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써먹는 점심시간 스터디
내가 다니는 회사는 좋은 의미로 이상한 짓을 많이 하는 곳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당써먹’이라는 이름의 회사 교육프로그램인데, 이 당써먹이라는 건 ‘당장 써먹는 점심시간 스터디’의 줄임말이다. 이 당써먹에서는 스님(스승님)이라 불리는 호스트가 짧은 점심시간을 활용해 업무 노하우를 공유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당써먹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이를테면 ‘있어빌리티한 콘텐츠를 만드는 소소한 제작 팁’부터 ‘사회초년생을 위한 워크네비게이션(저연차용)’, ‘그럴싸한 결과보고, 쉽게 완성하기’ 등등… 콘텐츠 기획이나 제작 업무에 도움이 되는 현실 꿀팁을 엑기스째로 들을 수 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당써먹 리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이번 시즌에도 제목만으로도 신청버튼을 절로 누르게 만드는 매력적인 당써먹 스터디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사례로 보는 AE 업무 사이클’이었다. 이 당써먹의 스님을 맡은 옆팀 팀장님은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발생하는 상상도 못할 사건사고들을, 그리고 그 난관을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난관이라는 건 예를 들면 건물 안에 자동차를 집어넣기 위해 통창을 떼어낸다거나 팝업 오픈 직전에 건물에 안전 이슈가 생겼다거나,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 기둥을 하나 더 세운다거나… 역시나 우리가 하는 일은 '일이 굴러가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내가 겪어보지 못한 프로젝트였지만 마치 그 사고들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PM이 된 것마냥 식은땀이 흘렀다. 이 당써먹에서 주로 이야기한 건 팝업스토어를 기획하거나 준비할 때의 노하우였지만. 정작 내게 시사하는 건 이런 거였다. 일잘러임이 분명한 그 스님 또한 일에 착수하기 전에는 잘 알지 못했다는 것. 지독하게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전문가가 됐다는 것. 일을 시작할 때면 긴장부터 하는 부류의 인간인 나는 누구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지 않다는,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성장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오늘도 일상을 살면서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을 그 당써먹을 통해 접한다. 내가 당했다면 뇌정지가 왔을 게 뻔한 사례를 간접체험하고 나면, 내게 다가올 미래의 사건사고에 예방주사를 놓는 듯한 든든한 느낌이 깃든다. 스님이 일러준 내용을 당장 써먹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대처법을 언젠간 써먹고 싶다는 의욕이 솟는다. 물론 회사가 학원은 아니지만 업무 의욕을 솟구치게 만드는 이런 교육 프로그램이야말로 구성원을 더 나은 일꾼으로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이 회사에 몇 년 다니다 보니 사내교육이라는 게 당연해졌지만 말이다. 과거 도제식이라는 핑계로 사내교육에 무관심했던 회사들도 지나온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 제몸으로 부닥치면 알아서 성장한 직원이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할 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목격하기도 했다. 회사가 그의 성장을 위해 준 것은 과도한 업무량 밖에 없었으면서.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교육을 통해 구성원 더 나은 일꾼이 되고, 그 결과로 더 좋은 곳을 향해 간더라도 ‘배신자’라고 저주받을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타인에게도 인정받았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며 앞날을 축복하지 않을까. 물론 이건 나의 뇌피셜일뿐 팀장님의 마음은 다를 수 있겠지만. 홧김에 당써먹을 여섯 개 몰아서 신청하고 말았다. 하필 출근하는 길에 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워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아름다워서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뭐라도 하나 더 배워가는 게 올해 주요한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님들이 공유하는 업무 노하우만큼이나 그 업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어나왔는지, 그 극복 방법을 고백하는 시간이 기대된다. 오늘은 ‘무엇이든 물어보는~’으로 시작하는 이름의 당써먹을 하나 들었다. 무엇이든 답할 수 있다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물씬 느껴져서 괜히 수강생인 나까지도 고양되는 기분이 든다. 나는 당써먹 스님들이 나눌 것이 있음(능력)에, 나누기를 기꺼이 실천하는 마음(인성)에 매번 감탄한다. 박수 소리가 멈추고 난 뒤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된다. 내년 이맘때쯤에는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쯤은 생겨있기를. 남들에게도 당장 써먹을 만한 노하우를 품고 있기를. 그런 상상을 하며 주섬주섬 오후 업무를 준비한다.