 기간 1년 10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회사 생활이었다. 회사 문을 열고 나온 세상은 미친 듯이 더웠다. 회사 밖은 냉혹한 겨울이라더니. 이건 더워도 너무 덥다. 5분도 안 되어서 몸 여기저기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에 절여졌을 즈음 생각했다. 아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도 하던데, 이번 퇴사의 테마는 지옥인 걸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이 이어질 때쯤 집에 도착했다. 부리나케 에어컨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도 손은 버릇처럼 구인 사이트를 클릭했다.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구인 리스트를 쳐다보았다. 30대에 접어들어 겪는 첫 백수 생활. 이제 뭐 해 먹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스크롤이 바닥에 도달했다. 창을 새로고침한다. 또 스크롤을 내린다. 대체 이 스크롤을 왜 내리고 있지? 어제도 보았고 그제도 보았다. 사실 다 본 구인 리스트다. 그럼에도 다시 들어와 리스트를 본다. 왜일까. 구인 사이트를 끄고 인스타를 켠다. 휴가철을 맞아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참에 나도 쉬어 볼까? 근데 백수 주제에 쉬는 게 맞나? 뭘 해야 하지? 직장을 내려놓자마자 한동안 보이지 않던 불안이 고개를 든다. 불안 없는 삶을 꿈꿨던 20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험 회피적인 인간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건드리지 않았다. 통제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어 했고, 상황이 틀어졌을 때를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려 했다. 두세 겹의 안전장치를 두어야만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학부생 시절 의심할 수 없는 학문적 토대를 찾는 토대주의자들에게 끌렸던 것은 아마 그런 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대주의자들에 대한 선망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성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삶에서도 안정적인 토대를 원했다. 사회인이 된다면 탄탄한 토대 위에서 출발하겠노라. 몇 년 고생하더라도 나의 삶을 절대 흔들리지 않게 가꿀 수만 있다면 남은 생은 불안 없이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런 꿈 같은 생각을 했다. 불안해지고 싶지 않다는 감각, 불안 없는 토대 위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당시 나를 추동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대학생 때는 온갖 전공을 오고 가며 지식과 정보를 폭식했다. 철학, 음악, 정치학, 경영학, 경제학, 국제관계학까지,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우고 도강에 청강까지 했다. 그 시절에는 불안이 무지에서 온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인이 된 후에는 돈이 불안의 원천이었다. 자연스레 직장은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빠르게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고 회사 일에 몰입했다. 직장에서 잘 자리 잡으면 안정적인 삶이 되리라 믿었다. 언제 올지 모를 생활고에 대비해 월급의 대부분은 저축했다. 퇴사할 때를 대비해 2~3개의 프리랜서 일도 꾸준히 병행했다. 한때는 삶의 중심을 찾는 게 불안을 없앨 진정한 해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위계를 잘 확립하면, 삶의 정체성과 방향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것이 안정적인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늘 숨 가쁜 삶이었지만 이렇게 달리고 달려 탄탄한 토대를 세우면 나에게도 영원한 봄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풀칠
느리게 먹는 사람의 사정
올여름은 사람들이 봄에는 절대 하지 않던 말로 점심 시간을 알렸다. “아, 밖에 나가기 싫어!” 갑자기 쏟아지는 비나 찌는 듯한 더위로 무장한 요즘 날씨를 보면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봄에도, 겨울에도, 가을에도, 밖에 나가기 싫었다. 사람들이 밥을 너무 빨리 먹기 때문이다. 빨리 먹기만 하면 다행이다.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임원들이 간혹 “음식이 입에 안 맞냐”, “다이어트 중이냐“, “속이 안 좋냐“ 같은 말을 하시는데, 말투도 다정하고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난다. 차라리 회의실에서 혼자 배달음식을 천천히 먹는 쪽이 더 낫다. 물론 점심용 법카의 유혹을 무시할 순 없어 함께 나가게 되지만. 느리게 먹는 사람의 식사는 식당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우선 임원들과 다른 테이블에 앉기 위해 걸음 속도를 조절해 되도록 뒤편에 선다. 그렇다고 맨 마지막 순서로 들어가도 안 된다. 테이블당 인원을 맞추느라 임원들과 같은 테이블로 배치될 수도 있으니까. 끝에서 두세 번째로 입장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이 단계는 그날의 식사를 편히 할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데, 비교적 느리게 먹는 직원들과 앉으면 식사를 끝낸 임원들 쪽 테이블은 먼저 일어날 것이므로 나는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임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면? 직장 생활 11년 차에겐 아직 많은 팁이 남았다. 제일 늦을 것은 확정이니 “왜 이렇게 밥을 안 먹냐”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한다. 먼저 메뉴 선택. 내 메뉴가 가장 늦게 나올 것을 감수하고 자유롭게 선택할지, 안전하게 누군가 주문한 메뉴를 같이 고를지 선택해야 한다. 이때 웬만하면 면보다는 밥으로 주문하는 게 좋다. 면은 먹는 도중 불기 때문에 남긴 양이 더 많아 보일 수 있다. 옆 사람에게 맛 좀 보라고 나눠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 공깃밥을 먹는 경우에는 나올 때 꼭 뚜껑을 덮어 놓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한 날에는 “왜 이렇게 밥을 안 먹냐”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인다. ‘밥 먹었냐’는 말이 안부 인사인 한국 사회에서 식사량을 체크하는 어른의 말은 걱정 어린 관심이니까. 혹시라도 욱하는 마음에 “밥을 안 먹는 게 아니라요. 저는 빨리 먹으면 체해서 밥을 천천히 먹는데 다들 너무 빨리 드시니까 먹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맨날 제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시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직장과 두 번째 직장에 다닐 땐 감히 따로 밥을 먹는다는 생각은 못 했다(지금은 다섯 번째 직장에 다니고 있다). 게다가 그곳에는 남이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상사들이 있었고 불행히도 나의 식사 속도는 그때도 똑같이 매우 느렸다. 사회 초년생 시절이라 늘 긴장했던 탓도 있겠지만, 점심식사마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음식을 꾸역꾸역 삼킨 결과 내과에 출석 도장을 찍었고 카베진(위장약)도 달고 살았다. 그 카베진까지 토해내는 사태에 이르렀을 때는 직장 생활하면 원래 몸을 다 버리는 거라고, 밥 먹는 시간조차 윗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 한국 사회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어느 날 말수 없는 팀장이 막내인 네가 밥 먹을 때 말 좀 하라고 했을 때는 정말 억울했다. 아니, 밥 먹는 속도 맞추는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말까지 해야 되나. 밥 먹느라 조용한 분위기가 괴로운 사람은 팀장이지 내가 아닌데. 나는 대체 언제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 있지. 그때부터 이직의 조건도 ‘점심시간이 즐거울 수 있는 회사’가 됐다. 여전히 점심을 먹고도 배가 안 차 아이스라떼를 마시고 오후 세 시면 배가 고파 탕비실에 들락날락거리지만, 이제 빨리 먹는 사람들과의 식사에 나름대로 적응했다. 근로기준법 제54조 1항(2024년 8월 기준)에 따르면 근로자는 하루 여덟 시간 일하면 1시간의 휴식 시간을 근로 시간 도중에 제공받아야 하고 대부분의 회사는 이 시간을 점심시간으로 쓴다. 이렇게 금쪽 같은 1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데 쓰도록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불만인 쪽은 휴식 시간을 한 시간으로 정한 이들이다. 식당에 가고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먹고 돌아오는 데만 한 시간을 다 쓰는데! 밥 먹고 바로 앉는 것이 소화에 가장 안 좋다는데! 여유롭게 식사하고 음료 한 잔 들고서 산책하면서 소화할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주 4일제보다 점심시간 늘리는 게 더 시급하다고요. 휴식 시간을 한 시간이라고 정한 사람들도 중년 남자들이고, 밥을 빨리 먹을 테고, 밥 먹고 산책해도 한 시간 안에 할 수 있다면서 “왜 밥 먹는데 한 시간 이상 필요하냐”고 물으시겠죠? 음식을 먹으면 약 15분 후에야 뇌로 음식이 들어왔다는 신호가 전달된다. 천천히 먹을 땐 이 신호를 많이 받지만 빨리 먹으면 특히 15분 내로 먹으면 신호를 잘 못 받아 배가 덜 부를 수밖에 없다. 요즘 혈당을 낮추기 위해 탄수화물을 마지막에 먹는 식사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빨리 먹으면 소용없다. 혈당이 급하게 올라 몸이 쉽게 피로해지며 각종 위장 질환이 생기기도 쉽다. ‘밥 먹었냐’는 인사가 안부인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나 밥을 잘못 먹고 있다. 식사 속도만 늦춰도 과식을 방지하고 소화도 잘 시키고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다.
풀칠
번아웃이 처음인 사람
번아웃인가요? '어디 보자...이 정도면 웰던인가?' 잠깐 서 있기만 해도 바삭하게 타들어 가는 한여름, 나는 머릿속으로 굽기 정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스테이크 얘기가 아니라 번아웃 얘기다. 사실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조금씩 속에 불이 있을 거다. 누군가는 업무 지시에 천불이 나고, 누군가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고, 누군가는 잔불만 남겨둔 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겠지. 그게 홧병이 되고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되고 번아웃이 되고, 뭐 그런 거 아닐까. 아무튼 한 여름에 피부만 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마음 속의 불까지, 안과 밖이 골고루 타고 있다. 인터넷 어디 한 구석에서는 번아웃까진 아니고 노릇하게 타버린 상태를 토스트 아웃이라고도 하던데...얼마나 'Burn'했는지 겪어보질 못했으니, 지금 내 마음은 잘 타고 있는 건지 하염없이 들춰보기만 했다.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입학생들의 기숙사를 정해주는 마법 모자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판단하기 쉬웠을 거다. 🧙‍♂️: '번아웃!', '번아웃까진 아니네...토스트 아웃!', ‘일하기가 싫다...? 뺑끼!' 그러다 어느 날 출근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물이 글썽 하고 나는 것이다. 다 탄 장작이 쉽게 바스러지는 것처럼 텅 비고 허무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길로 속초행 버스를 끊었다. 속초로 가자 속초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무거운 몸과 마음을 자리에 놓고 나니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내 일을 사랑하는 편이다. 일에 대한 낭만을 찾으면 멍청한 사람 소리 듣기 딱 좋은 낭다뒤(낭만 다 죽은) 시대에 좋은 팀장, 좋은 동료 만나 인정받으며 재밌게 일하고 있다. 그러니 이 울적한 기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가 보고 싶어서 속초로 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바다는 어떤 넌센스도 다 품어줄 것 같았으니까. 그런 너절하고 시시한 생각을 하며 계획도 없이 속초 터미널에 도착하니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대충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어놓고 동명항을 따라 걸으며 두 가지 여행 원칙을 세웠다.
풀칠
이번 여름엔 포켓몬을
최근 업무 미팅에서 가장 편리한 스몰 토크 주제는 여름 휴가다.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회사 돌아가는 상황도 떠볼 수 있고, 여행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 계획을 물었을 때의 반응은 극명하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쓴웃음을 지으며 며칠 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하는 이들도 꽤나 된다. 어떤 이들은 예전처럼 회사가 여름 휴가기간을 따로 두는 게 아니니 길게 다녀 올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으니 짧게 연차를 써서 그냥 쉬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멀리 놀러갈 힘도 없고 그냥 집에서 늦잠 자고 배달음식 시켜먹고 유튜브, 넷플릭스 보면서 쉬는 게 최고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나 또한 여러 일정으로 녹록치 않아진 탓에 긴 휴가를 내지 않을 예정이다. 대신 며칠 쉬면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그건 포켓로그다. 유튜브에 어느 샌가 자꾸 포켓몬 게임 영상이 뜨기에 뭔가 하고 하나 둘씩 챙겨 봤더니 일종의 팬게임이라고 한다. 포켓몬을 잡아서 배틀만 주구장창 하는 게임이라는 게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고 한다. 그게 뭐가 재미있어, 하며 플레이 영상을 보다가 지하철 역을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에는 게임을 그리 즐긴 편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는 메이플이나 던파를 조금 하던 게 전부고, 남들이 열심히 하던 롤을 한 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게임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어서 성인이 되면 닌텐도를 사서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을 하면서 여유롭게 쉬는 그런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게임이 어떻게 보면 일종의 유예였던 셈이다. 마시멜로 이야기를 아시는지. 오늘의 쾌락을 내일로 미뤄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니 풀칠에 가끔 등장한 주제이기도 하다. 20대의 나에겐 게임이 일종의 마시멜로였던 거 같다. 누군들 몰입하며 즐길 수 있는 오락을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마시멜로를 먹지 않아야지 성공한다는 철학을 순진하게 믿었고 게임이라곤 유튜브에서 게임 줄거리를 풀어서 설명해주는 영상을 보는 게 전부였을 따름이다. 근데 야근을 반복하는 요즘, 내가 먹지 않고 쌓아두었던 마시멜로는 다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거면 자기 개발이고 뭐고 오늘 하루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즐기는 게 훨씬 즐거운 삶 아닌가 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삶을 지나치게 무겁게만 받아들이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오늘 하루를 최대한 즐겁게 보내는 게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싶다. 순간의 즐거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요즘 게임 중독이 질병이냐 아니냐 하는 주제가 뉴스에서 흘러나오던데 그걸 보면서 조금 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중독에 대한 뉴스를 보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일 중독은 어찌 된 일인지 장려되는 분위기다. 청소년들이 게임에 빠져 학업을 놓치면 큰일 나지만, 어른들이 일에 미쳐 사는 건 괜찮다니. 이번 주말엔 원룸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포켓로그나 하고 싶다. 그동안 미뤄왔던 여유나 즐거움 같은 것들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결국, 삶은 일과 놀이,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발행일 2024년 7월 24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88호 : 🕹️게임에게로 떠나는 휴가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여름적 사고
태생적으로 체온이 높은 탓에 남들보다 일찍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인 모양이지만, 갱년기도 한참 지난 그를 탓할 나이는 지났다. 여름이니까 당연히 더운 거지. 엄마의 말버릇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러려니'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나만큼 여름을 부지런히 포착하는 건 대중교통이다. 에어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마자 익명 커뮤니티엔 ‘지하철 냉방 민원’을 주제로 한 글이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다. ‘추우니 지하철 온도를 높여라’라는 쪽과 ‘추우면 겉옷을 들고 다녀라’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충청도 출신(고통마저 유머로 승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음)인 나는 ‘그럴 거면 자차 타고 출근하지 그랬슈’라고 시시덕거리다가, 당장에 나도 차가 없는 처지라는 걸 금방 자각하곤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지하철 구석자리에 앉아 수십 개의 댓글을 넘겨보았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으스대는 인간도 고작 1-2도 되는 온도차에 사나운 짐승의 소리를 뱉는구나. 이 큰 쇳덩이를 매일 수십 km씩 움직이는 사람들이 실은 이렇게나 유치한 존재들이구나. 더위 때문에 밖으로 나서기도 힘들 지경이라며 싸울 기력은 남아있는 건가. 수신자 없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이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맞은편엔 겉옷을 꺼내 입는 사람과 손풍기를 정수리에 갖다 대는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과연 모두를 만족시키는 적정 온도란 없는 걸까. 스마트폰 속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날카로운 말들을 보는 동안 전차는 무심히 달렸다. 최근에 본 유튜브에서 우리가 만날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구가 어떠한 분기점을 넘어섰다고 했는데, 게스트로 출연한 과학자는 그 선을 두고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 불렀다. 지구는 이제 온난화 단계가 아니라 끓고 있는 상태라고. 큰일 난 건 지구가 아니라 인류라고. 우리는 이제 X됐다고. 인류 최고의 블랙코미디물 <심슨 가족>에서도 기후 위기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바트 심슨이 “올해는 내 인생 최고로 더운 여름이야”라고 말하자, 아빠 호머 심슨은 웃으며 답한다. “올해는 너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란다.” 인류가 하루에 만들어내는 탄소가 몇 톤이고 하는 막연한 말보다 이쪽이 훨씬 더 소름 끼친다. 당장 오늘도 끔찍할 정도인데 앞으로 더 뜨거워질 일만 남았다니.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는 말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그늘에 땀을 식히며 ‘그래, 이게 여름이지’하는 것도, 보사노바를 들으며 더위를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여름은 곧 사라질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친구 마감도비와 대화를 할 때면 우리는 사라진 것들을 되짚는다. 온스테이지, 미야자키 하야오, 언니네이발관, *미각… 왜 좋은 것들은 사라지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라질 만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지도 모를 것들을 이야기하며, 기나긴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한 종류의 인간인 나는 몇 년째 이미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를 곱씹으며 산다. 어쩌면 이게 나의 생존방식일지도 모른다. *미각: 연신내 최고의 중식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얼마 전에 본 수학강사 정승제님의 예능이 퍽 인상적이었다. 과거 좋아하던 피자(피자헛 치즈크러스트 골드 시즌1)가 단종된 사건 이후,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여럿 구비해 놓는다고 한다. 리모컨 꽂이는 3개, 방석은 8개, 티셔츠는 검정색만 300개, 뭐 이런 식이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질 것만 같은 거대한 공포. 단종포비아의 원인이 된 피자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 공포감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내일 당장 고미태의 닭콩국수를 먹을 수 없게 된다면? 내년부터 뉴진스의 새 앨범을 들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상상은 도저히 구체화하기조차 싫어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풀칠
알 듯 말 듯해, 혁신
‘이제 곧 초복이군.’ 10년 전 이맘때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먹은 짬밥이 ‘초복 특식’ 삼계탕이었던 탓에 매해 이맘때면 ‘이제 곧 초복이군’ 하게 된다. 하지만 난 초복을 챙기지 않는다. 여름이면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에 꼭 보양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아니다. ‘이제 곧 초복이군’ 하게 되는 것과 내 라이프스타일은 별 관계가 없다. 그건 뭐랄까…꼭 한 시절의 상흔으로 마음에 남았을 뿐이다. 중복과 말복은 언젠지도 모르고 지나간다는 게 증거다. ‘이제 곧 초복이군’이라는 생각은 한동안 일상 속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회의 중 쉬는 시간에,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퇴근 후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옆 사람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이제 곧 초복이네요…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지요. 그러나 대개 말만으로 그친다. 나는 초복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삼계탕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이유는 ‘초복이라서’가 아니라 ‘먹고 싶으니까’다. 내 선택의 근거를 외주 주지 않으리. 그러거나 말거나 많은 사람이 초복에 삼계탕을 먹는다. 중복도, 말복도 놓치지 않는다. 삼계탕집 주인은 삼복 시즌이면 더 많은 재료를 확보해 둘 것이다. 올림픽 같은 이벤트를 앞두고 스포츠 브랜드가 물량 갖추기에 들어가듯이. 연말이면 베이커리에서 각양각색 신상 케이크를 내놓듯이. 아주 작은 습관이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장이 형성된다. 역시 습관이야말로 가장 큰 상품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말도 안 되는 습관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에 뜨거운 음식을 먹어 더위를 이겨내겠다는 발상을 최초로 했던 사람은 누굴까.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주장하고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누군지 몰라도 덕분에 800만 삼계탕인이 여름에도 밥 먹고 산다. 아니지, 밥 팔고 산다. 다른 게 혁신이 아니다. 이런 게 혁신이지. 다음 혁신은 ‘겨울에 냉면 먹는 날 만들기’ 정도 되려나. 친구와 냉면을 먹다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식초와 겨자를 골고루 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지. 그건 너무 1차원적이잖아.” “그럼? 네가 생각하는 다음 혁신은 뭔데?” “아무도 상상 못한 시원한 음식을 만드는 거지. 예를 들면 아이스 버거라던가…” “듣기만 해도 *롯스럽네.” *롯스럽다: 희한한 버거(ex. 왕돈까스 버거)를 자주 내놓는 롯데리아의 실험정신을 일컫기 위해 유튜버 침착맨이 만들어 낸 신조어다. 그는 롯스러움에 대해 “자신감 있게 하다가 덤벙대고, 기대하고 실망하다가 거기서 나도 모르게 정이 들어서, 나중에 계속 생각이 나서 롯데리아를 선택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말했다.
풀칠
여름은 언제 찾아오는가
여름이다. 여름엔 늘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할지가 고민이다. 윗도리야 그냥 적당한 반팔을 주워 입으면 그만인데, 아랫도리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청바지? 무진장 덥다. 긴 바지? 너무 덥다. 반바지? 덥다. 어떤 바지를 입더라도 불쾌할 것이 분명한데, 바지를 꼭 입어야만 할까. 그래, 오늘은 바지를 안 입고 출근하기로 하자. 바지를 입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탄다. 출근길의 지하철에선 다들 남을 쳐다보는 것이 금지된 일인 것처럼 굴기 때문에 바지를 입지 않은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에 바쁘게 준비하다 보면 뭐 하나쯤은 반드시 집에 두고 오기 마련 아닌가.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텔레파시를 나눈다. 보아하니 집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오셨군요. 아하, 그쪽은 집에 정신머리를 두고 왔군요. 아이쿠, 저는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일부러 집에 연민을 두고 왔답니다. 아? 당신은 집에 바지를 두고 오셨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회사로 들어가기 전엔 매일 아침 들르던 카페에 간다. 일찍 출근한 동료들은 이미 카페에 앉아있다. 우리는 사실 동료라기보단 친구에 더 가깝다.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나의 새로운 패션을 칭찬했다. 오! 오늘은 아주 시원해 보이네! 카페 사장님도 거든다. 과감하네요! 나는 답한다. 아. 여름이잖아요. 회사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바지를 입지 않고 출근해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 뭔가 새로운 출발을 앞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느끼고 있지 못할 뿐 우리 모두는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된다. 어제의 세포는 죽어 나가고, 어제의 생각은 꿈속에서 녹아내리고, 어제의 말은 흩어진다. 기억이라는 불확실한 증거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그 사실을 자주 잊는 것뿐. 하지만 오늘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결정 덕분에 내가 새사람이 됐다는 걸 비로소 직면하게 됐다. 키보드의 타건감이 뭔가 조금 더 좋아진 것 같다. 모니터가 조금 더 밝아진 것 같다.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전 11시. 실제로 업무 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평소라면 오후까지 붙잡고 있었을 작업을 이미 끝내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산성이 개선되다니. 챗GPT를 배울 게 아니라 바지를 입지 않는 게 답이었던 거다! 짬이 생긴 김에 커피나 한 잔 뽑을 겸 움직이다 로비에서 팀장을 만났다. 팀장은 내게 뭔가 말을 건네고 싶은 눈치였다. 팀장과 말을 섞는 일은 애지간하면 피하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눈치를 주는데 먼저 물어보는 게 직장인 된 도리인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팀장님,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 오늘 복장이 아주 시원해 보이네요.” “아 네. 제가 더위를 좀 많이 타서요. 이렇게 입으니까 업무 능률이 올라가더라고요.” 팀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