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숙련되고 싶어요
3년만 버텨라. 입사 초기 상사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이 일종의 격려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 익숙해지고,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보다는 뭔가 자꾸 어긋난다는 기분이 들었다. 연차가 쌓이면 일에 더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회사의 요구와 나의 자질은 점점 미스매치되는 것 같다. '3년만 버티라'는 말이 꼭 나를 위한 조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말은 회사가 나를 더 효율적으로 부려 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사 4년차가 된 지금(이직에 실패해 이곳에 남은 탓이지만), 나의 역량과 회사가 기대하는 방향이 어딘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내가 가진 능력과 회사의 요구가 부조화를 이루는 현실이 다가오면서, 일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한층 더 깊어졌다. 최근에는 회사와 면담하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에서 칭찬을 받는다고 뛸 듯이 기쁜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내가 적절한 범주 안에서 직장 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는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그 칭찬들은 나름대로의 안도감을 주었고, 일에 대한 내 방식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프로젝트, 시의적절하지 못한 보고, 부사수의 근태 등 내가 듣는 모든 피드백이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동안 '열심히 한다', '꼼꼼하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칭찬으로 들려왔던 내 모습이, 이제는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로 돌아왔다. 내가 가진 장점이 상황에 따라 단점으로 변하는 순간을 맞이하며, 그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준 건 맞지만…" "이제는 열심히만 해서는 부족해."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누군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노력이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허탈함과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내가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나는 회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 조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일까. 요즘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배에서 칼을 떨어뜨렸는데 배에다 표시를 하고, 그 자리에서 칼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이 사자성어가 내 상황과 너무나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나는 예전의 방식을 고집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연차가 쌓이면 이렇게 전혀 다른 자질과 능력을 요구 받게 되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내 노력이 타성으로만 치부되는 것 같아 황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의 성실함이 이제는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 마치 내가 쌓아온 시간이 헛되었다고 여겨지는 순간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으로 다가왔다. '숙련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회'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일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체력은 바닥났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일 여유도 남지 않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업무의 대부분이 떠넘겨진 것이라고 항변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라면 직장에서의 인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유유자적 살아야 할 때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뭐, 어떻게 되겠어? 망해봐야 퇴사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갑자기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지하철 방송 멘트가 들려왔다. 지연 안내인가 싶어 이어폰을 뺐는데, 앞부분은 놓쳤지만 지하철 기장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승객 여러분, 반복되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을 응원합시다." 뭐야, 하늘의 계시인가. 조금은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끼며, 그렇게 회사로 향했다. 발행일 2024년 10월 16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95호 : 🔥열정도 타성이 되나요?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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